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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棟梁 (1)




북방의 하늘은 웅대한 산줄기가 가로지르고 있다. 태초가 빚어낸 듯 거침없이 달리는 그 산맥을 일컬어 청류라 한다.
청류의 중심에는 세상의 기둥인 양 하늘을 떠받친 영산(靈山)이 하나 있어 태무산(太巫山)이라 칭하였다.

그것을 구름에 닿은 산이라 접운산(接雲山)이며 꼭대기가 희다 하여 백두산(白頭山)이며 옥같이 아름다우며 또한 크다 하여 태벽산(太璧山)이라고도 이르는데 그 외에도 뭇 사람들이 귀히 여겨 아름답게 부르는 이름이 하 여럿이라 헤아릴 수가 없다. 과연 이 땅의 광명을 가져오신 수밀의 시황께서 첫 발을 디디신 영산이었다.

하여, 이 땅의 모든 나라가 황국 수밀에서 발원하였듯이 이 땅의 모든 산은 이 청류의 태무산으로부터 발원하였다. 태무산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뻗어나간 긴 산줄기는 서로는 서국(瑞國) 예주(瘱州)를 지나 정주(廷州)까지 닿았고 동으로는 제이국(悌怡國) 영주(煐州)를 지나 유주(柔州)까지 흐른다.

청류는, 북의 태무산을 정점으로 하여 마치 이 땅에 뿌리를 내리듯 한 장대한 산맥이었다.
그 중 정남향으로 내린 한 줄기가 수밀 경주(京州)의 중앙에 이르러 두 갈래로 분화하며 여러개의 명산을 낳아 놓았는데 그 중 이름난 것이 영기산(映麒山), 유수산(瑜秀山), 제곡산(堤鵠山)이다. 그리고 그 삼명산이 수호하는 땅 가운데 바로 세상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수밀의 황도(皇都)가 있다.

수밀의 황도는 북으로 병풍같은 유수산을 두고 부채꼴 아래에 장방형이 붙은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다. 하여 이 도성의 외성은 북방을 유수산에 맡긴 채 동남서의 삼면만을 두르고 있다. 내성 역시 황궁과 시가지를 분리하는 목적으로 하여 삼면 뿐이다. 황도 중앙의 북쪽으로부터 유수산의 기슭을 덮어내리며 광대한 황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성하 거리에서 올려다 보면 빼곡히 들어선 화려한 전각과 날아갈 듯 하늘로 뻗은 수십 개의 누각 위에 옥같은 유수산의 산머리가 떠있는 듯 하다.

그것은, 가을 다가오는 청명한 대기와 맑은 햇살 아래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늦여름의 햇살은 넘치도록 쏟아지고 있었다. 황궁의 동궐에서도 가을 다가오는 하늘이 푸르렀다. 그 하늘 아래 시원스런 쪽빛 기와를 인 동청궁의 지붕이 눈부시게 빛살을 받아내고 있었다. 포석 반듯하니 깔린 동청궁 앞 뜰 역시 빛으로 가득하였다. 선연한 오후였다.
그 흰 깁을 가득 펼쳐놓은듯 한 뜰에 그러나 조금은 이질적으로 차갑게 튀어오르는 빛이 있다.
검광이었다.
두 사람이 기합소리도 없이 격렬한 검격을 나누고 있었다.
은백색의 잘 벼려진 검을 들어 거침없이 치고 들어가는 쪽은 열 대여섯 되어 보이는 소년이다. 특별날 것 없이 짙은 남색의 가벼운 전복(戰服)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그 품세에 흐르는 기운은 범상치가 않았다. 격렬히 몸을 움직이는 중에도 눈매는 흔들림 없이 평정을 유지하며 한 점의 표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며 내닫는 걸음 하나에 단호함이 실려있었다. 소년의 묶어 올린 긴 머리채가 바람에 흩날렸다. 조금 흘러내려 땀에 젖은 옆머리칼 사이로 청석 패와 옥구슬을 물린 삼장 패수장식이 영롱하였다. 그것은 바로 소년이 이 동청궁의 주인임을 나타낸다.

