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스타

2019.03.25 04:5603.25

1

 

시간의 속도는 상대적이고, 편의점 알바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정미는 계산대에 멍하니 앉아 엄지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트위터의 타임라인을 갱신하지만 더는 올라오는 글이 없다. 아마 오늘의 시간도 느리게만 흐를 것이다. 정미가 일하는 편의점은 빌라들이 많은 동네에 있었다. 건물들의 창문은 옆 건물들과 서로 맞닿아있어 단지 공기구멍일 뿐 채광이나 창밖을 바라보며 경치를 구경할만한 기능을 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따닥따닥 개성 없는 건물들이 붙어있고 멀지도 않은 거리마다 편의점들이 있었다. 정미는 살고 있는 집에서 많이 걷지 않을 만큼, 하지만 집 근처에서 가게 손님을 마주치지는 않을 만큼의 거리가 떨어진 편의점에서 일했다. 집에서부터 일하는 편의점의 사이에도 다른 편의점이 몇 개나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돈을 써야 이 많은 편의점들이 유지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다들 각자의 편의점이 있기에 정미가 상대하는 손님이 많지는 않았고, 점점 눈에 익어갔다. 문소리가 들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첫 손님은 아침에 자주 오는 사람이었다.

 

“체인지 1 미리요.”

“네, 4500원입니다.”

 

손님은 아침이지만 피곤함 없이 과하지 않은 미소로 말을 전한다. 어떤 때는 계산대 옆의 껌이나 사탕 같은 것을 같이 살 때도 있지만 오늘은 담배 뿐이었다. 그럴 때 손님은 바로 카드를 건네주고, 정미는 그것을 받아 결제를 하고. 탁탁탁.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몇 번이나 합을 맞추었던, 서로의 리듬을 알고 부드럽게 진행한다. 손님도 프로, 알바도 프로. 정미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의식하며 만들어가는 그런 호흡이 좋았다. 50대 초반쯤일까. 나이는 정미의 어머니보다 조금 많아보였다. 이 손님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오고는 했는데 정미는 리듬이 좋은 분이니 어떤 일이든 잘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근처에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출퇴근 시간엔 손님이 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항상 기분 좋은 손님만 오지는 않았다. 다음 손님은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정미를 한번 쓱 올려다 보고는 카페인 음료와 삼각김밥을 계산대에 던지듯이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보면서 카드를 쑥 내민다. 정미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처리했다. 다행히 그 뒤로는 얼굴도 보지 않고 정미의 인사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손님이 문을 나서자 정미는 불쾌한 듯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그럴 때면 회의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내가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어야 하나.'

 

2

 

정미는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지고 있는 해의 끝자락이 보이면서 이른 저녁의 기분 좋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오늘은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윤화를 만날 예정이다. 정미는 대학교를 들어가면서 자취를 하겠다는 큰 결심을 했었다. 정미가 택한 학과는 기계공학과였다. 시험 점수와 어렸을 때 물건들을 부수고 조립하는데 흥미를 느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라 선택한 전공이었지만 자기의 길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가슴 속에 찜찜함이 조그맣게 느껴졌는데 가만히 놔뒀다간 후회할 만큼 커질 것 같았다. 정미는 그렇게 되기 전에 온전한 자신을 마주하고 세상에 부딪혀보자고 마음먹었다.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찾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부모님의 막연한 기대와 보호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합격이 결정되고 입학식 전에 학교 게시판을 둘러보는데 같이 자취할 룸메이트를 구하는 글을 보게 됐다. 혼자 자취를 하기엔 부담이 될 것이 확실했기에 좋은 기회라 생각을 해서 바로 연락을 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윤화였다. 과는 달랐지만 서로 이야기가 잘 통해서 대학 4년 동안을 같이 살았고, 졸업 후에도 얼마 정도 이어졌는데 윤화가 취직을 하면서 둘의 한 집 생활이 끝나게 됐다. 정미는 다시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예전의 정미가 아니었다. 아직 목적지는 희미하게 보일지 몰라도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윤화와의 시간은 마음속에 든든함으로 자리 잡았다. 그 뒤로도 둘은 꾸준히 연락을 이어갔지만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갔고, 이번엔 꽤 오랜만이었다.

 

"윤화야 기다렸어?"

"오, 정미."

 

멍하니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약속 장소에 다 와있었다. 지하철 입구에 서 있던 윤화는 언제나처럼 경쾌하게 대답을 했다.

 

"완전 오랜만이네. 얼굴 좋아 보이는데, 강정미."

"하하, 지금 운동하고 오는 길이거든. 너도 여전하네."

"나름 일도 재미있고, 직장인의 월급이 있으니 삶이 윤택해졌지. 고로 오늘은 내가 쏘겠어."

"고맙네. 저녁 먹을만한 데로 갈까?"

"그래, 좋아. 먹으면서 간단하게 한잔하든지. 뭐 끝나고 얘기해도 좋고."

"일단 맛있는 저녁을 먹자."

 

오랜만에 만났지만 거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정미는 실제 가족보다도 윤화가 편했다. 둘은 저녁을 먹고 지하철역 앞의 공원 잔디밭에 앉아 맥주캔을 땄다.

 

"짠!"

"회사는 어때?"

"뭐 괜찮아. 그냥 일하는 거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주위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많이 바뀌었다는 것 같기는 해. 예전 직장 분위기는 이상했다고 하니까."

"그치, 이제는 옛날 드라마들 못 보겠는 것처럼 말이야."

 

윤화는 출판사에 취직했다. 정미는 아직 제대로 된 직장 생활을 해보진 못했지만 티브이에서 최근에 만들어진 드라마와 옛날에 만들어진 드라마의 재방송들을 볼 때면 그 차이가 크게 느껴지듯이 회사의 문화들도 많이 달라졌을 터였다.

 

"남자라는 등장인물들이 여자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성희롱에 가까운 것들뿐이고 여자들은 다들 거기에 아무 말도 안 하고."

"응, 그런 사람들하고 사랑에 빠지고 말이야."

"정수기 물통을 가네 마네. 그런 시절이 있었지. 요새야 다들 사람 같지 뭐. 동등한. 이 동등하다는 단어가 무겁게 들리지만."

"맞아. 슬프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아직 모든 게 바뀌지는 않은 것 같지만 말이야."

 

3

 

'어차피 취직해봐야 뭐하겠어.'

