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R & J-6

2004.10.15 00:2210.15

가게는 술렁였다.
무리도 아니지, 사제 복장을 한 여자가 들어온 것이다.
새하얀 옷을 입고 인파를 헤치며 사뿐히 걷는 모습은
길을 잘못 들어 날아온 새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주위는 조금도 관심두지 않은 채
자켄한테 걸어왔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젊은 여성임이 분명했지만 딱 꼬집어 나이 대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소녀 같으면서 돌연 성인여성의 모습으로
바뀌는, 묘한 느낌을 주는 인상이라고 자켄은 생각했다.
그녀는 기품 있는 태도로 인사를 건네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이 근방의 토지를 사려면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는 벤틀러 씨를 떠올렸다가 금세 지워버렸다.
어르신께 맡기기엔 좀 그렇지.
이런 일에 제격인 사람은......번쩍 불이 들어오면서 존슨의 얼굴이
환하게 떠올랐다. 마당발 존슨, 홀아비 존슨.
자켄이 그려준 약도를 들고 자세한 위치를 듣고 난 뒤,
그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공손한 인사를 남기고 가게를 나섰다.  

그녀가 곧장 존슨을 찾아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존슨이 토지를 구입하려는 목적을 묻자 자신들은 자선사업의
일환으로 약 20명 정도의 아이들을 맡아 키우고 있는데,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신선하고 맑은 공기와 자연을
맛보게 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냘프면서도 맑고,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각박한 세상살이와 버려진 아이들의 딱한 처지를  
조목조목 열띤 얼굴로 토로하는 이 이방인에게 존슨은 감복하고 말았다.
그는 악수를 청하고 반드시 좋은 가격에 알맞은 땅을 구해주겠다 호언했다.
그 말에 살포시 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성녀의 현신 같다고,
존슨은 생각했다. 이름을 묻는 질문에 그녀는 자신을 에우로페라고
밝히며 루데아의 사제라 덧붙였다.

에우로페를 위해 존슨은 사방팔방으로 토지매물을 보러 다니고
땅 주인들을 쫒아 다녔다.
그 결과 하룸 시내에서 도보로 30분쯤 걸리는, 룬덴바른 동쪽 기슭의
평지를 얻는데 성공했다.
그는 즉각 에우로페한테 연락을 했고, 며칠 후 에우로페가
목수와 인부들을 데리고 하룸으로 돌아왔다.
토지를 본 그녀는 매우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 존슨을 뿌듯하게 했고,
그 날 오후 주인과 만나 매매계약을 맺었다.
약 다섯 달에 걸쳐 목수들이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서, 에우로페는
간간히 작업의 진척을 확인하러 마을에 들리곤 했다.
그때마다 존슨은 유쾌한 기분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루데아가 어떤 신인지 그가 궁금해 하자 에우로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눈웃음과 함께 자애와 은총의 여신이라 설명했다.
정교의 성서 창세기 구절에 나오는 여신 루데아는 자신의 아이인
인간들을 보살피고 아끼는 자애로운 어머니이며,
그 이상을 받잡아 자신도 한평생을 봉사와 헌신에
바치는 것이 염원이라고.  
이때 까지만도 존슨은, 그녀의 미소 그 한 까풀 아래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 똬리 틀고 있는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 좋기로 이름난 존슨은, 곧 신앙심 깊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이웃이 생긴다는 사실에 들떠있었고, 대개의 경우가 그렇듯
마음이 붕 뜬 상태에선 어떤 징조도, 그 불길함을 알아채는
일 따윈 불가능하다.
후일, 그는 때때로 떠올리게 된다. 그날의 오후를.
순백의 에우로페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그리고 눈뜬장님과 다름없던 자신을.

