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도플갱어 [중]

2005.09.12 13:2809.12

글씨체에 대해선 더이상 말할 것도 없지만, 갈수록 악화되어서 마지막 문장은 거의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고만 해 두겠다.

그 다음 페이지는 공백이었다. 손자국만 약간 묻어 있었다.

그 다음 장, 또 다음 장도 비어 있었다.

너덧 장을 흘리고서야 일기가 다시 이어졌다. 그런데 날짜가 무려 6월 17일이었다. 그 사이 보름 넘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나는 빈 페이지를 되넘겨 보았다. 왜 굳이 이렇게 했을까?


「6월 17일

그 아이를 나는 아주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훌쩍 큰 키와 어린 나무 같은 팔다리, 군더더기 없는 이목구비. 특히 그 눈. 하나도 꾸미지 않았는데도 너무 강렬한 매력을 뿜는 눈. 빛을 흡수하면 호박색으로 타오르는 홍채. 그리고 그 홍채와 같은 빛의 머리카락. 턱선을 감싸며 흐르는 머리카락. 공기를 품은 듯한 그 가벼운 찰랑임. 전부,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 꿈 속에서 항상 보아 왔으니까. 그 아이의 천진난만한 사랑스러움도 무서운 잔혹함도 다 내가 꿈꿔온 그대로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 아이가 실제로 있는 게 아니라 내 환상에 불과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 그 아이는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만났다. 나는 고등학교 첫 교실에서 내 앞자리에 앉아 있는 그 애를 발견했다. 그 애가 뒤돌아보았고, 눈이 마주쳤다. 태양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지금도 내가 그때의 눈 마주침, 그 섬뜩한 열기의 순간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 아이는 놀랍도록 활달하고 영리했다. 좋은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아이처럼 구김 없는 웃음을 지을 줄 알았다. 또 무언가를 힘들여 얻어 본 적 없는 아이다운 대범함과 즐거움에 넘쳤다. 아이들 모두 그 아이에게 이끌렸다. 하지만 단지 그 정도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그 애에게 연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어째서인지 알아버렸다. 그 애가 숨기는 '그것'을 말이다. 뭐라고 칭해야 하는 걸까?

─적의.

그 아이는 무언가를 격렬히 증오했다. 그 격정이 그 아이를 갉아먹고 있었다.

─ 나는 세상이 싫어.

─ 이 세상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모두 다 싫어.

─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나 역시 증오해.

─ 나와 같은 인간들 역시 증오해.

─ 그래서 나는 그들을 모두 파괴해 버리고 싶어.

─ 나 역시 파괴해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어.

─ 나는 나를 사랑해. 이 세상에서 단 하나 가치있는 게 있다면 나 자신 뿐이야.

─ 그래서 나는 나를 싫어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용서할 수 없어.

─ 모두 다. 모두 다.

─ 죽이고 싶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어.

너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한다. 너는 이미 '왜' 그런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게 되어 버렸다. 너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기에 너는 고통받는다. 너는 이대로 아무도 죽이지 못한 채 긴 인생을 살아가리라는 예감에 분노한다. 너는 너 자신을 죽이는 정도밖에 길이 없지만 그건 패배로의 길이다. 너는 무엇에도 지지 않는 태양이어야 한다.

나는 너의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심지어 너의 고통까지도 나는 꿈꿔 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나의 것이기를 원해 왔기 때문이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기를 원했다. 네 모든 것. 네 모든 것.

네가 지금 내게 하고 있는 일, 하지 않는 일 들을 똑똑히 봐.

너는 내가 아니다. 나는 네가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만나 버린 건가?

너와 나는 사실은 한 사람이 꾸는 다른 꿈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아, 지긋지긋하다. 어서 꿈에서 깨어나라. 아니면 둘 중 한 꿈은 지워버려라.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그럼 날 한 번 죽여보는 게 어떻겠니.」


「6월 20일

기말고사 예정표가 나왔다. 나는 두손 놓고 멍하니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언가 하려고 하면 10분도 안 되어 내 눈은 다른 것을 보고 있다.