 

정미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윤화에게서 온 문자메시지를 보면서 되뇌었다. 출근 시간이 지나면 한동안은 손님이 띄엄띄엄 온다. 편하지만 지루하기도 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조바심이 스멀스멀 어깨를 타고 올라오고, 윤화의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신을 타이르지 않고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윤화는 영문과를 나와서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다. 영미권의 소설들이 너무 재밌어서 영문과를 들어갔다는 순수한 마음은 취직의 문턱을 넘기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윤화는 웹진에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정미가 보기엔 정말 재밌고 대단했지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막막한 미래를 버티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했고, 여성이 오래 버틸 수 있을 만한 직업은 공무원 정도뿐이었다. 기계공학과를 나온 정미의 사정도 많이 다르지 않았다. 과에 몇 없는 여자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전공을 살려 취직을 하려고 해도 기업들은 보통 남자를 선호하고, 운 좋게 입사를 한다고 해도 봉급이나 승진에 불리한 점이 너무 많았다. 이미 자신의 전공이 적성에 맞는 것인지 고민하던 정미는 그런 현실에 뛰어들만한 각오가 없었다. 학생 때는 구직 활동을 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정도 노력도 하기가 싫어졌다. 정미의 부모는 번듯한 대학을 졸업까지 하고서도 취직도 못 하고, 남자친구도 없는 정미를 걱정하곤 했다. 같은 집에서 살면 잔소리를 피하느라 긴장감이 돌았겠지만 다행히 대학 친구인 윤화가 졸업을 하고도 자취를 하고 있어서 부모님과 떨어져 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윤화도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면서 근근이 살고 있는 처지라 같이 사는 정미도 살림에 보탬이 되려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4년 동안 고생을 했는데 2등급의 취급을 받는 일자리에서 고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생을 하려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었다. 취직을 하지 않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었고, 정미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대단한 삶의 질을 바라진 않았기 때문에 그럴 바에는 되도록 편한 일을 하고 싶었다. 시간 여유도 있고 윤화의 집에서도 가깝고, 결국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그렇게 멍하니 잡생각에 빠져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손님이 또 찾아온다.

 

"어서 오세요."

 

4

 

"세상이 바뀌는 건 정말 한순간이야."

"맞아. 남녀고용의 평등이라는 게 이렇게 커다란 것일 줄 누가 알았겠어."

 

둘은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목소리에 점점 감정이 실려 갔다. 둘 중에선 항상 윤화가 말을 많이 하는 쪽이었다.

 

"인구가 주니까 사원도 없고, 소비자도 없고. 기업들 이익이 줄어서 결단을 내릴 순간이 올 수밖에 없었겠지. 남녀채용 기준만 제대로 동등하게 해보니까 어떻게 됐어. 당연히 여자들이 훨씬 많이 뽑혔지. 여자들이 많이 뽑히니까 업무효율도 올라가고, 그게 눈에 다 보이니까 승진도 여자가 잘해. 그렇게 되니까 남자를 보호해야 된다 뭐라 뭐라 하지만 그럼 그만큼 이익을 내라고. 그동안 놀고먹었고, 앞으로도 놀고먹겠다는 거야 뭐야. 여자들이 얼마나 세상을 열심히 살아왔는데. 세상은 변했어."

 

쉴 새 없이 말을 한 윤화는 목이 말라가는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숨을 돌렸다.

 

"맞아.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 슬픈 감정이 남아있는 것 같아. 얼마 전까지도 그런 시절을 겪었잖아.”

 

정미도 그 시절을 잘 기억하고 있다.

 

"나도 문득 과거를 떠올리면 슬프고 답답한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있어. 아직 남아있는 트라우마 같은 거겠지. 그래도 앞으로의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괜찮다고 추스르곤 해."

"역시 내가 좋아하는 강정미 답네. 흔들리지 않고 타박타박 걸어가는."

 

윤화는 거리낌 없이 속마음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웃으며 건넨 그 한마디에 자신을 잘 알아주고 또 격려해주는 마음이 느껴져서 정미는 쑥스럽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을 찾고 있으니 윤화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가능성의 세상을 살고 있긴 해. 여자들은 항상 제 역할을 해왔었어. 인류의 발전에도 수많은 기여를 했지만 남자들은 그 성과들을 끊임없이 가로채 갔지. 학교 다닐 때도 보면 우리가 보통 공부도 더 잘했잖아. 남자애들이 열심히 한다고 해도 결국엔 우리가 잘했지. 그런데도 과학고 같은 데선 여자애들은 다 떨어뜨리고, 은행 같은 데도 여자들은 점수 조작해서 떨어뜨렸다고 뉴스도 나왔잖아. 남자들만이 인류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거야 뭐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자의식이야. 기회만 동등하게 돼도 이만큼 차이가 난다고."

 

윤화는 뿌듯한 얼굴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자신의 연설이 만족스러운 듯했다. 윤화는 항상 번뜩이는 것이 있는 친구였다. 정미가 찬찬히 걸어가고 있다면 윤화는 이리저리 달려가다가 부딪히고, 뒤처질 때도 있지만 어느새 또 앞서 나가고, 그런 식으로 서로의 속도가 맞았었다.

 

"난 아직 취직도 못 하고, 무언가를 시도해 보고는 있는데. 확실히 조바심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 언제나 실패는 남자들의 전유물이었잖아. 예전 드라마 같은 데서도 보면 남자들은 매번 실패에서 일어나고, 기회들이 주어지는데 여자들은 너무도 쉽게 실패로 몰리고 또 다른 기회를 얻기가 너무 힘들었잖아. 연약하고 착한 존재라 악인이 되면 안 되고, 조금만 실패하거나 악해지면 사회 전체가 매장하려고 하는 느낌이었어. 근데 이제는 여자도 실패를 하고, 다시 기회를 얻기 쉽게 됐어."

 

정미는 한마디 한마디 말을 이어갔다.

 

"취직을 하고, 안정을 찾은 너가 부럽기도 해. 나는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하면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인가 봐. 그런데 요새 들어서 도전해보고 싶은 게 생겼어. 아직까지 확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이제는 실패를 해도 된다고 마음을 먹으니 무모하더라도 느낌이 오는 길을 한번 따라가 볼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말해주긴 그렇고. 형태가 좀 갖춰지면 알려줄게."

 

윤화는 흐뭇한 얼굴로 정미를 보고 있었다. 둘은 또다시 속도를 맞춰갈 것이다.

 

"응, 알겠어. 그때까지는 내가 쏴줄게."

 

5

 

"안녕히 가세요."

 