그것은 여느 날처럼, 잠시 마을에 머물고 있던 에우로페가
존슨과 함께 마을 어귀를 걷고 있을 때 일어났다.
식후의 산책만큼 값어치 있는 것을 찾기란 의외로 어려운 일이랍니다,
에우로페의 말에 존슨이 옳소, 맞장구쳤다.
두 사람이 룬덴바움 강의 다리에 다다르자 여자아이의 새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에우로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그녀는 미간을 찡그렸다.
존슨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그보다 좀 더 큰 소년을 열심히 쫓아다니고 있었다.
대여섯 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는 ‘돌려줘, 돌려줘~’  
울음 섞인 애원을 했고 생김새로 보아 아마도 그 오빠 같은 소년은
노랑 모자를 번쩍 들어 ‘던진다, 던져버린다’하며 동생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두 눈은 왕방울만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고,
바지런히 움직이던 다리는 지치고 있었다.
소년을 야단치고 모자를 되돌려 주려 존슨이 입을 열려는 찰나,
에우로페는 성큼 발걸음을 옮겨 소년의 앞을 가로막았다.
“왜 동생을 괴롭히지? 울고 있잖아. 그만 돌려주렴.”
“이 바보가 어울리지도 않는 걸 자기 거라고 자꾸 우기잖아.”
“어찌됐든 간에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울리는 건
비겁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야. 네 자신을 겁쟁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쟨 툭하면 울기만 해. 별것도 아닌데 만날 울어서
엄마한테 혼난단 말야. 바보, 쪼다.”
“돌려줘, 모자.”
소년은 앞을 가로막은 어른을 짜증난다는 눈으로 흘겨보며
입을 비죽였다. 꼬마아이는 혹시나 오빠가 모자를 돌려줄 거란
기대에 우는 것을 멈추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어른여자의 얼굴은 무표정해서 무섭다.
싸늘한 눈동자는 깜박임 없이 자신을 내려 본다.
문득 기대에 부풀어 올려다보는 동생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결단을 내렸다. 잡고 있던 손을 놓아, 바람에,
노란 모자는 넘실넘실 곡예를 부리다 비틀대며 강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여동생이 빼액, 날카로운 울음을 터뜨렸다.
소년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것 봐, 얜 완전---.”
여기서부터 존슨은 탄식한다.
어째서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단 말인가.
그것은 확실히 기묘한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입술 사이로 하얀 거품이 보글보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소년은 감히 시선을 피하지도, 무릎을 꿇지도 못하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몸 전체가 빳빳하게 굳어졌다.
숨이 막혔지만 겉으로 시늉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눈 아래 근육이 바르르 떨리면서 공포에 질려 확장된 동공,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거품들.
마치 죽어가는 물고기가 내뿜는 기포 같다.
소년은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뺨을 타고 흘러내릴 새도 없이, 안구에서 샘솟는 뜨거운 액체가
바닥으로 낙하한다.
에우로페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냉엄한 표정과 함께 조롱 하듯,
“그만 가보렴, 겁쟁이 꼬마.”
그제야 소년의 무릎이 털썩 아래로 주저앉았고 눈물은 이제
흐느낌으로 변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1분 남짓한 동안 벌어졌다.
에우로페는 그저 소년을 차분한 눈초리로 주시했고
그 속에는 살기도 분노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새까만 흑요석 같은, 형형한 광채를 내뿜는 눈동자는 고요히 표류한다.
“모자, 잃어버리고 말았네.”
이미 눈물자국이 지워진 계집아이는 오빠가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이 신기한지 쳐다보다가 에우로페가 말을 걸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모자......”
노랑 모자는 벌써 강물 저만치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물살에 휩쓸려 수면위로 떴다 가라앉다 하면서.
“넌 울지 말아야 해.”
“......?”
“약한 생물만이 우는 거야. 그리고 더욱 강한 것들을 불러 모으게 되지.  
소리 내어 울면, 누군가 나타나 도와줄 거라 생각했니?
오빠가 마음을 바꿔 상냥해질 줄 알았어?”
어린애가 이해할 리 만무한 이야기를, 그녀는 계속 했다.
엄숙한 얼굴엔 웃음기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속상하고 억울한 일이 생기면, 참거나 울어선 안 돼.
필요한건 위로나 도움이 아니라, 혼자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야.
두 손이 있는 한 넌 주먹을 쥘 수 있고, 두 발이 있는 한
스스로 걸을 수 있어. 알겠니? 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거야.”
아이는 그녀의 손이 강한 힘으로 어깨를 움켜쥐는 바람에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우에엥.
에우로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열기에 가득 찬 표정에서
깨어나 본래의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이를 힘껏 잡고 있던 손을 떼고 부드럽게 말했다.
“앞으로 또, 울고 싶어지는 때가 오면 모자를 생각하렴.
네 예쁜 노랑 모자. 물에 떠내려 가버린 모자를 말이야.
그럼 넌 좀 더 강해질 거야.”  
계집애는 듣는 둥 마는 둥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마자
오빠한테로 내달렸다. 오빠야--.
소년은 이제 히꾹 히꾹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두 남매가 얼싸안고 도망치듯 마을로 사라진 후, 에우로페는
한참을 우뚝 서서 룬덴바른 산 저편을 바라보았다.

