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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드래곤의 연인 [3]

2004.09.16 04:0009.16

3.

서재에서 실전에 대한 책을 열심히 보면서 나름대로의 공부를 하던 메이슨은 순간적인 마나의 분출에 갸웃했다. 그와 동시에 뭔가 허전함이 머릿속 가득 덮쳐왔다. 뭔가 있던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근처에 있던 것이 없어졌는데 무엇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아주 친근한 작은, 부드러운 오오라가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에 가연의 오오라가 강타했다. 가연의 무지갯빛 영롱한 오오라가 잡히지 않았다. 메이슨은 자신의 영지 안은 물론이고 산맥 전체에 기의 망을 넓게 펼쳤다. 이 레어는 기본적으로 결계가 쳐져 있긴 했지만, 아주 약한 결계 수준이었다.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블랙 드래곤의 레어에 쳐들어올 정도로 담이 강한 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한구석 약해진 곳으로 마족이 들어왔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급하게 들어왔다 나갔는지 흔적을 지우지도 못한 채 남겨두고 있었다. 그 마족이 가연을 납치한 것이리라.

“사비네!”

메이슨이 부르자 잠옷 차림에 하품을 하며 사비네가 나타났다.

“가연이, 마족에게 납치당했다. 마왕성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봐.”

메이슨은 냉정하게 말했다. 사실 속으로는 냉정하지 못했다. 나의 소중한 알을 낳아줄 반려를 마족따위에게 납치당하다니, 이건 명예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걸 사비네에게 노골적으로 태를 내는 건, 마스터로서의 자존심이 있는 것이다.

“네?”

사비네는 마스터의 긴장된 표정을 보았다. 불쌍한 아가씨…… 이세계에 떨어졌지 블랙 드래곤 로드 메이슨의 반려라 하지, 이번에는 마족에게 납치까지 저렇게 기구한 인생역정은 자기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얘기였다.

사비네는 급하게 챙겨 입고 그리핀 같은 중성의 괴수들이 즐겨 찾는 펍으로 갔다. 이 펍은 마법사뿐만 아니라 온갖 종족들이, 실제로 종종 천신들까지 와서 놀다 가는 곳이었다. 운영자도 미스테리어스한 곳이었다. 실제로 상당히 변태스러운 것이 틀림없었다.

이곳은 절대 싸움 금지인 곳이었다. 하지만 무혈 무투 금지이지 침과 가래가 오가는 말싸움에 한해서만은 예외로 너그럽게 봐주고 있는 곳이었다. 금빛 그리핀 사비네가 들어서자 예전과 물갈이가 되어 있었다. 워낙 하계에 잘 내려오지 않는지라 그녀의 정체를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따라서 사비네의 마스터가 블랙 드래곤 로드라는 걸 거의 아는 자가 없었다. 사비네 역시 대강 눈치는 있는지라 그게 자기에게 불리하면 불리했지 결코 이득이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결코 발설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바에 앉아 마족이고 천족이고 드래곤족이고 할 것 없이 모두 그녀를 쳐다보았다. 허리까지 오는 금빛 머리에, 금갈색의 눈이 요요히 빛난다. 생긋 웃는 볼에 움푹 패이는 볼우물에 어디 하나 흠집 없는 천연 미인이었다. 짧은 튜닉 밑에 몸에 달라붙는 타이즈를 입고 있어서 잘빠진 다리가 노골적으로 들어났다. 게다가 사비네는 사비네만의 묘한 오오라가 있는데, 금속성의 빛을 띤 황금빛으로 발해서 오오라를 볼 수 있는 자들에게는 극히 드문 맑은 기운이었다.

사비네는 일부러 술에 좀 취한 듯해 보이는 마족 청년 옆에 앉았다. 보아하니 실제로 좀 취하긴 했어도 이 녀석이 쓸 만한 오오라의 소유자인 걸로 봐서 못해도 하위귀족이었다. 노려볼 만한 먹이감이라는 소리였다.

“안녕, 달링.”

그녀가 턱에 손을 괴면서 옆으로 고개를 돌려 슬쩍 유혹적인 미소를 뿌렸다. 천만 볼트라도 되는 번개가 번쩍인 것 같은 환한 미소였다. 옛부터 예쁜 여자 마다하는 남자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손짓을 해서 독한 술을 한 병 달라고 했다. 그런 다음 청년에게 한두 잔 권하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따라주는 술을 마다하기에 이 청년은 마족치고 너무 어리버리했다.

“그러니까, 마왕님의 반려가 나타났다는 건가요?”

