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죽저] 1. 非 (04)

2003.11.06 00:2411.06

2.

나는 노멀 양을 뻔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찻잔을 쳐다보면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맞은편의 메이지 양은... 칼장난을 하고 있었다. 휙, 휙, 휙, 부우웅...

[... 칼을 그렇게 휘두르지마.]

약간 잘려나가 식탁위에 떨어져있는 앞머리카락에 큰 연민을 느끼면서 나는 노멀 양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의뢰를 하실 모양인데, 그런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의뢰는 적당하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저는 형과는 달라서 증거 중심주의의 탐험 방식을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제 형은 '사건이란 먼지 하나 없는 방바닥에 똥기저귀를 버려두는 갓난 어린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먼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노멀 양의 의뢰는 도무지 진지하게 생각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좋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노멀 양이 나의 하숙집을 방문할 때에 무슨 짐보따리를 지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떼어버리기를 원하는 애물단지를 하나 데리고 다니는 것도 아닌 듯하고, 마음 속의 무슨 고민이 있다면 그걸 털어두면 되지, 도대체 짐을 뭐 어쩌란 말인가. 지금 내 온 마음으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놀려먹을만큼 나를 그렇게 하찮게 보았단 말입니까!'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진짜로 바이러 씨는 자신의 짐을 몰르르르.]

[제가 그렇게 하찮게 보이는 것입니까!]

...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렇게 정열과 투지가 넘쳐나는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응... 그런데... 몰르르르?

노멀 양과 메이지 양이 나를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 네. 흐음.]

그런 것이다. 메이지 양이 여러 사람과의 대화에 끼이면, 대화의 모습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들리지 않는 말과, 들리는 말. 그리고 가끔 이렇게 남문북답(南問北答)을 하는 바람에 바보가 되기도 한다. 지금이 딱 그렇다.

[가끔 사람은 의도에는 없던 영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죠. 커험. 지금은 영감께서 저를 사로잡은 겁니다. 근데 메이지 양, 짐을 내릴 수 없다는 말을 왜 네가 하지?]

[나는 너가 어릴 때부터 봐온 대로 마인드 리더의 천성을 가지고 있즈르르.]

메이지 양의 대답은 마치 '너 머리가 비었냐? 그런 걸 물어보게'라고 말하는 듯 했다. 메이지 양은 마음을 읽지. 그래서 내가 노멀 양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읽었군.

[아, 소울 씨는 마인드 리더군요. 대륙에서 이제 그 천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하게 발현되는데.]

메이지 양의 정체(?!)를 안 노멀 양은 놀라고 또 신기해했다. 뭐, 그럴만한 존재라고는 하더라. 같이 지내보니까 놀라울 때도 있고.

[저는 아주 간단한 리딩만 할 수 있즈르르. 그다지 썩 질좋은 능력은 아닙느르르.]

메이지 양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수수께끼를 푸는 암살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에, 노멀 양을 바라보면서 그녀를 재촉했다.

[그렇죠. 그렇죠. 그러니까 노멀 양, 당신의 입으로 더 자세한 얘기를 해봐요. 사실 저는 당신에 저를 능력 없다고 깔보는 줄 알았는데, 메이지 양이 노멀 양의 마음을 그렇게 읽었다면, 이제 노멀 양이 당신의 그 진리문답 같은 의뢰 말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셔야겠죠. 그래야 제가 의뢰를 맡을지 아닐지 결정할 것이 아닙니까.]

노멀 양은 자신의 손을 머리로 가져갔다. 검게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담으며 흰 머리끈을 올려매는 노멀 양의 행동은 그녀가 쉽게 말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불러왔다. 나는 천천히 부엌 쪽으로 가서 찬장에서 우유를 꺼내어 들면서 노멀 양에게 이야기를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우유를 컵에 담고 그 컵을 손에 들고는 천천히 내가 앉아있던 자리로 와서는 그것을 식탁 위에 두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홀짝, 마셨다.

홀짝. 홀짝. 호올짝. 훌쩍. 훌쩍.

갑자기 노멀 양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불현듯 터져 나온 노멀 양의 눈물에 나는 깜짝 놀라 메이지 양을 쳐다보았다. 메이지 양은 퉁명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슬며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고 싶었으나, 오늘따라 손수건이 없냐!

메이지 양이 자신의 핏빛어린 부엌치마 속에서 손수건... 으로는 보기 어려운 행주 비스므레한 것을 꺼내어들었다. 노멀 양은 대강 그것으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훌쩍였다.

[저는 짐을 지고 있습니다.]

코맹맹이 소리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니, 짐을 지고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짐인지, 아니면 허상 속에 자리잡은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짐이 실제로 있다면, 저는 그 짐을 당신이 해결하시는 대로 제 어깨 밑으로 내려두어 마침내 자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진짜로 짐을 지고 있는 것인지를 알려주세요. 그리고 진짜로 제가 짐을 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그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게 알려주세요. 그리고..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해주세요.]


혼란, 매혹, 감금, 은닉, 그리고 낮 다운 밤인 꿈, 어둠의 다섯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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