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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드래곤의 연인 [4]

2004.09.16 04:0209.16

4.

다음날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결국 새벽녘에 잠이 든 가연은 기척에 눈을 떴다. 언제 들어왔는지 소리 없이 슬쩍 방에 나타난 아마드는 침대 한편에서 선잠을 자고 있는 가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날이 밝은 지 한참 지난, 정오 무렵이었다. 역시 온몸이 긴장을 한 상태에서 쭈그리고 잤더니 삭신이 쑤셔왔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침대가 너무 푹신해서 허리가 아프기까지 했다.
아마드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 복숭아빛 뺨, 긴 속눈썹, 새까만 머리며 오똑하지만 귀엽게 약간 들린 코……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이 완벽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가슴은 좀 작아 뵈지만 제대로 성숙하면 꽤 볼륨 있는 몸매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 내 반려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자랑스럽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녀의 긴 속눈썹이 깜빡깜빡 하더니만 까만 동공이 나타났다. 새까만 동공에 졸음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그래도 긴장을 풀지 않았는지 금세 또렷해졌다.
“베이베 오늘도 나의 하트에 불을 지피는군.”
그가 달콤한 목소리로 검푸른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물었다. 그러자 가연은 잠에서 덜 깬 눈으로 눈을 쓱쓱 비비고 하품을 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입을 가릴 생각도 안 하고 입을 쩌억 벌려 가면서 기지개를 크게 키며 하품을 쭈압~ 했다.
가연의 속살(?)을 보며 아마드는 가연이 정신도 제대로 차리기 전에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어제 말했던 대로 그대는 나의 반려로 내정되어 있으니까 반항해 봤자 라는 거 알 거요. 결혼식은 3일 후니까 그런 줄 알고 계시오, 베이베.”
가연은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 켜던 자세에서 딱 멈추어서 30초 동안 미동도 하지 않더니 얼음이 되어 바삭 부서지기 일보직전 정신을 차렸다. 잠시 팔을 털썩 떨어뜨리고 얼굴을 숙이고 뭔가 생각하더니 심각하게 아마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해야 하는 거라면 하는 수 없겠지요.”
라고 의외로 선선히 승낙을 했다. 그러나 이대로 조용히 넘어가면 스토리가 진행이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홍가연 양은 마왕 아마드에게 따먹혀서 2세도 낳고 오순도순 해피하게 sm을 당하고 살았대요~ 라고 한다면 돌이 날아오겠지?
홍가연 양은 코믹이계깽판판타스틱로맨스의 주인공답게 술렁술렁 넘어갈 리가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었다. 가연은 잠에 덜 깼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야무지게 말했다.
“다만, 그 전에는 내 몸에 손 하나 까딱할 생각하지 마요. 그때는 나 죽고 당신도 2세의 꿈은 집어치워야 할 거예요!”
가연의 맑은 눈에는 건드리면 확 죽어버릴 거야란 오기로 가득했다. 선잠이 들기 전에 생각한 것은 의외로 낙관적이 생각을 가지자는 것이었다. 자기가 불에 타죽기 전에 메이슨이 나타났다면 역시 이 느끼한 작자랑 결혼하게 되기 전에 나타나주지 않을까. 게다가 이 세계에 끌려온 목적은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자기 인생이 끝나게 될 거라고는 조금도 믿고 있지 않았다. 어떤 소설에서 여주인공이 망가지게 그냥 둘 것인가, 라고 일말의 희망을 가질 만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며 메이슨이 구출하러 오기만 기다릴 뿐이라고만은 생각하지 말자. 게다가 가연은 아직 그 힘이 어떤지 미지이긴 했으나 드래곤과 마왕의 반려라는 엄청나게 불운함에 비교되는 행운이 있지 않은가!
언제까지나 음울한 생각만 하면서 침대에서 훌쩍일 수 없었다고 결심하며 가연은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어떻게든 버티고 살자라고 다시 한번 맹세하면서 어릴 때처럼 엄지손가락을 물고 잠이 든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드가 결혼할 거라고 말하는데도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속으로는 저 능글능글한 얼굴을 후려치고 싶다는 마음만 한가득이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다. 아무도 나를 지켜줄 수 없을 때는 아무리 힘이 없는 나라지만, 한도 내에서는 지켜야 하는 것이다.
