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3.시현



현관문을 열었을 때, 거기엔 완이 서 있었다. 낡아서 사용하지 않는 운동기구의 녹슨 철막대에 기대어 있던 완은 날 보자 어색하게 웃었다.

“벨은 왜 안 눌렀니?”
“이 시간쯤이면 나오겠다 싶어서.”

그건 사실이었다. 밤샘작업을 하든, 아니든 간에 내 기상시간은 한결같이 열한시였다. 그리고 정오무렵에 집을 나선다. 그건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면 자연히 알게 되는 생활 리듬이다. 내가 직장 같은 것에 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대학 후배들이 날 찾아올 때에도 나는 벨을 아무리 울려도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안 나오면?”
“한 시간쯤 있다가 돌아갈 생각이었어.”

완은 다시 머쓱하게 웃었다. 무릎이 편하다는 이유로 즐겨 신는 내 운동화 굽은 육센티. 그런 내가 올려다보아도 꽤나 높은 시선에 있는 것이 완이다. 난 올려다보기가 지쳐 엘리베이터 앞으로 먼저 걸어갔다.

“어디 나가는 길이야?”
“커피가 떨어졌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서 우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안은 두 사람이 있기에는 너무 넓고, 또 어색했다. 내가 완과 단 둘이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잠시 생각해본다. 기억나지 않는다.

“충격이었어? 내가… 프로포즈 한 게?”
“아니.”

엘리베이터가 지상에 닿는다. 완은 앞장서서 작은 차 문을 열었다. 빨간 색의 마티즈는 완에게 무척이나 안 어울린다. 앞좌석에 탄 내게 완은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또 어색하게 웃었다.

“어디 현대, 아니면…?”
“롯데.”

차 앞 백밀러에는 작은 토토로 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그 작은 인형이 여신의 백팩에 매달려 있었던 것을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참 둔하구나, 나란 사람은. 똑같은 두 인형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보여도 그 연관성 하나 짐작하지 못했다니.

“초코 라즈베리? 블루마운틴? 자메이카?”
“…모카.”

“모카 싫어하잖아, 나경누나는.”
“상관없어.”

그가 묻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대답 또한 아무런 의미도 있을 수 없다. 모카의 씁쓸한 뒷맛이 싫어서 피해 왔더라도, 어느날 갑자기 그 뒷맛이 그리워진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 걸 신이와 연관시킬 필요도, 이유도 없다.

“신이누나는, 초코 라즈베리를 좋아했어.”
“그래서?”
“….”

나는 무릎에 놓인 작은 쌕을 꼬옥 끌어안았다. 갈색은 따뜻한 색이지. 따뜻한 커피엔 크림이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야 따뜻한 갈색이 되니까.

“여신이는 초코 라즈베리를 좋아하고, 와일드스트로베리 티를 좋아하고, 홍차의 브랜드는 위타드를 좋아하고, 커피는 맥너힐을 좋아하지. 여신이는 SF와 환타지를 좋아하고, 작가는 송경아와 신경숙과 엔데를 좋아해. 그 앤 아삼 홍차에 사과 슬라이스를 넣어 먹는 걸 좋아해. 긴 치마를 좋아하고 모자를 좋아하고 음악은 엔야와 이승환을 좋아하고, 영화는 피아노와 불멸의 연인을 좋아했고. …그래서 어쨌는데?”

한참을 달리듯이 말하고 숨이 차서 나는 말을 멈추었다. 완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나한테 뭘 원해? 왜 모두 내게 여신이는 어땠다고, 여신이, 여신이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내게 뭘 바래?”

“나경누나, 신이누나는…….”

“그만해! 그만 하라구! 너도 그럴 거야? 너도, 신이는 날 좋아했다고, 그런데 난 신이한테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처럼, 그런 눈으로 그렇게 말할 거야?”

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얼굴을 머쓱하게 붉히며, 차 앞에 뭔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냥 누나가 들어줬으면 했어. 누구든, 아는 사람이면.”
“…나는 몰라. 난,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여신이를 모른다구.”

“몰랐어. 신이 누나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말한 적 없었어. …물어본 적도 없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완도 나도, 오늘은 모두 비정상적이다. 내가 그에게 화내는 것도, 그가 누군가가 화를 내는 걸 그냥 듣고만 있는 것도, 평소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완의 담담한 음성에 난 조금 미안해졌다. 평일 한낮의 백화점 주차장은 그래도 한산한 편이라서, 차는 지하 1층에서 주차시킬 수 있었다. 완은 차문을 열어주었다.

“…너희들 어쩐 일이냐?”

차 밖으로 나오다가 목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시현이 맞은편에 막 주차를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어, 시현형? 형은 여기 어쩐 일이예요?”
“글쎄? 아마 네 옆에 서 있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알거다.”

완이 나를 쳐다보았다. 난 시현을 쳐다보았다. 그가 피식 웃는다.

“못말리겠다, 나경이 너 여자가 맞긴 하냐? 100일은 챙겨야 할 거 아냐. 누군 여자가 너무 극성이라 괴롭다는데.”

“두 사람 언제 그렇게 된 거예요? 어, 나만 깜쪽같이 몰랐네.”