손님을 보내고는 다시 스마트폰 화면으로 눈을 옮긴다. 포털 사이트의 뉴스들을 살펴보는데 눈에 띄는 소식이 있었다. 미국에서 여성 이종격투기 챔피언이었던 선수가 프로레슬링에 데뷔한다는 뉴스였다. 남성들이 지배하던, 그리고 지금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격투 스포츠에서 여성으로서 모든 흥행기록을 갈아치웠던 유명한 선수라 해외토픽 정도만 알고 있는 정미도 한 번쯤 이름은 들어봤던 선수였다. 역시 미국 정도는 정복해줘야 대한민국 포털에도 뉴스가 나오는구나 하고 정미는 생각했다. 지금은 전혀 관심이 없지만 중학생 때의 정미는 프로레슬링을 좋아했다. 프로레슬링 선수들은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면서도 다른 사람을 들어 메치고,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그런 운동능력들이 참 대단해 보였다. 정미 자신도 학교 친구들과 아이돌의 춤을 따라 추거나 오락실에서 댄스 게임도 잘하고, 몸 움직이는 것을 참 좋아하는 아이였다. 체육 시간도 좋아하고, 자율학습을 도망갈 때 운동장을 뛰어서 가로지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조금 경사진 비탈길을 오르거나 먼 거리를 걷기도 버거워하는 지금의 자신을 생각하자 어릴 때의 자신을 움직이던 힘은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체력이었을까? 마음이었을까? 다시 자신을 타이를 시간이 왔다. 정미는 가방을 열어 안에 있는 봉지의 내용물을 그릇에 담아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편의점 옆 골목으로 들어가 구석진 곳의 바닥에 놓고 조금 떨어져 기다렸다. 손님이 오나 안 오나 잘 보면서, 골목의 구석도 확인하면서. 스마트폰도 보며 잠시 시간을 보내자 기다리던 손님이 왔다. 자주 오는 길고양이. 정미는 자신이 어렸을 때보다 나아진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고양이를 좋아하게 된 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쩌다 고양이를 좋아하게 됐는지 떠올려봐도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어느샌가 그냥 보고 있으면 좋다고 느껴졌다. 사실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고 싶지만 지금은 윤화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것이고, 키우게 되면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될 것 같아 이 정도의 거리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가끔 다가가서 쓰다듬을 때도 있었지만 고양이란 시시각각이 다른 생물이기에 눈치를 잘 봐야 했다. 정미는 기분이 조금 가라앉아 있어서 다가갔다가 고양이가 도망이라도 가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아 오늘은 멀리서 지켜보기로 했다. 황토색이 바탕인지 흰색이 바탕인지. 두 가지 색이 묘하게 섞여 있는 고양이였다. 땅콩버터가 섞여 있는 아이스크림이 떠올라 멋대로 땅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마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겠지. 사료를 다 먹은 고양이는 그릇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워서 그루밍을 하고 있었다. 정미는 그렇게 고양이를 바라보며 마음을 추슬렀다.

 

6

 

기분 좋은 술자리에서 오른 취기로 밤거리를 혼자 걸을 때는 기분이 좋다. 정미는 윤화와의 대화를 곱씹으면서 집으로 향했다. 정미는 오랜만에 만난 윤화와 예전처럼 같이 누워 밤새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아직 둘의 시간과 공간은 그렇게 넉넉하지 못했다.

 

"다녀왔습니다."

"어, 왔니?"

 

소파에 앉아있던 혜숙이 정미를 맞아주었다.

 

"저녁은 먹었니?"

"네, 윤화 만나고 왔어요."

 

신발을 벗으며 흘끗 살펴보니 혜숙은 케이블 티브이에서 해주는 옛날 드라마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한잔하고 왔나 보네. 윤화는 잘 지내니?"

"네, 뭐 취직하고 잘 지낸대요."

 

정미는 대답을 하면서 걱정했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 그대로 말을 해버렸다. 윤화가 취직을 했단 소리에 드라마를 보던 혜숙의 표정이 약간 찌푸려지는 것을 눈치챈 정미는 윤화와의 만남에서 이어지고 있는 좋은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아 씻는다고 말을 하고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정미는 샤워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서 윤화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윤화가 직장을 다니면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올리는 블로그인데 출판사에서 겪는 일들은 유쾌하면서도 공감가게 그려 방문자가 꾸준히 있는 편이었다. 가끔은 진지한 글도 올라오는데 윤화의 몰랐던 다양한 면들을 알게 되는 것 같아 항상 새로운 글이 기다려졌다. 그렇게 쉬고 있는 정미에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미야, 들어가도 되니?"

 

안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네, 들어오세요."

 

혜숙이 들어왔다.

 

"윤화랑 오늘 재밌었니? 윤화네 회사는 어떻다 그러든?"

"재밌었어요. 윤화는 다니기 괜찮다나 봐요. 보니까 일도 적성에 맞는 것 같고."

"그래, 이제 회사도 다니고 금방 좋은 소식 있겠네. 남자친구는 없대?"

"물어보진 않았는데, 별 얘기 없었던 거 보면 없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래. 윤화도 일이 힘들어서 그런가. 빨리 남자 만나고 해야 될 텐데."

 

사실 예전부터 혜숙은 윤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혜숙이 보기에 여자의 행복은 좋은 남편을 만나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남녀평등이다 하더니 이제는 여자들이 직장에서도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고, 동성끼리도 결혼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혜숙은 맏이인 정미를 낳고, 남동생 정욱을 낳고 한참이 지나서야 세상이 바뀐 것을 체감했다. 혜숙이 정미의 나이였을 때와 지금 정미가 사는 세상에서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졌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자신이 했던 고생들도 안다. 남편이 직장을 다니고 자신은 아이를 봤다. 편하기만 하고, 즐겁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행복이 없지는 않았다. 단지 지금의 사람들은 그저 편하고 편한 것만을 찾기 때문에 옳지만은 않다고 느꼈다. 그래도 할 것은 해야 하지 않는가. 혜숙은 자신의 엄마를 생각하고, 엄마의 엄마를 생각했다. 정미도 좋은 남자를 만나서 좋은 가족을 이루고, 아기를 낳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바랄 뿐이었다. 정미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자취를 하겠다고 성화를 할 때 호되게 말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 말도 잘 듣고 주위에 모나게 행동하지는 않았었는데, 자취를 하고 룸메이트였던 윤화와 친해지면서 점점 사회에 반항심을 가진 것 같았다. 가끔 집에 돌아와 이야기할 때면 혜숙의 이야기에 말대꾸가 많아지고, 고성이 오갈 때도 있었다. 정미를 탓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죽이 잘 맞는다는 윤화를 좋은 눈으로만 볼 수도 없었다.

 

"너는 어떠니? 이제 아빠 정년도 점점 다가오는데 좋은 소식 좀 없을까? 아빠도 기분 좋게 퇴직하셔야지."

"제가 하는 일 시작이 좀 더디네요. 자리 좀 잡히고 생각해볼게요."

"생각만 해서 되겠니. 무슨 일이길래 나한테는 말도 안 해주고. 얼른 자리 잡아야 사람도 만나고 그러지. 좋은 사람 소개시켜 준다는 친구가 있는데 내가 주위에 좀 물어볼까?"

 

정미는 고민에 빠진다. 본심을 말해서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싸우는 쪽인가, 아니면 나중에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또 더 큰 상처를 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을 피하고자 마음에 없는 말로 둘러댈 것인가. 정미는 찡그린 표정을 짓지 않도록 집중을 하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엄마. 제가 지금 운동하고 와서 많이 피곤해서요. 일단 알아서 해 볼테니까 주위에 물어보지는 마시구요. 저는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자리에는 맞지 않을 것 같아요."

 

정미는 본심도 조금, 거짓말도 조금 섞인 애매한 말로 둘러댔다. 혜숙은 혜숙대로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듣지 못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정미야, 너는 그렇게 운동만 하고, 여자가 그러면 인기 없어. 시간 지나면 더 힘들지도 몰라. 남녀평등이다 뭐다 해서 사람들이 이제 편하게만 살려고 그러는데 그러면 되니.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 거고 할 건 또 해야지. 엄마가 너 생각해서 그러지 딴게 아니야."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이 가장 멀게 느껴졌다. 세상은 바뀌고 있고, 뒤처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의 생모가 그 사람들 중 하나라니. 정미는 변해왔던 자신이 뿌듯했고, 택한 길에 대한 망설임도 줄어갔다. 그렇게 노력해온 자신의 모습을 언젠가는 혜숙이 알아봐 주고 같이 기뻐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있지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아직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가깝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다.