그녀가 이 말을 작게 했지만 이미 주점 안의 사람들은 다 들은 뒤였다.
누가 뒤에서 “월든이시여, 그녀에게 축복을 내리소서.” 라고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불쌍하다는 의미의 한숨이었을 것이다. 그 변태 녀석의 반려가 되다니 제대로 살기엔 글렀을 것이다.
사비네의 작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과연, 가연의 운명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 것이고, 가연의 붉은 실은 누구랑 맺어 있는 걸까요~♡

365일 한겨울에도 장미가 피어 있는, 마왕성의 장미정원은 그 명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미녀와 야수>의 그 야수도 이곳의 장미를 얻어다 키운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화려한 명성을 자랑했다.

사실 이 장미정원은 마왕 아마드의 취미 생활 중 하나였다. 그의 귀여운 베이베들이나 메리들과 신이 태어날 때 주신 바로 그 아름다운 만년셔츠로 뛰어다니면서 놀 때 주로 쓰는 향락의 장소였던 것이다. 가끔은 장미 가지를 꺾어 그 가시로 베이베들을 희롱하며, 노는 일종의 환락 파라다이스였다.

열린 창문으로 약초와 여러 꽃들이 가득 펴 있던 메이슨의 정원에 비해서 화려하고 코를 찌르고 정신을 멍하게 만들 정도로 강한 장미향이 들어왔다.

가연이 순간적으로 기절을 했다가 눈을 떴을 때, 눈앞이 침침했다. 메이슨이 걸어준 라식 마법이 풀렸던 것이었다.

또 낯선 푹신한 침대에 있다는 것이 가연은 못내 가슴에 걸렸다. 도대체 여긴 어디지. 자신의 입을 막던 그 강한 손아귀와 어두운 그림자, 그게 기억하는 전부였다.

게다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지독한 장미향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때 뭔가 반짝반짝이는 게 눈앞에 서 있는 것을 알았다. 눈높이나 등등으로 볼 때 사람이겠거니 싶었다. 그 빛나는 것이 말을 걸어왔다.

“안녕, 귀여운 아가씨.”

우웩, 온몸에서 닭살이 일 정도로 느끼한 말투에 가연은 온몸에 소름이 오싹해졌다. 저 작자도 변태토룡 못지않은 작자인 게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일어나 앉으면서 보이지도 않으면서 초점이 안 맞는 눈으로 그 남자를 보았다.

“무례한 납치를 용서해 주시오, 레이디.”

점입가경이다. 결정적으로 가연은 메이슨 못지않은 게 아니라 더하면 더했지 결코 만만찮은 자식이라고 속으로 마음을 굳혔다.
가연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하자 남자가 물었다.

“어디 불편한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앞이 안 보여서요.”
“아, 메이슨이 걸어놓은 시력증진 마법 말입니까.”
“네.”

그러나 시력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렇다. 이 남자는 마왕인 것이다. 절대로 올바르고 똑바르고 성격이 좋을 리가 없는 게 당연한 남자이다. 따라서 가연에게 순순히 원하는 걸 해줄 리 없었던 것이다.

“뭔가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네에?”

가연은 순간적으로 너무나 황당했다. 처음에는 에? 하는 물음표가 머리를 둥둥 떠다니다가 이제는 화가 나서 느낌표가 머릿속에 번개처럼 왔다갔다 했다.

“뭐라구? 멋대로 나를 납치해서 메이슨이 걸어놓은 눈 좋아지는 마법도 사라지게 한 주제에 대에가~라구? 벼룩도 낯짝은 있다던데, 정말 낯짝도 없네. 이 토룡만도 못한 놈아! 중 마빡 씻은 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 가연이 입에 담지 못할 험한 욕지거리를 걸쭉하게 내뱉기 시작했다.

“지랄 옆차기 하는 것도 아니고,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뭐, 뭐라구?”
“더 심한 욕도 해줄까? 이 멸치 좇 같은 녀석아!”
“흠흠.”

마왕 아마드의 체면에 이렇게 심한 욕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저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새끼손톱 하나에 명을 달리 했을 것이다. 사실 저 아가씨도, 자신의 반려만 아니라면 이미 절단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가 나서 발갛게 상기된 볼이나, 상아처럼 하얀 피부, 그리고 초점이 안 맞는지 깜박거릴 때마다 나비날개마냥 우아하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긴 속눈썹과 심연과도 같은 그 눈망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KO를 맞고 만 것이었다.

