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1.새로운 아이, 효정



초벌원고가 넘어온 이후로 나는 조금 바빠졌다. 초벌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내 일은 더 쉬워졌어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못했다. 단어의 문맥상 의미라는 것은 쉽게 익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글을 많이 접해보지 않고 사전만을 가지고 초벌번역을 시작한 사람들의 원고는 되려 나를 더 지치게 했다. …나 역시, 초벌원고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었지만.

수능 원서 접수가 시작되자 어머니는 나보다 더 들뜨셨다. 몇 년만에 찾아간 모교는 공립학교라,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스물 일곱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새로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나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교장실과 서무실, 교무실을 몇 번 오가면서 내가 손에 쥐고 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접수증까지 수능 전날 예비소집시에 주겠다고 했다. 정문을 빠져나와 한길가로 내려서자 이내, 내가 정말 시험을 치는 건지도 와닿지 않게 되어 버렸다.

문예창작과- 재수생의 원서를 담당하는 여교사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했다. 생활기록부의 성적을 보고 나서는 아예 드러내놓고 관심을 보이더니, 문예창작과를 지망한다는 말에 전국에 있는 4년제 문예창작과의 리스트를 다 찾아내려는 사람마냥 들떴다. 고려대 예술대학에 있네요, 중앙대에도 있구요. 역사는 중앙대가 오래 되었고 거기 출신들이 많기도 하지만,  세상 일이 간판이라는 게 있으니까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죠. 고대 파워라는 게 있지 않겠어요? 4년제를 꼭 가려는 건 아니예요. 한참 늘어놓던 그녀의 말을 잘라내듯이 내가 말했다. 놀란 눈으로 그녀는 나를 보았고, 아, 직장다녀요? 하고 되물었다. 네. 짧은 대답에 그녀는 어쩌나, 문창은 야간학과가 없을텐데하고 제 일처럼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돌아서는 내게 그럼 공부 열심히 해요, 응원할테니까. 라고 덧붙이는 데에는 그저 웃어 보일밖에 도리가 없었다.

세상은 참 빨리도 변해 가는 것이다. 7년 전에 아버지의 모교인 고려대에 문예창작과가 있었다면, 지금 내 길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아니지 않나? 머리가 아프다. 나는 금방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린다. 바다넷에 들어간 날 이후로 연락을 끊어버린 혜정과, 역시 약속이나 한 듯이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 두 사람에 관해서. 갑작스럽게 전화가 울리고, 완이 "배고파"라고 말할 것만 같아 나는 24시간 전화를 켜 놓았다. 어쩌면 새벽 세 시, 완이 술에 취한 음성으로 "다 죽여버릴거야."라고 말할 것만 같아서.

완의 전화 대신 나를 찾은 건 혜정의 어머님이셨다. 내가 어디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하며 어머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 2, 문과. 고3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애가 공부욕심도 있고 한데 영어가 딸린다고, 애가 하고 싶어 하니 좀 도와달라고, 하는 어머님께 그건 불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나라는 학생들 말고는 과외를 할 수 없다고, 그런 것을 모르실 분도 아니지 않은가.

전화 온 다음날 혜정의 집으로 갔다. 효정의 얼굴을 보는 건 몇 년 만인데, 효정이는 이제 그 몇 년 전의 언니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나를 맞았다. 혜정은 늦은 시간인데도 집에 없었다. 나는 예전에 혜정의 방이었던, 방음장치가 되어 있는 아늑한 그 방으로 들어갔다. 흰색을 좋아하는 효정답게 책상이며 침대, 책장까지 온통 흰색이었다.

"그래, 수업하기 전에 이야기부터 좀 할까."
이야기를 꺼내는 건 언제나 내 쪽이다. 효정이 자꾸만 그 때의 혜정 같아서, 그런 생각을 밀어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눈앞의 아이에 대해서 알아야만 했다. 몇 년 전 효정의 과외선생이었던 내게 자신은 외교관이 될 거라고 눈을 빛내며 말했던 아이는 지금 외고 중국어과를 다니고 있었다.

"기숙사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나왔어요. 요샌 통학해요."

아이는 짧게 대답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눈빛이 호기심인지, 탐색인지 알 수 없다. 혜정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부담 때문이었을까, 위법이기 때문이었을까.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대뜸 아이가 물었다. 나는 싱긋, 웃어버렸다.

"돼. -열 살 위의 사람이 구세대같이 보이지 않는다면."
"뭐 어때요. 그렇게 안 보이는걸."
"그래? 칭찬으로 듣는다."