「태자전하! 이건, 좀……우와앗-!」

사정없이 들어오는 검격에 밀리며, 상대하고 있던 청년이 당혹스럽게 외쳤으나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상대가 어떤 자인지를 이미 알기 때문이다. 과연, 청년은 품위 없는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익숙한 몸놀림으로 소년의 검을 모조리 흘려보내고 있었다.  

「좀 봐주십시- 악!」

처량한 외침에도 소년은 사정 봐 주지 않고 그대로 찔러들어갔다. 허나 이번에도 청년은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해내었다. 제법 여유롭게 피하고 있는 주제에 꼭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는 양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 손에 들린 장검 길이에 못 미치는 한자 반 짜리 목검은 여지껏 한번 휘두르기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청년의 몸에 헐렁하게 걸친 검은색의 장포가 몸놀림에 따라 크게 펄럭였다. 그러나 소년의 검날은 그 옷자락 끝에도 닿지 않았다. 고요하던 소년의 눈매에 은은하게 분노가 어리기 시작했다. 검놀림이 더욱 격해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느긋하게 그것을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여섯척이 훌쩍 넘어가는 장신에 단단한 무인의 풍모를 가진 사내다. 다른 한 명은 지금 검을 휘두르고 있는 소년과 무척이나 닮은 얼굴을 한, 그러나 키가 작고 좀 더 어려 보이는 소년이다. 둘 다 이마에 둘러 맨 비단 띠로부터 오른쪽 얼굴 옆으로 가볍게 패수장식을 늘였는데 거기에는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작은 청석 패가 달려있었다. 청석 패수는 수밀의 황족만이 패용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 찌푸린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연 것은 어린 소년 쪽이었다.      

「…뭐야, 형님보다 저 녀석이 더 강한거야?」

언듯 보기에도 옆에 선 사내와 나이차가 두 배는 넘어 보이는데 가볍게 반말이 나온다. 허나 사내는 그것에는 신경쓰지 않고 가볍게 답하였다.

「아니.」

그 간단한 대답에 어린 소년은 불만스런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럼 어째서 저런건데?」

<저런>이라고 가리켜 보이는 곳에는 여전히 같은 양상으로 대련같지 않은 대련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소년은 계속 공세로 치고들어갔지만 그 공격은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청년은 잘 피하고 있기는 했지만 단지 피하는 것 뿐이었다. 소리만 들으면 공세로 바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쩔쩔매며 피하기만 하는 것 같은데 몸놀림을 보면 제법 여유롭다. 하지만 공격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하고 있는 소년을 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내는 웃음기 섞인 말투로 설명했다.

「보법도 검법도 청란쪽이 더 깨끗하고 절도가 있다.」

말하는 중간에 스스럼 없이 태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데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에 신경쓰지는 않았다.

「-다만 속도가 아주 조금 부족한데 그야 당연한거 아니냐. 청란은 진검이고 현원은 목검인데. 그리고, 워낙에 현원녀석이 피하는데만은 명수고.」

「아니, 그러면-」

「그래. 상대가 한 번이라도 검을 제대로 받아내려 한다면 그걸로 끝날테지만 그럴 기회가 안 생기니까 청란은 이길 수도 질 수도 없어. 한 마디로, 지지리 안 맞는 상대지.」

그리 말하며 사내는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어린 소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올려다 보았다.

