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삐리리, 전화벨이 울렸다. 떠올랐던 기억들이 겁을 먹고 들어가 버린다.

"네."
"나야. 어디야, 지금?"

완의 음성에, 문득 묘한 기분이 되어 버린다. 죄책감.

"서울에 왔어."

음성이 떨렸다.

"집에 전화했었는데 서울에 갔다고 그러더라."

최근의 완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척이나 알고 싶어했다. 이런 성질 급한 녀석이 용케도 이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구나.

"나 서울이거든 지금."
"어쩐 일이야?"
"학회 일. 내일까지 시간 있는데, 누나 급하게 내려가야 해?"

급할 일은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나 간단하게 끝나버린 만남 때문에 오히려 당혹스럽던 터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내 머리에 박힌 것은 완의 호칭이었다. '누나'라는 그 호칭이 유난히 안심이 되었다.

"응."

그 때문일까. 머리는 아니, 라고 말하면서 대답은 응, 이라고 나왔다.

"그렇구나. 서울 온 김에 누나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할 수 없지 뭐. 그럼 나중에 부산 가서 보자."

"응."

다시 '누나'. 뭔가 이상한, 야릇한 느낌이 신경을 훑어 내려간다.

"조심해서 내려가, 누나."
"응."

전화가 끊어졌다.

/ 조심해서 내려가- 여신아. /

이명처럼, 완의 음성이 울려 되풀이되었다. 귀를 막으려 손을 들다가 흠칫 내린다. 주변 사람이 볼 리도 없는데 허둥지둥 지하철 역으로 들어선다. 타고 나니 파란색 라인, 4호선이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가방에 손을 넣어서 잡히는 것을 꺼낸다. 검정 다이어리. 신이의 것이다. 정확하게는 신이가 내게 보낸 것.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판타지 소설의 한 가운데라면, 나는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한다. 이럴 때 신이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 말한다. …여긴 너무 추워. 날 도와줘. 그러나 나는 현실 속에 있다. 그러므로 만약 그 애가 내게 할 말이 있다면, 살아 있었어야 했다. 정말로 내게 무언가 원했다면, 이런 우회적인 방법으로 내 목을 졸라오지 않았어야 했다.

"저… 혹시 이나경씨 아니세요?"
"예?"

갑작스러운 이름에 돌아선 자리에는, 낯선 얼굴이 나를 보고 서 있었다.

"아닌가요?"
"……맞는데요?"

낯선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

"기억 안나? 나 장현진인데-"

뭔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이름이다. 어디였더라. 어디에서 보았던 이름인가. 기억보다도 몸이 먼저 반응해버리는 이름이, 누구의 것인가.

"…서운해라. 테니스하던 현진이, 정말 기억 안나?"

아- 하고 나는 그 사람을 다시 쳐다보았다. 낯선 얼굴 곳곳에서 나는, 한 때 내 학교 생활의 전부였던 익숙한 모습을 찾아낸다. 가무잡잡한 얼굴, 웃으면 귀 앞에 옴폭 파이는 보조개, 외꺼풀의 서늘한 눈. 그래, 그랬었지.

"오랜만이다, 정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환한 웃음을 계속 지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렇게 오래 학교 전체에서 따돌려지는 아이를 혼자서 챙기지는 못했을테지.

"서울 사니? 몰랐다. 나는 그 뒤로 부산에 못 내려가서- 나 애들 가르쳐. 스포츠센터에서. 넌 뭐하고 지내니?"

대학 다녀. 출판사에서 일해. 번역 일 하고 있어. 여러 말이 머리에서 섞여 한참을 아무 말도 먼저 꺼내지 못했다.

"대학 다녀."
"응? 서울로 진학했구나? 대학원?"
"아니-"

이런 짧은 대답에도 계속 질문을 해오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 애가 맞았다. 그런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몇 년간 한 사람의 뒤치닥꺼리를 해 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씁쓸한 웃음이 나도 모르게 번졌다가 급히 들어갔다.

"많이 바쁘지 않으면 우리집 들렀다가 가. 다음 역에서 가깝거든. 아, 바쁘니?"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무엇에 대한 부정인가. 바쁘냐는 질문, 아니면 자기 집에 들렀다 가라는 말에 대한. 생각하기 전에 열차가 멈춰서고 그녀가 내 앞을 지나 걸었다. 그 뒤를 따라 내린다. 대문 옆에 대나무 줄기들이 꽂혀 있는 집들 사이를 조금 걷는 동안 그녀는 쉴새없이 내가 물었다. 간단한 응, 아니- 라는 대답에서 그녀가 과연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10여분을 걷다가 빌라라는 이름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벽돌모양의 타일이 엉성하게 붙어있는 작은 연립주택안으로 그녀가 들어섰다.