사랑을 농락하던 마왕이… 사랑에 농락당하는 처지에 빠질 수 있을까?
그러나 가연은 아마드가 어떤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지 일단 보이지 않으므로 알 길도 없고, 게다가 굉장히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한참 동안 말을 쏟아낸 뒤 씩씩거리며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 반짝거리는 남자를 흘겨보고 있었다.

“자, 이제 얘기해 보시지요.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

가연은 흥분해서 씩씩대던 호흡을 가라앉힌 뒤에 딱 잘라 말했다.
마왕 아마드 역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 마족은 말이지요. 마족 사이에서는 자식이 생기지가 않아요. 그래서 인간의 몸을 빌려서 자식을 불리는데…….”

갑자기 가연이 벌떡 일어나더니, 발을 쿵쾅쿵쾅 구르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난 정말 재수 없는 인생이란 말이야. 어흑흑. 난 아직 대리 승진도 못했고, 남자친구 사귄 적도 없고, 화이트 데이에 사탕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했는데, 하필이면 이런 이상한 데 끌려와서 첫키스도 빼앗기고…… 이상한 놈에게 끌려와서 강간당할 위기에…….”

가연은 주절주절 읖으면서 순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있는 대로 다 때려부수고 마구 아마드를 향해 던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마드는 어떻게 그녀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귀중한 반려이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2세가…….

“그러니까 나보고 애를 낳으라는 거 아니야!”

가연은 소리를 버럭 질러버리고 씩씩댔다.
결국 아마드는 그녀의 히스테리를 있는 대로 받아들이며 그녀가 자체적으로 진정하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 발톱을 있는 대로 세우고 날뛰는 새끼 고양이에게 그의 일생에서 처음으로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도 메이슨은 당신처럼 납치는 안 했지.”

그러나 가연이 비아냥거리는 순간 아마드의 눈빛이 변했다. 방금까지는 그래그래 다 받아주마 라는 태도가 확 바뀐 것이었다. 아무리 첫눈에 반했다고 해도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야비한 녀석이 마왕인 것이다. 순간적으로 있는 대로 화를 낼 때는 참을 수 있었지만 메이슨과 비교를 하자 순간적으로 질투로 머리가 어두워져버렸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남자는 뇌가 두 개인데 평소에는 위로 생각하다가 좀 흥분하면 아래로 먼저 생각이 가게 된다고!

앞뒤 잴 거 없이 다시 질투로 눈이 어두워진 아마드는 가연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가연은 방 여기저기에서 물건을 던지면서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순간적으로 어둠의 구름이라도 낀 뒤 정적해진 방 안을 둘러보다 아마드와 눈이 마주치자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방이 얼마나 넓은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도 계속 허공만 닿을 뿐이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보조라도 맞추듯이 아마드가 다가왔다.

눈을 돌리며 방을 살폈다. 아직 새벽인지, 방은 어두웠고 열린 창문으로 진한 장미향이 계속 후각을 마비시켰다. 전체적으로 볼 때 방은 꽤 높은 층수에 있기 때문에 뛰어내리는 것은 좀 위험했다. 그리고 문은 여러 개가 있는데 등 뒤로 돌아보니 등 뒤로 작은 문이 하나 보였다.
메이슨의 침실보다 훨씬 넓은 곳에 푹신한 융단과 기이한 벽화들과 장식, 그리고 애들 열 명이 뒹굴어도 될 정도로 큰 사주식 침대가 버티고 서 있었다.

한마디로 이 방은 아마드가 베이베들 혹은 새끼 고양이들(!)과 놀기 위해 쓰던 침실이었던 것이다. 고로, 3P도 불사한다는 소리, 마왕답게 그 역시 절륜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뒤에 뭔가 딱딱한 것이 닿았다. 그리고 손을 내려보니 손잡이가 있다. 가연은 다가오는 아마드를 보면서 입술을 깨물고 문을 열려고 당기고 돌리고 등등을 해봤으나 역시 소용없었다. 문은 애당초 잠겨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방의 문들 모두가 잠겨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입술만 깨물며 앞을 바라보았다. 아마드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비릿한 웃음을 띠더니, 팔로 강하게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더니 그대로 얼굴을 내렸다.