너를 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한다.

종례가 끝나고 아이들은 모두 야간자율학습실로 몰려갔다. 나는 남아서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혹시 네가 살그머니 다가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의 뒷모습은 네게 어떻게 보일까?

하늘은 폭풍의 예감으로 가득하다. 정지한 듯 높은 구름 아래로 흐르며 조용히 흐트러지는 구름보가 지는 햇빛을 반사하고 있다. 태양 근처의 하늘은 희끗한 푸른색과 농익은 금색으로 넘실댄다. 태양과 멀어질수록 구름은 붉은 빛으로 젖어간다. 구름 없는 텅빈 하늘은 어둠으로 빛을 살짝 가린 듯한 연푸른색이다. 색과 색이 서로 미끄러지고 번갈아 비치기도 하지만 결코 섞이는 일은 없다. 거대한 오팔 심장 같다.

─ 좋지 않아.

네가 등 뒤에서 속삭였다.

─ 경치를 잡것들이 다 망치고 있잖아. 봐, 저 산업폐기물들.

아파트 단지. 상가. 고가도로. 초등학교. 교회 첨탑.

─ 쓰레기들을 다 쓸어버리기 전엔 이런 거에 감동해선 안 되는 거야.

네가 씨익 웃는 기척.

─ 결심하자, 죽기 전에 완벽한 하늘을 보겠다고.

완벽한 하늘! 그 말에 하늘의 심장이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하늘 같은 건 지금 이대로도 족해. 아니 그런 건 어쨌든 좋아. 나는 살아서 무언가에 감동하는 일조차 싫어.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마치 거기 없는 것처럼, 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하면서 내 고독을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외로웠다. 나는 약했다. 또 어리석었다.

분명 나는 외롭고 약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 어리석음이 나를 그런 길로 이끌었다.

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내 인생이 어떻게 되어왔으며 내가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따위.

확실한 건 단 하나다. 너라는 돌멩이 하나가 내 인생이라는 강물의 원천을 간단히 막아버렸다는 것.

그래서 나는 살고 싶지 않게 되어 간다.

모르겠다. 너 때문인가? 아니면 원래 내가 그렇게 되어 있을 뿐인가?

태어난 지 스무 해도 되지 않았는데 벌서 말라붙은 물줄기의 마지막 흔적까지 훤히 보인다. 나는 틀렸어. 나는 틀렸어.

나는 틀렸다.

자신을 죽이는 방법은 두 가지다. 생명을 끊거나, 다른 사람이 되거나.

내 생명을 끊는 건 너였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이 된다면 네가 되었으면 좋겠다. 」


그 다음 글은 날자 표시가 없었다.


「믿을 수 없다.

너는 나를

너는 나를 도대체

이건 너무 심하다. 너는 나에게 심한 짓을 하고 있어. 난 너 때문에 엉망진창이야. 차라리 '갈가리 찢기는 고통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어.

괴롭냐고? 고통스럽냐고? 아니야.

다만 어둡다. 어둠뿐이야. 어딜 가도 어둠, 무엇을 해도 어둠, 가만히 있어도 온통 어둠이라, 나는 마치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


나는 이마에 주름까지 잡고서 길게 이어지는 「어둠」의 행렬을 열심히 좇고 있었다. 소름이 쫙 끼쳤다. 단어장 한 페이지도 들여다보는 일 없는 이 내가 일기장 나부랑이에 갈겨진 미친 변태년의 헛지랄에 집중하고 있다니! 이건 뭔가 이상하다. 누나의 일기가 나를 이상하게 만들고 있다. 그건 누나가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나는 우리 누나가 단순한 변태만은 아니라고 깨달았다. 변태인데다가 미치기까지! 그야말로 어두운 소리였다.

