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3.Cut



내가 기억하는 학력고사일은, 몹시도 추웠다. 바로 아래 학년부터 교과서가 바뀌고 교육과정도 전혀 달라지기 때문에- 라는 이유를 붙여서 고등학교 3학년 내 선생님들은 그렇게 우리들을 몰아갔다. 그 아래 학년들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라는 이유로 똑같이 선생님들에게 시달렸다. 아마도 그 아래의 아이들은, 최초의 수능이라는 것, 그 이전의 어떤 자료도 없다는 것을 이유로 대었을 것이다. 언제나 입시란 그런 것이다.

초록색 롱코트는 약간 푸른빛을 띈다.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나버린 박스형의 스타일이나 커다란 모자 어느 것도 쉽게 거리에서 찾을 수 있는 형식은 아니다. 소매통이 넓은 그 코트 안에 가디건을 입고, 머플러까지 칭칭 감고 나서야 어머니는 안심한 표정으로 웃었다.

“오랜만에 도시락을 싸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옛날로 돌아간 것 같고.”
“다녀올게.”

언제나 익숙한 육센티 굽 운동화를 신다 문득 어머니의 구두가 눈에 띄었다. 몇 년째 똑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똑같은 구두. 원래는 좁았을 볼이 넓어진, 색이 바랜 구두. 첫 번째 내 힘으로 손에 쥔 돈으로 산 구두다.

“차 태워준다니까.”

어머니는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대답대신 몸을 돌렸다.
어슴프레한 푸른빛이 거리에 맺혀 있는 시간에 거리로 나서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이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건 자주 있는 일이지만. 버스 정류장에 상기된 얼굴로 서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수험생이었다. 손에 작은 수첩을 들고 열심히 무언가를 되뇌는 얼굴이나, 걱정스러운 얼굴의 부모님과 나란히 서 있는 굳은 얼굴의 사람들은, 매년 똑같은 모습으로 이 정류장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 얼굴의 주인들이야 계속해서 달랐겠지만.

버스 몇 대를 보내고 기다리는 버스가 정류장에 닿았다. 우루루 탄 버스 안에도 몇 명의 입시생들이 눈에 띄었다. 긴장 같은 것, 하고 있지 않다. 특별히 무언가를 바래서 지금 새로 시험을 치는 것, 아니니까. 그래서 어젯밤에 사들고 온 모의고사 시험지도, 겨우 수리탐구 2를 조금 풀어보다 그만두었을 뿐이니까. 나중에 변명거리로 삼으려 그랬다고 할 지 몰라도- 아니 나는, 결과를 두려워 할 만큼의 노력도 하지 않았으니 기대도 긴장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대학입시, 지금은 모교가 된 그 대학을 오르는 언덕길이 왜 그렇게 추웠는지. 수험표를 보여야만 통과할 수 있는 까만 철창 대문을 지나 걸어 올라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었다. 사람들의 머리가, 새까만 머리가 그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다. 까만 철문을 경계로 그 너머의 사람들은, 그날 왜 그렇게 가슴이 저리게 했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여자 중학교의 작은 건물에도 역시 그 때처럼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때에 내가 그 풍경 안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 역시 내게는 이 풍경이 낯설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학교 교실의 풍경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느 학교의 어떤 교실들이라도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은 거지. 몸에 맞지 않는 조금 작은 걸상, 낮은 책상, 교실 앞에 걸린 어색한 태극기와 교훈 급훈이 적혀 있을 액자는 뒤집어 걸려 있었다. 환경포스터니 학습자료니 하는 것들이 붙어 있을 뒷벽도 하얀 모조지로 덮여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정적. 몇 명의 학생들이 이미 앉아 있지만 호흡까지 숨을 죽여 거의 들리지 않는다. 앉는 동작으로 삐걱대는 의자 소리에 그 중 한 명이 힐긋, 나를 돌아보았다. 초록색의 교복치마 아래에 트레이닝 바지를 받쳐 입은 아이의 얼굴은 파리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교실을 채우고, 몇 명의 학부모들이 얼굴을 비췄다가 나가는 것이 반복되는 동안 교실의 빈 자리는 하나 둘씩 줄었다. 그런 움직임을 나는 영화를 보듯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소리를 줄여 놓은 TV 프로그램의 장면처럼 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가는 정적의 움직임들이 멎고 신경을 긁는 스피커 소리가 들렸다. 시험 시작이다.



