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당장이라도 먹이를 잡아먹을 것 같은 그의 두 눈은 어느 새 저 구석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는 한 남자에게로 쏠려있었다.

"한 번 해명해 보시오. 챤핑 장군!"

사령관이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성난 목소리로 내뱉었다. 말끔한 갈색 제복을 차려입은 챤핑 장군의 얼굴은 어느새 유령처럼 핏기 없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두려움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던 하얀 종이 몇 장을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그의 두 손과 양다리는 심한 경련으로 파르르 떨고 있었으며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비치는 이마는 금방 세수라도 한 듯 심하게 번들거리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왔던, 적어도 자신만큼은 아주 절친하다고 믿어왔던 수 십 명의 장군들을 여러 차례 흘금흘금 쳐다보았다. 그는 어리석게도 절친한 동료들이 자신을 끔찍한 이 악몽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장군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아니, 곱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잔혹했다.

그들은 지금의 심각한 상황이 모두 그가 초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렇게 몰아 갔다. 사령관과 6명의 대장군 그리고 각 사단의 책임자인 장군들...... 그들 모두는 한 배를 탄 처지였다. 그들은 시간이 좀 더 필요했고, 그걸 위해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 같은, 수뇌부에 극도의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부하들을 잘 타일러야만 했다.

그러나 반군토벌 소식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희생양! 누구나 욕지거리를 마구 퍼부어 대며,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토해낼 수 있는 그런 대상 말이다. 불쌍하게 얼어붙은 챤핑 장군을 보면서 그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챤핑 장군이야말로 누구나 납득할만한 희생양이었다. 전략부의 수장으로서 알파리아 점령 계획을 구상하고 그것을 모두에게 거드름을 피며 명령한 장본인이 바로 그가 아닌가!

"그......그건......"

앞으로 다가올 자신의 미래를 미리 보기라도 한 것일까. 그는 충격과 공포 탓에 입이 얼어붙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무서운 주인에게 혼나는 강아지가 낑낑거리듯 연신 괴상한 신음소리만 토해냈다.

두려움과 공포가 뒤섞여 감도는 그의 황갈색 두 눈은 자신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장군들을 향해 있었다. 그들을 철썩 같이 믿었건만, 오히려 자신을 희생양으로 몰아가는 그들을 무섭게 노려보던 그의 두 눈은 어느새 무시무시한 빛을 띄며 악의에 차 이글거리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확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은 비쩍 마른 얼굴을 통해 그대로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군데군데 초록빛 핏대가 치솟아 있었고, 물이라도 부으면 금방 하얀 수증기로 증발시켜 버릴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게다가 식은땀으로 범벅된 얼굴은 정말 연민의 정이 물씬 들도록 일그러져 빛나고 있었다.

그는 영리한 자였고, 끝없는 욕망으로 가득 찬 야심가였다. 게다가 그는 사람마저 돈으로 살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던 대표적인 황금만능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영욕의 삶을 놓고 싶지 않았다. 불과 30 대란 젊은 나이에 장군이란 자리까지 오른 그가 아닌가......비록 옳지 못한 방법을 쓰기도 한 그였지만, 모든 것을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수 없이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라고 되새김했다.  그러나 하늘은 너무나 당연하게 그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해 버렸다. 아마 그의 손에 불쌍하게 사라져 간 이 들도 신에게 그렇게 빌었을 것이다. 살려달라고......

"되도록...... 나도 이런 날이 오지를 않기 바랬어. 그러나 이게 무슨 꼴인가! 자네의 미숙한 일 처리 때문에 국가의 막대한 과업이 큰 차질을 빚게 되었네......나는 자네의 뛰어난 재능을 믿었다. 그러나 내 눈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사령관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서류뭉치 속에서 삐죽 튀어나온 약간 누런 종이 한 장을 꺼내 들며 말했다."이건 자네가 전략부 책임자로 자원하면서 나에게 준 것이다. 자네는 이 종이에 전략부 수장으로서 이번 알파리아 원정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할 경우에는 목숨으로 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적었다. 난 자네에게 가장 핵심자리인 전략부 장군자리를 주었지만 자네는 나에게 쓰디쓴 아픔만을 주었네. 이제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하, 하지만 전 그......그런 걸......"

챤핑 장군이 뭐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사령관은 모니터 옆에 툭 튀어나와 있는 둥그런 빨간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사령관 일행이 들어왔던 자동문이 다시 스르르 열리더니 문 앞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어깨에 시커먼 총을 멘 건장한 체구의 사내 둘이 뛰어 들어 왔다. 사령관이 그들을 보고 '끌고 나가'라는 뜻의 고갯짓을 하자, 그들은 구차하게 변명하려는 챤핑 장군의 양팔을 잽싸게 꽉 껴잡았다.

"저......전 그런 약속을......한 적이 없습니다......"챤핑 장군이 아주 절박한 목소리로 애원했다."사...... 살려주십시오! 제......제발...... 이......이 놈들아! 이 손놓지 못해! 놔! 놓으란 말이다!"

