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난 화 낼 필요가 없었어.”

완이 나를 쳐다본다. 갑자기 굳은 내 얼굴이 낯설은가 보다.

“너나 혜정이가 화내고, 신이는 달래고, 그럼 난 비웃어주기만 하면 됐어.”

“시현형은 ‘자, 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가자.’고 하고 말이지.”

완은 애써 농담처럼 말을 받는다.

“‘그들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어째서 갑자기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순간 우리 둘은 어색해졌고, 완이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신이가 준 책에 들어 있었어. 작은 메모가. 다이어리에서 뜯어낸 것 같던데.”
“지금 갖고 있어?!”

완의 얼굴이 붉어진다.

“아니, 집에……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 그 쪽지를 완이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자신의 프로포즈가 그 애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는 것을, 완이 알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누난, 어떻게 이렇게 담담해? 누군지 알아내야 할 것 아냐!”
“……?”
“모르겠어? 그놈들이 누나를 그렇게 만든 거라구!”
“‘그들’이 우리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니?”

그래, 이게 원래 우리였지. 화내는 것은 너. 거기에 동조할 수 없는 나. 완에게 말하는 순간에,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정말로 ‘그들’이 ‘우리’인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여신이를 죽여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그 종이를 보았을 때 느꼈던 그 괴리감의 정체를 깨닫는다. 어쩌면 그 애는, 내가 그 애를 죽여가고 있었다는 걸 내게 알리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누, 누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가 뭘!”
“글쎄…… 솔직히 난 모르겠어.”

속에서부터 한숨이 치밀어 오른다.

“그 애가 왜 그래야 했는지. …혜정이는 왜 그랬는지.”

마침 어머님이 밖으로 나오셔서, 우리 둘은 쭈볏거리며 일어났다.

“효정이 올 시간이라서 집에 가봐야겠는데…, 두 사람 잠시 나 다녀올 때까지만 좀 있어주겠어?”

“병원에서 밤새시려구요?”

“그래야지, 쟤 혼자 둘 수는 없잖니.”

혜정이 아버님이 문득 떠오른다. 완고하시던, 꽤 무서운 인상으로 기억되는 평범한 회사원. 그 분이 이런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그 병원에서 하룻밤을 새울 아내를 어떻게 보실지.

“제가 병실 지킬테니 들어가서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 교대하죠.”
“어떻게, 나경이 일도 있을텐데….”

그러나 반가운 표정이 잠시, 숨지 못하고 스친다.

“마감까진 여유가 있어요. 병실에서 해도 돼요. 마침 컴퓨터도 들고 나왔거든요. 걱정 마시고 들어가서 푹 주무세요. 오늘 많이 놀라셨을 텐데.”

“그렇지만….”

“그럼 저도 함께 있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완이 대뜸 끼어든다. 어머님의 얼굴이 그제야 편안해졌다. 어째서 세상의 어머니들은 모두 저렇게 닮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 그럼 부탁해. 두 사람 꼭 부모님께 연락 드리고.”
“예, 내일 아침에 뵈어요.”

황급히 어머님은 종종걸음으로 멀어진다. 세상을 등지려 한 딸만큼이나 입시에 시달리는 딸도 걱정이 되시는 것이 세상의 어머님. 그 등이 무척이나 좁다.



헤정이는 잠들어 있었다. 그걸 보고 어머님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신 듯 했다. 전화를 마치고 돌아와선 자기가 밤을 샐 테니 걱정 말라던 완은 먼저 코까지 골며 잠들어 버렸다. 나는 혜정이한테서 조금 떨어져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다가 전원을 껐다. 어쩐지 어수선한 기분.

“…언니?”
“아, 깼니.”

나는 의자를 당겨 혜정이에게 다가가 앉았다.

“어머님 들어가시라고 했어. 집엔 효정이도 있고 하니까.”
“잘됐네요.”

혜정이 보조침대에 누운 완을 보며 조금 웃었다.

“귀엽죠.”
“응.”
“선생님은,”

혜정이 말을 끊고 나를 쳐다보았다.

“응?”
“오빠 이야기 할 때만 웃어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 …너무 잦다.

“왜 모두 딴 데만 보는 거죠.”
“…….”

우리는, 왜 이렇게 닮았을까.

“너는 여신이를 보고 있었잖아.”
“신이 언니는 날 안 봤어요.”
“신이는 날 봤지. 네 말대로라면 나는 완을 봤고, 완은 신이를 봤고.”

