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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풍경속의 바람



별빛 이야기에 대한 건이 마무리된 것은 그 해 겨울이 되어서였다. 원작자가 소송을 제기해 온 것이다. 출판사측에서 그 일을 주선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진희의 말에서 아마도 그런 교류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플롯이나 이야기의 흐름은 상당히 차이가 있었지만 이름난 저작권 전문 변호사가 변호를 맡았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재판은 시작되기 전에 화해로 끝났다. 보통 그러듯이 신문지상에 사과문을 게재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던 모양이지만 원작자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효정을 가르치는 것은 수능이 다가오던 가을에 그만두었다. 출판사측에서 책의 환불조치에 들어갔을 즈음이었다. 혜정은 출판사로 받은 인세 전액을 포함한 손해배상을 지불해야 했던 모양이었다. 완이 말한 대로 그렇게 될 때까지 혜정은 그 글이 자신의 글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겨울이 오고, 내가 사는 도시에 드문 눈이 내리기 시작할 즈음에 바다넷에 신이의 죽음이 알려졌다. 나도 완도, 시현도 헤정도 아니었다. 서울에서 가끔 전국순례를 하곤 하는 청년이 부산에 왔다가 알게 된 것이었다. 그 사람이 부산에서 마지막으로 신이를 만난 것은 그 애가 죽기 한 달 전이라 했다. 몇 년 간 죽음을 모르고 그는 그 애를 이따금씩 보고싶어하며, 가끔 사람들에게 그 애의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뒤늦게 바다넷 글동에서 신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 흐름에 혜정은 미묘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혜정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도 없었고, 같이 부산에 있는 혜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란 신기한 것이다. 처음에는 혜정이 편에 서 있던 글동 사람들이 서서히 돌아서는 것을 보는 것은,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혜정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거다.

수능 성적표가 나온 다음날이었다. 내가 그 작가의 새 작품을 맡아 번역에 들어갔을 때이기도 했다. 대학도 방학을 하고 난 뒤라 거의 집안에만 박혀 있는데 벨소리가 들렸다. 인터폰 화면에 보이는 얼굴이 흐릿하게, 혜정처럼 보였다.

“누구세요?”
“저예요.”

당연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 거라는 듯한 음성도 혜정같다.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통제하지 못한 상태로 대문을 열었다. 어깨를 조금 넘을락 말락 한 머리카락의 둥글둥글한 얼굴이,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다. 나는 순간 혼란스럽다. 이 아이가 혜정인지 효정인지.

“…어쩐 일이니?”

그런 내 혼란을 들키지 않으려 짐짓 태연히 묻는다.

“성적표 나왔어요, 맛있는 거 사 주세요.”

역시 효정이구나 하는 안도와 섞이어 조금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다가 황급히 숨어버린다. 그리고 여전히 고맙게도 이 아이는 내게 악의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 마음을 채워온다.

“성적 잘 나왔나보네? 뭐 먹을래?”

급히 준비하고 집을 나올 때까지 효정은 집 밖에 서 있었다. 효정이 짐짓 정색하고는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아파트의 휘어진 복도 끝, 거기에 시현이 있었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억지로 붙잡는다. 아직 효정은 내가 쓰러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효정에게만은, 혜정에게만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왜 왔어?”

목소리가 떨리지 않을 리가 없다.

“효정이 뭐 사 주려고 불러냈는데, 너 보고 싶다고 해서.”
“그럼 두 사람이 가.”

돌아서는데, 효정의 손이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는 채다. 나는 효정을 쳐다본다. 이러지 마, 지금 신경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으니까, 네 앞에서까지 무너지고 싶지 않으니까.

“…두 사람, 친했잖아요….”

그 목소리가, 그 말이 귀에 익다. 혜정의 목소리로, 완의 말을 하는 이 아이는 누구지?

“…혜, 아니 효정아. 너 오늘은 저 사람이랑 가라. 나 불편해. 저 사람이랑 만나고 싶지 않아. 미안하지만 안돼.”
“어째서 그렇게 날 피하는 거냐?”

시현의 목소리가 등 뒤로 꽂혔다.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내가 잘못한 게 뭔데? 다른 사람이 나를 멋대로 좋아한 것에 대해서까지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시현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이런 이야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시현이 효정과 함께 여기로 왔을 때는 내 반응 정도야 예상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저런 대답은 벌써 준비해 두었을 사람이다.

“이제 다 끝났잖아. 별빛 이야기 건도.”

시현의 말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 일이 아니더라도 나는 시현씨가 싫어. 정말로 싫어. 잘 지내고 있잖아, 나 없어도 당신은 충분히 즐겁잖아. 그러니까 그냥 좀 내버려 두란 말야, 그게 그렇게 힘들어?”

목소리가 평소 같지 않은 것은 오히려 내 쪽이다, 그래서.

“나경아.”
“효정아 미안해. 나 좀 쉴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팔힘이 세었던지 효정은 손을 채 붙잡지 못한다. 문을 쾅 소리나게 닫고 나는 문에 기대 선다. 이럴 때 네가 필요해. 완아. 내가 저 사람의 손을 잡지 않도록, 저 웃는 얼굴을, 저 난처해하는 얼굴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줘.

나는 푸슬푸슬 일어나 전화기를 들었다. 핸드폰에서 1번을 누르면 완이다. 나는 1을 눌렀다가, 꺼버린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완에게 기대지 않겠다고, 닥터와 이야기하면서 나는 그렇게 결심했었다. 사람들에게 솔직한 내 감정을 나타내겠다고 하는 결심과 함께, 나는 스스로 혼자 서기를 원했다. 그것은 내가 짝수가 되고 싶어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 아니 동일한 선상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수 있으려면- 내가 완에게 기대기만 하는 관계에서는 불가능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완이 시현을 마주하는 것을 보고싶지 않았다. 한때 너무나 존경했던 형, 나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어하고 나와 사귀었으면 하고 바랄만큼 좋아했던 형과 어색하게 다시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완이 시현에게 주먹을 날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핸드폰이 울렸다. 완일까. 완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네.”
“…언니.”

혜정이? 전화기를 든 손이 바들 떨린다.

“시현오빠, 갔어요. …미안해요, 언니한테 아무 말 안하고 같이 와서.”

효정이. 혜정이보다 약간은 앳띠고 밝은 목소리의.

“…나, 진짜로 오늘은 언니랑 같이 밥 먹고 싶었어요. 시현오빠가 왔을 때 언니한테 막 전화하려던 참이라서…, 두 사람 친했는데 사이 나빠졌다는 이야기 들어서….”

두서없는 효정이의 목소리는 전화기에서만 들린다. 바로 문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느낄 수 없을 만큼 힘없고 약하게.

“언니 내 목소리 듣고 있어요?”
“……듣고 있어.”

“나 오늘 성적표 나왔잖아요…, 재수할 때 진짜 힘들었으니까…, 언니 한참 못봤으니까….”

그래, 이것은 효정이 때문이 아니다. 내가 칼날을 들이댄 것은 혜정이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시현이다. 2년 넘는 동안에 친 언니처럼 나한테 살갑게 굴고, 친언니와 내가 이상한 일로 얽혀 버렸어도 여전히 나를 믿어준 효정이한테 내가 이러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문을 연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효정의 얼굴이 나를 보고는, 어렵사리 웃었다. 나는, 얼마나 더 사람을 상처입히려는 것이냐.

“미안…, 뭐, 먹으러 갈래?”

그런데도 이렇게 무뚝뚝하게 밖에 말하지 못하는 내게,

“카레, 치킨카레 먹으러 가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효정은 웃으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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