 

7

 

정미에게 길기만 했던 시간도 어느새 흘러가 오후 4시가 되었다. 그때부터는 점장이 근무하는 시간이었다. 점장은 40대 중반 정도의 여성으로 매번 하얀색의 키가 사람 허벅지 높이까지 오는 커다란 진돗개 키위와 같이 오곤 했다. 가끔 동네에서 마주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도 둘은 꼭 함께였다. 정미는 이름이 왜 키위인지 물어봤었는데 키위를 먹고 있을 때 집으로 왔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키위는 정말 순하고 착했다. 한 번도 성질부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정미가 편의점에서 일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을 때부터 알아봐 주고 다가오곤 했다. 그리고 정미가 쓰다듬어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기분 좋아했다. 키위의 붙임성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정미를 부럽게 했다. 정미는 당장 키울 것도 아닌데 강아지와 고양이를 다 키우는 것은 고양이에 대한 배신일까? 라고 괜히 심각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키위는 편의점 안에 있을 때도 있었고, 문 앞에 매어져 있을 때도 있었는데 혹시나 손님들이 해코지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곤 했다. 다들 키위의 착함을 알아봐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미는 점장에게 인사를 하고 키위에게도 인사를 하며 몇 번 쓰다듬고는 집으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윤화는 집에 없었다. 집에서 공부할 때도 있었고 도서관에 갈 때도 있었는데 오늘은 도서관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윤화는 샤워를 하고 잠시 쉬다가 저녁밥을 차릴 준비를 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두부와 양파가 조금 있어서 김치찌개를 하기로 했다. 윤화가 도서관에서 온다는 메시지가 와서 집에 도착할 때 맞춰 먹을 수 있도록 슬슬 요리를 시작했다. 김치찌개가 맛있게 끓을 때쯤 문소리가 들리고 윤화가 들어왔다.

 

"오, 맛있는 냄새 나네. 고마워 정미."

"응, 고생했어. 얼른 손 씻고 와."

 

정미는 전자레인지에 즉석밥을 두 개 데웠다. 윤화와는 대학 때부터 그리고 지금 졸업 이후에도 같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대학 때는 무엇이 그리 좋았는지 같이 밥을 먹을 때라던지 그저 서로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만은 없었다. 정미는 뻔해지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번듯한 기업에 들어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그런 평범한 길을 가려고 자신을 혹사하면서 나중에는 자신이 고생했는데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평만 하는 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미는 그런 자신의 아버지가 싫었다. 그래서 더욱 뻔한 길을 가고 싶지가 않았다. 정말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먹고 사는 것도 문제고, 집안의 기대에 반하는 것도 문제고, 지금도 그렇지만 다른 친구들을 만날 때도 점점 더 어울리기가 불편해질 것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엇나가 있지만 그렇게 생각에 휩싸여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지금 정미의 문제였다. 윤화는 정미와 달랐다. 정미는 대학교에 들어와서 부모님과 데면데면해졌지만 윤화는 계속 사이가 좋았다. 윤화의 부모님은 윤화가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바라고 윤화도 그 이유 뿐만은 아니겠지만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하지만 공무원 시험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정미는 점점 지쳐가는 윤화를 보기가 힘들었다. 대학교 때는 반짝반짝했던 윤화가 점점 빛을 잃고 자신의 아버지같이 뻔한 사람이 되어 갈까 봐 겁이 났다. 김치찌개를 한 숟가락 뜨고 후후 불면서 정미는 윤화에게 말을 걸었다.

 

"윤화야 공부는 잘 돼가?"

"응, 뭐 똑같지. 꾸준히 하는 수밖에."

"전에 네가 쓰던 글들 참 좋았는데. 그냥 갑자기 아까 일하다가 생각이 나서, 공부하다가 힘들면 글도 좀 쓰고 그래 봐."

 

윤화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목소리의 톤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 근데 또 글 하나를 쓰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래서 말이야. 일기 같은 글이라도 맘에 들 때까지 쓰다 보면 몇십 분은 금방 가는 것 같아. 뭔가 여유가 없다고나 할까."

 

자신의 말이 윤화에게 좋지만은 않게 들린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미는 힘들어하는 윤화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어떻게든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

 

"요새 생각하는데 아직 우리 젊잖아. 길은 한 가지가 아니니까. 윤화 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거기에 관련된 것으로 길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윤화 너는...."

 

정미의 말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 윤화는 찡그린 표정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정미야, 무슨 말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그게 정말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그냥 네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거 아니야? 나도 많이 고민해서 정한 길이야. 그 정도도 생각 안 해 보고 그냥 정한 게 아니라고. 지금 문제는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정미는 가슴 한가운데가 먹먹해졌다. 윤화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사실 내가 문제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윤화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윤화는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말투가 공격적이어서 정미는 당황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미안해 윤화야. 알아 문제는 나지. 근데......."

 

정미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윤화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고, 자신을 이해받고 싶었던 마음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화도 지쳐있어서 정미의 마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윤화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다른 말이 없었고, 답답해져만 가는 저녁 식탁의 공기를 견디지 못한 둘은 황급히 음식을 먹고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8

 

정미는 혜숙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새벽같이 집에서 나왔다. 매일 아침 조깅을 하러 나오던 시간보다 훨씬 일러서인지 길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동네의 공원을 한 바퀴 돌고서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은 단층의 넓은 건물이었다. 체육관 문을 여니 넓은 실내는 캄캄했고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겨우 전등 스위치까지의 길을 보여주었다. 정미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운동기구들을 피해 전등 스위치까지 걸어갔다. 전등 불빛이 밝혀지자 가운데 커다란 링이 있고, 그 주위로 깔린 매트와 운동기구들이 위치한 체육관 내부가 보였다. 정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석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 문을 열자 간이침대에서 자고 있는 선영이 있었다.

 

"언니, 또 사무실에서 주무셨어요?"

"음....... 정미 왔니?"

 

정미는 대학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다가 동네 체육관의 모집 공고를 보았다. 취직 준비의 스트레스도 풀고, 평상시에 몸을 쓸 일이 없다 보니 운동도 할 겸 별생각 없이 등록했다. 체육관이 있는 곳은 정미네 집 근처의 번화가와는 많이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공원을 지나 가게들이 많지 않은 외딴곳에 있어서 평상시에는 갈 일이 없었다. 공장들 같은 게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그중 한 건물이 체육관이었다. 그리고 그 체육관은 보통 일반적인 체육관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여자 프로레슬링 단체의 체육관이었던 것이다.

 

"경기 날이 얼마 안 남았어도 들어가서 주무셔야죠. 무리하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떡해요?"

"응, 그렇긴 한데 무대 구성도 생각해야 하고, 선수들 의상도 마무리해야 하고, 조명, 음악 등등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말이지. 집에 가서도 할 수 있지만 제대로 분위기를 느끼려면 아무래도 현장에 있는게 좋잖아. 이럴 때를 대비해서 침대는 좋은 걸로 사놨어. 도시락도 고급으로 먹었고."

