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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화조월석 10

2004.06.30 09:1006.30

이십이일 상오 上午  聽取胡弓音 李四因華明


1.


  날이 맑을 수록 장사 잘 되는 곳이 바로 다관이다. 성 북쪽에 있는 다관 동수거 冬樹
居 에도 화기 和氣 가 차분히 일렁이고 있었다. 성 북쪽의 신분 있는 사람들은 느긋하
게 가을날의 오전을 즐기고 있었다. 모두가 애애한데, 다만 한 사람은 민망하구나.
  강 타고 강북으로 온 기소영은 이사와 함께 의원 매 씨를 찾았다. 매 씨는 무척 바쁜
의원으로, 이른 날부터 병든 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도 많았고, 드문드
문 무예계의 인물들도 보였다. 기소영도 그중 하나였다.
  강물에 배 띄워 강성을 가로지른 이사는 기소영을 데리고 매 씨 의원을 찾았는데,
강성에 유명한 이 의원은 정말로 다망한 사람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두어 시간을 적
당히 지낸 후에야 진료를 받을 수 있겠다는 답을 들었고, 하여 적당히 다관에 들었다.
  기소영은 민망하고 또 무료하다. 이사는 여상하고 담담했다.
  이 아씨는 정말로 만사 쾌연해만 보인다. 또 일처리가 요연했다.
  망설임이 없고, 거침없이 내딛는 걸음도 당당하다. 도대체 이런 사람이 어디에서 나
왔을까? 기소영이 생각하기를, 이런 사람을 배출한 그 문파는 어떤 곳인가?
  차 향기 그윽하고, 생각은 끝도 없이 흘러만 간다.
  둥글게 열린 정문 앞마당으로 구름 그림자가 간다.
  호궁 胡弓 소리 유려했고, 드문드문 패패로 갈린 자리가 서로 다 화연했다.
  기소영은 그제야, 마음 다듬으며 예기한다, 이제 사흘 후면 약정일이구나. 그는 약
속한 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나가 결투를 해야만 한다. 헌데 그의 내상은 여직 다 치유
되지 않았다……매 씨가 재주 있다 하여도, 과연 쉽게 병을 떨칠 수 있을까?
  '다만 죽기로 각오할 따름이지!'
  생각은 끝도 없다. 그저 구름 마냥 멀리 또 무연하게 흘러만 간다.
  요 며칠 간 그는 내공을 크게 손해봤고, 또 공부는 크게 늘었다. 고수들의 경합을 바
로 곁에서 지켜본 덕이다. 이사의 칼질을 보는 것은 대단한 도움이 되었다!
  그건 과연, 한칼이었을까? 기소영의 눈앞에서 네 사람을 죽인 이사의 그 칼은, 정말
로 한칼이었나? 기소영은 이사의 칼질을 잘 보지 못했다……다만 종적을 남기던 그
한칼! 그로써 복도 얻었고, 심구도 늘렸다. 기소영은 원래 이국의 좋은 공부를 오래토
록 해 온 훌륭한 무인이었는데, 이제 귀국해서야 새 공부를 또 하는 셈이 되었다.
  기소영, 망연히 생각에 잠긴 품을 보곤 이사가 천연히 말한다.
  "그대는 크게 근심할 것 없어요."
  문득 흘러든 소리에, 기소영이 깜빡 눈을 감고 뜬다.
  "내가 기 도령을 돕지."
  "아니, 난 그런 걸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소영, 한층 민망해진다. 그는 기풍 올곧은 명가의 자손이요 또 당당한 협객인데,
어찌 결투에 나서며 여인의 방조를 바라겠는가? 그 어찌?
  "나는 물론, 그대의 결투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그대 이미 각오작심했을 터이니."
  마치 제 생각을 다 읽어 읊는 것만 같아 기소영은 어리둥절하다. 이 아씨는 과연 호
리정 狐狸精 이라도 되는가? 어떻게 이내 속내를 다 짚어 읊는 것일까?
  "나는 다만, 기 도령의 상처를 다스릴 뿐이지."
  "내 병은 제법 깊은 것인데, 결투 날짜는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 사람은 어쩌면 정말로, 여우의 정령일지 모르겠다. 기소영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무서운 칼, 알아볼 수도 없는 칼질, 거기에 다시 상처를 치유하는 비법도 안단다.
  과연 사람이 이런 것들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일들을 한 사람이 할 수 있
는 것일까. 그런데 이사는 그렇게 할 수 있다……이사는 정말로 사람인가?
  기소영이 송연히 이사를 바라보는데, 이사는 참으로 담담하기만 하다.
  호궁 소리 가운데 차향 그윽히 흘렀다.
  이사는 과연 정해진 만큼만 먹고 마시는 사람이다. 기소영은 맑은 차로 심정을 달래
는데, 이사는 그저 아뭇소리 없이 그윽하게도, 자리에 앉아만 있구나.
  차를 마시지도, 물을 마시지도 않으며 그저 그녀, 무엇을 바라보고 있나?
  "저기를 좀 봐요……"
  기소용은 또 한 번 화들짝, 놀랐다! 이 사람은 정말로 사람 같지가 않다!
  이사의 말에 황급히 그녀 가리키던 방향으로 시선 던지니, 호궁 흠쾌히 다루던 차박
사 처녀가 장정 두엇에 둘러싸여 있지 않은가? 그들은 무엇인가를 두고 투닥거리고,
호궁 소리는 이미 멎었고, 이사는 시정의 일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
  "이 낭자는 저들의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소리가 무척, 좋았는데."
  그리고 큰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또다시 울음소리가!

