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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지기란 숲을 돌보는 이를 칭한다.
        숲을 돌봄이란 나무들과 그 영역 안에 거주하는 생물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 관계를 조율하는 것을 말한다. 고로 훌륭한 숲지기란 폭풍우에 나무가 쓰러진다면 그것을 토막내어 치우고, 혹 불이 난다면 그것을 진화하며, 먹이사슬이 어긋나면 그 균형이 되돌아오도록 사냥에 임하는 이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르가 하르기어스는 어느 면으로 보나 썩 훌륭한 숲지기가 못 되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그저 하루에 한 번 그저 숲을 돌아보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의 일과는 간단했다. 그는 하루의 반을 숲을 걸으며 보내고, 남은 반을 그의 작은 오두막에서 잠으로 보내었다. 그러니, ‘훌륭한 숲지기’는 아무래도 라르가에게 어울리는 칭호가 아니었다.

다만, 누구라도 그를 노련한 숲지기라 칭할 수는 있을 법 하다. 그는 지난 칠백년 간 숲을 지켜 왔으니까. 바로 이 숲, 모든 생명의 근원지이자 세계수의 주검이 영원토록 썩어가는 라문간드, [하늘의 눈물과 대지의 피를 마시며 자라난 숲]을!

그 날, 그러니까 칠백년 간 지속되 온 그의 일과가 뿌리채 흔들린 날, 라르가는 언제나처럼 숲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나뭇잎을 엮어 겉옷삼고, 기다란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천천히 숲을 도는 것이 꼭 하릴없이 산책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나무들이 얼굴을 가지고 있고, 그 껍질이 신비한 빛을 머금고 있으며, 그가 지남에 따라 줄기와 가지를 속삭이듯 떨어댄다면, 아무도 그의 산책을 평범하게 여기지는 못하리라.

라르가 하르기어스는 라르 바르하예스, [숲을 떠나지 않은 자녀들]의 꿈을 듣는 중이었다. [두 발로 서며 해를 따르는 아이], [바람을 숨쉬며 달을 향해 비상하는 아이]와는 달리 라문간드를 떠나지 않았던 이 숲의 종족은 세계수의 죽음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들이 잠들기 전, 죽음과도 같은 수면 속에서 숲을 돌볼 자로 잉태한 것이 바로 라르가였다.

나무들은 여러가지 꿈을 꾸었다. 어느 나무는 다른 시간과 공간의 일을 꿈꾸었고, 어느 나무는 대륙 저 멀리서 일어나는 일을 꿈꾸었으며, 심지어 어느 나무는 머나먼 미래의 일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나무들이 그들이 세계수의 주위에서 노래하며 두 발로 걷던 옛 시절의 일과 세계수의 종말을 꿈꾸었다. 그중 후자의 것은 악몽에 가까워, 라르가는 하루에도 여러차례 신음하는 나무들을 달래야만 했다.

꿈 속에서 잠든 아이여, 신음치 말거라
하늘은 더 이상 울지 않으니 너도 울지 말고
땅의 상처도 낡았으니 너도 아파하지 말거라
아비의 뼈 위에서 평화를 찾고,
어미의 무덤 아래서 안식을 찾으려무나
가만히 귀기울여,
내 노래에서 부모의 음성을 찾으려무나

라르가는 세계수가 시들던 꿈 속에서 유난히 고통스러워하던 한 나무를 어르며 바르하예스들의 꿈이 점차 선명해지는 것을 염려했다. 칠백년 간 라문간드를 돌봐 온 라르가는 그들의 꿈이 낡은 감정의 잔해에서부터 감각을 자극하는 생생한 기억으로 화하는 과정을 주의깊게 살펴왔으며, 특히 지난 사십년 간 그 과정이 놀랍도록 빨라졌던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깨어나는 것인가?’

라르가는 긴 자장가를 마치고 호흡을 고르며 생각했다. 요즘 들어 그는 전에 없이 많은 나무들의 신음을 달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들의 의식이 직접 전달되어 오는 경우도 있었다. 비록 잠꼬대와 같은 의식의 파편에 불과할지라도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뭘 해야 하지?’