해가 산 아래로 숨어들면서 지평선을 붉게 물들였다.
이윽고 존슨을 향해 돌아선 그녀 역시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한동안 존슨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다리 위에 홀로 서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않고 다만 그를 응시하며 가슴이 시릴
정도로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훗날 다시 에우로페를 떠올렸을 때, 그 날 석양아래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흘리게 될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전부 빨아들인 것처럼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앞으로 닥칠 끔찍한 미래의 전조였다.

드디어 사원의 공사가 무사히 마치고, 여신 루데아를 섬기는
'자모회'가 하룸으로 옮겨왔다.
그들은 최고 사제 에우로페를 위시한 네 명의 수도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봉사자들이 열다섯 명 남짓, 그리고 아이들
-부모한테 버림받은 불쌍한 처지의-이 스물 정도.
얘기대로 작은 규모의 공동체였다.
특이한 점은 구성원이 모두 여자들뿐이었는데,
자모회는 남녀의 구분 없이 모든 교우들을 환영하지만,
남성교우들은 자모회의 교리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금세 나가버리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에우로페와 그녀의 하품 사제들은 하룸으로 포교활동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네들은 의학 쪽으로 박식해서 마을 사람들의 질병이나
상처를 치료하여 인기를 끌었다.
솜씨 좋은 의사가 없던 터라 사람들은 몸이 안 좋으면
사원을 찾았고, 자모회는 싫은 기색 없이 그들을 맞이했다.
또, 일주일에 한번, 교리와 복음을 가르치는 강연회를 열었는데
비단 정교뿐 아니라 종교 자체에 무심했던 사람도 기웃거릴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자모회가 하룸에 정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째서 교인이 여자들뿐인지 그 이유가 차츰 드러났다.
우선, 그들의 교리는 상당히 엄격했다.
어머니 루데아가 낳아주신 육체를 항상, 어디서든
정갈하게 지켜야 하며, 신체를 화려하게 꾸미는 어떤
장신구도 금지한다. 보고, 듣고, 먹는 것 모두 좋고 나쁨을 가려
소중한 몸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며,
특히 인간의 언어는 루데아가 주신 신성한 선물임으로
거친 욕설과 상스런 소리를 입에 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한다.
매달 셋째 주 금요일은 루데아께서 당신의 몸 안에 인간을
잉태하시어 마침내 인류의 시초인 라와 카를 낳은 날이므로
이날 하루는 경건한 자세로 여신께 감사를 드리고
미사를 올린 정수만을 마시며 몸을 정화한다.    
온건한 문체로 교리 상에 명시하고 있지만 그들은 마치
과거 유행했던 강경금욕주의 파 형제 회와도 같이
청빈과 금욕, 검소를 강조했다.
다를 게 있다면 형제 회는 검소한 생활을 위해 몸을 씻지 말 것을
권유하나, 자모회는 육체를 청결하게 하는 것이 곧 신에게 닿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라 역설한다는 점 정도였다.

명시하는 사항들은 구구절절 옳은 얘기들이었지만 마을의 남자들은
자모회의 교리를 떨떠름하게 여겼다.
머리로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뜻에 수긍하나 그 밑,
아마도 가슴 언저리께-에서는 행동 하나하나에 시시콜콜
신경을 쓰는 건 계집애 같다는 인식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자모회가 발산하는 매력의 상당부분이 줄어들던 차에
불거진 사건은 마을을 두 패거리의 치열한 격전지로 몰아갔다.
바로 루데아에 관한 논쟁이었다.

