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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棟梁 (2)




나라이름의 서(藇)는 아름답고 풍요롭다는 뜻을 품었다. 그 이름에 걸맞도록 서의 궁궐은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이름 높았다 한다.

<아름다운가…, 차라리 화치(華侈)하다 이르는 것이 옳을게다.>

세밀한 조각이 들어간 옥돌 바닥을 딛으며 태경은 그리 생각하였다.
금박 입힌 기둥이 늘어선 회랑을 홀로 걸으면 그는 언제나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곤 하였다.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이었다. 그러한 순백의 값진 돌로 깎아세운 난간이며 벽감을 따라 금은으로 아로새긴 문양에까지 시선이 닿을 제면 마음속 어딘가로부터는 혼란스러운 기분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하여,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잠시 멈추어 서곤 하는데 그리하면 발 디딘 궁이 흔들리는 것인지, 그 자신이 흔들리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조차도 이제는 아득하였다.

만조 백관이 부복한 가운데 일곱문양 아로새긴 옷자락을 떨치며 선 날이 있었다. 흰 돌바닥 반듯한 대궐 정전 앞에서였다. 화사한 봄볕 떨어지던 날이라 기억한다. 그 날 내려 받아 지니게 된 것으로 죽책문(竹冊文)과 교명문(敎命文)과 세자인(世子印)의 세 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아마도- 그 날 부터였을 것이리라. 누군가 내려주지도 아니한 것인데 이 현기증까지도 받아 품어온 것은. 처음에는 미약한 것이었으나 지금에 이르러 이 어지러움은 종종 태경을 송두리째 흔들고는 하였다. 그때마다 이 내가 흔들려서는 아니된다 하고 수없이 속으로 되뇌이곤 하는데도 그것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나라는 어디까지 기울어 가는 것일까.

궁의 누각을 두른 백옥도 백성의 물들이지 못한 거친 옷감도 말로는 똑같이 희다 이르는 것인데 그 흰빛은 같지가 않다. 궁의 기둥을 칠한 금박도 가난한 백성의 짚더미 인 지붕도 말로는 똑같이 누르다 이르는 것인데 그 누른빛 역시 같지가 않다. 그렇게 오늘도 궁궐에서는 백옥 두르고 금박 입힌 화치한 누대가 올라가는데 그는 이 나라의 세자였다.

그것이 분하다 외치려는 태경을 늙은 신하는 만류하였다. 지금에 주상의 심기를 거슬러 어찌하려 하시느냐고 조심스레 낮은 목소리로 일러왔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진심어린 염려가 담겨 있었기에 태경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 하였다. 왕은 더이상 전처럼 영명하지 않았고 그는 이나라의 불안한 세자였고 그것은 그러한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들려온 목소리에 태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현 표한경. 조금 차가우나 영민한 눈매를 한 소년으로 그의 배다른 아우 되는 이다.

「-아무것도.」

하며, 태경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표한경은 처음부터 답을 바라고 물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말 없이 태경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조금 거리를 두고 함께 걸어 동궁으로 향하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었다. 태경이 오후의 정무를 마치고 돌아올 즈음이면 표한경은 미리 말이 없어도 으레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고 그에 대하여 서로 말한 적이 없건만 어느덧 그것은 정해진 일처럼 되어 있었다. 정전에서 동궁까지 길다면 긴 거리를 그렇게 언제나 함께 걸으며 두 사람은 대화를 하거나 혹은 하지 않거나 하였다. 둘 다 말수가 많지 않았으나 서로가 어느만큼 의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부역에 관한 상소가 있었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표한경이었다. 그는 아직 열 여섯으로 어린 나이였으나 정치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고 그만큼 영리하였다. 태경은 씁쓸한 얼굴로 짧게 답하였다.

「-기각되었다.」

그 말에 잠시 입을 닫았던 표한경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하셨습니다.」

태경이 얼마만큼 착찹한 심정일지 알고 있건만 표한경으로서는 그 말이 최선이었다. 둘 사이에는 또다시 익숙한 침묵이 돌았다. 태경의 입가에서는 자조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우의 말은 옳지 않았으나 옳은 것이었다.

세자는 왕이 아니다.
-그렇게 태경이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사실을 그의 어린 아우는 너무나 쉽게 인정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잘 하시었다고 그리 말한다.

  왕이 윤허한 것을 세자가 소리높여 반대할 수는 없다. 그리 하였다가는 단번에 벌떼처럼 일어난 삼사 관료의 탄핵이 뒤따를 것이다. 현 왕비의 세력이 득세한 지금의 조정에서 태경을 비호해 줄 수 있는 세력은 아주 미약하여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시기에 태경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한 것은 노쇠한 왕을 대신하도록 전권을 맡기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단지 함정일 따름이었다.

대리청정 중이라 작은 왕과 같은 세자라 하여도 왕과 중신들의 비호가 없으면 허수아비가 될 뿐이다. 그들은 태경이 언제까지나 허수아비 노릇만 하고 있을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정의와 혈기로 떨쳐 일어나 이 조정은 잘못되었다 하고 외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뜨릴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음험한 기대와는 달리 태경은 상황을 직시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이 지리한 대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태경의 생기를 빼앗고 있는것만 같았다.