아니,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걸까? 옛날엔 완전히 정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언제냐 하면, 유치원 다닐 때만 해도. 그러니까, 우리 누나는 초등학교 때다. 그때까진 멀쩡했었던 것 같다. 그냥 보통 애새끼였다.  

아, 그렇다. 어른용 책을 보면서부터 누나는 미쳐버린 것 같다. 초등학생일 때부터 누나는 어른들 보는 엄청 두꺼운 소설책 같은 걸 책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 책들이 누나에게 대체 뭘 가르쳤는지 모르겠는데, 좀 뜯어 말릴 걸 그랬다. 엄마도 참, 나한테 "누나 보고 좀 배워"라고 그랬는데, 나까지 미친새끼되면 집안이 무슨 꼴 나려고.

책 보기 이전의 누나가 어땠는지는 솔직히 기억에 없다. 그냥 곧잘 같이 놀았다는 느낌만 있다. 그리고 어쩌면, 누나가 나를 꽤 잘 돌봐 줬는지도 모르겠다. 의심스럽긴 해도 나 역시 누나를 좋아했었다는 느낌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뭐 대충 그런 정도 뿐, 지금의 누나와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다. 누나는 음침하고, 신경질 잘 부리고, 지 방에만 틀어박혀 지내고, 가끔 몰래 기어나와서 컴퓨터로 호모질하고, 하란 공부는 안 하고 책이나 읽고 글이나 찍 쓰고 뭐, 그따위로 살면 참 죽고도 싶겠다.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무심코 종잇장을 쥔 손가락에 힘에 팍 들어갔다. 종이가 구겨져 버렸다. 나는 얼른 주름을 폈다. 하지만 완전히 펴지지도 않았을 분더러, 연필자국이 뭉개지고 번져버렸다. 이래서야 "내가 몰래 봤수다." 라고 알리는 거나 다름없다.

울컥, 하고 뭔가 치밀어 올랐다. 이따위 거 확 찢어버리는 게 낫다. 두 손으로 노트를 잡고 비틀려고 하는데, 어째서인지 작은 새의 양 날개를 잡아뜯는 기분이 들어서 그만 손을 놔 버렸다. 노트는 털썩 떨어졌다. 하필 모서리가 발등에 직격했다. 별로 아픈 것 같지 않았다. 모르겠다. 이럴 때는 아프게 느껴야 하는 건데.

나는 노트를 다시 들었다. 왜 그냥 제자리에 두지 않고 또 읽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7월 2일

내 생일이다.

옛날 이야기를 하자.

중학교 때의 이야기다. 2학년이었던 것 같다. 지금처럼 끈적거리는 햇빛으로 공기가 답답했고,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길 담벼락에 덩굴장미가 극성스럽게 피어서, 타래타래 땅바닥으로 끌어내려 짓밟아 버리고픈 그런 계절이었다.

나는 혼자 집에 왔다. 언제나처럼 집엔 아무도 없었다.

이 아파트 전체에 아무도 없었다.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옆집에는 강아지가 있었다. 그 강아지도 나처럼 혼자 있었다. 혹시 몰랐다, 내가 돌아오는 기척을 듣고 철문 안쪽에서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을지. 지금은 벽을 글어대고 있을지 몰랐다. 놀아줘, 만져줘, 귀여워해줘, 하고.

강아지는 내 손 두 개 만한 몸집의 요크셔테리어였다. 붙임성 좋고 애교가 많았다. 아니 단지 부드럽고 긴 털과 동그랗고 새까만 눈과 연약한 코를 가진 뜨거운 동물이라는 점만으로도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왠지 넌 안 믿을 것 같은데, 나 강아지 좋아해. 고양이도 좋아.

나는 옆집 열쇠가 문 손잡이에 걸린 우유주머니에 들어있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냥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래서인지 복도에는 소리가 거의 울리지 않았다. 소리가 났다 해도 들을 사람은 나 뿐이니 상관없었다.