「뭐냐 그거! 둘이 붙어보라고 한 건 하연형님이었잖아!」

「그야 물론. 살다보면 이런저런 녀석들이 다 있으니까 경험삼아, 저렇게 한번 쯤 붙어봐서 나쁠 건 없잖냐.」

「하아-.」

쓸모없는 대련을 시켜놓고서는 당당하게 대꾸하는 것에 할말이 없어져서 어린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 그 옆에서  웃고있는 사내는 황친 의정왕(意正王)의 아들로 봉호를 렴호군(燫虎君), 이름을 하연(嘏演)이라 한다. 황군(皇軍)의 무관직을 맡고 있으며 동시에 태자 청란과 이황자 비겸의 검술 스승이었다. 당당하고 사내다운 성품과 뛰어난 실력으로 두루 인정받는 훌륭한 무관이라 하나 비겸이 생각하기에는 늘상 미덥지가 않았다.  

「바보같아.」

그 말에 하연은 스스럼 없이 <바보들 맞지 무얼.> 했다.

「자, 그러니까 바보 둘 중 누가 이길지 내기나 해볼까-.」

「아니, 하연형님이 바보라고.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거라고 방금 자기 입으로 말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하하…….」

계면쩍어 그냥 웃어버리는 하연 앞에서 비겸은 제 검을 뽑아들었다. 청란이 휘두르고 있는 것 보다 길이도 짧고 폭도 좁은 것으로 가벼운 연습용 검이었다.

「-속도란 말이지.」

검을 잡고 가볍게 두어번 흔들어보며 혼잣말로 그리 뱉은 비겸은 말릴 새도 없이 대련 중인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비겸, 너 임마-!」

「으앗-! 이황자 전하!」

하연과 현원의 당혹스러운 외침이 쩌렁하게 울렸다.

「-!」

막 체중을 다 실어 크게 베어들어가던 청란은 무어라 외칠 여유조차 없었다.
갑자기 끼어든 아우를 베지 않기 위해서 무리하게 몸을 틀었던 그는 내닫던 속도 그대로 처박히듯 넘어져 바닥에 구르고 말았다. 그 귓가에 비겸의 목소리가 뒤늦게 날아와 꽂혔다.

「형님, 미안-!」

그리고 그 목소리는 곧 격렬한 소리에 묻혀버렸다.

「…….」

청란은 신음성도 내지 않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조금 지푸린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것은 포석에 쓸린 팔꿈치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아우의 무모함 때문이다.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했으니 앞으로는 주의하라고 충고해야겠다 생각하며 청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 옆으로 하연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서자 하연은 청란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는 씨익 웃으며 물었다.  

「괜찮냐?」

「-예.」

사촌 형이기도 한 렴호군 하연에게 거침없이 대하는 비겸과는 달리 고지식한 편인 청란은 스승인 그에게 항상 존대를 하였다.

「-저 녀석, 너 대신 현원과 붙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

하연이 가리킨 곳에서는 한창 비겸과 현원의 대련이 펼쳐지고 있었다.
탁탁탁탁탁-! 하고, 날을 죽인 연습용 검과 단단한 재질의 목검이 부딪는 둔탁한 소리가 틈도 두지 않고 연속으로 울렸다. 청란을 상대하며 피하기만 했던 것과는 달리 현원은 계속해서 비겸의 검을 받아내며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둘 다 지극히 속도가 빨라 보통사람은 눈으로 따라잡기도 어려울 정도의 굉장한 기세였다.
그것을 보던 청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네가 약했던게 아니다. 잘 봐라.」

고개를 떨구려는 청란에게 하연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실상 비겸과 현원은 수없이 검을 부딪혔지만 그 어느 하나도 서로에게 확실한 타격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별로 힘들이지 않은 검격이 뻗어나가고 역시 별로 힘들이지 않은 검이 그것을 쳐낸다. 부딪힌 검은 둘 다 아주 가볍게 튕겨나가고 그것을 반동으로 삼아 휘둘러 다시 친다. -그런 반복일 뿐이라는 것을 청란도 곧 알아챌 수 있었다. 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꽤나 화려한 볼거리가 될만한 대련이었으나 검에 평생을 건 하연의 눈에는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하연이 외쳤다.