버르장머리 없이 저 빠다대마왕의 화만 돋구어서 괜시리 구박덩이가 되거나 도망도 못 치고 에찌한 일을 당할 바에야, 말을 듣는 척하다가 기회를 틈타 도망이라도 치는 편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가연은 나름대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노무 제대로 된 게 없는 세상 따위 가까운 시일 내에 자기의 행운의 힘으로 최대한 때려부서주마 라고 마음속 깊이 한과 오기와 투지로 활활 불타오르게 된 한국의 열혈동인녀 아니 열혈녀 홍가연이었다.


가연이 머물고 있는 궁은 마왕성의 가장 안쪽에 있는 내궁으로 다른 성들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마왕의 거처이자 애첩들이 사는 곳이었다. 가연은 최소한 허락받은 것은 장미 정원 정도는 돌아다닐 수 있었다. 마왕성에서도 작은 내궁인 이곳은 작지만 꽤 높은 탑이 있었고 탑을 정원이 둘러싸고 있었다.
일단 승리를 하려면 나를 알고 남을 알면 백전백승 지피지기라고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 척하면서 마왕성의 여기저기 구조를 보면서 도망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아마드의 장미정원에는 장미향 말고도 다른 몽롱한 향이 섞여 있었다. 마치 엘리베이터에 듄이나 버버리를 지독하게 뿌린 여자랑 같이 타고 있는 것 같을 정도로 독하고 달착지근한 향이었다.
말이 산책이지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곳곳에 호위병이 서 있는 정원에서의 산책도 답답했지만 가는 곳 족족마다 나무 뒤에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더욱 지긋지긋했다.
장미덩쿨 혹은 나무 뒤, 벽 뒤 등에서 그녀를 쏘아보는 눈이 수십 쌍에 이르자, 점점 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질투와 분노의 눈길, 혹은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는 욕망의 눈길 속에 하루도 지나기 전에 지쳐 더 이상 아무데도 가고 싶어지지 않았다. 음산하고 기괴한 조각들이나 오오라가 답답하기만 했다. 장미향에 구역질까지 날 정도였다. 맑고 신선한 풀 냄새가 맡고 싶었다.
안에 있으면 더욱 답답해져서 하늘마저 붉은 기운을 띄고 있는 밖에라도 나와 있어야 했다. 밖에 나와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가연 앞에 웬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타났다. 별것 아닌 것 마냥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당신이 아마드 님의 반려라는 바로 그 사람인가 보군요?”
“그렇다고 치죠.”
가연은 조금도 지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매끄러운 금발에 유리구슬 같은 파란눈동자에 날씬한 몸매, 최대한 볼륨업을 한 가슴(실제로 뭔가 넣은 게 아닌가 의심되었지만)에 최대한 몸을 드러내기 위해 효과적으로 만든 드레스까지 완벽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결혼은 너랑 할지 몰라도 마음만은 내가 가지고 있어.”
블론드가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말했다.
“결혼도 댁이랑 해도 좋은데…….”
가연이 절대 질 리 없었다. 오기와 투지로 똘똘 뭉친 아가씨, 이계를 평정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러자 그 여자의 입을 딱 벌리더니
“설마 너 아마드 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야?”“그런 강간마에 플레이보이 따위 100명을 갖다주어도 마음 가지 않는다구!”
“감히 너 같은 평민 따위가 아마드 님께 그런 소리를!”
“평민은 좋아하는 남자 취향이 없다든가? 보아하니, 댁이 그 느끼한 강간마한테 관심이 많은 듯하니, 어지간하면 그냥 데리고 가버려. 난 갖고 싶지 않거든. 그따위 버터로 온몸을 둘둘 바른 느끼한 놈팽이 따위는 거저 줘도 사양이라구!”
여자는 분노로 온몸을 파들파들 떨면서 가연의 뺨이라도 때리려는지 손을 들었지만, 가연의 몸에 닿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뺨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오홋홋홋- 이래 뵈도 난 은총을 입은 몸이라구!”
여자는 분한 듯이 오뚜기처럼 발딱 일어났다. 왜 이런 여자랑 이런 말싸움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연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질투와 독기로 뒤섞인 눈빛을 뒤로 하고 한숨을 쉬며 가연은 거처로 돌아가버렸다.
가연의 고민은 그것 외에도 또 있었다. 왜 자꾸 메이슨이 생각나는지 잘 몰랐다. 물론 불에 타죽을 뻔한 걸 구원해 준 당사자이자, 자신의 첫키스를 가져간 이죽이죽거리는 음침한 표정의 왜 그 남자가 자꾸 걸리는지 몰랐다. 게다가 메이슨을 생각하면 가슴이 뻑적지근하게 아파오는 게 혹시, 심장병이 생긴 게 아닌가 고민까지 되었다.