20대라는 것처럼 어설픈 것이 또 있을까. 섣부른 성인이라는 기대. 책임져야 한다는 것과 또 벗어나서는 안되는 것들. 그 어정쩡한 성년이라는 범위 안에 있는 나. 그리고, 그 안에 이제 막 들어서려는 너.

우리는 그렇게, 서로 엇갈린 곳을 보고 있었어.

나는 이제 겨우 스물 일곱의 나이다. 세상에 대해서 잘 안다거나, 세상살이의 노하우가 생겼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기만이다. 혜정이 앞에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아우가 스스로 맺음을 하기 위해서 했던 생각들이 어쩌면 나의, 그 날과 같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충분히 잤니?”
“예.”

어색하게 혜정은 웃었다. 속이 아플텐데. 위세척이라는 것은 꽤 끔찍한 일이다. 위세척을 한 번 당해봐야 다시는 그런 짓을 할 생각을 못하지, 라고 농담처럼 말하던 닥터들의 음성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막 깨어나 눈을 뜨지 못하고 있던 내게 들렸던 음성들은, 웃음소리였다. 숨을 죽인 낮은 웃음소리, 비웃음, 조소. 그들은 무엇이 그렇게 우스웠던 것일까.

“아깐, 미안했어.”
“아니예요.”

혜정은 대답하며 다시 웃었다.

“신이 언니 생각이 났어요. 누구든, 언니를 아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어서… 오빠한테 전화한 거예요.”

완이 이야기한 것과 다르다.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한다.

“처음엔 두 사람이었는데, 선생님과 나. 언제부터인가 하나씩 늘어났죠. 서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난, 다섯이라는 그 숫자가 참 불안했어요.”

“…다섯이라.”

“짝수는 안정적이고, 홀수는 불안정하고요. 선생님과 나, 이 짝수가 오빠가 들면서 홀수가 되고, 신이언니가 들어오면서 짝수가 되고. 이게 참 좋았는데. 다시 홀수가 되고 나서 짝수로 돌아갔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더라구요.”

몇 년 전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던 그 아이. 이야기의 내용은 그 때만큼이나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꼭, 내 탓인 것 같았어요. 다시 짝수가 된 게.”
“…바보같긴.”

어쩔 수 없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상실에 대한 부채감. 누구에게도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없을 때, 책임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때로는 이성적인 이유를 달고, 때로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이유를 달고.

“그런 이야기를 오빠한테 했는데, …오빠가, 신이언니한테 한 이야기를 알게 됐어요.”
“…아아.”

혜정은 씁쓸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몇 년 전에 그 애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모르셨죠? 선생님을 첨 만나기 전부터, 몰래 약 모으고 있었어요.”
“…….”
“그게 생각이 났어요. 한참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혜정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수능 성적표가 나오던 날, 갑작스럽게 받은 전화 수화기 너머로, 혜정이는 내가 다닌 그 대학에 가겠다 말했었다. 알았어야 했을까. 그 때 니 감정들을.

“이제 괜찮아. 괜찮을거야.”

어색한 말들. 내게 나온 것 같지 않은 말들. 이럴 때면 여신이는 어떻게 했더라? 알 수 없다. 관심갖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언제나 여신이의 몫이었으니까.

“다신, 그러지 않을거지?”
“……네.”
“그래, 됐어.”

힘겨운 혜정의 대답에, 가슴 한 쪽에서 막혀 있던 무언가가 뚫리는 느낌이 든다. 이 감정들을 감당할 수 없어서, 네게 처음 손찌검을 해버렸던 것일까.

다음날 아침 일찍, 고등학생들이 학교로 가고 났을 즈음에 어머님은 숨을 몰아쉬며 병실로 돌아오셨다. 혜정은 며칠간 입원을 해야한다고 했다.

“또 올게.”
“예.”

혜정이 웃으며 우리를 보냈다. 조금은 안정적인 눈동자로. 완은 얼굴을 붉히며 내 뒤를 따라 나왔다.

“인기인.”

쿡. 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치며 나는 웃었다.

“뭐, 뭐야?”
“그런 게 있어.”

완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 나는 다시 웃었다. 짝수는 안정적인 수이고 홀수는 불안정하다…. 하지만, 이젠 홀수 안에서 안정적이 되어야만 하는 거다.

어머니께, 전화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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