완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래, 저 웃음이 완에겐 어울린다. 하지만 나는 그 장난에 보조를 맞출 감각도 없는 사람이다.

“뭐가 백일이야, 류시현씨. 장난 그만 쳐.”
“뭐가 백일이냐니--. 나경아, 석 달 열흘 전의 그 불타는 고백은 어쩌고?”

벌써 그렇게 되었나, 라고는 하지만 석 달 열흘 전의 그 일부터 시현이 백일을 세어가고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불타는 고백이라. 하긴 거창하긴 했지. 택배인지 커다란 상자가 집으로 와서 풀어보니 거기엔 하얀 백합꽃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래서 류시현은 바보다. 나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데.

지하쪽의 출입구로 들어갔다. 출입구 왼쪽에는 포숑의 매장이 있다. 백화점에서 즉시 즉시 구워내곤 하는 포숑의 빵이나 케익들은 모두 지나치게 달아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정성껏 찍어서 만든 쿠키류들은 다른 곳에서 맛보기 힘든 맛이 있어서 간간히 약간씩 섞어서 사들고 가곤 했다. 그래, 이런 날엔 조금 단 것을 먹어도 좋을까.

“그런데 두 사람 점심은 먹었어?”
“아뇨, 형은?”

“나경이는 분명히 안 먹었을거고, 뭐 사러 나왔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점심 먹으러 가지?”

시현은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시현씨는 뭐 사러 나온건데? 약속 있었던 거 아닌가.”

꽤 많은 쿠키를 사버리면서 나는 담담히 물었다.

“이런, 그새 또 잊어먹었군. 나경아, 백일 선물 사러 나왔다니까.”

나는 시현을 담담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완처럼 큰 키는 아니지만, 운동화를 신고도 올려봐야 하는 시현의 키도 작은 키는 아니다.

“이상한 말은 그만해줘, 나는 그러자고 한 적 없잖아. 난 분명히 싫다고 말했어.”
“하지만 나도 그만둔다는 말은 한 적 없다, 이나경.”

싱글거리는 시현의 얼굴에 울컥, 화가 치민다. 나는 휙 돌아서서 커피 매장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당황한 완이 나를 따라 쫓아왔다.

“나경아!”

시현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 것처럼, 나는 모카커피 100g을 사서 쿠키를 넣은 봉지 옆에 넣는다.

“이나경!”

커다란 손이 내 어깨에 닿는다.

“손대지마!”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시야가, 하얗다. 나는 그 새하얀 빛 속으로 잠겨버린다.





“얼마나 놀랬을까, 고마워요, 두 사람.”
“아닙니다, 어머님이 더 놀라셨죠….”

두런두런, 멀리서 이야기소리가 들린다.

“요즘은 괜찮았는데….”

어머니의 말 끝은 깊은 한숨으로 묻힌다.

“저 애 아버지가… …였는데, …신이가….”

잘 들리지 않는다. 어머니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어머님, 전 나경이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류시현. 정말 웃기고 있군. 또 무슨 소리야. 몇 번이나 말했는데. 하지만 머리가 이렇게 맑은데도 몸은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시현이라고 했죠? 내가 아주 든든하네. 나경이가 아무 말도 안해서, 걱정을 했었는데. 완이와는 아는 사이인가?”

“…예, 저희 학교 선배예요.”

겨우 손가락이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나는 힘들게 일어나서 조금 열려있는 방문을 왈칵 열었다. 거실에서 둘러 앉아 있던 세 사람 중에 제일 먼저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은 어머니, 완과 시현이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나를 보았다.

“나경아, 왜 일어나니? 좀 누워있지 않고.”
“괜찮아, 나경아?”

시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 얼굴이 싫다.

“나가.”
“나경아, 너 그게 무슨….”

어머니가 놀라 만류했다. 하지만, 내 목소리엔 더욱 힘이 실렸다. 오래 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벌써부터 다리가 떨리기 시작하니까. 그러니 다시 주저앉기 전에, 이런 모습을 더 이상 저들에게 보여 줄 수는 없단 말이야.

“나가라고 했어, 류시현씨.”
“…쉬어, 그럼. 다음에….”
“연락하지 마.”

나는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그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벽 너머로 시현이 돌아가며 어머니께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뼈가 굵은 손이 문을 노크하는 소리.

“나경누나?”

완이다.

“왜?”
“왜 화난 건지, 말해줄 수 있어?”

바보같은 녀석.

“나는, 이런 거 잘 못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흐흠, 벽 너머에서 헛기침하는 소리. 진지한 말을 하기 전에 어색한 마음을 다듬기 위해서 완은 늘 저랬다.

“시현형, 좋은 사람이야. ”
“…….”
“누나가 그러는 것도 이유가 있겠지만, 잘 생각해줄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관문 소리가 났다. 정이 많은 어머니는 시현이 차를 타는 것까지 보고 올라오셨을 것이다.

“그래서, 안돼.”
“응?”
“…너무 좋은 사람이라구. 가 줘.”

완이 일어서는 소리가 들리고, 성큼성큼 걷는 완의 걸음이 멀어졌다.
어머니는 완을 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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