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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포비아

2019.04.01 01:1704.01

 

진은 언덕 위를 올랐다.

언덕 아래 펼쳐진 드넓은 황금빛 들녘을 따라 이삭들이 바람결에 물결치고 있었다. 논 한가운데 서있는 허수아비는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서있었다.

혁진은 논두렁 위를 가로지르는 참새들을 바라보았다. 서로 지저귀던 참새들은 이장님 댁 논을 가로질러 허수아비 위에 앉았다. 참새가 많이 모이는 걸 보니 올해는 꽤 작황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님, 먹을 만한 벌레가 늘어났다든가. 그는 참새들을 바라보다 산책로를 따라 언덕을 올랐다. 그때였다.

, 박사님이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자 혁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은 초등학생이 산길을 쪼르르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이장님 댁 손자인 민이였다. 녀석은 곤충 채집통과 잠자리채를 들고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박사님 어디가요?”

, , 밭에. 새로 심은 가지를 볼 참이란다. 넌 어디 갔다 오니?”

친구들이랑 산예요. 버섯도 보고요. , 기다란 양송이버섯도 봤어요. 하얗고 예쁜 버섯이었어요. 달달한 냄새 같은 게 나는 버섯이었는데…….”

산에 난 버섯은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

안 돼요? 하지만 성찬이가 괜찮다고 했어요. 가끔 걔네 할아버지도 산에서 버섯 따온다고 하던걸요. 그리고 말이죠. 버섯 딴 곳에서 딱정벌레랑 사마귀 잡았어요.”

아이는 채집통을 들어보였다. 녹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감옥 속엔 곤충들이 들어 있었다. 두 녀석은 서로에게 겁이라도 먹은 듯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광경이었다. 혁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심해라. 멧돼지 나올라.”

괜찮아요. 석종이랑 철명이도 같이 있었다고요. 거기다 땡구도요.”

땡구가 누구냐고 혁진이 묻자 민이는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옆집 진돗개요. 박사님도 돼지 조심하세요. 며칠 전인가, 덕구 할아버지네 밭도 돼지 땜에 뒤집어졌다고 하던데요. 아무래도 올해는 감자먹긴 힘들 거 같대요.”

힘없이 말한 아이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쫄래쫄래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서너 걸음 가다 뒤를 돌아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럼 바이바이~.”

혁진은 손을 흔들어대는 꼬맹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장 집 손자는 힘차게 오솔길을 뛰어 내려가더니 순식간에 흐릿하게 멀어졌다.

혁진은 잠시 멀어져 가는 아이를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잔돌을 해치고서 천천히 언덕길을 올랐다. 이윽고 산마루와 맞닿은 작은 분지 위에 오르자, 그는 천천히 가쁜 숨을 내쉬었다. 서서히 드리우는 그림자 아래 잠긴 작은 밭이 보였다. 고추와 가지를 심어놓은 작은 밭이었다.

세 개의 이랑 위로 30그루의 가지가 이파리를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지들 사이사이 마다 고추가 자라고 있었다. 혁진은 고추와 가지를 빤히 바라보다 밭 한편에 우두커니 서있는 쇠막대에 매달린 공책을 집어 들었다. 관찰 노트였다. 그는 노트를 천천히 펼쳤다. 서너 달 간의 기록들이 손끝에서 너덜거리자, 혁진은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항상 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볼펜을 꺼내 공책에 오늘 날짜를 적었다. 그리곤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오늘도 무사히 잘 지냈니?”

그는 식물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지그시 이파리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그는 눈썹을 찡그리다 손을 뻗어 가지가 열린 줄기를 손으로 집어 올렸다. 그러자 잘 익은 가지의 검은 껍질 위로 이빨자국 하나가 눈에 띠었다. 배어 문지 얼마 되지 않았던지 아직 싱싱한 조직에선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기록에 남겼다. 무엇이 가지를 한입 배어먹은 걸까? 그는 사진을 찍으면서 생각했다. 주둥이가 넓고 앞니가 살짝 튀어나온 동물이었다. 어금니가 잘 발달하지 않았는지 둥그스름한 치열이 가지에 남아 있었다.

치과전문의가 아닌 혁진이 봐도 그것은 사람의 흔적이었다.

설마. 그는 아까 마주친 민이를 떠올렸다. 민이가 가지를 배어먹었을까? 혁진은 입술을 실룩거렸다. , 가지야 생으로도 먹을 수 있으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이다 다른 가지들을 살폈다. 약 두 달 가량을 키운 가지들 대부분은 멀쩡했다.