강연회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에는 에우로페가 내뿜는
카리스마가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에우로페가 그녀의 맑고 영롱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는 광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고 청중을 바라보는  
칠흑의 두 눈동자는 감히 응대할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또한 가슴을 떨게 만드는 그 미소는 어떠한가!
정녕 이 세상의 범부라고 여기기엔 그녀는 너무나 신비로웠다.
에우로페는 금세 하룸의 마돈나가 되었다.
그녀의 추종자들은 자모회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열성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정점이 바로 에우로페와 가까이서
함께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강연회였다.
루데아가 낯선 이들한테 보다 쉬이 복음을 전달키 위한 취지로
시작한 강연회는, 회를 거듭할수록 청중의 수가 늘어났고 그 형태가
단순히 앉아서 설교를 듣기보단 청중이 참여해 신관과 대화를 나누며
의문을 푸는 모양으로 바뀌어갔다.
나중엔 강연이 끝나도 자리를 뜨지 않은 채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할 정도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경건한 분위기속에 에우로페가 루데아의 은덕을
칭송하는 기도문을 읊는 것으로 강연회는 출발했다.
주제는 ‘성서에 나타나는 태고신과 여신의 일체성’이었는데,
이날의 강연자는 에우로페였기 때문에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청중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은 이제껏 만연해 온 잘못된 성서의 해석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감미로운 에우로페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여 경청했다.
늘 그래왔듯이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삶의 지침을 기대하던
그들에게, 그녀가 하게 될 이야기는 충격적이고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창세기 첫 장에 등장하는 태고 신을 정의하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태초에 우주가 있었고, 우주는 곧 신이었다.
그런데 신은 자신을 돌아보았고 자신의 안에 무한한
어둠만이 있음을 발견했다.
어둠은 혼돈이며 불완전한 자신이라 깨달은 신은
어둠을 밝힐 것을 창조할 결심을 하여 세상을 만들었다.
세상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럼에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불완전한 우주-다름 아닌 신-를 보완하는 등불이었다.
비로소 바라던 바를 달성한 신은 만족하여 텅 빈 세상에
충만한 생명을 불어넣었고 신의 숨결로 만물이 탄생하였다.
신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역동적이며 변화무쌍한 세상을
조화롭게 할 존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자신을 본떠 인간의 형상을 만든 신은, 그러나 앞서 창조한
만물과는 다른-즉 신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릴-인간을 탄생키 위한
특별한 장소를 구했다.
그 바람에 응하여 여신은 인류의 시초인 라와 카를
자신의 몸속에 잉태하니, 여신의 자궁 안, 전 우주 중
가장 완전한 장소인 그곳에서 라와 카는 은총을 받으며
자라났으며 천지창조를 한지 십일 하고도 아흐레 만에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라와 카는 여신의 자궁에 머문 엿새 동안 장성하여
완전무결한 모습으로 대지에 발을 내딛었다......
에우로페는 간략하게 창세기 인류탄생까지를 낭독한 다음
그 부분에 대한 견해를 늘어놓았다.

“과거 신학자들은 태고신과 여신의 관계를 여러 차례
다르게 풀이해왔습니다.
처음, 태고신과 여신은 남매 신으로, 오라비의 요청에
동생인 여신이 인간을 잉태하였다는 해석이 있었고,
다음으론 성서 그대로를 연구하는 학파에서 여신은 문자 그대로
여신일 뿐, 태고 신과 혈연이 아닌 별개의 독립적인 존재라는
이론이 제기되었으며, 오랜 세월이 흘러 작금에 이르러서는
여신이 태고신의 아내이며 불완전한 우주를 깨달은 순간
태고 신에게서 파생된 분신이라는, 즉 여신은 태고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존재라는 해석이 정설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 아리안 정교의 고질인
남성 우월과 타 생명들을 억누르고 지배하려는 야만적 성질이
기인한 것으로써 정작 주목해야 할 성서 본연의 모습에서
눈을 돌리고 귀를 막고 있는 정교의 사제들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여느 때와 달리 강경한 어조로 정교를 매섭게 질타하는
그녀의 태도에 더러는 졸고, 옆 사람과 수다를 떨면서 강연을 듣던
사람들 중 일부가 술렁였다.

