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9.이진희, 정현진.



그- 1999년의 봄. 나는 입학을 하고, 완은 대학원에 진학했다. 군대를 미뤄놓은 진학이었다. 완이 어떤 이유로 군대를 계속 미루어왔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완도 설명하지 않았다. 내가 번역한 책 한 권이 늘어났고, 동기중의 몇 명이 언니 언니 하고 살갑게 굴기 시작했고, 몇몇 교수들이 인사를 하는 내 이름을 외게 되면서 봄이 흘렀다. 숨죽인 일상, 이래도 좋은 것인가- 이것이 나의 것이 맞는가 싶을 만큼의 안정적인 일상. 봄 동안 나는 그랬다. 아아 이것이 일상이구나,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그 낯설은 느낌이란. 대학생활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 그것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대학에 아무런 신비감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담담한 평범함에 놀라게 되었는지도. 우연히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읽는 스포츠 신문에서 혜정의 이름과 사진을 발견한다거나, 일주일에 두 번 들리는 효정에게서 책이 재판을 냈다는 소식을 듣는다거나 학교 앞 서점에서 류시현이라는 이름이 박힌 책을 발견한다거나 하더라도 일상이 완전히 어긋나지는 않았다. 단지 일상이었던 것이 조금씩 일상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나는 지극히 평온하고 그들은 더 이상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인 듯 했다. 그건 새로운 일상이었다.

대학을 처음 들어가면서부터 내 일상은 그러한 것이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씩 생겨났고 작은 일들 큰 일들은 대개 그 사람들과 함께 했다. 그 중심엔 언제나 신이가 있었다. 신이 자신은 알지 못했겠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 애의 향기가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었음을. 신이는 그 인간관계의 중심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완을 처음 안 것도, 혜정을 처음 안 것도 나였고- 시현은 완을 통해서 만났기 때문에. 그러니 언제나 함께 있다고 해도 신이는 그 안에서 겉도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그 아이가 조용히 웃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 일 수 있었는데도. 오랫동안 굳어져버렸던 내 감정으로는 내게 그 사람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알았다면, 신이가 그토록 내몰릴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새로운 일상에 젖어 들면서부터 서서히, 감겼던 눈이 뜨여지는 것처럼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중학교 시절부터 닫혀 있었던 기억들이 조금씩 일깨워지는 것과 함께. 언제나 신이가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여 줄 수 없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체육시간, 내가 써놓은 습작을 내밀어주었던 행동이 무엇을 뜻했는지. 그것은 닫힌 내 감정 안에서 욱, 하고 치밀어 오른 내 심장의 반동이었다. 그걸 알아준 사람이 있었던가. 가끔씩 보이는 내 반동들의 의미를 알아준 것은 누구였을까. 그 때마다 너무나 태연하게 웃어주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책이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한참 일을 하지 않았던 청랑에서 연락이 왔다.

"서울에 있는 출판사인데, 번역가를 찾고 있답니다. 이나경씨가 아무래도 적임 같아요. 한 번 만나보고 결정하겠다고 하는데요. 해 보시겠어요?"

청랑에서 나와 가장 많이 마주치는 최소영씨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뭐 꼭 못할 일은 없었다.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해도 전보다 훨씬 바빠졌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대학이란, 그런 곳이다. 바쁘려고 하면 더없이 바쁘고, 시간을 내려고 하면 얼마든지 또 가능한.

나는 학교 때 수학여행 이후 처음으로 서울로 올라갔다. 금요일 수업을 마치고 올라가니 약속시간 전에는 꽤 여유시간이 생겼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그 거리를 지하철 노선도 하나만 가지고 돌아다녔다. 관광객을 위한 노선도에는 정말 별 것들이 다 실려 있었다. 그 노선도를 들고 돌아다닌 곳은 대학가들이었다. 신촌, 홍대, 대학로. 대학로에서 유명하다는 인도 커리집을 찾아 혼자 치킨카레를 시켜 먹기도 하고, 끝없어 보이는 그 미로 끝에서 조그만 공연장을 찾아 공연도 없는 그 노천 계단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첫 약속장소에서 야구모자를 쓰고 처음 나타난 나를 보고 출판사 직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소영씨 말로는 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했다고 들었지만, 그 직원이 상상해버린 내 모습은 적어도 나와는 거리가 좀 있었던 듯 했다. 그렇다고 백팩을 매고 나온 나를 보고 정말 이나경씨 맞으세요? 하고 반문한 건 너무하지만.

"신분증이라도 보여 드려야 되나요?"
"아뇨, 실례했네요. 이진희라고 합니다. 죄송해요. 제 또래라고 들어서요. 대학생처럼 보이셔서 놀랐어요."

아마도 서울의 출판사에서 나올 사람은 내 또래일 것이라고 청랑에선 이야기했었다. 스물 여덟살이란 저런 외모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하고 나는 그녀를 새로 쳐다보았다. 진하지 않은 화장에 그래도 수수한 편인 옷차림, 자리에 놓인 MCM의 검은 정장 백팩. 20대 후반의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은 모습이다.