병충해에 걸린 5번을 빼고는 시험 삼아 키운 나머지 29그루의 가지와 그 주변에 심어놓은 고추는 별 다른 해 없이 잘 자라고 있었다. 특히 고라니가 이파리를 뜯어먹지 않은 덕에 새로 자란 가지 끝에 고추가 주렁주렁 자라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결과는 명확했다. 산 반대편에 실험용으로 임대한 밭은 한 달 전에 벌써 돼지와 고라니의 습격으로 나마나질 않았다. 도랑은 돼지의 들창코에 박살이 났고 뿌리째 드러난 농작물들은 하나 남지 않고 말라죽었다.

혁진은 입맛을 다시다 얼굴로 달려드는 산모기를 손으로 쫓았다. 그리곤 핸드폰을 꺼내 일지를 사진으로 찍어 남겼다. 기록을 마치자, 언덕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때문에 혁진은 핸드폰에 불을 켜고 가까스로 언덕을 내려올 수 있었다. 차에 올라탄 그는 핸드폰으로 오늘 찍은 자료들을 연구실로 보냈다. 무려 4년 만에 내놓은 유의미한 성과가 지금 그의 손에 전송되고 있었다.

 

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혁진은 기자들 앞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농업기술진흥청에서 개발한 이번 신품종 가지에 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입안에서 우황청심환 냄새가 진동을 했다. 조금 독한 냄새가 입안을 가득 매웠지만, 그래도 나름 효과가 있는 듯 했다. 일단 심장이 터질 듯이 뛰지도 않았고 샤워한 것처럼 땀을 흘리지도 않으니 말이다. 거기다 학교 다닐 때처럼 발표하다 쓰러지지도 않았고 말이다. 크게 숨을 들이켠 혁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번에, 저희가 선보인 가지는 멧돼지들이 싫어하는 향을 줄기에서 뿜어져 나오도록 설계 했습니다.”

그는 프레젠테이션을 맡은 직원에게 눈짓을 했다. 거대한 스크린 위로 빔 프로젝터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화면을 만들기 무섭게 그는 배양 과정을 설명했다. 배지 종류와 삽입된 유전자들이 떠올랐다.

저희가 가지를 선택한 이유는 우선, 가지의 경우 병충해 저항력이 우수하고, 어차피 가지 줄기나 이파리는 거의 쓰질 않기 때, 때문에 그곳에서 이상한 향이 난다고 가지의 품질이 떨어질 우려가 적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실험 결과 5월에 심은 모종 주위에 있던 작물은 피해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맛도 보통 가지와 다를 바가 없었고요.”

맛은 어떻게 확인 하신건가요?”

회식자리에서 확인했습니다.”

발표회장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혁진은 조심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 실은, 연구 윤리에 따라 시식을 하기 보단 성분 분석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현재 저희가 개발한 육종의 경우에는, , 맛의, 차이가, 별로, ,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죠.”

이런. 방금 전에 즉흥적으로 뱉은 유머 때문일까? 집 나간 긴장감이 돌아오자 혁진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잠시 프레젠테이션을 바라보았다. 사진과 전문용어로 가득 찬 프레젠테이션은 어느새 'Q&A'라고 적힌 텅 빈 페이지를 펼쳐보였다. 혁진은 안도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다가 손을 들고 말했다.

그렇군요. 이제 발표가 끝이 나스니다.” 이런 말이 셌군.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혁진이 말하기 무섭게 한 기자가 손을 들고 말했다.

몇몇 단체에서는 GMO가 인체에 해를 입힌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박사님은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GMO가 안전한 건가요?”

익숙한 질문이었다. 혁진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주장하시는 분들의 주장으, 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철지난 GMO공포를 21세기에 불어오는 건 중대한 오류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그러니까, GMO는 환경운동가들의 생각처럼 마구잡이로 생명을 개조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사사실, 몇 가지 과정에선 옛 선조들께서 작물을 개량하던 것과 별로 다를 게 헙…….”

혀를 씹고만 혁진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입안이 비린내로 가득차자, 그는 다른 연구원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비상사태란 뜻이었다. 그의 간절한 호소에 발표를 도와주던 다른 연구원 하나가 기자의 질문을 받아갔다.

, 대신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유전자 작물이라고 해야 기존 형질 전환 작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요?”

, 예를 들어서 옥수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원래 옥수수는 지금처럼 커다란 알맹이를 맺지 못하는 식물이었습니다. 끽해야 강아지 풀 정도 밖에 자라지 않았죠.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수세기에 걸쳐 교배를 시킨 결과 옥수수는 거대한 자루 줄기에 거대한 알갱이가 더덕더덕 붙은 형태가 되었죠. 이때가 대략 12세기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후로도 거듭된 개량으로 인류는 정말 수많은 종류의 옥수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죠.”

