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도플갱어 [하]

2005.09.12 13:3109.12

일어나서 학교 가고 갔다와서 마비하고 길티하고 그러다가 자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기말 시험 기간이 됐다. 게임 좀 작작 하고 공부하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자꾸 딴생각이 났다. 그것도 만화나 야동 같은 게 아니라 더 곤란했다.

누나도 시험 기간이라 맨날 야자하고 들어왔다. 나는 자주 누나 일기를 훔쳐봤다. 내가 구겨 놓은 페이지는 여전한데 누나는 아무 눈치 못 챈 것 같았다. 앞의 내용을 안 들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새 일기들은 뭔가가 이상했다. 그냥 날자 쓰고 「날씨 좋음. 시험 공부로 밤샘. 못 견딜 정도는 아님. 내일 수학. 중요표시만 보고 모레 영어를 더 해 두는 게 낫다.」하는 식으로 짤막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누나 친구인지 뭔지 진득진득하게 등장하던 '너'라는 사람도 대략 이런 정도로밖에 안 나왔다.



「2교시 경제 보는 중 생리 터짐. 쉬는 시간에 너에게 생리대를 빌렸다.」

삶이니 어둠이니 누굴 죽인다느니 죽여달라느니 그딴 소리는 한 줄도 안 비쳤다. 그러니까 완전 정상이었다. 그런데 나는 뭔가 목에 꽉 차오르는 것 같이 답답하고 불안했다. 누나 상태는 심상치 않을 정도가 되어 가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누나의 행동 같은 것도 딱히 문제될 거 없었다. 요즘 갑자기 초등학교 때 그만둔 피아노를 시작했을 뿐. 뭐 솔직히 좀 때려쳤으면 좋겠는데 말을 걸 수가 없어서 참고 있었다.

그냥 그랬다.







시험이 끝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바람이 엄청났다. 꼭 보이지 않는 커다란 새가 날개로 치고 튀는 것처럼 불었다. 나는 스스로가 생각을 하는지 마는지도 모른 채 학교에 가서 애들이랑 좀 입담 까다가 시험을 쳤다. 내내 산만했다. 하늘은 그냥 푸르뎅뎅하기만 하고 바람만 창문에 시비를 걸어 댔다. 삐꺽거리고 덜컹거리는 소음와 연필 사각거리는 조용함이 교실을 가득 메웠다. 나는 그런 소리들과 바깥의 흙먼지 낀 햇볕과 구름 없는 하늘빛 같은 게 자꾸 신경쓰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시험지 지문을 멀거니 들여다보면 활자체가 기우뚱 일그러지면서 구데기 꾸물거리는 글씨로 변했다. 우리 누나의 글씨였다. 그리고 우리 누나의 일기에 참견한 '너'란 사람의 글씨였다.

시험 시간은 대충 흘러갔다.

종이 찌리링 울리자마자 애새끼들이 악을 써댔다. 내 친구들이 끝나고 피시방 갈지 농구하러 갈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목소리 큰 놈이 이겨서 농구하러 가기로 했다.

집에서 밥 먹고 역 광장으로 모이기로 했다. 누나도 오늘 시험 끝나니까 어쩌면 먼저 집에 들어와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느릿느릿 집으로 갔다.

집 문은 잠겨 있었다. 현관에 누나 구두도 없었다. 나는 옷 갈아입고 마비 하다가 슬슬 밥 먹고 나왔다.

광장에 나가자 세 명이 이미 와 있었다. 다들 싱글벙글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죽을상이라며 놀렸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갑자기 화가 나서 주먹을 쥐었다. 애새끼들 안색이 약간 죽었다.

" 마, 왜그래? 이번 시험 완전 개박살?"

" 씨발놈아, 너만 시험 망친 줄 알고 지랄이심?"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중얼거린 것도 같다.

애들이 더 오고부터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됐다. 땀이 셔츠에 배어들자 바람의 질감이 더 선명히 등에 닿았다.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기분도 상쾌해져 갔다.

친구들도 얼굴이 벌개져서 머리카락 끝까지 비지땀으로 번들거리며 히히거렸다. 가끔 욕설이 튀어나오고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우리는 사실 게임보다 몸을 움직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웠다. 넘어진다거나 다친다는 건 신경조차 쓰지 않고 거칠게 공을 좇고, 순전히 감각만으로 긴 슛으로 쏘고, 그 공이 허공에 그리는 움직임에 잠시 숨을 멈추는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들이 너무 즐거웠다. 물론 즐거워하는 그 순간에 내가 즐겁다는 걸 알고 있지는 않았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럴 것 같다. 자기가 즐거운 바로 그 때 즐겁다는 사실을 안다면, 글쎄 적어도 우리 누나처럼 미친 사람은 없었을 것 같다.