그는 숲과 그 자녀들을 사랑했지만 변화에 익숙하지는 않았다. 바르하예스들이 깨어난다면 물론 기쁠 테지만, 한편으로 숲지기의 의무가 그 의미를 잃을 듯 하여 걱정스러웠다. 그는 숲지기로서 잉태되었고, 숲지기로서 살아왔기에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아아아온 아아아아이이이이이

생각에 잠겨 걷던 라르가는 의식에 직접 전달되 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의식을 집중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나아아알개애 어어어없이이 아아아아아알으을 깨애애애고 나아아온 아아아이이이이

다르마이옌이란 이름을 가진 밤나무였다. 라르가는 꿈틀대는 나무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피며 그 꿈을 보기 위해 한 손을 그 위에 가져다 대었다. 천천히, 그의 심장이 나무의 그것과 동화되며 그와 나무의 의식 사이에 한 줄기 은색 실이 이어졌다. 의식의 연결에 깊이 몰두해, 라르가는 주변의 나무들이 뿌리를 들썩이는 것을 차마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의 영혼이 실을 타고 밤나무의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오, 펠라드라드! 펠라드라드!”

아문은 미친듯이 절규하며 새벽의 숲속을 달렸다. 아하스는 이미 의식을 잃고 부러진 인형처럼 그의 품 안에서 흔들렸다. 그녀의 육체는 이미 그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오직 그녀의 전신을 잠식해가는 문신만이 그녀에게 내려진 저주가 아직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음을, 곧 그녀의 생명이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문은 절박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적처럼 모든 추적을 뿌리치고 목적지에 도착했건만, 그토록 바라던 펠라드라드는 어디 있는가! 아문은 맹목적인 분노와 상실감에 맹수처럼 으르렁대며 오직 한 세대에 한 명뿐인 [바람의 소리를 전하는 이]의 이름을 외쳤다.

“펠라드라드! 빌어먹을, 펠라드라드! 아하스를 살려주시오!”

아문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뿌리가 발을 잡아채고, 가지들은 회초리가 되어 전신을 후려쳤으나 그를 멈추지 못했다. 옷은 이미 넝마였고, 초생달 모양의 도刀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달렸다.

“펠라드라드! 아문이오! 펠라드라드!”

마침내 아문은 울창한 나무들을 지나 공터에 들어섰다. 거기, 그의 앞에 그가 그리도 애타게 부르짖던 펠라드라드의 오두막이 있었다.

“펠라드라드!”

아문은 전신으로 문을 부수듯 하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여러가지 약초의 향내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짚을 채워넣은 침대를 찾아 아하스라문을 눕혔다. 이미 구조를 알고 있는 듯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아문은 방 한 켠에 쳐진 주렴을 걷었다. 그는 펠라드라드가 때때로 깊은 명상에 잠기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아직 어려 날지 못할 때, 펠라드라드는 그를 숲으로 데려가 함께 [바람의 속삭임을 읽곤] 했다. 비록 [날개의 털이 비맞은 생쥐가 되는 시기] 이후로 그러한 소통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펠라드라드로부터 바람이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을 흔들어 전하는 속삭임에서 지혜를 얻어내는 법을 배운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문?”

명상의 방에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아문이 망연자실 서 있을 무렵, 오두막의 문이 열리며 한 손에 바구니를 든 여인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섰다.

“펠라드라드!”
“아문? 혹시나 했더니 네가 왜 여기엘… 맙소사! 저 암컷…”
“그녀는 내 짝찟기 상대요. 사르가옌이 저주를… 펠라드라드, 살려주시오! 제발!”
“달신이여! [영혼을 삭이는 땅속의 불]!”

그녀는 바구니를 바닥이 내려두고 아하스라문을 살피다 놀라 외쳤다. 아하스라문의 몸을 태우는 문신을 잠시 살피더니, 그녀는 곧 안색을 굳히며 아문에게 말했다.

“아문, 지하에서 [땅벌레들이 싫어하는 세 잎의 풀]을 찾아와. 할 수 있지?”
“펠라드라드, 그녀를 살릴 수 있소? [영혼을 꺽어가는 광풍]이 비켜가게 할 수 있소?”
“그건 달신께 달렸지. 어서 가서 약초나 가져오라구!”

아문은 그녀의 말에 순종하여 방에서 나갔다. 그가 바닥에 달린 덧문을 여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펠라드라드는 의식을 잃은 아하스라문의 부른 배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한 숨을 내쉬었다.

“[두 발로 서며 날개 없이 해를 따르는 아이]라니…”
풀잎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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