메이슨의 조금은 주저하던 부드러운 키스와는 다르게 아마드는 바로 입속으로 혀를 집어넣는 딥키스를 시도했다. 그러나 가연이 순순히 입을 열었을 리는 없었다. 그의 혀가 그녀의 하얀 이에 닫혀서 침투를 못하자, 아랫입술을 제딴에는 부드럽게 깨물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놀란 가연이 아파서 잠시 방심하는 틈을 타서 잽싸게 안으로 들어간 혀는 가지런한 치열을 훑기 시작하면서 농염하게 혀를 얽혔다.
가연의 작은 혀는 뱀처럼 핥고 빠는 입에서 도망을 가려고 했으나 계속 쫓아와서 강하게 빨았다. 물론 손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어깨에 겨우 닿는 작은 몸을 번쩍 안아서 최종 목적지로 가려 했다.

가연은 내내 아마드의 등을 두들기고 때리고 발로 차려고 했으나 아마드의 힘이 대단한지라 결국에는 저항도 제대로 못해 보고 은근슬쩍 끌려서 침대에 다다랐다.

가연은 체념할 수가 없었다. 순결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름도 모르는 처음 본 남자랑 그런 친밀한 행위를 하고 싶은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팔자에 없는 미혼모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창창한 앞날이 있는데 애한테 발목 잡혀서 사는 인생 같은 것은 꿈도 꿔보지 못했다.

출근 안 하는 휴일에 늦잠도 자고, 오후에 햇빛 나른한 마루에 누워서 데굴데굴하는 고양이 같은 인생을 생각해 보았다. 애가 생기면 그런 나날들은 안녕이여~ 인 것이었다. 자신의 인생이 걸렸다 생각하니 더욱 힘이 불끈 났다. 그러나 온힘을 다해 밀어보아도 때려보아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의 차이에서 오는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그것은 본능적인 공포였다. 힘에 의해 제압당하는 것, 이것이 폭력이지 않은가? 마녀로 몰려 고문을 당할 때 그 광기가 두려웠고 지금은 그 폭력이 두려웠다. 남자와 여자의 몸의 차이가 너무나 확연하게 느껴져서 그녀는 더욱 두려웠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는 이 막막한 세계에 그녀는 바람에도 몸을 흔드는 작은 가랑잎 같은 존재임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힘> 좀더 많은 <힘>을, 그리고 이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힘>이 요구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메이슨이 비교적 신사적이었던 것과 비교해서 그는 가연이 온몸으로 반항해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가연의 몸이 뒤로 출렁하면서 넘어가는 순간 아마드의 몸이 덮쳐왔다. 메이슨 때와는 달리 가연은 무서워서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정신을 잃는다고 저 사람이 봐줄 리 없다는 걸 가연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아마드의 손은 가연의 몸을 좀더 잘 알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에서 여기저기를 훑고 있었던 것이다. 모양 좋은 귀에서부터, 길고 가는 목선, 그리고 탄력 있고 모양 좋은 가슴, 가는 허리까지 그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고 사비네가 입혀준 긴 스커트 자락을 그가 거머쥐었을 때…… 가연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순간적으로 여기서 이대로 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진 가연은 본능적으로 아마드의 아랫입술을 물어뜯어버렸다. 순간적으로 아랫입술이 따끔해진 아마드가 입을 떼었다. 손등으로 쓸어보니 피가 묻어났다.

피를 보자, 그의 눈이 미묘하게 변하더니 붉은색을 요요히 띠기 시작했다. 가연은 더욱 겁을 먹었지만 이미 일은 저질러진 뒤였다.

피를 훔치면서 아마드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미 말투까지 변한 것이 확실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일단 이 상황은 벗어났지만 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두려웠다.

“베이베, 발톱도 봐줄 때나 세워야지. 쯧쯧.”

그가 비아냥거렸다. 가연은 자기가 어떤 신세인지 확실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메이슨은 이게 어찌된 일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분명 구하러 와줄 것이다. 그녀는 그를 잘 몰랐지만 이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화형당하기 직전에도 그가 구하러 와주지 않았던가. 그때까지만은 어떻게든 상황을 이끌어가야 했다.

가연은 요요히 빛나는 아마드의 붉은 눈과 마주했다. 손에서 땀이 고일 정도로 긴장해 있었지만 어떻게든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게 놔둔다는 것은 독자 서비스 측면에서 책을 파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자신에게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또 작가가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데 역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가연은 자신이 무사히 지구로 돌아가야 하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야 스토리가 말이 될 거 아니겠는가.

“미, 미안해요. 난 그냥 무서워서…….”
“뭐가 무서운데 베이베? 나같이 상냥한 연인 본 적 있어?”