참아야 한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그의 곧은 성품에 그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으나 태경은 그리해야만 했다. 그가 사라진 연후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질 나라를 생각하면 지금 죽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다만-,    

「-다만, 형님께서 옥좌에 오르실 때 까지 과연 이 나라가 버틸지 모르겠습니다.」

마음 속을 들여다 본 것만 같은 아우의 말에 태경은 흠칫하였다. 그 말 끝에 표한경은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알고 있다. 끓어오르는 속을 가진 것이 어찌 나 하나 뿐이겠는가. 하며 태경은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표한경은, 그의 아우는 그보다 한참이나 어렸고 또 이 왕실의 수많은 왕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에 더하여 그 어미는 천출의 궁녀이고 게다가 일찍 죽었다. 태경보다도 훨씬 입지가 약한, 그러나 그 마음만은 더 뜨거울지 모르는 이 영리한 아이의 마음 속에 쌓인 더께가 얼마나 될 것인가. -태경은 그것에 늘 마음이 쓰였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표한경은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다.
둘은 다시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표한경이 조금 잰 걸음으로 다가서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 것은 잠시 후였다.

「예후가 돌아간 지 오늘로 보름입니다.」

「-그래.」

태경은 속으로 <하려는 말이 그것이었느냐-.> 하고 한숨을 뱉었으나 마음의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짧게 답하였다. 그러나 표한경은 녹록치 않았다.  

「헤아리고 계셨습니까.」

「……그래.」

조금 머뭇거리며 태경은 답하였다. 지난 보름 동안 그를 가장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 일이었다.

「예후는 군사를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표한경은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했다.
예후라면 비원의 화치한 누대를 올리는 데 부역할 군사 따위를 내어 줄 리가 없다. 하여, 태경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그리 단정짓는 말을 듣는 것은 속이 쓰렸다.

전 예후가 세상을 떴다. 그 아들인 유진성은 새로운 예후로 주상의 인준을 받기 위하여 수도로 왔었는데 그것이 이십여일 전의 일이다. 시기는 막 한여름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곧 가을이고 추수철이 될 것이라 부역하는 농민의 원성이 높았다. 그러나, 새로이 예후 될 이에게 하명한 바, 충정을 보이면 인준을 내릴 터이니 부역할 병사를 내놓아라 일렀던 왕은 어리석었다.

「내란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표한경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태경은 아직 믿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진성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헛된 믿음일지도 모른다 알고 있어도 태경은 그렇게 말하였고 그 자신의 목소리가 메말라 있다고 스스로 느꼈다. 표한경은 태경의 그런 쓰린 속내를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었으나 아직 어렸으므로 부러 반론하지 않을 정도로 속이 깊지는 못 하였다.

「사람을 그리 믿어 어찌하려 하시는지요.」

자신보다 냉정한 아우의 말에 태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진성이 어떤 성품인지 태경은 잘 알고 있었다. 주후의 후계자는 어린시절 일정 기간동안 수도에 머무르는데 그 시간동안 그와 진성은 뜻이 맞아 마치 친형제처럼 우애를 쌓은 사이였다. 표한경 역시 주로 태경 곁에 머물러 왔으므로 진성과도 모르는 사이가 아니다. 그러한데도 쉽게 믿지 말라 이르고 있는 것이었다. 태경이 생각하기에 진성은 그런 표한경과 꼭 닮아 있었다. 올곧고 냉정하며 놀라울 정도로 사리에 밝은 이였다. 그 가슴은 뜨거우나 그것으로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 할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3년이라는 시간은 사람이 변하기에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날 하명받은 진성이 그예 돌아갔었다 하면 그도 어쩌면 냉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예주로 돌아가기 전에 진성은 태경을 찾아왔었다.
보기에 민망할 지경으로 사치하여 꾸민 접견실에서였다. 태경은 스스로 진성을 바로 볼 낯이 없다 여겼다. 사람을 모두 물리고 진정 오랜만에 둘만이 마주하였는데도 한참이나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속을 짐작할 수 없는 평온한 얼굴로 진성은 입을 열었는데-,

<-현태경. 이것은 너의 나라인가.>

하고 물어왔으나 그 어조는 질문도 아니었고 질책은 더더욱 아니었다. 지극히 담담하게, 스스로에게 답을 구하듯 하는 말이었으며 그 눈은 원망도 격동도 담지 않아 고요하였다. 그 모든 것이 지극히 그가 아는 진성다웠다. 아무것도 변해있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그 자신만이 몸을 보전키 위해 변해버렸다 생각한 태경은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하여 그날은 대화랄 것도 없이 그것이 전부였다.

진성은 변하지 않았다. 고요하고 냉정하며 충을 알고 의를 아는 이다. 그러하므로 더더욱 이번에 그가 선택한 길이 무엇일는지 태경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부역할 군사를 끝내 보내오지 아니한다면 정주의 조정은 틀림없이 그것을 규탄할 것인데 태경에게는 오랜 친우를 비호해 줄 힘이 없었다. 총명하며 냉정한 아우는 지금 반란을 맞을 준비를 하라 이른다.

예주후 유진성이 돌아간 지 오늘로 보름이건만 예주에서는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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