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4.경주, 어머니



집에 돌아오자, 온통 TV며 라디오에서는 올 수능이 사상 유래 없이 쉬운 수능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20점 넘게 성적이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것은 좀 심한 감이 있었다. 작년의 수능이 어땠었는지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소파 탁자 위에 신문 한 장을 곱게 펴 놓고 다시 나가신 모양이었다. 신문에 내가 쓴 답을 적고, 시험 점수를 계산한다. 점수에 소수점 단위까지 붙어 있어서 계산하기가 성가셨다. 이것이 첫 시험이었다면 조금 손도 떨렸을지 모른다. 한 문제가 틀릴 때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이, 입술이 파리해 졌을지도 모른다.

/ 괜찮아, 괜찮아. 겨우 고등학교 입시인걸. /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었다. 떨고 있었나, 나는. 학력고사 때였나? 아니다. 그 때의 나는.

/ 수고했다, 나경아. 힘들었지? /

그 때 내게 손을 내밀었던 것은, 어머니. 나는 돌아서서 내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그냥 잠들었었다. 학력고사의 점수를 내 본다거나 하는 기운도 없어서, 그냥 계속 잠을 잤었다. 집에 돌아온 저녁 무렵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 잠들어서, 그 다음날엔 결국 학교를 결석하고 말았었다.

그 때의 나는 누군가가, 따뜻하게 어깨에 손을 얹어 주기를 바랬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없었다.

뭔가 체증처럼 막혀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다. 히끄므레한 안개속의 풍경을 보는 것처럼 무언가가 보일 때면 언제나 그랬다. 머리속에서 흔들리는 영상이 무엇인가 생각할 때면, 머리속에서는 동시에 또 경고음이 들려오곤 했다. 생각하지 마. 기억하지 마. 고등학교 선발고사때 내 등을 쓸어주던 사람이 누구지? 춥다.

“나경이 들어왔니?”
“응.”

어머니는 거실에 앉아 있는 내 표정을 살피셨다.

“어디 들렀다 왔나보구나. 기다리다가 장 보고 왔다. 고등어가 왜 이리 올랐는지. 고등어 조림을 해볼까 했더니.”
“IMF라잖아.”

슬쩍, 어머니의 질문 하나를 외면하며 나는 말을 돌렸다. 시현을 만나고 왔다는 걸 알면 어머니는 반색할지도 모른다. 시현에게 험한 말을 하고 왔다면, 어머니는 얼굴 가득 근심을 실으실지도.

“집에 메밀국수 있어?”
“건면이라면 있는데…. 추운데 메밀은 왜?”
“…먹고싶어서.”

어머니의 얼굴이 조금 흐려졌다. 메밀을 좋아하신 건 아버지. 메밀을 채운 베개가 아니면 잠을 잘 수 없던 것도 아버지.

“그럼 장국으로 해볼까? 건면이라서.”
“응. 뭐든.”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서고 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본다. 엇가기만 하는 딸, 어머니가 바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도망치듯이 다른 쪽으로 가기만 하는 딸이라도 당신은 오늘 시험의 결과를 궁금해 했을 것이다. 그리고 먼저 말하지 않는 딸을 보고, 혹여 마음 상할까봐 묻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그렇게 조심스러웠다. 언제부터? 어머니는 바깥 선반에서 이것저것을 들고 안으로 들어온다. 조금 짙은 빛을 하고 있는 국수다발과 멸치를 넣어둔 통을 내려놓고 당신은 커다란 무를 큼지막하니 썰고 멸치를 손질한다. 나는 식탁으로 걸음을 옮겨 당신의 그 모습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본다.

“엄만, 참 예뻐.”
“…실없긴.”
“아냐­ 정말 예뻐.”