  "아앙!"
  호궁을 타던 처녀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처녀를 둘러싼 장정들이 크게 웃는다.
  "아니 이 값어치 없는 칠보잠 七寶簪 하나로 빚을 다 갚겠다는 거냐? 이 초라한 비
녀가 열닷냥의 값어치가 있다는 거야? 닷 푼도 주지 않을 것을 내밀며 빚을 갚겠다
하다니, 너는 이 강성의 호걸들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니냐!"
  얼굴이 얽은 장정이 크게 소리치자, 다른 하나가 얼른 맞장구를 친다.
  "이 계집애는 아무래도 세상일 장사법을 너무 잘 아는 것 같군, 달리 흥정하자 하는
게 아닌가? 원래 평 平 형제가 저에게 관심 있는 걸 알고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두 사내가 껄껄 웃으며 처녀를 희롱하니, 장내 중인이 주목을 하더라.
  "나는 결코, 결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요……"
  차박사 처녀가 울먹이며 항변했다.
  그러자 곰보 평 씨가 주위를 돌아보며 크게 떠들기 시작한다.
  "제위 諸位 께 이 평 가가 고하리다! 여기 수 洙 낭자는 타향 사람으로! 우연히 이 고
장을 지나는 도중 노부 老父 가 몸을 앓게 되어 주아교 主芽橋 건너에 있는 양평행가
襄平行家 에 장기간 투숙하게 되었소이다, 솔직히 이 부녀의 처지가 딱하고 또 양평
행가는 평 모가 돌보는 곳이라 방을 한 칸 빌려 주고 돈도 대 주었소! 헌데도 두 주일
이 넘도록 은혜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내 밥 먹고 내 약 먹으며도 사리더니, 이제 이
두 사람에게 들인 밥값과 약값이 은자 銀子 스무 냥은 족히 되었으니 어찌 분하지 않
겠소? 나는 원래 理財 만 따지는 사람이 아니며 또 좋은 일을 하는 셈 치고 열닷 냥만
받아 강성 호걸 협객의 모범을 보이고자 했는데! 수 낭자는 이렇게 몸을 피하기만 하
다 이제는 이런, 이런 낡은 비녀 하나로 빚을 갚겠다 하지 않소이까!"
  이 말, 평 곰보의 일장 연설에 주목하던 사람들이 고개 끄덕이며 호응을 한다.
  "처자가 너무했군."
  "원래 염치가 없었군."
  "객향인이라니 과연 대접해도 잘  모르는구나."
  "이건 강성 호걸들의 일이니……우리 같은 사람들이 관여할 바 아니지."
  희롱당해 눈물 흘린 처녀는 비분과 치욕으로 바들바들 몸 떨었다. 그녀는 입을 달싹
였지만, 다시 말을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몸짓 표정만으로도 그녀의 부서진 자존
심을 알 수 있겠더니. 억지로 울음 멈춰 사리며, 매무샐랑 추스리더라.
  "자, 너는 이제 나를 따라가자!"
  평 곰보가 처녀를 끌고 가려 하니, 마침내 처녀가 이야기를 시작하더라. 원래 그녀
는 호궁을 타며 노래를 하는 차박사인데, 그 소리 곱지 않겠는가. 다만 눈물 없은 읍
소는 아니라. 자존심이 있고 강단이 있으나 다만 힘이 없어 억울하구나.
  "그대, 그대들은 원래 우리 부녀에게 억지로 빚을 안기고, 실로 우리는 우리의 밥값
이며 약값을 모두 대었잖아요! 그런데도 당신들은 억지로 또 약을 떠안기며 값을 크
게 쳐 핍박하고, 또 내가 일하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이리 못살게 구니……"
  이에 평 곰보와 함께 온 사내가 거칠게, 그녀를 잡아끈다.
  짜아악, 하는 소리에 처녀가 놀라 웅크리는데, 소매가 찢어져 흰 팔일랑 훤히 내비
친다. 그 소리 그 빛에, 다관 모였던 사람들 분분히 일어서 제 갈길을 가거나 아예 모
른 척 제 패들과 함께 그저 저희들 이야기만 한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니,
과연 강성 무림의 인물들에게 항거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흉악한 저이들은 원래가 강
성에서 잘 노는 비밀결사의 일원인데, 공연히 나서다 벼락 맞으면 그 무슨 재수인가!
  다만 호기 있게 나선 한 사람은, 그 사정이 다르니 이이 역시 무림의 인물이다.
  "……하는 짓들이 너무 흉한 거 아닌가."
  박차고 나와 선 사람은 바로 이사다!
  기소영은 원래가 당당한 협사요, 지강한 대장부로 평 곰보 하는 꼴을 구경하다 감연
히 일어서려 했지만, 이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사에게 보호받고 있는
형편에 제 체면을 내세우며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사는, 초연해 뵈지 않
던가? 허나 또 강성의 이 무협 武俠 이라는 작자들, 짓거리가 너무 구차하지 않느냐?
가련한 처녀를 핍박하니 어찌 밝은 해 아래 당당한 호걸이라 하겠는가! 마침내는 분
기탱천, 나서려 하다 보니 이사가 어느덧 앞서 나가 섰지 않은가?
  기소영의 등줄기에 소름이 주르륵, 끼쳤다, 저 두 사람이 다 죽겠구나!