순간적으로 상냥? 얼어죽을 상냥…… 너네 나라에선 상냥한 연인이 강간한다든? 이라고 반문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저 냉기 아니 날이 선 칼날과도 같은 살기를 날리는 저 느끼남을 어떻게든 진정시켜야겠다고 가연은 속으로 삼키던 분노와 원망이 결국 터져나오고 말았다.

“메이슨은 그래도 내가 싫다고 했을 때 멈춰줬어요.”

그러자 그의 표정이 더욱 우그러지는 게 그가 메이슨을 잘 알 뿐만 아니라 몹시 싫어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바람둥이 마왕 아마드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감히 내 앞에서 다른 남자와 나를 비교해? 거기다 상대는 자기가 반한 상대인 것이다. 그런 여자를 힘으로 누르려고 했으니 자기도 문제가 없었다곤 절대 말 못할 것이다. 보통 키스 한 번이면 꺄악 넘어가버렸던 여자들과 달리 그녀는 요지부동으로 일절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최대의 숙적과 자신을 비교하는 실수(!)까지 저지른 것이다.

<키다리 아저씨>에 이런 말이 나온다. 주디가 말하길 <남자는 고양이 같아서 털을 제대로 쓰다듬으면 가릉거리지만 반대로 쓰다듬으면 바로 캬악- 한다>고. 바로 가연이 여태 한 얘기들은 털을 반대로 쓰다듬는 얘기였고 그중 최고는 메이슨과 비교한 것이었다. 즉, 아마드는 고양이가 하악하악 하다가 날뛰기 바로 직전이었던 것이다.

그를 밀어내려 하는 가연의 가녀린 몸에 자신의 몸을 겹쳐서 꼼짝 못하게 눌렀다. 도망가려는 가연의 혀를 강하게 빨아들이며 한 손으로는
양 팔목을 잡았다. 그의 거칠고 굶주린 키스에 그녀가 긴장하면서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입술을 굳게 다무리려 했지만 그의 강한 혀와 입이 그녀의 입을 강제로 벌리게 했다.

손으로 가연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앞섶의 단추를 풀려고 하다 결국은 그대로 잡아채버리자 공중으로 단추가 튀었다. 보드라운 비단 사이로 같은 천으로 된 속옷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 역시 찢어버렸다. 하얗고 풍만한 가슴이 드러났다. 대기 중의 찬 공기에 붉은 봉우리가 긴장하는 게 보였다. 가는 허리에 비해 가슴은 상당히 풍만했다.

그의 큰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말랑거리는 살덩어리를 그는 한 모급 베어 물었다. 향긋한 향이 풍겨나왔다. 그가 가슴을 입으로 지분거리는 동안 손은 역시 다른 할일을 찾아 가연의 가는 허리에서 동그란 엉덩이로 그리고 날씬한 허벅지 사이로 이동했다.

그의 얼굴이 가연의 입에서 목덜미로 이동했을 때, 가연은 이제 더 이상의 반항이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간을 끌어볼 생각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연은 이왕 화난 것 갈 데로 가라고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일단 궁금한 건 알고 넘어가려고 냉정하게 말을 꺼냈다.

“나는 특이한 체질이라서 드래곤의 반려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당신도 드래곤인가요?”

일단은 아무 말이나 꺼내서 상황을 모면해 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따위 지렁이들 따위랑 나를 비교하다니 섭섭한걸요, 베이베.”
“그럼 당신은 누구죠?”
“나는 마족 중의 마족, 마왕 자는 사안 이름은 아마드라고 하지요, 나의 반려여.”

하면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면서 가연의 작은 손에 입맞춤을 보내는 것이었다. 순간 그 입술이 부딪친 지점을 시작으로 온몸에 앨러지가 돋을 듯했지만 꾹 누르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 소중한 반려가 몸에 상처를 입는다면 어떻게 될 거 같아요?”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지요, 베이베. 내가 그대를 위험에서 지켜주겠소.”

위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자기가 제일 큰 위험이면서.

순간적으로 가연은 탁자에 있던 화병을 바닥에 던졌다. 커다란 화병이 장미와 물을 바닥에 흩뿌리며 깨졌다. 발톱 세운 아기 고양이의 행동을 유심히 보던 아마드는 그녀가 히스테리를 다시 시작했나 싶었다. 그러나 가장 크고 날카로운 조각을 집어 가연이 가느다란 하얀 목의 혈관 부근에 대었을 때 어지간히 간 큰 그조차 출렁했다. 아마드가 주춤하는 기색이 보이자, 가연이 날카롭게 외쳤다.

“더 가까이 오지 마요. 가까이 오면 그어버릴 거니까.”