하지만 그건 자연적인 결과 아닌가요?”

결코 자연적인 결과는 아니죠. 인간이란 존재의 개입이 없었다면 비대한 지금의 옥수수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어째서인가요?”

기자가 묻자, 연구원은 희미하게 웃었다.

기자님. 혹시 잘 익은 옥수수 알갱이를 보신 적 있나요?”

기자는 그렇노라 답했다.

그렇다면 잘 아시겠네요. 혹시 옥수수 알갱이가 옥수수 자루에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와서 사방에 흩뿌려지는 걸 보신 적 있습니까?”

기자는 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연구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바로 그 점입니다. 지금의 옥수수는 자연적으로 씨를 퍼뜨리질 못해요. 오로지 인간이 씨앗을 퍼뜨려줬기 때문에 옥수수는 지금처럼 번성을 할 수 있죠. 유전자 조작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우린 씨를 뿌려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돌연변이를 기다릴 것 없이 좋은 형질을 찾아서 그걸 작물에 이식하는 것뿐이죠. 이제 우린 수세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형질을 발현시킬 수 있게 된 것 뿐입니다. 여기에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있는 걸로 압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 살려내!”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기자회견장 뒤편에서 들려왔다. 카메라의 시선들은 한 여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혁진은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도 못하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얼굴은 마치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 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혁진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장집 둘째 딸이었다. 당황한 혁진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카메라 앞에서 울고 있었다.

 

이 벌어진 것은 사흘 전, 혁진이 차에 오르고 있을 때였다.

집으로 들어간 민이는 저녁 생각이 없다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배를 문지르면서 가지를 잘못 먹었나보다 중얼거렸단다. 그리고 밤 10시 즈음 아이 엄마가 쓰러진 민이를 발견하고 119에 신고를 했다.

구급차가 올 때까지 민이는 호흡곤란과 구토 증세를 보였다. 하지만 입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건강을 되찾았다. 구토는 멎었고, 호흡곤란도 사라진 뒤였다. 병원에서도 구토할 때 나온 가지를 발견하고 이제 괜찮을 거라 했단다. 때문에 이장님 가족들은 민이를 퇴원시켰다. 하지만 이틀 뒤, 민이는 다시 의식불명에 빠졌다. 몸이 마비가 되었고, 간과 신장은 손 쓸 새 없이 파괴되어 이식을 해야 할 판이노라. 인터넷 기사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혁진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벌써 언론과 대중은 혁진이 만든 가지를 범인으로 확신했다. 아이가 쓰러지기 전에 남긴 말과 유전자 변형이라는 단어가 결정타였다. 그 결과 혁진의 텃밭에는 노란 폴리스 라인이 쳐졌다. 경찰은 그가 만든 가지를 식약처에 가져가서 독성 조사를 의뢰할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복잡했고 지나치게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저희는 이번 사안을 조사함에 있어 한 치의 의혹도 없이 철저히 진상을 규명할 것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경찰소장이 말하자 화면은 다시 아이의 상태에 대해 넘어갔다. 그리고 아이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날 차도가 없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 즈음. 소장은 혁진을 불렀다. 그녀는 이번 일이 유전학계 전반으로 옮겨 갈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어떻게든 혁진의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그 때문일까? 그녀는 다른 연구소로 옮겨 가는 건 어떠냐고 혁진을 노골적으로 떠보기도 했다. 하지만 옮겨갈 수는 없었다. 이 바닥이 좁은 바닥이란 것은 혁진이나 소장이나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직을 권고한다는 것은 혁진에게 업계를 떠나라고 선고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혁진은 단호하게 소장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리곤 수군거리는 동료들을 지나쳐 자신의 자리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그는 입술을 잡아당겼다.

그는 머릿속에 남은 염기서열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실수한 부분은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그는 가지와 함께 살다시피 했던 그였기에 알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육종을 기르고 분석하고, 또 스크리퍼로 수정하지 않았던가? 유전자를 검토하고, 발현인자를 얼마나 많이 고려했던가?

그러나 그가 만든 가지를 먹었노라 말한 아이는 병석에 누워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어쩌면 가지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초등학생이 하루 종일 가지 하나만 먹었을 리 만무했으니까. 어쩌면 뭔가 다른 것을 먹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칠 즈음. 연구소 밖에선 소란스런 말소리가 울렸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안전한 친환경 먹거리를 요구한다!”