 

선영은 체육관의 관장이자 프로레슬링 단체의 경영자였다. 선영은 젊었을 때 무역회사에서 일했었다. 그때의 선영은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언제나 차를 타는 것은 자신의 몫이었고, 설거지를 해야 했고, 과일을 깎았다. 업무에서 아무리 좋은 성과를 내도 언제나 공은 남자들이 차지했다. 답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으로 출장을 갔을 때, 호텔방에서  TV를 돌리다 우연히 여자 프로레슬링을 보게 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움직임이었다. 여자는 항상 움츠리고 방어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링 위의 여자들은 달려가고, 소리를 지르고, 상대를 때리고 던졌다. 선영은 그 해방감에 반해 한눈에 팬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실제로 경기를 보고, 영상매체를 구하고, 점점 매니아가 되어 갔지만 혼자만의 기쁨이었다. 선영은 그저 기쁨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의 손으로 이룬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다. 더 깊이 공부하고, 자본을 모으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50대가 다 되어 자신의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첫 대회 개최를 앞두고 있었다.

 

"정미야 링네임은 생각해 봤니?"

"네, '슈팅 스타' 쯤 어떨까 싶어요. 옷에 노란 별 모양이 있으면 좋겠어요."

"오, 괜찮네. 이번에 경순이는 파란 옷을 입을 테니까 대비가 잘 될 것 같아."

 

정미의 지금 목표는 프로레슬링을 해보는 것이었다. 등록할 때 체육관에서 프로레슬링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처음에는 별 관심 없었다. 그냥 체육관 시설을 이용하면서 운동하는 평범한 회원이었다. 하지만 정미가 기계공학과 전공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선영은 운동기구를 관리하며 보수를 받는 것은 어떤지 물었다. 정미 자신은 딱히 연관이 없어서 주저했지만 선영이 큰 기대를 하지 않을 테니 부담 없이 해도 된다며 설득을 했다. 정미는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체육관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아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일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운동기구들이 잘 움직이는지 확인하면서 헐거워지면 조이고, 빡빡하면 기름을 치는 정도였다. 그 외의 시간에는 운동하고, 책을 읽든 공부를 하든 자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체육관에는 선영이 여기저기서 모아온 선수들이 항상 연습을 했고, 어느 날은 정미도 연습 뒤풀이에 따라가게 되었다. 첫 시합을 앞두고 있는 선수들이 대부분 이었고 정미처럼 운동만 하는 체육관 회원들 몇 명도 참석했다. 체육관의 큰 행사를 앞두고 있어 들뜬 분위기의 대화들이 여기저기서 이어지고 있었다. 정미도 다른 사람들의 설렌 마음들에 기분이 좋았지만 조금은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한 쪽에서 선영이 몇몇 선수들과 하는 이야기가 정미의 귀에 들어왔다.

 

"난 프로레슬링을 처음 봤을 때부터 한국에서는 여자 프로레슬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어. 한국 여자 운동 선수들을 봐봐. 매번 올림픽 같은 데 나가서도 다양한 종목들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해외 배구, 축구 리그에 진출해서도 주목을 받잖아? 항상 좋은 여자 운동 선수들은 많았었어. 그 선수들이 다 어디로 가냐고. 국내의 프로팀들은 많지도 않고, 그 절대 수가 너무 적으니까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생계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어. 거기다 운동만 했으니 다른 일을 새로 하기도 어렵고. 들어간다고 해도 길지 않은 현역활동이 끝나면 그 이후에 지도자 자리 같은데는 더 적을 테고, 가정이 생기면 밥하랴 애 보랴. 그렇게 꿈을 잃고 좌절을 하면서 운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거 아냐. 거기서 난 프로레슬링이 떠올랐었어. 프로레슬링은 선수들이 서로를 믿고 가장 멋있는 모습을 만들어 내는 경기야. 격렬하기도 하지만 안전하게 할 수도 있어. 격투기 같은 것은 몸에 부담이 커서 한 경기를 한 이후에 몇 개월은 회복을 해야 하고, 경기 중에 실제로 큰 부상을 입을 때도 많거든. 프로레슬링은 위험한 것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거의 매일 경기를 할 수도 있고, 길게 보면 40대가 넘어서도 활동할 수 있단 말이야. 모두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 명에게 대안을 만들어 줄 수가 있다고 생각했어. 한국 여자 운동 선수 정도면 프로레슬링에 필요한 운동능력 정도는 충분히 가지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만드는 것은 몇십 년이 걸린 거지."

 

선영의 이야기를 경기에 참가할 선수들이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모여있는 선수들은 육상선수 출신도 있었고, 체조선수, 농구, 씨름 등등 다양한 분야의 운동을 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선영이 말하는 이야기의 실제 예들이 바로 자신들이었다. 선영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프로레슬링은 좀 웃기지. 뭐라고 정의하기도 어려워. 실제로 때리기도 하니까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고, 감정을 연기하고 동작을 만들어 내니까 연극이라고 할 수도 있고, 서커스? 뭐 다들 알아서 생각하겠지. 하지만 프로레슬링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감동이 있어. 액션 영화 처럼 멋있는 장면들, 선수들의 감정이 전해져 오는 것 같은 희한한 느낌들. 호텔 방에서 처음으로 봤던 경기가 생각나. 그 시절의 나는 세상에 대한 불만이 정말 많았고 답답했거든. 뭘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었어. 그런데 경기를 하는 선수들이 내 안에서 소리치고 싶던 무언가를 온몸으로 표현해주는 것 같았어. 나도 그런 감동을 만들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었어."

 

선영의 말은 뒤로도 계속 이어졌고, 다른 선수들과도 많은 대화가 오갔다. 정미가 먼저 관심이 생긴 것은 선영이라는 사람에 대해서였다. 선영은 자신도 그렇고 다른 선수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기회들을 만들어주고, 그러면서도 부담이 되지 않게 항상 신경을 써줬다. 게다가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긴 시간 동안 참고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야 첫 번째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지만 어딘가 믿음이 갔다. 프로레슬링에 흥미가 생긴 것은 그 다음이었다. 선영이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는 프로레슬링이란 무엇인가? 중학교 때 티브이에서 해주는 프로레슬링 프로그램이 있었다. 가끔 볼 때면 사람들이 경쾌하게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여자 프로레슬러들은 많지 않았다. 간혹 나온다고 해도 여자 선수들은 몸매가 강조된 옷을 입고 나와서 시간때우기 라는 것이 뻔히 보이는 경기들을 하고는 했다. 주먹질 하나만 하더라도 운동선수 같은 움직임 이라기보다는 '여자처럼'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듯 과장되게 행동을 해서 더욱 대비가 되었다. 그래서 여자 선수들의 기억은 딱히 인상 깊게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뒤풀이에서 선영의 말을 듣고 난 이후로 체육관에서 열심히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들을 보고 있으면 무언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9

 