아마드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 여태까지 이렇게 자신에게 반항한 베이베는 없었다. 표정을 보니 상당히 심각했다. 그러나 아마드가 다가왔으나 가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 거긴 동맥이 아니라 정맥이라구. 거기다가 그런 거 갖고 죽기에는 그대가 너무 건강하다고 생각들지 않아?”

아마드가 아까의 놀란 기색을 지우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가연이 눈썹을 활처럼 휘면서 웃었다. 볼우물이 깊게 패였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죽는 방법은 꽤 여러 가지로 알고 있는데? 이건 단순하게 맛배기일 뿐이지.”

아마드는 가연의 강한 의지를 읽었다. 실제로 화병의 날카로운 조각이 가연의 목에 가느다란 핏자국을 만들고 있는 걸 본 것이다.

여기서 더해서 괜히 더 흥분시켜서 안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았다. 게다가 메이슨보다 못한 녀석으로 찍히는 것이 그다지 도움이 안 되겠다 싶어서 손을 들었다

“알았소, 베이베. 그대 뜻이 그러하다면…….”

일단 아마드는 오늘은 후퇴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두 발 전진을 위해서 한 발 후퇴는 나쁘지 않다라는 자기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그는 후퇴했다.

“일단 오늘은 물러날 테니, 푹 쉬시구려.”

말을 하면서 느끼한 웃음과 Chu♡~를 날리며 사라졌다.
가연은 일단 한국의 가장 오래되고 고루한, 하지만 아직도 쓸모가 있는 은장도 전법으로 적을 물리치고 난 뒤 긴장이 풀리자 침대에 쭈그리고 앉아 한숨을 푹 쉬었다.

“젠장. 열라 아프잖아.”

가연이 침대 시트로 목에 가늘게 그어진 핏줄기를 닦아냈다. 갑자기 온몸에 긴장이 확 내려앉으면서 졸음이 몰려왔다. 역시 적진에 들어와 있다는 긴장 속에 잠을 제대로 잤을 리는 없었다.

한편 메이슨은 사비네를 정보 수집을 위해 내보낸 뒤에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연이 가진 능력은 드래곤의 반려라고만 하기엔 너무 강했다. 특히 자신의 반려가 좀 마이너스적인 요소가 많아서 플러스가 강해진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 너무 강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마족은 가연을 어디에 쓰려고 납치를 했단 말인가? 서, 설마?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메이슨의 앞에 어머니 로리엘이 나타났다. 가죽으로 된 수영복 비스무레한 옷에 망사 스타킹에 굽 높은 하이힐에 키메라 같은 화장까지, 어쩌면 저리도…….
메이슨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로리엘이 비아냥거리듯이 말을 꺼냈다.

“이젠 어쩐 일이냐고도 묻지도 않는구나.”

메이슨은 로리엘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뭔 일인지 안 물어도 알 거 같아서요.”
“이 등신 같은 놈아, 당장 가서 네 여자 찾아오지 못해?”
“어디 있는지 알아야 찾던가 말던가 하죠.”
“어디 있긴 어디 있어 마왕성 아니면 갈 데가 있나!”

그때였다.

“메이슨 님 메이슨 님! 큰일 났어요!”

사비네가 호들갑스럽게 메이슨에게 달려왔다. 급하게 왔는지 이마에서 땀 한 줄기가 흘렀다.

“뭐가 큰일이란 말이냐? 알아 오라고 한 거나 제대로 알아온 거야?”
“글쎄, 가연 님이요. 마왕의 반려로 간택되었다네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가연은 나의 반려다!”
“아니에요! 가연님은 마왕의 반려로 간택이 되어서 지금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려고 한다는데요! 그래서 마족들이 모두 로컬트 주점에 모여서 축하주를 걸쭉하게 마시고 있었어요!”

갑자기 메이슨의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역시 너무나 강한 마력! 어쩐지 수상했어.

“헛!~”

홍가연, 너만 재수없는 줄 아냐. 나도 만만치 않게 재수없는 인생이다!
멍하게 허공에 혼잣말을 하는 메이슨을 로리엘이 기가 차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로리엘이 말했다.

“가자! 메리랜드로~”
“네 그게 또 웬 헛소리세요? 노망이라도 나신 거예요?”
“아마드 놈이 자기네 땅을 메리랜드라고 하니 메리랜드로 가보는 수밖에!”
“맙소사!”
“일단 가자니까.”
“네 그래요. 가요, 메리랜드로~”

비겁한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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