"청랑의 최소영 씨가 제 선배거든요, 들으셨죠? 번역할 분 소개해 달라 그랬더니 이나경씨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언뜻 경상도 억양이 섞였다. 아, 그래서 지방 출판사에 가끔 일을 하는 나를 굳이 불러낸 게로구나. 어쨌든 상당히 곰살맞은 사람이었다. 금새 웃는 것이 예의상 하는 표정 같지 않았다. 굳이 새로 대학에 들어갔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는 조금 웃었다.

"그냥 한 번 뵙고 싶기도 하고요. 원고야 그냥 넘기면 되지만, 이런 일이 그렇거든요. 사람을 많이 대하니까, 사람을 보면 느낌이 나와요. 이 사람은 이런 문장을 만들겠구나, 하는."

"예?"

그저 곰살맞기만 한 사람은 아니로구나. 새살거리는 말투 안에 은근히 힘이 숨어 있다.

"원문이 문장이 예뻐요. 그 느낌을 살릴 번역을 하고 싶어서요. 제가 아는 분들 중에는 그런 분이 없네요."
"제 번역 보셨나요?"
"네. 하지만 직접 뵙고 싶었어요."

그녀에게서 나는 책 세 권을 건네 받았다. 페이퍼백 세 권의 분량이니 번역을 하면 꽤나 길어질 글이다.

"초벌번역은 메일로 보내드릴께요."

초벌번역은 없는 편이 나은데요, 하려다가 그만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그녀는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배웅했다. 드문 일일까. 굳이 번역하는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청랑에선 늘 나와 이야기를 했다. 글에 대한 이야기, 작가에 대한 이야기. 나는 주로 듣고 있었고, 가끔 내가 꺼내는 말을 그들은 꽤나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최소영씨는 특히 그런 사람이었다. 굳이 서울까지 오라고 한 것에 비하면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정말로 그녀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느낌인지 보고 싶었던 것 뿐이었을까.

책 표지를 꺼내 들었다. 미국의 페이퍼백이 흔히 그렇듯이 상당히 현란한 색채의 그림에다 제목은 금속색이다. 좀처럼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도안들. 하지만 차라리 이쪽이 나은 면도 있다. 요즘의 단행본들이란 하나같이 엄청난 여백에다 줄간이라, 문장 아래에 주석을 달아가면서 보라는 배려인가 하는 느낌까지 들 정도니까. 별 생각없이 표지를 넘기고 글을 읽어 들어가다가, 나는 이런-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그 글은, 여신이의 글을 너무 닮았다.

여신이의 성격이라든가, 내가 영문과를 나왔다거나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내 손에 쥐어진 글이 여신이에게 어떻게 해석이 되었을 지는 알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을 나름의 몽환적인 시선으로 해석해버리는 여신이므로.

<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는데 가벼우나 확실하게 레르 뒤 땅의 향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직도 5년 전의 세상에 있는 사람 같다. >

이 문장이,

< 옆자리에 다가가는데 선뜻한 향이 난다. 옅지만 분명한, 'l'eur du temp' …1년의 시간 뒤에 있는 아이. >

의 원문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향수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여신이가 어째서 그다지 닮지 않은 토미 걸과 레르 뒤 땅을 바꾸어 쓴 것인지. 그리고 왜 그 장면에서 '1년의 시간 뒤에 있다' 라고 했는지.

그랬다. 여신이는, 몇 년 전 미국에 갔었다. 갑작스럽게 학기를 중단하고 신이가 미국행 비자를 받았다 했을 때 우리는 모두 놀랐었다, 나만 제외하고. 나만큼은 그 애가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 동안 그 애가 미국행을 남몰래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했었다. 그 기간이 5개월이나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엔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 연수를 위해 휴학을 하고 그 애가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그녀를 배웅조차 하지 않았다. 간간히 그녀에게서 편지가 왔었다. 미국의 소인이 찍힌, Via air mail의 마크가 찍혀 있는 그 편지들은 평소의 그 애의 글만큼이나 나를 숨막히게 했었다.

왜일까, 신이의 미국행을 나는 완전히 없었던 일처럼 잊고 있었다. 미국에서 그녀에겐 무슨 일이 있었나. 돌아온 그녀는 조금 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단 한마디도 그 곳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우리 역시도 그랬던 것 같다. 그녀가 없는 동안의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없는 동안에도 '우리'는 종종 만났고 그 자리에 신이가 없는 것을 가장 힘들어 한 것은 누구보다도 신이 자신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 나라로 몰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구보다도 '우리'에 목말라하던 그녀가 갑작스럽게 긴 단절을 택했던 이유를, 그리고 그 동안의 일에 대해서 돌아온 그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이유를 나는 묻지 않았었다.

/ 어서 와라. 마침 복숭아 절임을 만들었단다. /

돌아온 신이가 어머니에게만큼은 그렇게 밝았던 건, 어머니가 가장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애를 맞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자리를 비우고 돌아온 것처럼 어머니는 신이에게 더운밥을 먹이고, 신이가 좋아하는 커피 원두를 고르고. 그 날… 그래, 신이는, 내 책장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 책, 많다. /
/ 뭐- 새삼스럽게. 늘지도 않았는걸. /
/ …나경아. /

신이는, 멍한 얼굴로 나를 보았었다.

/ 왜? /
/ …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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