강아지는 잠시 닫힌 문 쪽에서 얼쩡거리다가, 내가 손뼉치고 부르자 쪼르르 달려왔다. 내가 일어서 걷자 쫓아왔다. 내가 베란다로 가서 오래된 공구통을 끌어내릴 때도 강아지는 내 발치를 맴돌며 헥헥대고 열심히 꼬리를 흔들었다.

나는 아직도 날이 꽤 번듯한 손작두와 망치와 콘크리트 못 몇 개를 꺼내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신발장 위 서랍에서 고무 테이프와 가위를 찾았다. 화장실로 들어가자 강아지가 따라 들어왔다. 문을 닫고, 나는 고무 테이프로 강아지의 턱을 우선 묶었다. 테이프가 코에 닿지 않게 조심했다. 나는 기묘하리만치 깔끔하게 테이프를 붙였고, 다리 역시 테이프로 묶었다.

그리고 나와서 강아지와 작두 따위를 한 가방에 넣었다. 장롱 속에 일회용 비옷이 있는 게 생각나서 그것도 같이 넣고, 비닐 장갑도 챙겼다. 나는 아직도 교복 차림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아파트 바로 뒤에 있는 아카시아 산으로 갔다. 아카시아 산은 아카시아 산이었다. 꽃은 옛날에 시들어서 흰 흔적도 찾아볼 수 없어도 선명하면서도 연약한 녹색의 가지런한 잎사귀들이 탐욕스럽게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면 하늘마저 아카시아 무리들에 자리를 빼앗기고 나는 온통 아카시아의 시선에 둘러싸인다. 그러나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그저 그러고 있다는 사실만이 뚜렸할 뿐이다. 이 아카시아들이, 이 산이 똑똑히 보고 있다는 그 사실만이.

나는 수도사처럼, 혹은 형 집행인처럼 우윳빛 비옷을 걸친다.

나는 난생 처음 무언가를 똑똑히 안다.

이 세계는 일어난 사실만이 전부이며, 내가 어떤 사실을 일어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나 역시 똑똑히 알게 되었다. 나 어렸을 때 갑자기 없어져 버린 엎집 뽀르미는 누나가 죽였다는 걸 말이다.

옆집이 무슨 애 없어진 것처럼 발칵 뒤집혔었는데. 난리도 아니었다. 한밤중에 개새끼 이름이나 부르면서 찾아다니고. 뭐 나도 그때 옆집 누나랑 같이 울고불며 찾아다녔던 것 같지만.

뒷산에서 다 썩은 개 시체가 발견된 건 몇달 지나서였다. 시체라기보단 뼛조각 몇 개 굴러다니던 것 뿐이지만. 그 개가 어떻게 죽었는지, 목이 잘렸는지 콘크리트 못이 박혔는지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 왜? 왜 이런 짓을?

누나 역시 뽀르미를 좋아했다. 언제나 침울한 얼굴이던 주제에, 강아지가 벌렁 누워서 애교를 떨면 배를 간질여 주며 빙글빙글 웃었다. 강아지가 혼나서 잠깐 쫓겨나면 나랑 같이 복도에서 위로해주고 먹을 거 주고 놀아주고 그랬다. 보통은, 그런 건 강아지를 좋아하고 있다는 뜻 아닌가? 좋아하면 이뻐해주고 맛있는 것도 주고 그러는 거지, 죽이지는 않는 거 아닌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누나는 거짓말을 쓴 거 아닐까? 이거 다 소설쓴 거 아냐? 맞다. 누나가 나 엿먹이려고 일부러 그런 거다. 누나는 원래 좀 그러니까. 내가 자기 책상 뒤져볼 줄 알고 준비한 게 틀림없다. 분명 마지막엔 「이걸 믿냐 띠용아」라고 큼지막하게 갈겨쓰며 웃었을 거다.

하지만 제일 마지막으로 쓴 페이지에는 날짜 없는 글만 있었다. 멍하니 몇 줄 읽다가, 나는 앞장을 다시 뒤적여 글씨를 확인했다.

글씨체가 달랐다. 아니 개판인 건 닮았는데, 뭔가 달랐다.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쓴 것 같이 말이다.