2.


  "낭자는 누구이기로 우리들 구초파 舊草派 의 일에 관여하오?"
  평 곰보가 야기죽거리며 말했다.
  "이사가 온 이후로, 강성의 여무들이 기를 펴는군!"
  옆에 선 장정이 하하 웃는다. 이들은 아주 자신만만했다!
  "이것이 방회의 일인가?"
  이사가 이들을 치어다보며 말했다.
  속기 없는 얼굴에 한 점 분기가 없는데, 웃음도 없다. 속내를 알 수가 없구나.
  "낭자는 내 연설을 듣지 못했나? 나는 억울한 사람이고 이 수 낭자는 잘못이 있는
사람인데 어째서 이 올바른 일에 관여를 하겠다는 거지?"
  평 곰보의 말에 동무가 웃으며 맞장구를 친다.
  "도대체 자기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낭자는 자신이 그 무서운 이사라
도 되는 양 남의 일에 끼어드는구만. 여무란 원래 당당한 사내들의 장사에 끼어드는
법이 아니라는 걸 좀 알려 주어야 하겠어! 교훈을 내려 주어야 하겠어!"
  기소영은 팔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은 심장도 부르르, 떨렸다. 맑은 날에 차향기를
맡고, 시간을 죽이다 상처를 고치려 했던 것인데 돌연, 두 사람이 또 죽게 되었다!
  이사의 행사를 말리자니 그럴 체면이 없고, 또 실로 나선 사람이 이사만 아니었다면
박장하며 찬양했을 터다. 다만 이런 일로, 이런 일로, 이런 일로……
  '살인할 수는 없잖나!'
  그는 벌떡 일어섰다. 지금에야말로 기소영이 나서야 할 테다.

  이사는 여전히 기색 하나 변치 않고 그저, 고개만 저었다.
  "이사는 원래 남의 일에 끼어드는 사람이 아니었지."
  이에 두 장정이 함께 또 크게, 웃었다.
  "보라구, 이 낭자는 이제 아예, 이사와 친분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만!"
  "원래 강호의 여무들은 서로 친하게 지내는 법이라지! 하하핫!"
  그리고 평 곰보는 이사에게 큰절을 올렸다.