「둘 다 장난하냐-!」

「씨발, 장난하는 걸로 보이냐-!」

비겸은 엄청난 속도로 검을 놀리는 와중에도 귀는 열어두고 있었는지 바로 그렇게 항변했다. 애초에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 것이다. 하연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데 역시 격렬하게 검을 튕겨내면서도 현원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뭐, 확실히 재미는 있는데요.」

계속 검을 부딪치고 있건만, 청란을 상대하던 때 보다 오히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체엣-!」

비겸은 약이 잔뜩 올라서 계속 치고들어갔고, 하연은 이번에는 검술스승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해 보기로 결심했다.

「둘 다 검이 너무 가볍다!」

현원으로서는 가끔 하연과 대련할 때 마다 듣던 소리였고 또한 스스로도 잘 아는 단점이었기에 속으로 쓴웃음 짓고 말았지만 비겸은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게 뭐 어때서-!」

「그런 공격은 제대로 들어가도 치명상이 못 된단 말이다! 상처만 낸다고 적이 죽어준다더냐!」

「내가, 죽여야 될 적이 어딨는지나 읊어봐라-!」

그 말에 하연은 역시 이 어린 사촌아우에게 말로는 못이기겠다- 하고 속으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그러하다. 시절이 평온하여 근방에 전쟁이 그친지가 이미 오래이며 국경을 마주한 나라는 모두 예로부터 황국 수밀에 복속한 제후국들이다. 그리고 먼 땅의 이족을 경계하는 것은 군의 일이지 황자가 직접 검을 들 일은 아닌 것이다.
하여, 하연은 입을 다물었지만 비겸은 그래도 할 말이 많은지 계속해서 외쳤다.

「이 내가, 전쟁터 뛰어다닐, 몸이시냐고-! 실전, 해봐야, 자객이나, 잡을건데! 그럴 땐, 일격필살, 해버리면, 하아-, 배후를, 못 캐니까, 되려 곤란해진다앗-!」

입은 그렇게 떠들면서도 몸놀림은 늦추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전장에서, 앞서 달리는, 윗대가리 만큼, 바보는 없다고-! 하아-, 윗사람 되셨으면, 후방에서, 얌전히, 명령이나, 내려주시면, 되는 거다-! 하아-, 하아-, 하아-!」

호흡이 심하게 흐트러지는 상황에서도 죽어라 하고싶은 말을 끝까지 다 해내는 비겸에게 하연은 속으로 <내가 졌다-.>라고 해 주었다.
애초에 지구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닌 비겸은 이제 격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허나 승부는 쉽게 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청란과 대련 중이던 현원 역시 많이 지쳐서 속도가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겸은 오기로 계속 하고 있었고 현원은 어쩔 수 없이 지친 몸으로 겨우 받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결국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현원이었다.      

「후아-. 제가, 졌습니다-!」

하고 주저앉아버린 현원에게로 비틀거리는 비겸의 검이 내리꽂혔다. 현원은 아예 바닥에 벌렁 누워버린 다음 굴러서 겨우 그것을 피했다. 허나 비겸 역시 그것이 마지막 공격이었다. 바닥에 검을 내리치면서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무너져버린 것이다. 지팡이처럼 검을 바닥에 세워 짚고 숨을 몰아쉬면서도 비겸은 발악하듯이 외쳤다.  

「너 이자식, 일어나-! 헉, 허억-, 이긴 것 같지가 않단 말이다-!」

현원은 널부러진 자세 그대로 간신히 대꾸했다.

「하아-, 너무한데요. 후우-, 간만에, 놀러왔는데, 상여로, 돌려보낼, 생각이십니까-. 하아, 하아- 」

「후아-, 후아- 상여가 아깝다! …거적 하나, 내서, 말아는 주지!」

그 말에 대꾸할 기운도 없는 듯 현원은 바닥에 늘어진 채로 힘없이 그냥 아하하- 웃어버렸다.
비겸과의 대련이 끝나면 못다한 승부를 낼 요량이었던 청란은 그만 포기하고 그때까지 한 손에 잡고있던 검을 검집에 거두어 넣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곧 죽을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는 두사람 곁으로 다가간 하연은 비겸에게 말했다.