비록 변변한 교회도, 사제도 없는 마을의 주민들이지만
국교인 정교를 어느 정도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에우로페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해도
그 분위기로 미루어 보건대 정교를 좋게 평가하는 게
아니라는 낌새가 강연장을 감돌았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갑시다. 태고 신을 묘사하는 구절을
눈 여겨 보세요. 그리고 여신도. 무엇을 발견할 수 있나요?!
태고신이 천지를 창조하고 인류가 탄생하는 창세기 전체에
걸쳐 신은 그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신일뿐 여자인지, 남자인지 젊은이인지 노인인지도,
무엇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지 않지요.
그런데, 다음 구절을 보세요.
온 우주에서 가장 완전한 장소인 자궁-신이 요청해 루데아께서
나약한 인간을 다 자랄 때까지 머물도록 한 그곳이죠.
신은 세상을 창조한 기쁨으로 만물을 만드셨고
그것들을 다스릴, 신의 대리를 관장할 인간을 만드셨어요.
이 특별하고 중요한 존재를 위한 장소를 물색하던 신께서
마침내 결정한 곳이 바로 여신의 자궁이라는 문장이
무엇을 뜻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영광스럽게도, 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성별이 나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분께선 의심할 여지없이
자궁을 갖고 있는 여자이신 것이지요.
증거는 성서 곳곳에 명시되어 있어요.
자궁은 온 우주에서 가장 완전한 곳-우주와 신께선 일체하다는
구절을 기억하겠죠?
신은 이미 세상과 어둠을 모두 가져 완벽해진 모습을 갖추셨는데,
완전한 신의 완전한 부분이 자궁이라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또, 천지창조 열아흐레 만에 인간이 탄생하였다-
이 부분은 어떤가요?
루데아의 자궁에서 엿새를 보냈으니 신께서 라와 카를
만드시기까지 열하고 나흘이 걸렸습니다.
열나흘, 이 숫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아시는 분 있나요?
아직 모르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하지만, 여성의 인체는
신비로운 것이라 일정한 시간을 돌아 다시 처음으로 되풀이
하는 순환을 하지요. 여러 주기들 가운데, 열 나흐레 동안의
기간을 갖는 것이 있어요.
바로 배란주기입니다!
배란이란 아이를 낳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순서로
아이의 절반을 이루는 생명의 씨앗을
임신이 가능한 장소로 옮기는 과정이에요.
이런, 인간이 태어나는데 있어 절대 필요한 현상과
창세기 인류가 나타나는 기간이 같다는 사실을 상기하세요.
비단 성서의 여러 구절을 낱낱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신께서 여성이라는 진실을 쉬이 깨달을 수가 있어요.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의 어머니들을 생각합시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합니다.
당신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기며 태어난 아이를,
조건 없는 사랑으로 보듬어 살피죠.
여러분, 우리는 신의 사랑스런 자식입니다.
더없이 소중하고 아끼는 자식을,
나약한 아이를 보살피기에 신께서 염두 해두신 곳이 있다면
그곳은 마땅히 신 당신의 몸 안일 따름 밖에요!
이처럼 성서를 올바르게 읽어야만 우리는 진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답니다.
그리고 신께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됩니다.
그분은 자식을 내치는 매정한 분이 아니에요.
자신을 곡해하는 어리석은 자식들을, 항상 자애롭게
굽어 살피고 계시죠.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그분의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강연장은 한바탕 폭우가 쏟아지고 난 뒤의 정적처럼 고요했다.
마치 에우로페의 말에 취한 듯 홀린 듯 미동도 않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두 눈에 생기를 띠고 자신의 말에 도취된
청중들을 내려다보았다.
유리구슬처럼 청량한 목소리는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위엄찼다.

“여신 루데아는 단지 태고신의 수하가 아닌 창조주이십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들어온 거짓투성인 더러운 말들을
털어내어야만 합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서도 특히 여성은 창조주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빼어 닮은 존재이며, 마땅히 가치를 드높여
위상을 떨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을 갖고 태어났어요.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배우자를 뒷바라지 하는
인생으로 만족해서는, 그 육체를 내려주신 루데아께
불효하는 셈이 됩니다.
부디 남성들은 헤아려주셔야 해요.
자신들이 여성을 지배하고, 옭죄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그것은 신을 욕보이는 부정한----.”

anj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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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7. 첫번째 목소리 먼여행 2004.09.29 0
59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6. 사람들 사이에는 강이 흐른다.2 먼여행 2004.09.28 0
58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5. 비틀림 먼여행 2004.09.27 0
57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4. 혜정, 병원 (2) 먼여행 2004.09.26 0
56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4. 혜정, 병원 (1) 먼여행 2004.09.25 0
55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3. 시현 먼여행 2004.09.24 0
54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 남은 자들1 먼여행 2004.09.23 0
53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 여신의 죽음1 먼여행 2004.09.22 0
52 중편 드래곤의 연인 [4]2 비겁한콩 2004.09.1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