그 소음은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음을 따라 성난 목소리들이 뒤따랐다.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따라 구호를 외쳤다. 자연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자연을 보호하자는 둥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들이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혁진은 슬쩍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깃발 하나가 눈에 비쳤다. 푸른 숲을 둘러싼 아이와 엄마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저들은 자연을 파괴하는 악마입니다! 유전자 변형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옳소! 사람들은 꽹과리를 치며 좋아하는 소리가 신경을 갉아댔다. 혁진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혁진은 쓰린 속을 붙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당장에 변호사 친구라도 있었으면 했다. 만약에 그런 친구가 있었다면 당장 그의 변호를 맡아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변호사 친구는 없었다. 그렇다고 혁진, 스스로 나서서 자기변호를 할 수도 없었다. 누가 우황청심원 없이는 이리저리 말만 더듬어 대는 이의 말을 믿어줄…….

좋은 생각이 든 혁진은 손가락을 튕겼다. 마침 동창 중에 기자가 된 사람이 있다고 했었다. 맞아. 학창 시절에 꽤나 친하게 지낸 녀석이었는데. 나중에 만나자고 번호까지 저장을 해뒀었는데……. 그는 핸드폰을 뒤졌다. 한참을 뒤진 뒤에야 영석 기자라고 적힌 연락처가 떠올랐다. 혁진은 주저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석은 기자였다. 혁진은 그가 정확히 무슨 분야를 다루는 기자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과학관련 기사도 가끔 써서 칼럼인가 어딘가에 올리는 그런 종류의 기자였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호프집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40을 넘어선 영석은 기억 속의 모습보다 풍채가 커지고 머리가 벗겨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서른 대여섯 즈음이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시간은 그를 너무도 많이 바꾸어 놓았다. 혁진은 그를 호프집 구석에 앉혔다. 그리곤 맥주를 두어 잔 들이켜고 난 뒤에 안부를 물었다.

“뭐, 나야 잘 있지. 넌……. 그래, 기사 봤어. 완전 뭐 된 거 같던데.”

“뭐 된 정도가 아니야. 오후에 아이 병실을 찾아갔는데, 거기서 얻어맞아 죽을 뻔했어. 부모는 길길이 날뛰지, 날 도와주시던 이장님까지 날 죽이려고 해. 그 분 덕 많이 봤는데……. 거기다 집에 들어갈 때도 사람들 시선이 따라붙는 거 같기도 하고 죽을 맛이다.”

영석은 혁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선, 난 변호사 나부랭이는 아니야. 하지만 나한테라도 진실을 말해줘야 해. 알겠어?”

혁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실험실에서 한차례 생장과정을 거쳐. 물론, 세포덩어리를 묘목으로 키워내니까. 하지만, 이런 유전자 변형 작물은 위험성 때문에 실험실에서 과실을 재배한 다음에 각 부위별로 분석을 하지. 독성이나, 단백질 함량, 영양소 같은 걸 중점적으로 따지는 데…….”

혁진이 말을 흐리자, 영석은 입가를 쓸어내리다 맥주를 들이켰다. 그는 뜬금없이 말했다.

“있지. 한 가지만 기억해 둬. 사람들이 원하는 건 악마야.”

영석은 혁진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복잡한 논리보다 단순한 악마가 훨씬 더 명확하거든. 악마라는 글자는 듣기 만해도 이미지가 딱 떠오르잖나. 사악하고 뿔 달리고 삼지창들고……. 그럼 이제, 나한테 GMO에 대해 설명해봐.”

“음, 생명체의 유전적 염기서열을 검토하고 형질을 선택해서…….”

혁진이 말하기 무섭게 영석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봐. 유전적 염기서열, 형질, 아인슈타인 나부랭이. 사람들은 그런 복잡한 걸 싫어해.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고. 오죽하면 전 세계를 통틀어서 MSG를 나쁘다고 여기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란 소리가 나오겠냐? 글루타민 산이 자기들 몸에 들어있는 아미노산 조각이란 걸 알면 무슨 생각을 할지, 참.”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혁진은 소주잔을 쥐고서 날선 목소리를 던졌다.

“그러니까 나더러 유해성을 인정하라 이거야? 내가 만든 가지에서 독소가 검출된 게 유전자 조작 때문이라고 거짓으로 인정하라고? 젠장! 원래 가짓과 식물에는 독소가 들어있어. 먹어도 죽지 않을 만큼 엄청 소량 들어 있다고. 거기다 맹세코 나는 열매부분은 건드리지 않았어. 유전적으로 내가 건드린 부분은 줄기 부분이란 일이야. 이파리랑!”