  "어, 어어……"
  평 곰보의 동무는 이게 무슨 사단이냐, 싶어 어리둥절하다. 함께 잘 웃던 동무가 어
언간 풀썩, 엎드려 절을 하다니? 혼란 켠에 바람 한 오라기, 일던 걸 문뜩 깨달았다.
그러고야 오호라! 과연 그도 이해를 잘하게 됐다. 저도 똑같이, 절을 올려야 하지 않
겠는가? 복부 깊숙히 발이 꽂히면 누구라도, 엎드러져 큰절 올리는 법이다.
  '저거! 저거였어! 저거였어!'
  덕분에 기소영도 한 가지 깨달았다. 오늘은 여러모로 참 공부 잘되는 날이로다.
  멀찌감치 서서야 겨우 알아본, 이사의 발질이다. 제가 당할 적에는 통 보이지 않았
고 알지도 못했던 그 발질을 기소영은 이제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닥을 구르는 사내가 없고, 멀쩡하게 일어나 황망해 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꿇고 엎
드린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눈 희게 뒤집고는, 아예 말도 없이.

  기소영이 급히 다가와 두 사람을 살피는 동안, 이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수 아
가씨를 살핀다. 겉에 걸친 장삼을 벗어 수 낭자 어깨에 걸쳐 주며 말하더라.
  "당신은 이제 괜찮은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또한 강호에서 홀로 장사하는 사람이니, 좀 더 담을 키워야 할 텐데."
  걱정인지 찌증인지 알 수 없는 이사의 기색에 수 씨 처녀는.
  어안을 한 번, 옴찔하고, 곧 다시 입매를 달싹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제 낯 붉어진 것도 알겠는데, 어째 혀만 달싹일까.
  수 낭자는 과연 재주 있는 차박사인데, 상황 맴도는 사정을 모를 수가 있는가. 차박
사란 원래가 일 살피는 눈이 좋고 들어 새기는 귀가 좋으며 잘 구르는 혀가 있는 법이
다. 수 아가씨 생각하기를, 자신이 바로 곤경에 처한 사람이요 또 강호의 인걸이 저를
도와 주니, 이야말로 이야깃거리 중의 사건이 아니겠는가.
  "고, 고마, 워요……감은 感恩 ……"
  한데도 말이 이어지지 않는 건 그저, 앞에 선 여자가 사람인지 무엇인지 도통 살펴
지지 않는 탓이라. 그저 나서서는 풀썩, 두 사내에게 절 받는 이 여자가 과연 사람일
까? 혹은 영험있는 신불 神佛 이나, 또는 시중의 요정 妖精 은 아닐까? 그녀는 부친을
따라 천지 곳곳을 돌며 풍물을 구경하고, 무림 인물 간의 결투도 종종 구경을 하고 또
노래도 여럿 지었다. 다만 그녀는 본 적 없고, 들은 적도 없는 한순간을 지금 막 겪었
고……돌연 절하며 눈 뒤집는 사내들은 처음 봤고, 그래서 어안벙벙하다!
  "그대는 그들을 살필 필요가 없어요."
  수 낭자 깜짝 놀라자, 두 사람의 목께를 만지던 기소영이 대답한다.
  "과연 크게 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아, 이이는 저이에게 말한 거로구나, 한숨 놓을 때 이사가 다시 수 낭자를 바라봤다.
  그 여상한 눈길 닿으니 홀연, 서늘하여 도근대던 심정일랑 순식간에 다독여진다.
  "당신은 좀 쉬는 게 좋겠소."
  이사는 그녀를 이끌고, 저희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기소영이 어정쩡 따라온다.
  수 낭자는 여직 어안벙벙, 어깨에 걸쳐진 장삼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이사가 타악! 손바닥으로 탁자를 쳤다.
  "여기, 다시 차를!"
  수 낭자 깜짝! 놀라고, 돌연한 사건에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이 죄 놀라 고개를 돌리
며 모른 척, 다시 저희들 얘기에 바빠지고, 여직 절하고 있는 두 사내를 어찌 건드릴
줄 몰라라 하던 점주며가 소스라쳐 뛰어온다. 곧 한 주전자의 차가 다시 내어졌고, 다
과도 풍성하게 나왔다. 미리 손을 써 혹여의 소란을 진정코자 하는 점주의 마음씀씀
이다. 이사는 입에 대지 않았지만, 기소영과 수 낭자는 기껍게 마시고 먹었다.
  "그……낭자는 그러니까……"
  기소영 보기에 이사일랑 입술 꼬옥 사무니 더 말을 않겠구나, 제가 무어든 읊어야
할 것인데. 할 말도 없다. 도무지, 처음 낯 나누는 처녀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으냐?
  원래 잘 읊는 차박사가 말을 못 내니 누가 또 나서서 말하겠는가?