뭐 그런 것들을 나는 어떤 새끼가 패스한 공을 잡느라 다른 새끼들이랑 배를 부딪친 그 순간엔 전혀 몰랐고, 애새끼들을 따돌릴 때도 뭐 정신없었고, 어쩌다가 초 장거리 슛이 손에서 미끄러져나가는 딱 그 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뭔가를 알기 시작한 건 그 다음 순간부터였다.

나는 내 팔도, 골대를 향해 나는 농구공도, 광장의 가로수도, 역사와 그 너머 상가 건물들도 아닌, 훨씬 멀리 펼쳐진 색의 무대를 보았다.


「오팔 빛 하늘」

「심장처럼 두근거리는 불꽃들」


그건 누나의 말이었다.

하지만 내 말도 됐다.

내가 누나였어도 바로 그렇게 썼을 거다. 누나가 나였어도 바로 이런 하늘을 봤을 거다.

그것은 딱 한 순간의 분명함이었다. 세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바늘처럼 그것이 그때 나를 관통했다.

순간 얼음같은 바람이 온몸에 부딪쳤다.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 내게 「좋지 않아」라고 말한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이런 거에 감동받으면 안 된다고 그랬다. 이런 건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좀 가려지든 어쨌든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다. 누구도 좀 덜 완전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빼앗으면 안 된다.

그리고 좀 덜 완전한 거에 감동했다고 그런 감동하는 마음까지도 싫어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바로 그런 짓을 그 사람이 누나에게 한 거다.

나는 내가 알아버린 그런 사실들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내 슛은 빗나갔다. 나는 계속 애들과 농구했다. 머릿속으론 다른 데를 헤매고 있었다.




하늘이 그냥 노을하늘이 되었다. 우리들은 또 배가 고파졌다. 다들 집에 갔다.

지금쯤 누나가 돌아와 있을 것이다. 시험 끝나는 날까지 야자를 할 리는 없다.

나는 누나에게 할 말이 많았다. 아니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막상 얘기하면 안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뭔가 물어봐야 했다. 뭔가. 아까 내가 알아버린 것들이 대체 뭔지 같은 거 말이다. 그리고 뽀르미를 왜 그랬는지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또 알 수 없는 것들이 잔뜩 있었다.

아파트 현관에 다가갔을 뿐인데도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공기를 쓰다듬는 듯 희미한 선율이었다. 음계가 올라갔다 내려오고 다시 오르고 올랐다. 내가 계단을 밟을 때마다 선율은 점점 크고 격해져갔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철문을 여는 순간 선율이 느릿해졌다. 살짝 발구르듯 머뭇거리던 선율은 서두르지 않고 하강하기 시작했다.

누나의 뒷모습이 음악처럼 유연하게 흔들렸다. 나는 어느 거리 이상 다다가지 못했다. 누나의 음악은 투명하고 달콤한데도 나는 어디가 아파지고 있었다. 어두운 노을이 누나와 피아노의 풍경 위로 쏟아져 내리는데도 그 음악은 어디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 아팠는지도 모른다.

누나의 양 손이 어긋나며 피어오르는 화음을 불러낼 때, 나는 불가사의를 알았다. 그것은 눈앞의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의 감정이었다.

" 누나……."

선율이 사라졌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음악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깨끗하게 건반에서 손을 떼고, 커버를 덮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나를 향해 돌았다.

누나가 매일 입는 감색 교복이었는데 노을에 물들어 검다고도 푸르다고도 붉다고도 할 수 없는 야릇한 색이 되어 있었다. 나는 교복의 옷깃, 목, 턱 순으로 시선을 옮겼다. 턱선을 부드럽게 감싸는 단발머리가 섬세한 유리섬유처럼 흔들리며 빛났다. 그 머리카락 끝부분을 보고 있는 것 뿐인데 나는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상대가 나보다 훨씬 키가 컸기 때문이었다. 눈을 마주치려면 시선을 더 위로 향해야 했다. 왠지 내 눈은 딱 턱 높이까지만 붙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람의 얼굴에서 빛나는 건 머리카락으로 감싸인 윤곽 뿐이었다. 그 안은 어두웠다. 역광 때문인가, 보지 않았기 때문인가는, 모른다.

그 사람이 움직였다.

" 동생이니? 실례했다."

그 사람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이어 현관 쪽에서 부시럭거리며 신발 신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하며 문을 열고 닫는 소리와,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생각했다. 플스나 컴퓨터를 잡기 전에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안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누나는 이제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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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 버렸습니다...;ㅁ;

여기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합니다.



9월 13일 덧붙임: 뒤늦게서야 '이거, 단편 방에 올려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량이 애매하군요......
luc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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