날은 그렇게 흘러흘러 그날이 왔다. 가연은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구해 주러 올 것 같던 메이슨은 오지 않고 저 빠다보이의 느끼함은 날수록 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장미향이 어찌나 독한지 앞으로 10년은 장미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온몸에 베일 정도로 강한 장미로 둘러쌓인 탑 속에 거의 유폐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장미정원 주변에 뭔가 알 수 없는 미로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결국 메이슨이 마왕성에 들어올 수 있던 때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결혼식 당일날이었다. 결혼식장의 경비는 삼엄했다. 고위 마족 100명 이상이 결혼식장을 통째로 감싸는 강한 오오라로 막을 두르고, 함부로 드나들 수 없게 문에서도 경비를 서고 있었다. 일단 어떻게든 결혼만은 저지해 보자 싶어서 결혼식장에 뛰쳐들어갔을 때는, 이미 식이 시작된 뒤였다.
긴 검은 머리를 등 뒤로 길게 드리우고 있는 작은 여자가 보였다. 어깨가 깊이 파인 선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의 고개가 약간 아래로 숙여져 있었다. 여러 겁으로 붉은 베일이 드리워져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연이라고 메이슨은 철썩같이 믿었다. 심안으로 보면 그녀의 몸 주변을 감싼 무지갯빛 영롱한 오오라가 보였다. 메이슨은 여기서 정면돌파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과연 그녀가 저 여자 킬러라고 불리는 마왕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일단 생각은 하지 말고 움직여보자. 본능이 따르는 대로 행동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메이슨은 식장의 붉은 융단을 밟으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가연!”
메이슨의 목소리가 넓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드래곤 로드를 알아본 마족들이 웅성거리며 튀어나왔지만, 가연은 그 웅성거림 속에서도 메이슨의 목소리를 알아보았는지 뒤를 돌았다.
“메이슨!”
긴장하고 있었는지 떨고 있던 가연의 창백한 얼굴이 들어왔다. 얼굴을 보는 순간 메이슨이 외쳤다.
“이리 와!”
한쪽 끝에 서 있던 가연은 아마드가 팔을 잡기도 전에 메이슨의 품으로 몸을 날렸다. 선홍색 드레스 자락의 한쪽 끝을 아마드가 잡았지만 여리디 여린 실크는 그대로 찢어지고 가연은 메이슨의 품으로 무사히 안착했다.
일단 뛰어들 때 가연이 한 생각은 수시로 자기를 덮칠 날만 노려온 이 능글맞은 날라리 양아치 노란머리보다는, 그보단 좀 점잖았던 메이슨 쪽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자기는 짱게집 배달부 같던 그 노란머리가 정말정말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그뒤로 BGM <스캐브로의 추억>가 흐르며가 아니라, 마족들의 아우성 소리를 백그라운드 뮤직 삼아 둘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메이슨은 가연을 데리고 미리 로리엘이 알려주었던 대로 결계가 약한 부분을 찾아 도망가기 시작했다. 워낙 결계가 강한지라 이곳에서 힘을 표출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둘의 텔레포트 거리도 짧을 수박에 없었다. 게다가 힘을 잘 컨트롤하지 못하는 가연 대신 메이슨이 가연의 몫까지 힘을 집중해야 했고 따라서 사정거리는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를 아마드가 바싹 쫓고 있었다. 아마드는 가연의 독특한 오오라를 쫓아가기 때문에 쉽게 그 흔적을 따라갈 수 있었다.
마왕성은 넓었다. 고딕 건축 양식으로 음산하고 뾰족하게 하늘을 찌를 듯하고 여기저기 벽에 조각되어 있는 석상은 기괴했다. 날아오를 것만 같은 고블린과 오크 떼거지들,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몬스터로 가득했다.
마왕성을 겨우 벗어나자, 황량한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마왕성은 넓은 황야 한가운데 서 있는 높다란 돌로 쌓은 성이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접근하는 무리가 뚜렷하게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해자를 파 가운데 강이 흐른다. 따라서 뒤에는 강, 앞에는 넓은 황야가 펼쳐져 있는 자연요새였다.
