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기말고사가 끝나고 서점에 들러서 책을 잔뜩 사가지고 돌아왔다. '시간을 거슬러 가다'는 아직도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들어 있었다. 나는 괜시리 책을 펼쳐 보고 거기 있는 내 이름에 화들짝 놀라며 책을 덮었다. 이 역시 피학심리. 자신을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좋아하지 않는 판타지 서적이나 SF의 고전이라는 것들을 사들고 돌아와 그 낯선 코드들 안에서 허우적거리거나, 일부러 핸드폰의 밧데리가 떨어질 때까지 충전을 해두지 않아서 전화가 되지 않게 만들거나, 어머니가 퇴근하기 전의 집에서 괜시리 옛날 그릇들을 꺼내어 모두 새로 닦는다거나 하는 것과 통하는 일이다. 출판사측에서 강경대응을 하기로 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가끔씩 그 안티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변함없이 내 이름이 눈에 띄곤 했다.  원작자의 이름보다도 내 이름이 더 많이 눈에 띈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지만.

그건 이상한 피학심리일지도 모른다. 나에 대한 불특정 다수의 욕설로 도배된 게시판을 샅샅이 훑으면서 심장의 박동소리를 듣는 것. 모든 것에 무뎠던 내가 조금씩 분노와 혐오를 가지게 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건 이것 말고 다른 방법도 있었다. 그래, 완을 만나서 괜시리 돌아다닌다거나. 동기들의 꼬드김에 못이긴척 술자리에 참석한다거나 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나는 순간 순간 떠올려대고는 했다. 완이 머쓱한 얼굴로 얼굴을 붉히며 내게 말했던 것. 조금은 어이없이 말했던 '좋아해-' 라는 말보다도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 내 말 때문에 돌리지 못하면서 어렵사리 말했던 그 말이 내게는 더 깊이 박혀 버린 것이다. 그래서 도망쳤다. 일부러 완을 끌고 백화점 지하를 돌아다니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투덜대면서 벤치에 앉고 일부러 목이 마르다고 녹차를 사다달라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완이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도록.

비겁하잖아. 무언가 하고 있지 않으면 마음 속에서는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있으면서도 답을 하지 않는 비겁함. 단지 도망칠 길을 만들어 두는 것에 불과했다. 기정사실을 만들지 않으려는. 만약에 그를 더없이 상처입히고 돌아서더라도 나는 그에게 허락한 것이 아니라고 하려는, 끝을 대비한 변명거리를 만들어두기. 그 증거로 나는 또 핸드폰의 밧데리를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창을 열면 바람이 차가웠다. 어느새 세밑이었다. TV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해서- 라는 문구가 슬슬 지겨워질 때쯤, 방 안에서 글을 쓰다가 문득 거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TV였다. 어머니가 밤늦게 TV를 켜두는 경우는 드물어서 나는 밖으로 나왔다. TV화면 가득히 개미떼처럼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경아 같이 보자, 제야의 종 친다 곧."
"뭐 먹을 거 챙길까?"

어머니는 앞에 놓인 귤바구니를 가리키며 웃었다. 바구니 옆에는 꿀밤에다 잣까지 놓여 있었다. 호두속이 보이는 걸 보면 얼마 전의 부럼이 남아있었던 듯했다. 어머니와 함께 부럼을 까먹는 동안에도 나는 책 이야기를 끝내 하지 않았었다. 이런 것도 마찬가지. 당신과 나 사이의 강을 메워 보겠다는 생각 한 켠에 강이 메워진 후의 결과가 두렵고 무서워서 머뭇거린다. 그리고 당신이 무언가 해주기를 기다린다. …비겁해.

"요새는 완이가 통 안 보이는구나. 가끔 만나긴 하니?"
"같은 학교니까 가끔 마주치긴 해."

얼버무림.

"언제 한 번 오라고 그래, 튀김 해먹자 우리."

뎅, 종이 때맞춰 울렸다. 귀에도, 머리 속에도.

"…엄마."
"응?"

숨을 삼키고, 가볍게 내쉬고, 그리고 다시 종소리를 듣고.

"…나, 완이 좋아해."

어머니는 응- 하고 대답하시다가 흠칫 동작을 멈추었다. 완과 내가 누나 동생이라는 호칭을 하면서 지낸 시간이 짧지는 않다. 어머니는 내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는지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 짧은 순간이, 지독하게도 길었다.

"완이, 너랑 몇 살 차이지?"

어머니가 자각시켜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깨닫고 싶지 않았던 무엇인가.

"세 살."

완은 아직 군대를 가지 않았고, 대학원 진학 전에도 군대를 연기신청했다. 아마도 그것은 여신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신이에게 고백의 대답을 듣지 않고 군대로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혹은… 당연히 여신이가 답을 주고, 여신이와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거나. 어느쪽이든- 그것은 여신이 덕분에 생긴 유예였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대학원을 마치고 군대를 간다면 완이 제대할 때쯤이면 나는 서른을 넘긴다. 어머니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완이는, 알고 있고?"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쉰다.

"완이가 먼저 이야기했어. …나 좋아한대."
"그래? 잘됐구나."

어머니의 얼굴이 그순간 조금 펴지며,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아, 아니었던가. 어머니가 걱정하는 건 다른 것이었던가.

"요즘 집에도 안 오고 그래서- 걱정했지."
"바쁘대. 대학원이라서."

거짓말. 나는 완이 찾아왔던 마지막 날, 어머니로부터 후한 상차림을 받았던 그 날에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완이 집에 찾아오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던 것이 아닌가.

"예전에 찾아왔던 그 사람- 누구였지, 시-."
"그 사람 혜정이랑 사귀고 있어."

시현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듣기 싫어서, 나는 급하게 어머니의 말허리를 잘라낸다. 어머니는 저런 그랬구나, 하고는 머쓱해했다. 어머니와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서먹해졌을까. 어째서 당신은 나를 마치 어려운 친구를 대하듯이 하는 것일까. 나는 억지로 흐리게 밀어넣었던 기억 속에서 예전의 어머니를 떠올려본다. 은은한 먹물향으로 기억되는 아버지는 그 향기 만큼이나 흐릿하다. 하지만- 그 시간 내내 내 곁에 있어 주었던 어머니의 기억은 어떤가.

"아버지가 보셨으면 참 좋아하셨을텐데. 참 좋잖니.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서글서글하고. …저런 아들이 있으니 그 어머니는 얼마나 든든하실까 했었는데."

시린 날이 가슴을 훑으며, 나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스치는 불안과 두려움을 보았다. 아버지의 기억이 되살아날 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돌연 머리를 파고들 때, 갑작스럽게 집 밖으로 내달리곤 하는 나를 어머니는 몇 번이나 보았을까. 그 때도 그랬다. 혜정의 자살미수에 대해서 들었을 때에도 어머니가 두려워했던 것은 혜정의 안부가 아니라 그것이 내게 미칠 영향이었다.

"하지만 완이는 서예도 사군자도 못할걸?"

나는 대답하며 조금 웃었다. 어머니는 한 박자 늦게 웃었다. 괜찮아, 엄마. 그렇게 조심하지 않아도 돼. 나도 변하고 있으니까, 아빠를 연상시키는 것만으로 다시 어쩔 줄 몰라하지 않을테니까. 엄마도 변해 줘, 아니- 돌아가 줘.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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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여행 04.10.24 22:29 댓글 수정 삭제
    이제 다시 원래의 페이스로 돌려 놓겠습니다.
    A4로 30장 정도 남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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