정미는 결국 다음 날 아침까지 윤화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편의점으로 나왔다. 몇 명의 손님이 다녀갔지만 머릿속에서는 어제저녁 윤화와의 엇나간 대화가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조금씩 서로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불안해하던 차에 윤화의 기분을 상하게 해버려서 둘의 관계에 문제라도 생기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멈추질 않았다. 정미는 윤화를 잃을 수 없었다.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있는 시간들을 같이 보내며 수많은 감정을 함께한 사이였다. 윤화도 자신 만큼 고통스러울까? 해야 할 일들에서 도망치기만 하는 자신이 싫어졌을까? 정미는 지금 이 순간에 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친구와의 우정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그때는 평생을 같이할 것 같았지만 이제는 얼굴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 친구들도 많다.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의 선택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위 사람들의 흐름에 떠밀려 지나갔다. 대학교 때는 그래도 자신의 의지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었었는데 결국 지금도 사회가 만들어 가는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억울했다. 지금 자신의 처지는 자기가 만든 게 아니었다. 정미는 사회에서 말하는 대로 대학교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좋은 성적을 얻었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나서 만난 진짜 사회의 모습은 불공평한 것 투성이였다. 평등한 세상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차별은 명백했다. 대학교 때 같이 공부했던 남자들은 정미보다 성적도 좋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취직을 하고 자신의 능력이 대단한 것처럼 떵떵 거리고 다녔다. 여자들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또 노력을 해봐도 같은 출발선에 서기도 힘들었다. 거기에 자신도 상처받고, 윤화도 상처받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불쌍했고, 윤화가 불쌍했다. 어떻게 해야 바뀌는 것인가. 내가 바꿀 수는 있는 것인가. 너무 답답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돼서 평소에 하던 대로 고양이의 밥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평온하게 지내는 고양이라도 봐야 마음이 조금 안정될 것 같았다. 밥을 가져다 놓고 기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정미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고양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정미는 황급히 소리가 들려오는 골목 안쪽으로 향했다.

 

10

 

체육관의 게시판에는 언제나 선영이 추천하는 경기 목록이 있었다. 여자 프로레슬링 역사에 남을 만한 명경기들의 목록들이 있었고, 최근의 경기들 중 볼만한 경기들이 적혀있는 목록이 있었다. 정미는 그중에서 최근의 경기들을 검색해서 보기 시작했다. 역시 많은 시간이 흘러서인지 최근의 경기들은 정미가 기억하고 있는 프로레슬링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더 화려한 조명과 의상들, 그리고 기억에는 여성 선수들은 남성 선수들과 호칭부터가 달랐는데 이제는 같은 호칭을 쓰고 있었다. 몸매를 강조하는 옷을 입은 선수도 있었지만 그냥 편해 보이는 옷을 입은 선수들도 있었다. 가장 차이를 느낀 것은 선수들의 움직임이었다. 예전의 어설픈 움직임이 아니라 숙련된 운동선수의 움직임이었다. 경기 자체도 스포츠 경기의 느낌이 강했다. 프로들이 자신들의 기술을 겨룬다는 느낌이었다. 요즘의 경기를 몇 개 본 후에 90년대의 명경기도 한 편 보기로 했다. 추천돼있던 경기는 충격적이었다. 스포츠 경기라고 하기보다는 두 사람의 싸움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주먹질, 발길질로 서로를 때리는 소리가 경기장 안에 울려 퍼질 정도로 컸다. 두 명의 선수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때리고 던지다가 버틴 사람이 이기는 느낌이었다. 정미는 선영 언니가 봤던 것은 이런 경기였을까 하고 생각했다. 정미는 자신이 경기를 한다면 절대 90년대의 스타일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문득 어느새 자신이 프로레슬링을 해 본다는 생각을 하는 것에 신기해했다. 그 후로 요즘의 경기를 몇 개 더 보았다. 선수마다 실력들이 다른 것도 알겠고, 스타일이나 기술이 어떤 건지도 조금 알 듯했다. 그중에는 몇몇 마음에 드는 선수들도 있었다. 머릿속으로 자신은 어떤 기술을 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한참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두근거림이 다시 생겨나는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중에 미래에 연결될만한 중요한 일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방황하고 있었다. 프로레슬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정미는 체육관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는 선영을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언니, 저 프로레슬링 한번 배워볼 수 있을까요?"

"어.... 그래."

 

선영은 약간 놀란 듯 했지만 흔쾌히 수락을 했다. 정미는 그 날의 연습에 참여했다. 연습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코치 겸 선수인 경순이 다른 선수와 여러 가지 기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순은 40대 중반으로 체조 선수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몸이 작고 탄탄했는데 체조를 해서 그런지 날렵하고 동작에 절도가 있었다. 시범을 지켜보는 정미는 신기한 느낌을 받았다. 정미와 다른 선수들이 링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경순의 몸동작 하나하나에 자신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 움직여지는 것 같았다. 마치 경순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실들이 뻗어 나와 자신을 보고 있는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있어서 경순이 상대를 공격할 때 주먹질이나 발길 질로 그 실들을 당기면 관중의 몸이 들썩거려진다고나 할까. 경순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경순이 공격을 받거나 던져져서 아픈 표정을 지을 때면 정미 가슴 속의 안타까움이 있는 부분이 살짝살짝 당겨지는 것 같았다. 경순이 공격을 받다가 반격을 시작하자 들뜬 공기가 실내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는데 어느새 연습 시작 시간이 되어서 더 이어지지는 않았다. 경순은 많은 공격을 받고, 많은 공격을 해서 체력이 떨어졌을 법했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선수들을 불러 모으고 연습을 시작했다. 정미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홀렸던 것 같은 얼떨떨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처음 며칠간은 기본적인 동작을 배웠다. 달리기, 누웠다 일어서기, 낙법 등등.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면 던져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실제로는 굉장히 아파서 깜짝 놀랐다. 로프에 튕겨져 나오는 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로프가 몸을 파고들어 깊은 곳을 때리는 느낌이었다. 기본 동작만 연습하는 데도 고통이 예상 밖이라 정미는 며칠간 왜 프로레슬링을 한다고 했을까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하지만 문턱도 넘기 전에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본 동작들을 하나하나 따로 하는 연습이 익숙해질 때쯤 링 위에서 기본 동작들을 연결해 보이는 연습을 하는 날이 왔다. 두 명의 선수가 링 위에 올라가 번갈아 가면서 이런저런 동작들을 주고받는 연습이었다. 정미의 차례가 됐다. 코치가 연습할 동작을 차례차례 말해주면 그 순서대로 연결하는 것이다. 동작의 순서는 매번 달라졌기 때문에 제대로 집중을 하고 있어야 했다. 처음의 몇 번은 정신없이 지나가고 약간 익숙해질 때쯤 정미는 경순이 시범을 보였던 날의 느낌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조종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기술을 걸면 그 기술에 따라 보고 있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정미는 연습이 끝나고 경순을 찾아갔다. 경순은 선영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경순에게 그 느낌을 설명했다.

 

"언니 그 있잖아요. 링 위에서 기술을 쓰면 다른 사람들을 잡아당긴다고 해야 하나 뭐라 해야 하나. 언니가 무슨 행동을 하면 제가 거기에 딸려가는 그런 느낌을 받는데 그게 뭔가요?"