그 높다란 성문의 해자 앞에는 사비네가 대비하고 있었다. 사비네의 마력으로 이곳을 통과하기에 무리였던 것이다. 물론 로리엘은 게이트를 열어주고 잽싸게 튀어버린 후였다.
거의 해자 앞에 이르렀을 때 이미 연락받은 경비병들이 성문을 닫은 후였다. 그에 따라 마력 자체가 흐르는 마왕성 위로 두툼한 오오라의 벽이 생겨서 통과할 수 없어진 뒤였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메이슨이 사비네를 돌아보았다.
“내가 멋진 걸 보여주지.”
가연은 이 사람이 지금 미쳤나 싶어서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러자 메이슨이
“모르프!”
하고 외치면서 팔에 차고 있던 인장 팔찌를 열자, 그 속에서 금빛이 흘러나와서 하늘 위의 두툼한 진홍빛 오오라를 뚫고 황야로 날아갔다. 그 금빛은 사비네의 몸을 포커스로 그 주위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인장팔찌에서 흘러나오는 그 강한 빛에 가연은 눈을 뜰 수가 없었지만 조금 뒤 적응해서 눈을 들어보니 높은 벽 뒤로 무언가 강한 금빛에 뒤덮인 게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때 마왕 아마드가 나타났다. 그뒤의 부하들이 슬슬 둥글게 원을 그리며 좁혀 포위하려 했다.
그 순간에도 금빛은 점점 더 강해졌고 그에 따라 사비네의 몸은 점점 거대화되면서 금속빛을 띤 물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인장에서 빛이 나가는 게 멈추고, 황야가 다시 정적으로 조용해졌을 때, 무언가 오오라를 뚫고 성벽을 부수며 나타났다.
거대한 기계수는 금빛의 광채를 뿌리면서 플래티넘 브로드소드를 들어 두꺼운 성벽을 내리치자 가루가 되어 마력으로 굳건하게 지어진 성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단숨에 격파한 뒤에 다시 한번 브로드소드로 마왕의 부하들을 내리 누르자, 흔적도 알아볼 수 없는 강한 열기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개미떼를 죽이듯이 마왕의 부하들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검은 빛을 내뿜으며 사라졌다.
사비네는 마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대신에, 다른 마력으로 강한 존재로 사용될 수 있는 몸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메이슨이 괜히 이런 애물단지를 데리고 있던 것이 아니다.
아마드는 냉정하게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아마드도 자신의 귀걸이를 하나 빼었다.
“호오 내 신부를 납치해 간 게 다름 아닌 블랙 드래곤 로드 메이슨이었구려. 오랜만이오. 천오백 년 만이던가?”
메이슨은 아무 말도 없이 아마드의 눈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드의 푸른 눈에 붉은 빛이 점차로 강하게 모이기 시작하면서 사나운 바람이 아마드의 몸을 둘러싸고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마드의 푸른 눈이 차가운 핏빛을 띄기 시작했다.
“1500년 전에 그때 제대로 못해 본 걸 지금 이 자리에서 해보자구.”
메이슨은 침착하게 가연을 꼭 쥐고 있던 손을 푸르면서 손목을 한 번 우두둑 꺾었다.
“누가 너의 신부이고 누가 먼저 납치해 간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입은 여전히 뱀처럼 매끄럽군.”
“승리를 그대에게 바치리.”
가연에게 느긋하게 농담까지 해가면서 그는 점점 변하고 있었다. 메이슨이 그때 손목에 찬 인장팔찌에 대고
“사비네, 타겠다.”
그러자 거대 괴수 사비네가 손을 내밀었다. 메이슨은 가연의 손을 이끌고 사비네의 손에 올라탔다. 사비네는 그들을 소중하게 감싸 안아서 머리 위에 모자처럼 쓰고 있는 조종관 안에 앉혔다.
몸이 변하는 중인 아마드는 거대 괴수가 된 사비네와 그 속에 들어가 있는 메이슨과 가연을 느긋하게 쳐다보았다. 이 두 괴수의 중심으로 팽팽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이것은 마치 도쿄 시에서 고지라 대 킹기도라 또는 가메라 대 갸오스와의 대결 같은 팽팽함이었다. 한발 누가 내딛을 때마다 뭔가 부서지고 이 땅의 어딘가에 지진이 나고 해일이 몰아치는 그런 형상이었던 것이다. (나라면 이들한테 손해배상 청구할 거다. -_-;)
고로 이 둘은 여자애 하나 두고서 이 세계에 대한 엄청난 민폐 중의 민폐를 저지르는 중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이계깽판타지로맨스라는 증거가 아니고 뭐이겠는가.