  다만 이사가 그렇게 한다. 이사는 원래 누구도 예견할 수 없는 사람이다.
  "당신은 먼저 마음을 다스리고, 정신이 다 들면 의복을 갖추어야겠지."
  수 낭자는 이미 마음을 다 도닥였다. 다만 눈앞의 한 남자와 한 신불이 말을 하지 않
으니 그녀 처지에 또 먼저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사가 문득 말을 꺼내니, 이제
수 낭자가 무어든 인사해야 하지 않겠느냐. 원래 그녀는 말 잘하는 차박사다.
  "여무 같은 분들이 신불처럼 도와 주시니 우리들 장사하는 사람들도 모두 평안하게
지낼 수 있지요, 소녀 小女 는 원래 억울한 일을 당해 곤란한 처지였는데 영웅들께서
출수하시어 가련한 사람을 구원하시니 다만 감격할 뿐입니다, 다만, 다만……"
  이사가 묵묵부답하니 기소영이 대신 말을 받는다.
  "다만 소저 小姐 는 후사를 걱정하는 거겠지요?"
  "저들은 그저 저희 부녀를 크게 핍박하지는 않았고, 이건 그저 조그마한 일이니까
영웅들께서는 너무 화를 내지 말아 주세요."
  이사는 여전히 말이 없다. 수 낭자에게도 기소영에게도 눈을 두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다구 茶具 만 바라보다, 홀연 고개를 저었다. 무엇이 탐탁찮은가?
  "그들은 원래 한 번 혼이 나야 하지요, 이런 일은 아씨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나
는 원래 그들에게 가르침을 좀 주려 했는데 이 낭자께서 먼저 손을 쓰신 거지요……"
  기소영이 무안해 하는 수 낭자를 위로했다. 이건 큰일도 아니고, 원래 수 낭자가 억
울한 사람인데도 나서서 저 엎드린 두 사내를 변호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기소영은
알 수 있었다. 협사라면 누구라도, 당연히 나서서 도와야 할 테다. 다만……
  "그들은 구초파라고 했던가?"
  박차고 나선 사람이 이사, 무서운 이사라는 게 문제일까.
  문득 운 韻 을 떼곤, 또 고개 돌려 말을 듣지 않는 이사라는 게 문제일 테다.
  "저, 이 낭자, 이건 그저 소소한 일일 뿐이며 저들 또한……"
  기소영도 수 낭자만큼 답답했다. 도대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다시 생각하자니,
대관절 왜 저처럼 당당한 협사가 저 흑도 얼간이들을 비호해야 하는 것이냐.
  "소소한 일이지만, 저이들은 이미 명자 名字 를 내세웠지."
  "아니, 아니 그러니까, 이건 방회의 일도 아닐 테고……이런 일로, 그러니까,"
  "그러니까 여무께선 다시 화를 내셔서는 아니 되어요!"
  수낭자가 급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연 간담이 좋고 강단이 있구나.
  "저들은 원래 소녀에게 관심이 있어서 우리 부녀를 곤란하게 한 것인데, 사실 저들
뒤에는 또 강성의 힘 있는 영웅이 있다고 해요. 여무께서 다시 관여를 하신다면 필히
그이들도 나설 텐데, 그럼 여무께서는 무척, 무척……곤란해지실 거예요……"
  강단있게 말하다 보니, 정황이 기괴하지 않은가? 이미 이사가 관여했는데, 다시 이
지경에서야 손을 뗀다면 자신은 어찌 되는 것인가. 상황이 험악해졌으니, 이제 도망
칠 길조차 막막할 뿐이다. 흑도의 호걸이란 체면을 가장 중요시하는 법이다. 비록 저
평 씨가 사사로운 일로 사건을 벌였어도 이미 방회의 명자를 대었으니 그들이 어찌
모른 척하겠는가? 구초파는 강성 북쪽에서 새로 장사를 시작한 힘 있는 방회였다.
  이런 장사에 명자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구초파의 호걸들은 반드시 자신을 찾아
보복하려 할 테다. 강호에서 체면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때로 그것은, 목숨보다 더더욱 소중한 보물인 법이다.
  이리 고민으로 여념 없는 수 낭자 낯빛이 어둡다. 어찌해야 한담?
  기소영도 여기까지는 대략 짚어냈다. 다만 이사, 이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어 수 낭자 편을 들 수도 없고, 이사를 다독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이 낭자께서는……"
  또 생각을 해 보자 하면, 다독일 수 있는 사람이기나 한 것이냐!
  "차를 다 마셨으면, 이제 가서 사람을 봐야지요."
  그저 담담히,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설 뿐이다.