영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 모르지. 하지만 여론은 보고 싶은 것만 봐. 이 친구야. 이미 기사가 터졌을 때 넌 반수 이상의 사람을 잃었어. 당장 학부모 단체는 급식에 네 ‘작품’이 오르는 걸 보이콧하려고 준비 중이고, 환경단체와 언론들은 매 시간마다 자극적인 기사들을 써대지. 이게 무슨 말인 줄 알아? 사람들은 절대로 네 말에 수긍하지 않을 거란 소리야. 네가 어떤 자료를 내놓건 TV에서 평론가니 하는 것들이 GMO에 대해 두어 시간 공부한 걸 들고 나와서 TV며 인터넷에다 떠들어 댈 거라고.”

혁진은 반쯤 벌어진 입으로 술을 들이켰다. 그러자 영석은 잽싸게 술을 따르는 혁진의 잔을 가로챘다. 혁진이 눈을 부라리자, 영석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확실한 건 오늘 취해서 들어가면 네 인생은 거기서 끝이라는 거야.”

“씨발. 이미 끝난 거 같은데.”

“그래도 준비를 해야 연착륙이라도 시도해볼 수 있어. 이대로 그냥 땅에 박을 순 없잖아. 일단 당장 집에 들어가서 연설문을 작성하도록 해. 최대한 공손하게. 일단 잘못을 했든 안했든 사과를 해야 하니까.”

“어째서?”

“물의를 일으킨 것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죄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최대한 모호한 화법을 구사하도록 해. 일단 죄송하지만 이 일은 내 잘못이라 보기에는 너무도 복잡한 뒷배경이 있다고 설명하는 게 좋아.”

“하지만 그랬다가 변명이라고 치부하면?”

“변명이든 뭐든 계속 이슈거리가 돼야 나중에 무죄가 밝혀져도 빨리 복권될 수 있어. 그러니까 잔 내려 놔.”

영석은 연거푸 맥주를 들이키는 혁진의 손을 붙들어 잔을 빼앗았다. 혁진은 영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영석은 고개를 저으면서 그만 하라고 중얼거렸다. 혁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두 사람은 맥주를 테이블 위에 내버려 두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둑해진 거리 위로 차들이 쏜살 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혁진은 차들을 바라보았다. 이름 모를 부속품에 가솔린을 가득 머금은 철마는 빠르게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영석아. 나, 계속 이 일 할 수 있을까?”

혁진이 중얼거리자, 영석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리를 가로질렀다. 혁진도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다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가로등 불빛이 무겁게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혁진은 깜빡이는 불빛 속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6월 중순의 밤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기 짝이 없었다.

 

구실에서 공식 발표가 나오자, 연구실 근처 주민 센터는 시끌벅적했다.

수십 명의 기자들이 구둣발로 들어와 카메라를 설치했다. 연구소에서 파견된 연구원 중 하나가 빔 프로젝터를 설치했다. 연구원들이 노트북을 열었다. 연구원들이 프레젠테이션을 띠워 올리기 무섭게 사방에서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혁진이 연단으로 올라온 것이다. 양복 차림의 혁진은 그 빛의 감옥 속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를 둘러싼 수많은 기자들이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전선테이프로 감은 각목만한 마이크 뭉치를 떠안자 혁진은 다시 한 번 이 기자회견의 무게를 느꼈다.

“네, 전 농업혁신연구소의 연구원 강혁진 박사입니다.” 박수는 없었다.

“이번에 아이가 저희 실험 작물을 먹고서 이상 증세를 보인 건에 대해 연구소 자체 조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밝히고자 합니다.”

혁진은 숨을 들이켰다. 떨리는 폐를 타고 곱게 간 납덩이를 들이키는 것 같은 감각이 밀려왔다. 그는 미리 준비해둔 도표와 사진들을 화면에 띠웠다. 가지에 관한 유전정보와 이파리, 각 샘플들의 훼손 정도까지 설명한 혁진은 마지막으로 독성시험테스트결과지를 띠웠다. 다른 연구소에서 분석 의뢰한 샘플이었다.

“관리에 허술한 점이 있었던 점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아이의 증상은 유전자 변형 가지를 먹어서 생긴 증세는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현재 단지 내의 모든 실험 작물을 수확, 수거, 분석한 결과. 아이에게서 발생한 고열과 마비 등의 증세를 일으키는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아마 아이는 다른 원인 물질에 노출이…….”