가연은 메이슨 옆에 앉아서 둘의 기세를 살펴보았다. 암컷 하나를 사이에 둔 두 수컷은 엄청난 긴장감으로 팽배해 있었다. 일단 마왕 아마드의 경우에 결혼할 정도로 마음에 든 여자는 극히 드물 뿐만 아니라, 그 여자가 자기의 2세까지 생산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운은 없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메이슨은 가연 아님 자신이 직접 알을 낳아야 하는 (본인 생각에) 체면 구기는 일을 해야 했다. 게다가 아마드는 마왕, 메이슨은 드래곤 로드…… 이 둘에게도 나름대로의 소시얼 포지션과 함께 체면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까짓 여자 하나 때문에 부딪치더라도 여기서 진다면…… 즉 둘 다한테 물러날 데가 없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평원에는 바람 하나 불지 못한 채, 긴장감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은 침 한 번 삼키질 못할 정도였다. 땀방울도 떨어지기 힘들 정도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가연은 이 둘의 기세를 찬찬히 살펴봤다. 처음에야 어떻게든, 메이슨에게 구원받아 저 느끼버터마왕에게 도망가면 그만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가만 보니 이 둘의 기세가 그걸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아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둘이 싸우는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자신의 알을 낳아줄 2세…… 고로 자기는 이 둘에게 <암컷>이자 애를 낳아줄 대리모밖에 되지 못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상당히 불쾌했다. 다시 한 번 주먹을 불끈 쥐고 이놈이나 저놈을 다 엿먹이겠노라고 굳게 다짐을 했다.
게다가, 아마드도 메이슨도 물러설 의향이 전혀 없어 보였다. 상당히 도덕적인 그녀로서 가연에게 이 둘의 거대한 몸이 부딪칠 경우의 여파를 생각해보니 헐리웃의 영화 <갓질라 2000>의 한 장면이 떠올라 한숨이 피식 나왔다.
가연은 흥분한 메이슨의 팔을 잡고 불렀다.
“메이슨.”
“응?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해.”
“도망가요.”
“뭐라고?”
“도망가자구요, 지금…….”
가연은 메이슨의 냉정할 정도로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온몸 여기저기에 상처투성이었다. 아무리 드래곤 로드일지라도 마왕성에 침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쯤은 대여점에 가서 판타지 10질만 빌려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신 몸 상태도 안 좋고, 아마드는 기분이 몹시 나쁜 거 같으니 여기서 이쯤 해서 도망가자구요. 당신과 내 힘이 합쳐진다면 당신 레어로 갈 수 있을 거예요.”
메이슨은 가연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연은 이세계에 들어와서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자신의 능력을 처음 쓰게 되었다. 메이슨과 손을 맞잡고 간절한 마음으로 메이슨의 레어를 마음속으로 그렸다.
눈앞이 희미해지면서 일렁일렁거리는 뭔가를 통과해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메이슨의 서재가 나타났다. 가연은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천장 가득 높은 책장과 커다란 오래된 책장과 이런저런 도구들이 늘어져 있는 탁자까지……. 그런데 뭔가 놓고 왔다는 기분이 들어 메이슨과 얼굴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던 그들은 동시에 외쳤다.
“앗, 사비네!”
거대화된 사비네까지 데리고 가기엔 이미 힘을 많이 쏟은 메이슨과 가연에게 역부족이었던 것이고 사비네 혼자 그 황야에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 것이었다.
자연히 몸이 거대 괴수화되도록 만든 힘이 떨어지는 순간 사비네는 기운을 잃고 정신을 잃었고 깨어보니 지하감옥이었던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고나 할까.

비겁한콩
댓글 2
  • No Profile
    비겁한콩 04.09.16 04:08 댓글 수정 삭제
    사실 이 뒤에 메이슨과 가연이 사랑에 빠지기 위한 짧은 에피소드를 넣고 가연이 돌아가는 걸로 마무리를 하려고 마지막만 써놨거든요. 에피소드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요? 저에게 해답을 내려주세요. ㅠ.ㅠ
  • No Profile
    가연 04.09.16 16:34 댓글 수정 삭제
    역시 재밌군요!
    에피소드는.. 음... 둘이 알콩달콩 사랑에 빠졌으나 그 때 마다 찾아오는 마왕에게 방해받는.. (... 매우 전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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