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4.혜정, 병원



그 뒤로도 계속 어머니는 내게 자주 시현의 이야기를 했다. 뭐하는 사람이냐, 사람이 참 반듯하더라, 하는 어머니들이 사윗감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들을. 나는, 그 날 이후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장 한 줄을 채운, 신이가 보낸 책들을 날짜 순서대로. 그런다고 해서 내가 신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혜정이는 며칠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혜정이에게 빌려온 편지는 여전히 내게 있었지만, 나는 그 뒤로 한 번도 봉투를 열어 볼 수 없었다. 집안 가득, 신이의 공기로 채워진 것 같았다. 답답해서, 숨이 막혀 버릴지도 모른다. 이럴 때에는 내가 집에서 일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어도 능률은 오르지 않았다. 가죽가방에 노트북과 손에 잡히는 책 한권을 쑤셔넣고 밖으로 나왔다. 한풀 꺾인 한낮의 열기가 식기는 했어도 아직은 여름이다.

찌는 버스를 타고 용두산 공원에 도착해서, 양쪽으로 정체불명의 상가가 줄지어 서 있는 악명 높은 계단을 올라가니 옷이 온통 흠뻑 젖었다. 가방 속에서 들고 나온 책을 꺼내들었다. 얄팍한 것 아무 거나 집어 들고 나온 길, 책은 ‘테러리스트’였다. 비교적 최근의, 올해 내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모가 쓰여진.

그러고보면, 최근의 책들은 눈에 띄게 얇아졌다. 이 책처럼 한 권짜리야 원고 분량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다섯 권이 넘어가는 장편들을 펴 보면 두 권 정도를 서너권으로 불려놓은 책들이 부지기수. 책값에서 종이값이 차지하는 비중이야 얼마 안되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심한 여백과 심한 활자크기로 분량을 불려놓은 책들은 애당초 손에 쉬 쥐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봐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그런 책들을 사 볼 취미같은 건 나한테 없으니. 여신이라면 또 모를까.
책장을 휘휘 넘기다가, 뭔가가 책장 사이에 끼어 있는 게 보였다. 다이어리에서 찢어낸 속지.

‘그들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이제 Alone again, naturally. 완이 내게 고백하다.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여신이의 글씨였다.

왜 이 종이가 여기에 있는 거지. 그 애가 일부러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럴 정도의 주변머리가 있는 애는 아니니까. 아니, 일부러 그랬을지도 모르지. 늦게 도착하라고 우편번호를 일부러 적지 않을만큼 치밀한 애 아닌가. 나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책을 덮고 나는 타워행 엘리베이터를 탔다. 누군가의 몸에서 나는 찌든 담배냄새와 바로 옆에 선 여자에게서 나는 뽀아종 향수 냄새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이 숨이 막힐 만큼 길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나는 그 냄새에서 벗어나려 조금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타워의 1층, 매점에 두런두런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는 캔커피를 하나 사 가지고 창가에 앉았다. 창 밖,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의 풍경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둥근 유리창 때문일까, 이 높은 시선 높이 때문일까.

28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어땠니.

/난 아파트가 싫어…. 창밖으론 아파트만 보여./

그들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무슨 일이었을까. 신이는 무슨 일로 이런 글을 써야 했던 걸까. 만약 이게 나에게 남긴 글이라면, 그 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란 것일까. ‘그들’이 누구길래.

삐리리. 전화벨소리에 퍼뜩 놀란다.

“네.”
“여보세요? 나경누나?”
“…응.”

완이. 3일만에 듣는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누, 누구한테 연락을 해야 되는지 몰라서, 누, 누나, 혜정이가.”
“…혜정이?”
“여기, 메리놀병원인데, 누나, 빨리 좀….”
“갈게.”

전화를 끊고 나는 급히 가방을 챙겼다. 채 반도 마시지 않은 커피캔이 쓰레기통에 쳐박혔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느리다.




혜정이는 하얀 병실에 잠들어 있었다. 그 앞에 앉아 있던 완이 나를 보고 일어났다.

“…어머님은?”
“의사한테 가셨어.”
“무슨 일이니?”

완이 내미는 보조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약을 먹었어.”
“…….”

갑자기 왜 이런 일들이 나한테 일어나는 걸까. 아니, 우리에게. …우리란 무엇? 우리는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 다섯. 나와 신이와 완과 혜정과… 그리고 시현.

“넌 왜 여기 있는 건데?”
“내가 전화를 받고 있었거든.”

완이 설명해 준 대강의 사정은 이랬다. 완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고, 혜정은 울고 있었다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완이에게, ‘죽을 거야, 죽어버릴 거야.’ 라고만 되풀이 했었다고.

“갑자기 전화가 끊어져서 곧바로 집으로 왔는데. 문을 안 열잖아. 그래서 어머님께 연락드린거야. ”

혜정의 어머님은 아파트 앞에서 작은 화장품 가게를 하고 계셨다. 그 분이 깜짝 놀라서 달려왔을 상황이 상상이 된다. 내가 그 아이를 가르쳤을 때, 헤정에 대한 첫인상은 그랬다. 언젠가 이 아이가 입시에 찌들려 자살할지도 모르겠다라는 불안감. 그러나 혜정은 위태위태한 상황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면서 대학에 들어갔다. 아마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자식을 끔찍이도 아끼는 혜정이 어머님도, 그런 불안감을 갖고 계시지 않았을까. 혜정이가 여신이를 무척 따랐던 것을 어머님은 알고 계셨을까. 그랬다면 여신이의 죽음 앞에서 더욱 불안해졌던 것은, 어쩌면 나보다도 어머님이셨을지도 모르겠다.