“죄송한 말씀이지만 가지에서 알칼로이드 배당체의 일종이 검출됐는데, 문제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거기다 아이의 혈액에서도 다량의 알칼로이드 배당체가 검출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 생각하십니까? 그 알칼로이드라는 것은 상당한 독성 보유한 물질이라고 익명의 전문가가 말씀하시던데요.”

한 기자가 물었다. 혁진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짧은 머리가 귀를 덮은 기자는 어서 말해보라는 듯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혁진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자 장내는 수군거렸다. 이제 화두는 일제히 알칼로이드 배당체로 쏠렸다. 알칼로이드가 들어있는 게 사실인가요? 박사님? 맹독이란 것도 사실인가요?

혁진은 머릿속이 마비되는 감각 속에 버려졌다. 알칼로이드 배당체의 대표적인 물질을 떠올리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입을 열기 무섭게 머릿속이 꼬였다. 무슨 단어를 고를지, 어떤 말부터 던질지. 그는 신중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입은 자연스럽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물론, 알칼로이드 배당체가 가지에 함유되어는 있지만…….”

“그럼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신 거네요!”

“아, 아니, 가짓과 식물 전반에 걸쳐서 소량, 아니 모든 동식물이…….”

“그럼 가짓과 식물들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토마토나 감자도 먹을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뇨! 가짓과 식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그렇다면 지금껏 우리 모두가 유해한 식품을 먹고 살았다는 말씀이신가요?”

“변명 말고 사실을 말해주십쇼!”

혁진은 소란스러워지는 장내 분위기에 맞춰 목청을 높였다.

“먹으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가짓과 식물에는 독소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솔라닌은 맹독이지만 소량 들어 있어서…….”

“하지만 아이가 마비 증세를 보였지 않나요? 어쩌면 유전자 변형이 알칼로이드 배당체를 증가시킨 게…….”

혁진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기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또렷이 바라보았다. 그들의 비난어린 시선 속에서 그는 입을 벌리고 다물었다. 물 밖을 벗어난 금붕어처럼 그가 짧게 단말마를 흘렸다. 결국, 보다 못한 다른 연구원들이 그를 연단에서 끌어내렸다.

“……이상, 기자회견을 마치겠습니다.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후배의 멋쩍은 인삿말과 함께 혁진은 패배로 얼룩진 어깨를 늘어뜨렸다. 셔터 세례와 고성어린 질문만이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칼로이드 배당체는 검색어 1위를 기록했다.

혁진은 착잡한 얼굴로 인터넷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혁진의 신상은 전 국민의 것이 되었다. 모든 이들이 그를 형편없는 과학자로 몰아세웠다. 그는 ‘솔라닌도 모르는 생화학자, 그가 만든 키메라.’라는 기사에 들어갔다. 그러자 날선 말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작정이라도 한 듯 그들은 혁진을 철저히 깔아뭉개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뭉갰다. 긴장이 풀리자, 알칼로이드 계열 물질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르핀, 솔라닌, 니코틴, 아드레날린, 테오브로민(초콜렛에 들어있는 성분), 카페인…….

하지만 이제와선 소용없는 짓이었다. 회견장에서 밝혔어야 했는데……. 혁진은 참담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어제 영석에게서 암담한 대답을 미리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그는 힘없이 팔을 축 늘어뜨렸다. 핸드폰이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현장을 정리하는 연구원과 기자단의 모습이 눈에 띠었다. 몇몇 이들은 의기양양하게. 몇몇 이들은 별 반응도 없이 그저 묵묵히 짐들을 옮기고 있었다.

슬쩍 혁진에게 다가온 영석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일단은 정정보도를 때릴 순 있어. 기준치 이하라는 점을 부각하면 어느 정도 선방을 할 수 있을 지도 몰라. 아주 안 나오는 게 좋았겠지만…….”

“알칼로이드는 식물에도, 하다못해 우리 몸에도 들어있다고. 아드레날린 같은…….”

“알아. 이 친구야. 일단은 정신 잘 잡아. 난 올라간다. 데스크에서 내가 쓴 기사를 통과 시켜 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변호는 잘 해볼게. 아는 연줄 좀 대면 몇몇 기사는 네게 유리하게 나갈 지도 몰라.”

영석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찻길 옆에 세워둔 승합차에 올라탄 뒤 쌩하니 사라졌다. 혁진은 홀로 남아 담배를 피웠다. 생전 피우지도 않던 담배를 피우자 목구멍이 따끔거리다 못해 눈이 매웠다. 그는 잠시 눈물을 닦으면서 담배를 피웠다.