「-더 하다간 누가 죽어도 죽겠구만. 네가 이긴걸로 해둬.」

「뭐? 해 둬? 이긴게 아니라 이긴걸로 해 둬? 지금 나보고 그딴 거 납득하라고-?」

지쳐서 쓰러질 지경인 주제에 입만은 살아서 악악거리는 비겸을 잠시 내려다보던 하연은 말없이 가볍게 발을 들어 비겸이 몸을 기대고 있던 검을 차버렸고, 비겸은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온갖 욕지꺼리를 주워섬기면서 악을 쓰는 비겸을 그냥 무시하며 <어허-, 어디서 자꾸 잡소리가.> 하는 하연에게 현원은 지친기색 역력히 묻어나는 어조로 말했다.

「이거야 원……, 자주 왔다가는 몸이 남아나질 않겠습니다.」

「어, 그래. 간만에 운동 좀 하니까 좋지?」

「…전혀요.」

정색하는 현원 앞에서 하연은 사람좋게 웃었고 현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렇게 힘든데 무료봉사라니 역시 싫다고요. 어떻습니까, 태자보위의 입김으로 아무거나 관직하나 내리고 저를 아예 작은선생 삼으시는건?」

「오호-. 그거 대충 청탁인건 알겠는데, 내가 워낙 대쪽같으셔서 안되겠다 임마.」

「……그냥 농담이었는데요.」

「어, 나도 농담이었다. 」

힘겹게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는 현원에게 그렇게 말해서 뭔가 기운빠지게 해버린 하연은 뒤에 혼잣말처럼 작게 덧붙였다.

「-관직 따위, 준다고 해서 네놈이 넙죽 받을 놈도 아니고…….」

정전 방향에서 한 궁인이 급히 뛰어오며 소리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멀리서 소리가 들리는 순간 현원은 급히 일어나 달려서 담을 넘어 모습을 감추었고 그것을 본 비겸은 이를 갈았지만 <저새끼 역시! 날 갖고 놀았다 이거지-!>하는 악다구니는 달려온 궁인의 외침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렴호군-! 여기에 계셨습니까!」

「무슨 일인가.」

하연은 침착하게 물었지만 숨이 턱까지 찬 궁인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허억-, 헉-, 어전…, 어전에서 회의가……」

더듬더듬 이어지는 궁인의 말을 들은 하연의 눈살이 조금 지푸려졌다.

「-이 시간에?」

수밀에서는 어전회의 자체가 생소한 일이다. 시급한 사항이 없을 시 황제의 안전에서 제관이 모이는 일은 매일 아침의 조례밖에 없다. 허나 지금은 늦은 오후였다. 그리고 황군의 수뇌에 있는 하연은 행정업무에는 관여할 일이 없기에 보통의 회의에서는 굳이 자리하지 않아도 되었다. 평상시라면 이렇게 궁인이 뛰어다니며 굳이 찾아서 참석시켜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청란이 아직 어리고 태자로 봉해진 지 겨우 석달 지나간다 하지만 분명 이 나라의 태자다. 태자에게 먼저 전해지지도 않은 어전회의란 말인가.
하연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에 궁인은 설명을 덧붙였다.  

「급히 소집된 회의이옵니다. 의정왕께서 렴호군을 꼭 뫼셔오라 하시어 금위영으로 갔는데 아니계셔서……」

「-알았다. 태자전하, 함께 가시지요.」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하연은 간단히 말하고 정전으로 달렸다. 그 뒤를 청란이 급히 따랐다.

「…제가 발이 느려 시간을 많이 지체하였사옵니다. 이를 어찌……」

뒤에 덩그라니 남은 궁인은 힘없는 목소리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고 비겸의 얼굴에는 불안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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