3.


  기상이 무척이나 맑았고, 하늘은 드높으며 바람은 쌀쌀했다. 가을 점점 깊어만 가
고, 날은 고연히 멈출 줄도 모르니 이미 이십이일이고, 이미 한낮이다.
  수 낭자 도리 없이 이사를 따라 걷고, 기소영은 원래 이사와 동행이다.
  세 사람이 별말도 없이 매 씨 의원의 사업장으로 와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이사는 그저, 몇 마디의 말을 다관에 남겼을 뿐이다.
  "나는 오늘 자약원 自若院 에 있을 것이니, 사람이 오면 그리로 보내시오."

  잠시 걷다, 매 씨네 자약원 문 앞에 서서야 기소영이 물었다.
  "이 낭자는, 그들을 상대할 생각입니까? 그 구초파라는 이들과……"
  이사는 대답이 없고, 이렇다 할 기색도 없다.
  "저어, 여무께서는……저기, 그 사람들은 무척 사나운 호걸들인데……"
  수 낭자도 무언가 말을 꺼내다 다 맺지 못한다. 도무지 이 여무의 정체를 알 도리가
없고,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찌할 작정일까?
  그러면서도 예까지 따라온 것은, 달리 방도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이 두 사람의 협
객에게 도움받아 강성에서 무사히 도망쳐 나갈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을 테다.
  "이미 문 앞에 섰는데, 어째서 들어가지 않나?"
  이사가 비로서야, 고개 저으며 대답했다. ……답이 되지 않는 것 아니냐!
  "어, 그러니까, 나는 다만……"
  "먼저 그대의 상처를 보고, 그간 낭자의 옷도 사고, 다시 그들 일을 처리해야지."
  수 낭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짚어내기를, 분명 이 여무는 자신의 일을 돌보
아 줄 생각인 듯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소소한 일조차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 테다.
  "저는, 저는……"
  "당신은 좋은 사람인데, 어찌 소매 없이 다닐 수 있을까?"
  문뜩 낯 찌푸리며 이사가 또 고개를 젓는데, 이 품 마냥 어색하다. 표정 내보이기 싫
은 기색이며, 말을 많이도 하였다 하며 벋가는 기색이라 기소영이 흠칫 놀란다.
  "들어갑시다, 들어가야지요!"
  더 말 시키다, 화증 내면 어찌 하겠나.
  자약원에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아직 두어 사람이 더 진료받고 난 후에야 기소영의
차례가 될 듯 싶었다. 세 사람은 대청에 앉아, 조용히 차례를 기다리며 가을 하늘을
바랐다. 답답한 사람이 둘, 그리고 사실은 더 답답한 사람이 하나, 대청에 나앉아 멍
하니 하늘만 바라본다. 기소영은 제 처지가 가소로워 헛웃음을 쳤고 수 낭자는 기박
한 만사가 다 지긋지긋했고, 이사는……저 스스로의 추고에 새삼 어리둥절하다.
  그리하여 추회하는 것이다. 잘못 처리한 일에 찌증이 난다. 여복 먼저 구해얄 것을
문앞에서야 떠올리다니? 선후처리를 잘못 택하다니? 시각을 따져 헤아리면 호연한
것을! 그리하여 그로부터 이사는……자신이 왜 여기까지 간예하는 것인지를 도무지,
헤아리지 못하고. 하리망당한 현재가 탐탁찮다.
  그녀는 단호하고 과감한 사람이었다.
  모든 일을 그저 한 칼로 해결할 작정이었다.
  한 가지 커단 일이 있고, 그 때문이라면 무어든 할 수 있었고, 그래서 다른 것에 눈
돌린 적이 이십일 년 생에 한 번도 없었는데, 그랬더랬는데……
  "저, 저기, 제가 그만 결례를 저질렀어요. 저는 수 씨라고 해요."
  "수 낭자. 아니, 저도 그만……정호성 井浩城 의 기 箕 라 합니다."
  햇살 따뜻한데 서로 쌀쌀맞게도 말이 없으니, 통성이라도 해얄 것 아닌가. 도시 풀