 

경순은 정미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가 미소를 짓더니 옆에 있던 선영에게 말했다.

 

"선영씨, 정미 경기 올려 보는 거 어떨까? 나는 아직 상대가 없으니까 나랑 같이."

 

정미는 갑자기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놀라고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선영도 경순처럼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좋아. 재밌을 것 같네. 기구 정비 담당이 의외의 인재일지도 모르겠어."

 

얼떨결에 정미와 경순의 경기가 정해지고, 경순은 정미가 느낀 것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말하자면 정미가 앞으로 배울 것을 본능적으로 먼저 느낀 것이었다. 경순이 말하길 링 위에서의 모든 동작들은 관중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도구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공격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 공격을 당했을 때 어떻게 표현을 하느냐, 정정당당한 행동과 비겁한 행동 등등 특정한 행동으로 특정한 감정을 끌어낸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을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도 따로 있다고 했다. 설명을 들으니 정미는 자신이 느낀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새로운 세계의 비밀을 조금 맛본 듯해 기분이 좋았다. 정미는 이번 경기를 멋지게 해내고 싶어졌다.

 

11

 

기역자 모양으로 꺾어진 골목 끝에서 남자의 큰 목소리와 고양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정미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어떤 남자가 땅콩이를 위협하고 있었다.

 

"어쭈 이게 덤벼?"

 

한 손에 소주병을 든 남자는 대낮부터 술을 취하도록 마셨는지 벌건 얼굴로 술 냄새를 풍겼다. 땅콩이는 구석의 높은 담에 몰려 도망갈 길이 없었지만 자세를 낮추고 소리를 지르며 최대한 저항하려는 모습이었다. 남자는 소주병을 던질 듯 위협하면서 발길질을 해보려고 했지만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해서 휘청거렸다.

 

"아저씨 뭐 하시는 거예요?"

"뭐야 이 고양이가 니꺼야?"

"아니라도 그러시면 안 되죠!“

"어디서 어른한테 눈을 똑바로 뜨고, 네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남자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도대체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자신보다 약한 동물을 괴롭힐 수가 있을까? 정미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인터넷에서 CCTV에 찍힌 동물을 학대하는 영상을 우연히 클릭해서 봤을 때도 두근거리던 가슴은 실제의 증오를 마주하자 터질 것만 같았다. 어디서 이런 폭력이 퍼져나가는 걸까? 이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도 괴롭히는 걸까? 정미는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아서 순식간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온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구석에서 온몸의 털들을 곤두세우고 있는 땅콩이를 보자 정미는 더 이상 생각만 할 수는 없었다. 말싸움이 이어졌는데 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말대꾸하는 정미의 기세에 눌려 남자는 고양이에게 주의가 멀어졌다. 정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위협하는 남자의 앞으로 재빨리 뛰어들어 땅콩 이를 낚아챘다.

 

"따라오면 경찰 부를 거예요!"

 

정미는 남아있는 힘을 쥐어짜 큰소리를 지르고는 편의점을 향해 달려갔다.

 

12

 

어느새 경기 당일이 됐다. 정미는 무대 뒤편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데뷔전이라 맨 첫 번째 순서였다. 경순과 연습을 계속 해 왔지만 아직은 부족한 것 같았고, 긴장한 탓에 입이 바짝 말라왔다. 정미는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순에게 많은 것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첫 경기는 정미와 경순과 선영이 함께할 것이다. 선영은 체육관 관장에 단체 경영자였지만 이번처럼 심판을 겸할 때도 있었다. 정미의 첫 경기는 이렇게 세 명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경순은 노련하고 거만한 선배 프로레슬러의 역할이다. 경순이 정미를 공격한 후 머리를 민다든지,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는다든지 얄미운 행동으로 관중의 분노를 일으키면 정미는 그런 경순을 공격하는 것만으로도 환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정미의 기본적인 공격을 경순이 굉장히 강력한 공격인 것처럼 받아주는 것으로 그 효과를 극대화할 것이다. 심판인 선영도 그 안에서 경순의 반칙을 못 보고 지나친다거나 정미의 분노에 찬 공격을 진정시키기도 하며 관중을 애태우는 것으로 한몫을 하게 된다. 정미는 그동안 연습했던 것들과 오늘의 시합 내용을 반복해서 머릿속에 되새겼다. 경기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정미는 거울 앞에서 시합 의상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몸 전체를 감싸는 반짝이는 노란색 타이츠에 꼬리를 단 커다란 오각형 별 두 개가 겹쳐져서 가슴팍에 붙어있었다. 어색하기도 했지만 신이 나기도 했다. 마음을 다잡고 있는 정미 곁으로 경순이 다가왔다. 경순은 체조 선수 생활을 하며 큰 무대를 경험해봐서인지 태연해 보였다.

 

"혹시 진행을 까먹더라도 내가 바로바로 말을 해줄 테니까 그대로 하면 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알겠어요."

 

경기 시작을 알리는 링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정미의 이름이 불렸다. 정미의 등장 음악이 흘러나오자 두근거림이 점점 거세지던 정미의 가슴은 터질 듯 쿵쾅댔다. 어두웠던 무대 뒤의 커튼을 젖히고 경기장으로 나가자 조명에 눈이 부셨다. 조명들이 경기장 중앙의 링에 집중되어 있어서 관중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소식을 전했던 윤화는 관중석 어딘가에 앉아있겠지만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정미는 떨리는 다리를 티내지 않도록 노력하며 링 위로 올라갔다. 링 위에는 심판복을 입은 선영이 먼저 올라가 있었다. 곧이어 경순이 입장할 차례였다.

 

"재밌게 해보는 거야."

 

관중들의 시선이 입장하고 있는 경순에게 쏠리자 선영이 정미에게 말했다. 정미는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대답하고 경순을 기다렸다. 경순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링 위에 올랐다. 선영이 두 사람의 몸을 체크 하고, 공이 울렸다. 정미가 기세 좋게 달려가 공격을 시도했지만 경순은 가볍게 피하고 반격을 했다. 경순은 두 번째 공격도 가볍게 피하며 정미를 넘어뜨렸다. 경순은 넘어져 있는 정미에게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고는 혓바닥을 내밀며 형편없다는 표현을 했다. 그러자 관중들은 상대 선수에게 예의가 없는 경순에게 야유했다. 정미가 일어나서 세 번째 공격을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경순이 허둥대는 정미에게 등을 보인 채 놀리면서 방심을 하고 있는 사이 정미는 정신을 차리고 경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숨을 들이마시며 온몸의 힘을 모아 뛰어올랐다. 양발을 모은 채로 경순의 가슴팍 높이까지 올라간 정미는 모았던 발을 힘차게 뻗으며 경순을 가격했다. 열심히 갈고닦은 드롭킥이었다. 경순은 그 공격 받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관중들은 얄미웠던 경순이 보기 좋게 공격을 당하자 크게 환호했다. 정미는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쓰러진 경순을 일으켜 주먹질하며 공격을 이어갔다. 정미는 떨리고 정신이 없었지만 집중을 하고 연습한 대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정미의 공격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반격의 기회를 잡은 경순이 정미를 들어 올려 메쳤다. 정미는 수백 번 연습한 낙법으로 안전하게 떨어졌다. 경순은 귓구멍을 후비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정미의 공격 타이밍이 오면 로프로 도망가서 심판인 선영의 중지 신호를 기다렸다. 계속해서 정정당당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경순에게 정미의 공격이 성공할 때는 관중들이 환호했다. 경기는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정미와 경순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공방을 오갔다. 정미의 머리통을 겨드랑이에서 조이고 있던 경순이 관중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정미에게 속삭였다.