“나경이?”

사색이 된 어머님이 들어오시며, 나를 보셨다.

“와줬구나, 잘왔어, 잘왔어. 그간 왜 안 들렸어?”
“예… 죄송합니다.”

몇 년 전에 여고생인 딸을 맡기며 어머님은 심하다 싶을만큼 걱정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것이 다른 보통 어머니들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혜정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첫날, 혜정이 방 책상에는 10여권의 수학책과 10여권의 영어책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질린 날 보며 혜정이가 일어났다.

“일단은 제가 좀 골라 놓아 봤어요. 어떤 책을 하실지 몰라서요.”
“이걸 다 볼 생각이니?”
“다 안 봐도 서울대 갈 수 있나요?”

대뜸 내게 말하는 아이의 당돌함보다도, 그 애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더욱 마음에 걸렸다. 혜정이는 내가 가르친 여섯 번째의 아이, 그들 중에 누구도 저런 눈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공부 잘 한다고 들었어. 그래, 어디 살펴보자.”

아이 옆에 앉으면서 책을 하나씩 집어 살펴보았다. 이제는 절판되었을 거라고 생각한 최고수학에, 듣도 보도 못한 문제집까지. 이 나라에 참고서 전문 출판사가 많다는 것이야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하나같이 새 책인 이것들을 어디서 다 구했는지가 더 궁금했다.

“전 서울대 가야돼요.”
“…그래. 가야지.”
“**대같은 데 가면 전 부끄러워서 죽어버릴 거예요.”

그 아이가 지적한 대학은 바로 내가 다니고 있는 그 곳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말들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니라서 나는 그 자리에서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과외 경력 3년이 그냥 되는 건 아니지.

“나경언니?”

이제는 그, 부끄러워서 죽어버릴 거라던 대학의 학생이 된 혜정이가 깨어나 나를 보았다. 막 의식을 깨어난 어리어리함이 금새 빠릿한 분노로 덮였다.

“죽게 놔두지!”

소리치는 혜정이가 빰을 감싸쥐었다. 내 머리보다도 먼저 손이 움직인 탓이다. 어머님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신다. 나는 무심히 그 시선을 피한다.

“죽고 싶으면, 전화는 왜 했어?”
“나경누나!”

완이 나를 붙들었다.

“여신이한테 가고싶어? 그래서 이래?”
“나경아, 말이 심하지 않니.”

어머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님이 계신 걸 잊었어요.”
“혜정아, 너 왜 그러니, 왜 그래.”

대답 대신 어머님은 혜정이에게 다가가 앉았다. 혜정이는 휙 고개를 돌려버린다.

“정말로 죽고 싶은 사람은, 누구한테 연락할 수도 없어. 니가 그런 상황을 알아? 어머님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혜정에게 모진 말을 퍼부어버리는 나를, 완이 붙잡고 병실을 나왔다.

“누나, 참아. 누나가 이러면 어떻게 해?”
“그래. 이런 건. 내가 아니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복도 긴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완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화내는 건 나고, 냉정한 게 누난데, 요샌 뭐가 이상하다.”

완이 중얼거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런 상황에도 웃음은 나오는구나. 이나경. 웃음이 자꾸만 나와서,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누나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담. 했다니까.”
“…그랬니.”

겨우 웃음을 가라앉혔다. 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의 완은, 지금보다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부산의 남학생들이 아마 전국에서 머리가 제일 짧을 거다. 운동선수마냥 짧은 머리를 하고 길쭉한 사내아이가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곤 쭈볏쭈볏 일어났었지.

“누나 그 땐 머리가 길었었잖아. 그 머리를 질끈 묶고 있는데, 표정도 없고 해서 무서워 보이더라구.”
“그런데 참 너 잘도 기어올랐다.”

피식 웃음이 다시 나왔다.

“뭐야, 내가 얼마나 순하고 모범적이었는데.”
“그래그래.”

웃고 있었던 때가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완은 내가 그 전에 가르쳤던 누구와도 달랐다. 사내아이들을 그리 잘 맡지 않는 내가 완을 가르치게 된 건 순전히 재정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기말 고사를 보고 나서 아무래도 예감이 나빠, 2학기 등록금을 대비해서 급하게 구한 과외 자리였으니까.

그렇게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사내아이가, 나를 꽤나 골탕을 먹였었다. 혈기 왕성함과, 또 사교성. 인정해야할 건 인정해야지. 너를 가르치면서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많이 웃을 수 있었다는 거. 그래서 대학에 가서도 너는, 계속 내게 연락을 해 왔었지. 언제부터인가 선생님이란 말 대신 누나라는 말을 쓰면서.

하지만, 언제부터였지. 니가 나보다도 신이를 더 먼저 찾게 된 건. 혜정이도, 너도, 우연히 두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내가 신이와 동행한 이후로 두 사람에겐 여신이 더 가까운 존재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서운했던 걸까.

“고맙다.”
“…응?”
“이제, 괜찮아졌어.”

완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어쩌면 여신이는 완이를 사랑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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