「네가 뭘 의도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분명 너는 "쓰고 있는 소설"이라고 그랬지. 그런데 내가 볼 땐 소설이 아니라 일기같은데.

이건 그냥 네 일기야. 아니라고 해 봐야 소용없어.

왜 내가 너의 일기따윌 봐야 하지? 타인의 일기 같은 거 구역질나. 특히 나에 대해 뭐라 왈가왈부한 내용 같은 건, 똥 먹는 기분이란 말이다. 알겠어? 넌 네가 싸지른 풋똥을 나한테 처먹인 거야.

나는 화가 나 있어. 하지만 화풀이할 생각은 없어. 사실 조금 읽고서 금방 일기란 걸 알았는데도 계속 읽은 건 순전히 내 탓이니까 말이지. 뭐, 다른 말을 길게 하고 싶지도 않아. 그냥 네가 듣고 싶어하는 소리들을 해 주지.

첫째로, 나는 네가 보는 대로의 인간이 아니야. 하지만 네 환상을 굳이 깨뜨릴 필요는 없겠지.

둘째로, 이게 완전히 논픽션이라면 넌 정신분열증에라도 푹 절어 있는 게 분명해. 아, 픽션인 부분이 적어도 하나는 있는 것 같군. 7월 2일 일기 말야. 내가 언젠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지 않았던가? 거기서 모티브라도 얻은 거 아냐 뭐, 실제상황이라면 큰 실례겠지만.

셋째로, 죽고 싶으면 그냥 죽어.

나랑 만난 거 자체가 괴롭다고? 내가 너한테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그거 정말 불쾌하군. 난 칼도 쥐지 않았는데 왜 피를 뿜는 거야?

그리고 이거야말로 네가 못 믿을 소리겠지만, 사실 난 널 꽤 좋아해. 네 일기대로 표현하자면, 너의 '어둠'이 좋아.

너는 죽는다면 내 손에 죽고 싶다고 말했지. 기뻐.

할 일은 명백해. 너는 죽고, 나는 죽이고.

내일 아침에 네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국화는 싫지? 네가 좋아하는 꽃을 책상에 놔 줄게. 백합이지? 」


나는 노트를 덮었다.

누나 방을 나왔을 때는 아홉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TV에 플스 2를 연결하고 길티 익젝 샤프리로드를 넣었다. 매니악모드에서 솔로 골드캐릭들이랑 붙었다.

뭐 생각하고 자시고 할 거 없었다. 그냥 볼카닉 지르는 거다. 뭔가 답답해지면 스틱 돌린다. 텐션 차 있으면 타일런레이브 나간다. 1타에서 막히면 기분 드럽긴 해도 그래픽이 뽀대나서 좋다.

한시간동안 그러고 앉아 있으니까 누나가 돌아왔다. 눈 안 마주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작패드가 땀에 젖어서 미끌거렸다. 씨발, 모른다. 일단 지르고 본다. 볼카닉 바이퍼-!

비명이 들려오거나 누가 머리 산발하고 식칼들고 달려나오거나 하지 않았다. 조용했다.

머리가 점점 식어갔다. 솔이 살살 봐가면서 밴디트 루프도 걸고 구석 몰면 디루프로 놀고 그러기 시작했다.

뭐 별 거 있나. 그런 거지.

아니 우리 누나야 뭐, 정신분열증이라잖아. 뭐 그럴 수도 있지.

대충 남한테 피해만 안 가면 되는 거 아녀.

엄마가 오고부터 TV는 양보하고 컴퓨터로 자리를 옮겼다. 엄마는 드라마 보고 나는 마비 했다. 누나도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드라마 끝나자 엄마가 잔소리했다. 그때 슬슬 컴퓨터 접고 이불로 기어들어갔다. 다른 날보다 잠이 잘 안 왔다. 그래도 잠이 들자 언제나처럼 꿈 없이 깊이 잤다.

luc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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