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금연

2003.09.09 12:1909.09



속이 쓰라렸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집안은 조용했다. 선영이는 나간 모양이었다. 일어나려는데 현기증이 났다.
몸이 예전같지 않다니까.
베개 옆에 핸드폰이 있었다.
누구랑 통화를 한 거지?
머리가 아팠다.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해댔을까? 핸드폰을 확인하니 문자가 와 있었다.
- 회사다미치게따밥도못묵고와따속은괜찮음?
불쌍한 것. 오늘은 정말 출근하기 싫었겠다. 쓴웃음을 짓고 시간을 확인하니 12시 반이었다. 어젠 둘 다 뭐에 씌웠던 거야.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퍼마셨담.
냉장고를 열고 냉수를 마셨다. 차가운 물이 들어가자 속이 더 허해졌다. 뭔가 먹어야할 것 같았다. 안움직이는 손을 놀려서 북어국을 끓였다. 북어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국이 끓기를 기다리며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았다. 없었다. 가방을 뒤졌다. 없었다. 화장실 문을 열었다. 세면대 위에 물에 젖어 갈색으로 변해버린 담배가 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이거라도 말려 피워야 하나?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수퍼에 가는 게 귀찮으면 저거라도 피우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자 버릴 수가 없었다. 쓰레기통에 넣었던 걸 꺼내 피우는 건 더 암담할 것 같았다. 아예 부러뜨려 버릴까? 그랬다가 후회하면 어쩌지? 결국 담배는 놔둔 채 가그린으로 입만 대충 헹구고 나와보니 국이 끓고 있었다. 밥을 약간 말아 훌훌 먹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 밥을 먹고 나자 의례히 그렇듯 담배 생각이 났다. 하지만 밖에 나가는 건 끔찍하리만큼이나 귀찮았다.
다시 방에 들어와 벌렁 누웠다. 멍청하게도 어제 나가기 전 재떨이를 비웠었다. 장초라도 있었으면…. 세면기 위에 있는 담배가 생각났지만 좀 더 버텨보기로 했다.

컴퓨터를 키고 즐겨 가는 사이트들을 죽 훑었다. 몸에서 니코틴을 달라고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얼굴에 난 뽀드락지를 손가락을 꾹꾹 찔러대는 기분처럼. 담배를 피우고 싶지만 피우지 않는 것.

작년부터 담배를 끊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학교 때문에 동생과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하면서 부모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된 이후 부쩍 담배가 늘었다. 예전엔 집에선 못 피우니까 자연스레 집에서는 포기하고 있었는데 제약이 없어지면서 담배를 참기도 더 어려워졌다. 처음엔 내가 담배를 피웠는데 이제는 담배가 날 피우고 있었다. 새벽 2시에 담배가 떨어져 왕복 30분이나 걸리는 편의점에 갔다온 적이 있었다. 그 시간에 그 먼 곳에 있는 편의점에 담배하나 사러 모자 푹 눌러쓰고 나갔다 오면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한숨쉰 적도 많았다.

이 참에 끊어버릴까? 그런데 끊을 수 있으려나?
끊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결심을 못 한 건 두 번, 세 번 끊겠다고 선언하게 될까봐였다.

다시 담배에 대한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여전히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즐거웠다.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간디가 부인과의 성생활을 그만두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뭐라고 했더라? 20년이 지난 후에도 매일 칼날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고 했어. 그러나 그러한 자기억제 속에서 위안과 환희를 느꼈다고 했었지.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생각했다. 언젠가 사람들이 왜 담배를 끊었냐고 물어보면 뽀드락지 비유를 꼭 써서 이야기해야지. 그럼 사람들이 그런 특이한 이유가 다 있냐고 웃을 거야. 하지만 끊었다고는 말하지 말아야지. 끊을까 생각중이에요. 그렇게만 말해야지. 20년 동안이나요? 상대는 그렇게 물을 거야. 그럼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해야지. 네, 20년 동안요. 그럼 사람들이 너무 신기해할 거야.
그런데 누가?
난 잠깐 생각했다. 누구면 어때.

선영이에겐 말하지 말아야겠다. 담배를 끊겠다고 말하면 선영이는 잘 생각했다며 10분은 떠들어댈 것이다. 선영이가 내가 담배를 안피우는 걸 언제 알게 될까? 적어도 일주일은 있어야 할 걸. 어쩌면 한 달은 있어야 할지도 몰라. 늦게 알았으면 좋겠는데. 언니 요즘 담배 안펴? 라고 물어보면 끊었어, 라고 말해야지. 아니다, 응, 그냥 안펴. 가 더 낫겠다. 언제부터 안피웠는데? 라고 물어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말투로 한 달? 두 달? 잘 모르겠네. 라고 말해야지. 선영이가 눈이 똥그래져 꼬치꼬치 캐물으면 귀찮다는 듯이 몸을 돌려 버려야지.
아, 그런데 설마 담배끊고 나서 살찌진 않겠지? 저녁에 먹는 것만 좀 조절하면 될 거야. 밤참을 안먹으면 괜찮겠지. 조심해야지, 배가 나오는 건 딱 질색이야. 어쩌면 피부도 좋아질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식탁 위에 선영이가 빌려놓은 만화책이 있었다. 만화책을 보다가 갔던 사이트를 또 가고 빈둥거리는 동안 저녁이 되었다. 담배 생각이 자주 났지만 전처럼 담배가 없어서 신경질이 나지는 않았다. 담배가 없으면 사러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곤 했는데 몸이 힘들면서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저녁은 일부러 조금만 먹었다. 담배를 끊은 후 살이 찌는 건 입이 심심해 상대적으로 군것질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선영이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왔다.
"언니 아직 안잤네."
선영이는 발갛게 물든 얼굴로 신발을 벗었다. 그 바람에 몸이 기울어져 어깨에 맨 가방과 비닐봉지가 위태롭게 바닥에 닿았다. 난 가방과 봉지를 받았다. 봉지에는 라면과 참치가 들어 있었다.
"응, 한 잔 했냐."
"어제 언니만큼은 아니야. 언니 어제 장난 아니었던 거 알지? 용케 엄마가 전화했을 땐 태연하게 받더라."
"어제 '엄마'가 전화했었어?"
"언니 들어올 때. 언니 멀쩡하게 전화받더니 방에 들어가서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로 바로 자더라."
그랬군. 다행이다, 실수하진 않았구나.
"그럼 쉬어라."
"아, 언니, 잠깐."
선영이는 핸드백을 한참 뒤적뒤적하더니 말보로를 내밀었다.
"오늘 같이 마신 친구건데 친구가 집에 담배 가져가면 안된다고 나 주더라구. 그래서 언니 생각나서 가져왔어."
선영이는 내 손에 담배를 쥐어주더니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난 말보로 싫어하는데. 그것도 라이트잖아? 얘가 왜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 언젠 끊으라고 난리더니?
컴퓨터 앞에 앉았다. 더 이상 가볼 사이트도 없었다. 만화책도 다 봤다. 아직 잠은 오지 않았다. 말보로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10분 후 난 말보로에 불을 붙였다. 게시판에 담배 끊겠다는 글 안남기길 잘했군. 폐속 깊이 담배를 빨아들였다. 아주 조금, 씁쓸했다.
아진
댓글 1
  • No Profile
    azderica 03.09.09 13:45 댓글 수정 삭제
    혼자만의 다짐이란 언제나 그렇게 쉽게 무너지고 마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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