질질 끌려나가다시피 하는 그가 울부짖으며 완강하게 발버둥 쳤다. 분노와 증오로 이글거리던 두 눈은 어느새 눈물로 범벅돼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절규는 방안에 메아리처럼 굵게 울려 퍼졌지만, 모든 이들의 눈은 아까보다 더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무정하게 닫히는 문 너머로 사라져 갔다. 거의 자동문이 닫히는 순간 마지막으로 문 틈새에 보였던 그의 한쪽 눈은...... 이제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악마의 눈이었다......검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빨갛게 변해버린 눈......어쩌면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이 그것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억울하게 죽이려는 모든 이들을 저주하는 것 말이다. 문 밖으로 끌려나간 그의 울부짖음도 차츰 작아지더니 이윽고 아주 조용히 멎어 버렸다.

"쯧쯧, 한심한 인간 같으니라구! 저렇게까지 추하게 굴 줄이야......" 사령관이 모두에게 똑똑히 들으라는 것처럼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챤핑의 희생으로 수 십 명의 장군들은 무거운 짐 하나를 덜어낸 것처럼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지만, 한편으로는 큰 바위 하나가 가슴에 꽉 들어찬 것 같이 무겁고 답답했다. 항상 이런 일이 있은 직후에는 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땅거미처럼 엄습해 왔다.

장군이란 자리는 대장군 다음가는 높은 직위였지만, 그만큼 엄청난 책임이 뒤따랐다. 벌써 열 명이 넘는 장군들이 군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그들의 눈앞에서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 모두 안도감을 느꼈다...... 늘 그랬다. 그들의 희생이 있은 직후에 어지러웠던 군내기강은 쉽게 회복됐고, 아주 어려웠던 전쟁에서도 늘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힘든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배고플 때 당연히 밥 먹는 것처럼 이런 일이 수 차례나 되풀이되었다, 희생 된 장군의 수가 점점 늘어날수록 그들의 마음속에 어느새 싹튼 공포와 두려움도 덩달아 커져만 갔다. 그 희생양이 바로 자기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임자는 나중에 통보하겠소. 수석 보좌관, 현 상황에 대해 보고하라!"사령관이 맨 앞 테이블 오른쪽 구석에 앉아 있는 한 사내를 바라보며 외쳤다.

지명을 받은 사내는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듯 스프링처럼 바로 튀어 나왔다. 그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활 모양의 새까만 눈썹, 날카로우면서 지적인 눈매, 얼굴을 잘 살려주는 반듯한 일자 콧대, 게다가 핏기 없이 표백제처럼 새 하얀 피부 등등 그는 군인보다는 영화배우를 하는 게 더 수지맞는 외모를 지닌 사내였다. 그의 왼쪽 가슴 부분에는 평범한 계급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초록색 신분증이 고이 붙어 있었는데 그의 잘생긴 사진 아래로 글자 석 자가 환히 빛나고 있었다. '최.수.안' 그것이 그의 이름인 듯 했다. 그는 모든 이들이 잘 보이는 위치로 나가 사령관과 그 좌우에 일렬로 앉아 있는 나머지 6인에게도 정중히 인사했다.

"일단 이 것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손가락을 탁 하고 튕기자, 7인이 앉아 있는 테이블과 맨 앞쪽 테이블의 중간 지점에서 '스잉' 하는 소리를 내며 구멍이 생기더니 그 속에서 이상하게 생긴 물체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것은 영상스크린을 만들어내는 기계였다.

"기본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서를 통해 알려드렸습니다. 중요한 점만 찍어 말씀드리자면 알파리아 여러 곳에서 이상조짐이 일고 있다는 점과 며칠 전에 우주 연합에 등록되지 않은 정체불명의 소형전함 한 척이 이 레드라인 어딘가에 착륙했다는 사실입니다."그가 말하는 동안, 바닥에서 불쑥 나온 영상스크린 기계 위로 유난히 솟아있는 은빛 뿔 기둥에서 '웅' 하는 고음이 귀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나더니 이윽고 그것은 하얀 빛줄기를 천장을 향해 쏘아 올렸다.

어느 정도 천장 가까이 다다른 빛줄기는 어느새 뿔 기둥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하나의 굵을 막대기 같은 모양을 한 채 빛나던 그것이 갑자기 좌우로 늘어지더니 꼭 사각거울처럼 커다란 하얀 테두리를 형성해 버렸다.

"구체적 말해 보라. 이상한 조짐이 일고 있다는 게 무슨 말인가?"사령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수안에게 물었다."이미 남쪽의 반군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이제 이 레드라인에 몰래 숨어있는 잔당들만 소탕하면 되는데 뜬 금 없이 이상조짐이라니?"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들어오는 보고에 따르면 점령지역의 주민들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겁니다. 남쪽의 반군들이 섬멸되었지만, 그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어제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남쪽에서 가장 큰 도시에서 우리에게 겁먹었던 주민들이 갑자기 떼로 몰려와  우리의 보급물자를 약탈해 갔다는 겁니다."

"그게 사실인가!?"

사령관이 깜짝 놀란 듯 되물었다. 반군 토벌 소식과 한 사람의 깔끔한 희생으로 안도했던 모두의 얼굴이 썩은 똥물을 뒤집어 쓴 것 마냥 짙은 흙빛으로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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