어머니는 그냥 조금 웃을 뿐이다. 외할머니는 이북 분이셨다. 가족이 함께 피난을 내려오는 길에 남편을 잃고, 할머니는 낯선 땅에서 기차를 타고 아무 역에나 내렸단다. 핏덩이 딸을 키우면서 혼자 어찌 사노 싶어서, 목숨이 모질어서. 허위허위 걸어서 아무 집 앞에나 아이를 내려놓고 달음질쳐 달렸단다. 그렇게 한 길을 돌고 두 길을 돌고 다시 역을 찾는데, 도대체 역이 뵈질 않았더란다. 사람들에게도 물어물어 길을 가는데 가도 가도 막힌 길만 나오더란다. 그 때 퍼뜩 아이 얼굴이 눈에 어렸단다. 내가 어째 그것을 두고 이 땅을 뜨나, 이 일을 어쩌나, 가는 길도 모르는 길이었고 돌아오는 길에도 몇 번을 헤매었으니 그 집을 어찌 찾아 아이를 데려올꼬 막막하게 주저앉아 있다가 걸음 가는 데로 휘적휘적 걸었단다. 가는 길에 순사라도 만나면 자기 죄를 구하고 아이를 찾아오겠다고 하던 참에, 그런데 퍼뜩,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단다. 그 울음소리가 나는 게 바로 지척이었단다. 그래서 외할머니는, 그 집 대문을 다시 찾아 아이를 안았다 한다. 아이는 할머니를 보고는 방긋 웃더란다. 울었던 흔적도 없더란다. 그래 외할머니는 이게 하늘의 뜻이다 여기고 그 땅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게 경주땅. 외가가 있는 곳이었다.

개가한 할머니는 어머니가 자라는 동안에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고 했다. 인물 하나 번듯했지. 눈썹이 숱처럼 짙고 코가 듬직한데다 안광이 형형했니라. 외할머니의 거친 외모를 어머니는 전혀 닮지 않았다. 할머니가 개가한 후에 난 동생들은 죄다 할머니를 닮았는데도, 어머니만 달랐다. 맏딸노릇 다 하고 결혼한 후에도,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 날 그 때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유독 친정이 그리워서 간 날 밤에, 할머니는 어머니 옆에 누워서 그 이야기를 하셨다고 했다. 목숨이 모질지, 목숨이 모질어. 내가 니한테 아무 거리낄 것이 없는데, 그것만은 이래 맺혀 있거든. 사람이 살고 죽는 게 하늘의 뜻인데, 우째 그런 험한 생각을 했을까 몰라. 니 딸한테 잘해라. 내 니가 아들이 없는 기 꼭 내 죄 같다. 그런 다음날 아침에 할머니는 잠든 채로 먼 곳으로 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들은 날 할머니께 뭐라고 했는지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어느날 밤 내 옆에 누워서 그 이야기를 해 줄지도 모른다. 그 전에 나는 그런 것을 물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머니는 저렇게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 날에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언제나 그랬다. 회사일과는 지독하게도 어올리지 않는 어머니는 회사에 나간 이후에도 그렇게 음식을 만들 때만 각별히 아름다워 보였다. 한복을 입으면 어깨선이 고운 어머니. 고전물에서 한복에 행주치마를 늘이고 음식을 만들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다.

“근데 메밀도 장국으로 먹나?”
“글쎄다. 안 먹으면 어떠니.”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멸치다시가 끓어 체에 받쳐놓고, 어머니는 국수를 삶았다. 팔팔 끓는 물에 국수를 넣고 끓어오르면 냉수를 한 사발 위에 부었다. 그래야 면이 속까지 익으면서 겉은 쫀득해 지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섣불리 어머니를 따라 하다가 망쳐버린 적이 있는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좋구나.”

식탁에서 한참 어머니의 메밀국수를 먹는 중에 어머니는 뜬금없이 말했다. 고개를 올려 보니 어머니는, 양 손을 모아 쥔 끝에 아슬아슬하게 젓가락을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뭐가?”
“그냥.”

하고 어머니는 웃었다. 나는 따라 피식 웃었다. 어머니는 어쩌면 내 얼굴에서 이번 시험의 성적을 추측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저 단순히, 내가 어머니의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에 즐거워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굳이 그걸 묻고 싶지 않았다.

“내일 바쁘니?”
“응? 아니.”

마감까지는 굳이 꼽아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경주에 다녀오고 싶은데.”
“응? 다녀와. 그럼.”

어머니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너 시간이 되면 같이 가자고. 할머니도 보고 싶고….”

그것은 조금은 놀라운 우연이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의 어머니, 할머니를 떠올린 날에 어머니가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다니. 외할머니는 화장을 치렀다. 혼이라도 고향 땅을 밟겠다는 할머니의 고집을 이종 외삼촌들은 꺾을 수 없었다 한다.

“토함산에?”
“그래.”

해가 뜨면 가장 먼저 빛이 닿는 것이 토함산이라던가. 생전에 고인이 가장 아끼던 장소를 찾는 것이 고인을 만나는 길이라고 어머니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토함산을 좋아한 것이 할머니 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응”

내 대답에 어머니는 환하게 웃었다. 입안에 남은 멸치 다시의 향이 구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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