그때였다. 핸드폰에서 밸이 울리자, 혁진은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연구소에서 날아온 문자였다. 그는 문자 속에 들어 있는 검사 결과를 다시 한 번 신중히 살폈다. 그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버섯을 먹었어요. 민이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는 핸드폰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잠깐!” 회견장을 박차고 나간 혁진은 기자들을 붙잡았다.

“잠깐만! 방금 전에 문자가 왔습니다! 식약청에서요! 아마톡신! 아이의 간에서 아마톡신의 징후가 보였다고요!”

“그게 뭡니까?” 한 기자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자 혁진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마톡신, 그러니까, 젠장! 맞아요. 애가 버섯 이야기를 했어요! 버섯을……. 맞아요! 애가 건강했을 때 산에서 내려오다 만난 적 있는데, 그때 애가 그렇게 이야기 했다고요. 아마, 아이는 독버섯을 먹었을 겁니다. 광대버섯에 든 성분이니까…….”

“참, 그렇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싫은 겁니까? 어른이 돼서 어쩜 그리 뻔뻔할 수 있죠?”

혁진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벅거렸다. 그러자 기자가 말했다.

“이봐요. 알칼로이드가 검출된 이상 당신은 빼도 박도 못해요. 알아요?”

“알, 알칼로이드는 해로운 게 아니라고요!”

“흥, 그러시겠지.”

기자는 카페인이 든 커피를 홀짝이면서 말했다. 그는 정신병자 보듯 혁진에게 눈을 흘기곤 승합차에 올라탔다. 혁진은 떠나가는 승합차들 뒤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혁진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혁진은 이제 자신의 자리가 아닌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내려진 처분은 학회차원에서 제명이었다. 이제, 그는 박사라는 학위도 내세울 수 없었다. 따라서 자동으로 연구실에서 잘려나갔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그는 멍하니 책상을 바라보았다. 분명 영석이 쓴 기사, 아이가 먹은 게 가지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기사도 인터넷 상에 퍼졌다. 어떤 기사에는 아마톡신에 대한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거기다 식약청에서 공식적으로 아마톡신에 관한 브리핑을 낼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기사들이 GMO와 알칼로이드의 위험성에 대한 기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막말을 쏟아냈고 그 화살은 오로지 혁진에게로 쏠렸다. 이제 인터넷에선 범죄자들을 혁진한 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거기다 대다수의 언론들은 식약청의 공식 성명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영석은 자신의 기사도 데스크에서 내리라고 지시할 정도였다고 전화로 울분을 토해냈다.

젠장. 미안하다. 자식아. 어떻게든 기사 내려고 했는데, 그 자식들 하는 말이 뭔 줄 알아? 일단 정정보도를 때리면 자신들이 틀렸다는 걸 공공연히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신뢰도가 떨어져서 조회수가 줄어든다 이거야. 자기네 이미지가 깎여서! 거기다 조회수가 내려가면 광고 수입이 들어오질 않으니까 결국엔 악순환이 된다네. 그럼 애당초 자극적인 기사만 쓰지 말든가! 개자식들.”

어떻게든 되겠지.” 혁진은 침착하게 말했다. 적어도 한 쪽 창문이 닫히면 다른 쪽 창문이 열릴 거라. 그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성은 침착하라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혁진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언론이 숭고한 성전을 벌이는 환경단체의 손을 들어주자, 이제는 정부 기관까지 나섰다. 환경부와 법무부는 유전자 변형 금지 법안을 입법예고까지 했다. 거기다 감사원은 연구소로 들어간 지원금에 대한 감사까지 예고하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라면 연구실은 곧 문을 닫을 수밖엔 없을 것이다. 비단 혁진이 다니는 연구소뿐만 아니었다. 거의 없다시피 한, 국내의 GMO 연구 단체도 정부에서 지원받던 지원금을 잃고 말 것이다.

무지의 승리였다.