'참 잘도 믿고 있구나. 10년동안이나 소식이 없었던 친구의 이름만으로.'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묻는다. 나는 씁쓸하게 웃는다. 더 무엇을 잃을 수 있겠어. 어쨌든 아직까지도 몸이 먼저 반가워하는 이름인걸.

"당신이야?"
"응, 내가 열게-"

열쇠소리를 들었는지 집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 끝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인 듯 했다. 문이 열리자 작은 인영人影 두엇이 달려와 내게 부딪혔다.

"엄마 친구분이야.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오."

머리를 들기 전에 아이들의 머리가 벌써 숙여졌다.

"누구 같이 오셨어?"

바퀴를 미는 소리였다. 얼굴이 하얀 남자가 불쑥, 휠체어를 밀고 현관 가까이까지 나왔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현진에게도 들렸을까 신경이 쓰인다.

"응, 동현씨- 얘, 나경이야. 이나경."
"아아,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떻게 소식이 닿았나보네요?"

에? 하는 얼굴에 남자와 친구가 함께 웃었다.

"세상에 전철에서 만났어. 인연이 있나봐 아무래도."
"하늘이 무심하지 않으시네."

아이 둘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어른들을 올려다보았다.

집안에는 문틀이 없었다. 남편은 전혀 불편하지 않은 사람처럼, 오히려 아내를 앉혀두고 자신이 차를 챙겨 내 주었다. 헤즐넛 향커피가, 평소엔 거북스러운 그 향이 묘하게 반갑다.

"이 사람이 나경씨 이야기를 얼마나 했다고요.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는 나경씨 이야기밖에 없다니까요."

구김살없는 웃음.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우리 둘이 연애하면서 들은 이야기만해도… 나경씨 자서전을 하나 쓰고도 남을걸요."

"그게 무슨 자서전이야. 나경이가 비웃겠다. 이해해, 이 사람이 이렇게 말을 자주 헷갈린단다."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밝고, 그 자리에 있는 나는 이방인처럼 낯설다.

"그럼 이야기 나누세요. 나는 작업할 게 있으니까-."
"응, 동현씨 수고-"

바퀴를 밀며 사라지는 방향을 나는 한참을 보고 있었다.

"저사람, 내 팬이었어. 대학교때. 같은 대학이었거든."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녀는 이야기를 꺼냈다. 물을 수는 없었다. 어떤 인연으로 저런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냐고. 혹시 사고였느냐고.

"테니스장에서, 가까이 오지도 않고 저 편 멀리에서 계속 보고 있는 거야. 어릴 때니까 두근두근하잖아. 왜. …이상하지? 그걸 보니까, 너 처음 봤을 때 생각이 나서. 그래서 내가 먼저 가까이 갔었어. 캔커피 두 개 뽑아가지구."

처음,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아이들 모두가 나를 따돌리는 상황에 익숙해졌을 때 그 애가, 내게 먼저 다가왔었다. 양 손에 두유 팩 한 개씩을 들고.

/ 먹을래? /

나는, 조금 웃는다. 그래… 너는, 그렇게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애였어. 눈이 닿는 곳엔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먼저 다가서는 애였어. 그래서 네 옆에서는 안심하고 있을 수 있었어. 내가 먼저 손을 뻗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니 손뻗음에 내가 응한 것 뿐이기 때문에.

"알고 있니? 너, 날 보고 있었어. 테니스하는 날."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학창시절의 나…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날 보며 웃었다.

"먼발치에서 그냥. 이야기를 하다 시선을 느끼면 네가 날 보고 있었어. 땀을 닦다가 시선을 돌려보면 네가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지."

손을 뻗은 것은, 나였을까.

"그렇지만 이상하게- 너 앞에 갔을 때는 그런 말이 나오질 않았어. 왜 날 보고 있었니 라고 물어야 했었을까? 아니, 필요 없었을 거야. 알고 있었으니까."

"넌 인기가 많았어."

스스로의 답변이 참, 바보같다고 생각한다.

"일생에 두 명이면 충분하지 뭐. 인기라는 건."

말하던 그녀는 문 밖을 아- 하고 쳐다보곤 덧붙였다.

"저 두 명도 넣을까?"

나는 그녀의 부모님과 그녀의 집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어떤 집에서 살고 있었을까. 한번쯤 그녀의 집에 갔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꽤 오랫동안 무한궤도의 LP판을 가지고 있었다. 어설픈, 아이다운 포장을 한 그것을 내밀었던 건 언제였더라. 기억의 시간은 옅어지고, 안개로 희미해진다. 자전거를 타고 온 그녀가 내게 웃으며 그 포장을 내밀던 장면을 떠올리던 나, 고개를 젓는다. 이건 현진이 아니다. 러브레터의 수줍은 소년 후지이 이츠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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