길 없는 답답함, 이 먹먹한 시간을 어찌든 녹녹히 눅이며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헌데 이사는 여전히, 묵묵부답 놀음이다. 제 넋 다듬기에 하염없는 탓이다.
  "아, 아……정호성에서 오셨군요, 저는 예전에 정호성 기 씨 명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곳에는 당대에 절한 검객이 계시고, 그 한 분의 검객은 대단히 비정한
분이시지만 당당한 백도의 협사이시며……"
  "수 낭자께선 혹 비정고검 기 대인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네에, 제나라에서 큰 벼슬을 살고 다시 위나라에서 봉작받은 명문의 자손이시라 들
었어요. 그분은 아주 비정한 검객이지만 친구에게 무척 다정한 분이시라고……"
  이에 기소영이 감격하며 마주하여 읍례하더라.
  "그건 아주 오래 전의 일인데, 강호의 친구들이 아직도 우리 집안을 좋게 봐 그리 불
러 주지요. 비정검객 기소작야께서 바로 가부이십니다."
  수 낭자가 답읍하며 웃었다.
  "과연 명문의 고제이셨군요, 과연 장문호자 將門虎子 이십니다."
  "아니, 아직 미흡하여 죄송할 따름이지요, 부끄럽기 그지 없다오……"
  문득 이사를 쳐다보곤 그녀 눈치 보며 가일층 부끄러워하는 기소영에게, 이유를 몰
라 그저 웃기만 하던 수 낭자가 다시 노래하듯 사연을 읊는다.
  "지나치게 겸손하시어요. 행협작의 行俠作義 하시니 어찌 명가 名價 에 합당하다 하
지 않겠어요? 소녀는 원래 호서 湖西 향곡 사람인데, 오래 전 향국을 떠나와 중원 풍
물을 구경하고 또 읊기도 하며 살아요. 우리 부녀는 벌써 십 년 동안 차박사 노릇으로
살림을 꾸려 왔답니다. 단지 우리 부녀 두 사람뿐인데, 사실 위나라의 기풍이 좋고 또
민간의 인심이 좋아 벌써 이 년째 머무르고 있지요. 강성에 온 지는 이제 겨우 스무
날 남짓 되었는데, 이 년 만에 처음으로 환란을 겪게 되었답니다."
  수 낭자도 슬몃, 이사의 눈치를 본다.
  "위나라는 원래 좋은 곳이지요, 수 낭자께서는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소한 사
건이야 비일비재한 것이며, 실로 저들도 그리 크게는 일을 벌이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당당한 기소영이 한바탕 일을 벌일 작정이기도 하다.
  이제 기소영, 제법 흥도 나고 기운도 난다. 이 모처럼의 당당한 협객 행세잖나?
  성안의 치안부처가 갈무리 못하는 인사에 단연히 나서서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협객
의 올바른 행사일 테다. 또 이사가 이미 나섰는데, 자신이 그저 구경만 할 수야 있는
가? 하물며 이사가 참견한 일이니, 이제 다시 기소영이 나선다 하여도 제 면을 세웅
고 협객 체면을 돌볼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사는 기소영의 은인이고, 은인의
일에 조력하는 것은 위나라의 좋은 기풍이기도 하다.
  "헌데 이분 여무께서는……"
  수 낭자가 조심조심 운을 떼자, 기소영이 난감해 한다. 이사의 이름을 자신이 밝혀
도 좋은 걸까? 이사가 먼저 통성 운자를 떼지 않는데, 자신이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하물며 윤명 贇名 을 어찌, 당당한 협사가 함부로 내어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이사가 문득, 수 낭자를 바라보며 입 떼는 순간 콰당! 하며 대문이 거세게 열렸다.

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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