혁진은 짐을 챙기면서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그의 귓가에는 아주머니의 함성이 맴돌고 있었다. 자연을 파괴하는 악마입니다! 악마입니다! 그는 시큰거리는 눈두덩을 매만졌다.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하나 같은 거창한 생각은 고사하고 당장 걸음도 떼기 힘들었다. 정문까지 거의 20분은 걸은 듯했다. 차를 어디다 뒀더라? 그는 고개를 들고 시위대가 남기고간 수많은 물건들 사이를 둘러보았다. 거리엔 어느 아줌마 하나가 서있었지만 그의 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 순간. 다리에서 아찔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입에선 절로 신음이 터졌다. 무슨 일이지? 그는 다리를 내려 보았다. 허벅지에 박힌 식칼이 손잡이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그를 찌른 아줌마는 거리를 내달렸다. 혁진은 그 아주머니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무어라고 소리쳤는지는 혁진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텅 빈 도로 위에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이 하나 없었다는 것만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진은 병원에 어떻게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팠고 끔찍한 기억이었다는 것만이 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빌어먹을 통증과 의료진들의 수군거림. 그리고 취재한답시고 아무 데나 면상을 들이대는 기자들. 모든 게 악몽과도 같았다. 언론은 혁진에게 일어난 식칼테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업자득이라 말했다. 이미 그는 전 국민이 다 아는 농작물계의 히틀러였다. 그리고 히틀러에게 동정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혁진은 병원에서 기나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몇 차례 수술을 했지만 왼쪽 다리에는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신경이 잘린 탓이었다. 결국 그는 재활과 좌절을 동시에 짊어져야 했다. 거기다 통장잔고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기에 그는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밖엔 없었다.

사건이 벌어진 후, 그 짧고도 긴 시간은 사람을 망가뜨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혁진은 더 이상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의 제일 친한 친구는 핸드폰이었다. 때문에 혁진은 말없는 새 친구를 손에 들고서 하루를 보냈다. 부모님도 그런 그를 다그치다 지친 나머지 밥만 넣어줄 뿐이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어느 날이 찾아왔다.

올해, 작황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무와 배추는 흉년이 들어서 당장 정부 비축량을 풀어도 모자랄 실정입니다.’

휠체어를 탄 혁진은 신경질적으로 다른 뉴스를 눌렀다.

농수산물 가격이 줄줄이 폭등하는 가운데, 현재 국내 기업이 소유한 종자의 숫자가 체 1%에도 근접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밥상 물가 폭등이 현실화 되었습니다. 이상철 기자입니다.’

혁진은 다시 한 번 기사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다음 기사도 같은 내용이었다.

이상기후와 해충, 그리고 때 아닌 냉해가 겹쳐 벌서 과수원과 벼농사는 다음해를 기약해야 할 판입니다. 당장 해충에 저항력을 갖춘 개량 작물을 들여오고 싶어도 법이 따라주지 않아서…….’

젠장! 그는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넘겼다.

벌레가 들끓는 곡창은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대재앙은 경신 대기근 이후 처음이라 합니다. 벼 모종은 이 해외에서 들어온 생소한 벌레들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해외에선 이미 살충효과를 지닌 벼 품종을 계발되었지만…….’

그는 진저리를 치면서 핸드폰을 넘겼다. 당장에라도 핸드폰을 꺼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 있어서 가장 친한 친구는 핸드폰이었기에 차마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다른 기사를 보자 시위대는 정부를 향해 다가가는 중이란 기사가 떠올랐다. 그는 쓰디쓴 입술을 핥으면서 그 기사를 눌렀다.

정부는 농수산물 가격을 안 잡고 뭐했나?’

뒤따르는 수만 명이 같은 구호를 복창했다. 굶주린 이들은 중국 농작물이라도 수입하라는 구호를 연달아 내뱉었다. 혁진은 사람들 무리 속에 섞인 낯익은 깃발을 바라보았다. 푸른 숲을 둘러싼 아이와 엄마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혁진은 결국 휴대폰을 꺼버렸다.

더는 화면을 들여다 볼 수 자신이 없었다. 단지, 핸드폰을 던져버리고만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연구원도 박사도 아닌 장애인이었다. 다리만 부서진 게 아닌, 핸드폰을 던질 의지조차 부서진 진정한 장애인이었다.

오늘 새벽 정부는 터키산 GMO콩과 밀을 수입해오는 것에 합의 서명을 했습니다. 물가 안정이 빠르게 이뤄질지, 1분 뒤에 계속 전해드리겠습니다.’

TV 속에서는 광고가 흘러나왔다. 알칼로이드 프리 커피 우유의 선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TV를 바라보던 그는 휠체어에 축 늘어졌다. 분노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닥에 처박혔다. 그는 천장에 비스듬히 걸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곧이어 시작된 뉴스에서는 해충이 먹으면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밀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었다. 마치 당장 병충해를 해결해줄 것 같은 뉘앙스는 덤이었다.

화면을 바라보던 혁진은 헛웃음을 지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무언가를 TV에다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잘난 리모컨조차 그의 시아에서 벗어나 있었다. 때문에 그는 화면을 향해 입을 벌렸다. 무슨 말이 나올까? 무슨 말을 하게 될까? 그는 스스로에게 기대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혁진은 끝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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