아하하, 아이가 웃었다. 무엇을 기대했을까. 이 아이가 몇 년 전의 혜정이처럼 나를 보길 바라기라도 했나 생각하니 아이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학교는 숨이 막혀요."
"그러니?"
"put off와 Turn off를 구별 못하면 바보예요?"

아이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아니, 하고 대답했다.

"난 별로 하고 싶은 것도 없어요. 그냥 대학생만 한 번 되어보면 그걸로 끝이거든요. 근데 영어를 못하면 대학생이 못된대요."

"영어를 잘하는 것보단 조금 어렵겠지."

심각하게 내가 대답하자 아이는 힐긋, 나를 보다가 깔깔 웃었다. 이런 모습이 제 언니와 닮았다고 말을 하려다가 나는 그만둔다. 보통은 성인이 되기 전에 자매간, 형제간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는 것이 경험이었기 때문에.

"저런 것 때문에 영어가 싫어졌어요."

아이는 도와줄래요? 하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마지막 시험에 몇점이었는데?"
"모의고사는 67점인가 받구, 월례고사는 58점 받았어요."

80점 만점의 67점과 100점 만점의 58점. 조금은 비정상적으로 모의고사의 점수가 높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럼 잘 부탁해."

손을 내밀었다. 효정이 내 손을 가볍게 쥐며 웃는다. 오랜만에,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걸까. 아이를 가르친다는 일의 즐거움에 대해서. 즐겁기 때문에 이 일을 해왔었던 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학생의 아르바이트로 그만한 게 어디 있느냐는 얄팍한 생각에 따라서 해온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만두었을 때도, 다시 그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바로 이 일 때문에 나는 완을, 혜정을 만났던 거였지. 영어책을 챙기고 있는 효정은 옛날의 혜정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 효정과 함께 수업하기로 한지 두 번째 날, 수업으로는 첫 번째 날. 나는 효정의 옆에 앉아서 담담히, 언제나 그렇듯이 시작을 연다.

"on이 무슨 뜻인지 아니?"
"위요."
"그럼 over는? above는?"
"…위."
"put on이랑 put over는 뭐가 다를까?"

효정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황한 얼굴이, '지금 뭐하는 거예요'라고 묻는 것 같다. 혜정이도 그랬지.

"turn on은 뭐지?"
"켜다."
"왜 켜다,야?"

효정은 이제 정말로 알 수 없는 얼굴을 해보였다. 혜정이라면 얼굴을 찌푸렸을텐데, 효정은 그냥 황당한 얼굴만 하고 있었다. 왜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 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지 않을까. 그저 몇 년동안 아이들은 당연하게 그것을 외우고 반문할 시간도 가지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on은 접촉하다는 뜻이야."

나는 효정에게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이렇게 시작한다. 누구나 외고 있는 간단한 숙어를 시작으로 전치사 이야기를 하지. 그렇게 몇 개의 전치사를 익히고 나면 아이들은 지겹게 느껴지던 영어의 다른 모습들을 보기 시작한다. 사실은 아주 간단한 건데.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들이야. 모두가 학자가 될 필요도 없잖아. 그저 대화하는 수단인데.

"turn on은, 돌려서 전선을 접촉시킨다는 뜻이지."
"아."

아이는 조금 웃었다.

"put on은 그럼 놓아서 접촉시킨다?"
"그렇지. 잘 하는구나. 그럼 go on 은 무슨 뜻일까?"

"그건 계속 ~하다 잖아요. 그거랑 접촉이랑 무슨 관계가 있어요?"

나는 연습장에다가 조그만 네모들을 연이어 그리고 그 위에다 날려서 time이라고 쓴다. 시간의 블록들이 줄지어 이어진 모습이 된다. 효정은 그 때의 혜정처럼 초조해하는 대신에 그 그림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간끼리 접촉해서 이어지도록 간다."
"헤에-"

효정은 노트에다가 뭔가 적으려고 한다. 나는 아이의 손을 막는다.

"외우지 마. 그냥 머리로 생각해. 혹시 생각나지 않거든 몇번이든 내게 물어.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양을 머리는 기억하거든."

/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몸은 기억하고 있어. 니가 했던 것들 뭐든 말이지. /

누군가 내 머리 속에서 익숙하게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 누군가가 했던 말일까. 내가 지금 효정에게 하는 말들이 마치, 내 말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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