시험이 마치고 정적의 교실은 완전히 생기를 되찾았다. 얼굴의 표정들은 대부분 밝았다. 나쁘지 않은 시험이었다. 교과서를 전혀 알지 못하는 나에게 언어영역에 교과서 지문이 얼마나 나왔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교과서까지 바뀌어버린 사회탐구, 과학탐구 문제도 내가 뭐라고 할 수 없었지만, 똑똑하게 발음을 끊어주는 듣기 평가, 주변의 차소음까지 완벽하게 차단된 교실에서 치러진 외국어 영역만큼은 단언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나쁘지는 않았어- 라고.

지급받은 싸인펜과 볼펜, 수험표를 가방 안에 쓸어놓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그 운동장에 빼곡하니 검은 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교문 근처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얼굴들이 건물쪽의 얼굴을 발견하고 반갑게 뛰어온다. 잘쳤어? 잘쳤니? 수고했어. 아빠도 왔네? 하나같이 환한 얼굴이다. 그래, 시험문제가 예년보다 쉽게 나온 모양이로구나. 결국은 전국의 퍼센트로 환산되는 것이 같다고 해도, 이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럽지. 적어도 평소보다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것이 절대적으로 어떤 등위에 속하게 되고, 어느 대학에 갈 수 있고를 알게 되는 것은 한 달 후의 일. 그 때까지 기쁜 마음을 지닐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감사하자. …결국 이 모든 것이 나와는 무관한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이나경!”

절대 아는 사람이 없어야 할 그 건너편에서 한 얼굴이 나를 보고 손을 들었다. 짙은 쥐색의 더플코트. 짧게 자른 머리가 조금 낯설기는 하지만, 류시현, 바로 그 얼굴이다.

june400.

시현의 얼굴 대신에, 시야를 가리듯이 그 철자가 내 눈앞에 보인다. 신이가 좋아했고, 모든 것을 기록해두고 싶어했고, 작은 습관 하나까지도 알고 싶어했던 사람. 내게 백합다발을 안기고 안 어울리는 로맨틱한 대사를 늘어놓은 류시현이, 내가 아니라 신이에게 그렇게 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이 그 자리에는 알파벳 네 자와 숫자 셋이 대신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현실처럼 또렷한 환영으로.

“왜 그리 멍하게 섰어? 시험 친다고 말도 안하고. 엿도 못 줬잖아.”

나는 못박힌 듯이 그 자리에 서 있고, 시현은 내게로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가 내 가방을 뺏듯이 받아들었다. 한결같은 웃음. 완과의 일이라든가 그간의 침묵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어제까지도 계속 만나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단다. 왜 나는 안돼? /

이건 …아니다. 이렇게 자연스러워서는 안 되는 거다. 그가 나를 보면서 이렇게 웃어선 안되는 거다. 그가 내 가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게 해서도 안 되는 거다. 나는 시현에게서 도로 내 가방을 받았다. 시현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오랜만에 보자마자 이러기냐?”
“이러지 마.”

나와 그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보고 말했다.

“도대체 왜 이래? 언제까지 이럴 거야?”

시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도망쳐선 안 된다. 내가 아무리 뿌리쳐도 이 사람이 이렇게 다가서려고 한다면, 뿌리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밀어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확실히 말할까, 시현씨? 나는 시현씨가 싫어. 시현씨가 내 곁에 있는 것도 싫고, 얼굴을 보는 것도, 목소리를 듣는 것도 싫어. 소름끼쳐.”

처음부터 단호하게 말했어야 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시일이 지나도 마찬가지라고. 그렇게 끝냈다면, 그랬더라면,

“…뭐?”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신이는… 죽지 않았다.





나는 뛰듯이 시현을 뿌리치고 교문쪽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의 인파에 부딪히는 동안에 몇 명의 사람들이 뭐야, 왜이래, 하는 말들이 들렸다. 이곳이 시험장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않았다면, 쫓아온 시현이 다시 내 어깨를 잡는 일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휙, 몸을 돌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유는 알아야 할 것 아냐!”