 

"백드롭 반격."

 

이제 정미가 경순의 기술을 멋지게 반격하는 중요한 장면을 연출할 차례였다. 난이도가 있었기 때문에 정미는 불안함이 없지 않았지만 부족한 자신을 위해 노력해준 경순에게 보답하고자 멋진 장면을 만들고 싶었다. 연습에서는 몇 번이나 성공했던 동작이었다. 정미가 경순을 공격하려고 달려가면 경순은 몸을 숙이고 피하면서 정미의 뒤로 돌아간다. 경순이 정미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리면 정미는 그 반동으로 뒤로 한 바퀴를 돌아 두 발로 착지하는 것이다. 둘은 달리고 달려서 경순이 정미를 들어 올린 순간, 조명의 빛 때문이었을지, 경기에 지친 다리 때문이었을지, 정미는 너무 강하게 뛰어버렸다. 두 발로 착지를 해야 했는데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고 뒤로 넘어가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미는 눈을 떴다. 아직 경기중이었다. 정미는 아주 잠깐이지만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눈이 부시고 뒤통수가 조금 얼얼했다. 시선 앞에는 선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정미야 괜찮니?"

"네, 괜찮아요."

 

옆쪽을 보니 경순이 관중들을 자극하고 있어서 시선은 모두 그쪽을 향해 있었다. 정미는 잠에서 깬 듯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언니 드롭킥할게요."

 

선영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관중들을 도발하는 경순을 저지하려는 듯 다가갔다. 하지만 실제로는 경순에게 정미는 괜찮고 이제 드롭킥이 날아올 것이라고 귀띔을 하는 중이었다. 정미는 숨을 다듬고 경순을 향해 달려갔다. 드롭킥! 부상을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선수가 정신을 차리고 멋진 기술을 보여주자 관중석에선 큰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정미의 공격이 연달아 이어지고, 환호는 점점 커졌다. 계획대로 마지막 마무리를 할 시간이 됐다. 정미는 경순을 들어서 메치고는 링의 코너에 올라갔다. 정미의 마무리 기술 엘보우드롭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코너의 높은 곳에 올라선 정미는 아래에 누워있는 경순을 바라보니 몇 달간 연습했던 시간들이 머리 속에서 순식간에 지나는 것 같았다. 정미는 마음을 굳게 먹고 경순을 향해 팔꿈치를 들고 힘껏 뛰었다. 연습들을 기억하고 있는 정미의 몸은 경순이 누워있는 거리까지 멋지게 날아갔다. ‘쾅’ 소리가 나고, 경순의 몸을 덮은 정미의 옆으로 선영이 달려왔다. 원, 투, 쓰리. 땡땡땡.

 

13

 

편의점까지 달려와서 뒤를 돌아보자 다행히 남자는 없었다. 땅콩이는 아직 놀란 상태인지 자신을 안고 있는 정미의 팔을 몇 번이나 물었고, 그제야 아픔이 느껴진 정미는 땅콩이를 놓아주었다. 땅콩이는 순식간에 저만큼 달려가더니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멀리 사라졌다. 정미는 떨림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와 앉아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하자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제부터 이게 무슨 일인가. 아니 어제부터가 아니었다. 한번 울음이 터지자 수많은 것들이 떠올라 더욱 슬퍼졌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부모님과 싸웠던 일, 대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어떤 회사에도 갈 수 없었던 막막함, 친하던 친구들과 서먹해지던 순간들, 슬펐지만 그동안 참아왔던 많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 스마트폰에 알림창이 떴다. 윤화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윤화는 ‘정미야 생일 축하해. 어젠 미안했어.’라는 글과 함께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의 사진을 보내왔다. 정미는 다시 눈물이 났다.

 

교대 시간이 됐다. 정미는 키위를 쓰다듬으며 점장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반 팔 셔츠 소매를 걷어 아까 땅콩이가 물었던 곳을 봤다. 빨간 자국은 있었지만 다행히 상처가 나진 않은 듯했다. 오늘은 정미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또 앞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예전에 자신이 믿는 것, 자신이 잊고 싶지 않은 것을 몸에 문신으로 새긴다는 어떤 배우의 인터뷰가 생각이 났다. 오늘은 조금 슬플지 몰라도 앞으로 분명히 행복한 날도 올 것이다. 정미는 오늘까지의 자신, 지금의 자신을 잊지 않도록 무언가를 몸에 새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노력해왔고, 고양이를 구했고, 윤화와 사이가 좋지만은 않은 지금의 자신. 오늘의 자신을 몸에 새기고 가끔씩, 아주 가끔씩만 돌아보도록. 그것이 윤화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하고 난 후에 둘이 다시 기분 좋게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오늘이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14

 

"승자는 슈팅 스타 강정미!"

 

링아나운서의 발표와 함께 선영은 승자인 정미의 팔을 들어 올렸다. 관중들의 환호 속에 정미는 무대 뒤로 돌아왔지만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경순도 어느새 무대 뒤로 돌아와 있었다.

 

"정미야, 아까는 미안했어.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아니예요, 경순 언니. 제가 실수한 건데요. 저야말로 감사드려요. 언니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경기는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아직 심판복을 갈아입지 않은 선영도 다가왔다.

 

"첫 경기부터 불을 질렀구만. 좋은 경기였어. 아찔한 순간도 있었는데, 그게 관중들을 더 자극한 것 같기도 하고. 수고했어."

 

선영과 경순은 나머지 경기를 지켜보러 갔다. 혼자가 된 정미는 조금 전의 경기를 떠올렸다. 경순, 선영과 함께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듯한 연대감, 관중들의 환호에 저릿저릿 떨려오는 몸, 녹초가 됐지만 뿌듯한 성취감. 모두 새로운 느낌이었다. 정미는 거울 앞에 섰다.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어있었다. 가슴 위에 있는 두 개의 커다란 노란 별. 그리고 어깨에 있는 동전만 한 노란 별. 정미가 삼 년 전에 새긴 문신이었다. 의미 있는 무언가를 새기고 싶었는데 결국 선택한 것은 뻔한 별 모양이었다. 오늘은 정미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생일에 데뷔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문신을 새겼을 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얼마나 변했을까. 바로 어제의 자신과도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프로레슬링을 더 해보고 싶었다. 내일이면 온몸이 쑤시겠지. 하지만 기분 나쁜 아픔은 아닐 것이다. 이 설렘, 이 기분 좋음이 있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망설이던 문제들도 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나는 것은 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택한 새로운 길을 윤화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왔던 말을 전할 것이다. 윤화를 좋아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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