사람들이 많았다. 시험장을 빠져나오던 수험생들의 얼굴이 놀라 나를 향했다. 수험생들의 옆에 선 부모님들이 요즘 애들이란, 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좋지 않았다. 이런 장면에서는.

시험장에서 조금 걸어 내려오면 곧바로 광안리 바닷가였다.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바다가 보였었다. 그러고 보면 그다지 멀지 않은 길. 걸어서 모교라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 내가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이 길은 더 친숙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 앞을 걸어가고 있는 저 뒷모습이 더욱 낯설어 보였을까.

시현이 올라간 2층 카페에서는 바다가 보였다. 학교에서 보는 먼 바닷가가 아니다. 손을 뻗으면 금새 빠져 버릴 것만 같은 흐느끼는 밤바다에 몇몇의 아이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시험을 끝낸 해방감에 어쩌면 부모님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자신들의 그 몇 년을 보상받고 싶어서 저러고 있을 지도 모를 일. 시현은 바닷가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 때문에 실내는 그다지 번잡스럽지 않았다. 수능을 끝낸 오늘 같은 날에 창가를 비울 수 있는 곳은 찾기 쉽지 않지만, 이런 곳을 조금의 주저함 없이 올 수 있는 시현은. 그래… 그런 사람이다. 누구든 미워할 수 없을 사람. 하지만 나는 절대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이야기라도 좀 해 봐. 도대체 왜 자꾸 그러는 건지.”

시현의 목소리는 한참 가라앉았다.

“내가 진심이 아닌 걸로 보이니? 어떻게 해야 날 받아주겠어?”

현실적이지 않은. 연인이라고 해도 절대로 저렇게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을 말. 시현의 말은 항상 그랬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단 둘이 있을 때에는, 내게 전화를 할 때에는, 언제나 시현의 말은 비현실적이다. 신이가 즐겨 보았던 만화책, 신이가 좋아했던 SF물, 신이가 좋아했던 Fantasy, 그런 글에서나 나올지도 모르는, 그러나 나는 좋아하지 않는 저런 낯설은 말들. …신이가 들었어야 했을 말들.

“…진심이라고?”

조금, 나는 웃었을지도 모른다. 몇 달 전의 그 말처럼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럼… 신이는?”

시현의 얼굴이 순간 조금 굳었다.

“나한테 이러는 게 진심이면… 신이한테는?”

쿡쿡. 웃음이 나왔다. 쉽게 표정이 생기지 않는 내 얼굴에 낯선 표정이 생겨난다. 속 싶은 곳에서 치밀 듯이 무언가가 올라오고, 그것은 웃음으로 변해버린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끝없이 터져나왔다.

“…무슨 소리야?”

표정과는 딴판으로, 시현이 말했다. 이미 표정은, 어떻게 내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거냐고 묻고 있었지만.

“설마, 신이는 시현씨를 사랑했는데 시현씨는 아니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나답지 않은- 아니, 현실적이지 않은. 만화대사같은 말이 나오는 것은 시현 때문이다. 시현의 분위기에 휩쓸렸기 때문이다.

“신이가 그렇게 된 것도, 신이가 아이를 가진 것도, 시현씨는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아. 그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하나야. 내가 시현씨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 시현씨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듣기 싫다는 거야. 이젠.”

“나경아!”
“…집에 가야겠어. 어머니가 기다리셔.”

억양은 높아지지 않았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내 감정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시현의 손이 잡아 끌었다.

“니가 무슨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여신이와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못 믿겠니? 내가 그렇게 너한테 못 믿을 사람이야? 내가 사랑하는 건….”

“…포기해. 나는 아니니까.”

뿌리치는 손을 시현은 다시 잡지 않았다. …잔인하다, 너.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말은 어딘가 만화에서 본 듯 한 말이었다. 언젠가 리젠에서 술에 취해 음성 메시지를 남겼을 때, 시현은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 이런 걸 잔인하다고 하는 게 맞을 거다. 내게만큼은 그렇게 잘 했던 사람에게, 숙취로 고생하는 때에도 내 음성이 힘이 없는 걸 걱정하던 사람에게 이렇게 매몰차게 굴 수 있다는 것은. 하지만 어떻게? 누가 알려줄 수 있다면.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신이에 대한 이 부채감負債感을 씻을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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