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남포동 전철역에서 내려서 지하도를 따라 효정은 앞서 걸었다. 시현이나 완이 있었더라면 자가용으로 이동했겠지만, 전철 안에서 재재거리는 효정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남포동 지하상가에 나온 것도 오랜만이라, 언재 새로 생겼는지 모를 지하 팬시점의 계단을 올라오니 남포 문고였다. 오랫동안 지하철 입구에 있었던 남포 문고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가 사는 이 곳도 쉴 새 없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쪽요 이쪽.”

효정의 목소리를 따라 빠져나온 것은 남포동의 먹자 골목이었다. 두어 번 신이와 함께 왔었던 곳이다. 신이는 펄럭이는 긴 치마를 단단히 여미고 이 길에 웅크리고 앉아 떡볶이며 당면무침이며 잡채 같은 것을 먹는 걸 좋아했었다. 그렇게 많이 먹지도 못해서, 항상 내가 훨씬 많은 양을 먹게 되곤 했지만.

“이 근처에 카레하는 곳이 있었니?”
“응 있어요 있어.”

효정은 배실배실 웃으면서 걷다가, 작은 계단 앞에서 멈추어섰다. 노란 간판. 이 복잡한 거리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을 입구와 간판이었다. ‘인도 이야기’ 라는 그 간판 아래를 효정이 앞서 걸어 올라간다. 좁고 가파른 계단 양쪽에 조금은 유치한 색조의 인도풍 그림들과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퍼뜩 카레향 비슷한 냄새가 풍겨왔다. 작은 가게였다. 인도의 옷을 입고 이마에는 장식까지 붙인 아가씨가 좁은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샤리같은 천이 드리워진 자리는 비좁지만 인도풍의 샤리, 인도풍의 가리개가 깔려 있는 모습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카레에다 라쉬라는 게 덧붙여진 셋트 메뉴를 두 개 시키고, 나는 효정을 쳐다보았다.

“그래, 어때? 성적표 나온 날 성적 물어보면 안된다던데.”
“괜찮아요. 보여드리려고 들고 왔으니까.”

효정이 얄팍한 종이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성적표의 사본. 점수보다도 신빙성이 높은 것은 후미에 있는 퍼센트다. 지난 해의 성적보다 10%이상이 올라가 있었다. 1년 동안 이런 저런 일도 많이 겪은 아이였다. 집은 시끄러웠고 혜정의 히스테리는 절정에 달해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효정이에게 신경이 갈 여유가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머님이 내게 몇 번이나 효정을 부탁했던 것은 당신 자신이 효정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보상심리였다.

“잘했다. 정말 수고했구나.”
“그렇죠?”

정말로 환하게 웃는 효정을 보니 마음 한쪽이 시리다.

“마지막엔 내가 봐 주지도 못하고, 혼자서 정말 애썼네. 마지막 모의고사도 이만큼 안나왔더니.”

“마지막엔 정말 악밖에 안 남더라구요. 언니가 보란 듯이 잘 쳐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언니랑 절대 같은 학교 안 간다는 결심도 하고.”

“…듣기 편한 말은 아니네.”

효정은 킥, 웃었다.

“사이 좋은 자매가 없다잖아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응?”

“선생님은 한 번도 언니 나쁘게 말 한 적 없어요. 늘 화내고 소리지르는 건 언니였죠.”

효정의 말이 내 심장을 후벼파는 듯이 아프다.

“그런 걸로는… 모르는 거야.”

뭐라고 내가 더 말하려 할 때 인도옷을 입은 아가씨가 우리 자리에 밥과 카레를 가져다 놓았다. 얄팍하고 네모난 접시에 과일과 함께 담긴 노란 밥이 생경하다. 여기 이 곳의 카레향 만큼이나. 익숙하게 집에서 맡던 그런 카레와는 미묘하게 다른. 그렇다고 학교 식당에서 풍기는 화학조미료 듬뿍 들어간 카레향과도 또 다른. 이야기는 끊어지고 효정은 아주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밥 한 술을 떠서 입에 넣는다. 노란 밥, 흙색의 카레.

“언니 애인요.”

한참만에 침묵을 깨는 것은 시현의 이야기였다.

“엄마는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아버지는 별로 안 좋아하세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학생이라는 것 때문인지 작가라는 것 때문인지.”

어렴풋이, 나는 시현의 그간의 생활을 짐작한다. 베스트셀러가 되었었던 포렌로우 이야기. 잠시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는 학교로 돌아갔었나 보다. 포렌로우 이후에 그가 새 글을 썼던 것은 알고 있었다. 독자들이 얼마나 매정한지 나는 보았다. 포렌로우의 팬들일수록 새 책을 강도 높여 비평했다. 포렌로우의 팬이지만 류시현의 팬은 아니라는 사람이 적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그는 잃은 만큼의 팬들을 또 얻었을 것이다. 몇 년 사이 출판되는 판타지 소설이 그러하듯이, 팬들은 항상 생겨났다. 나는 놀라서 시현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을 조금 후회한다. 보아 줄 것을. 그 사람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일련의 일로 얼마만큼 상처 입었는지 두 눈으로 보아줄 것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효정은 모를 것이다.

“선생님이랑도 친했다면서요.”
“…다섯이서 뭉쳐 다녔었지. 그 애가 죽기 전에.”

그래. 그것이 끝. 그 애가 죽으면서, 모든 것은 끝났다. 웅크리고 앉아서 모든 것에 무관심하던 내 삶도, 시현의 짝사랑도. 나는 알고 있다. 그가 내게 여전히 접근하려 하는 것은 단지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옛날 이야기야.”

내 말에 내 심장이 놀란다. 옛날 일이니? 그 애가 죽은 건.

“저기, 선생님은 왜 선생님 안 됐어요? 영문과 나와도 교사 할 수 있다면서요.”

죽음이라는 말에 애써 효정은 말을 돌렸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거기에 응해준다. …생각해보면 학과에서 밀다시피 해서 했었던 교직이수, 참으로 생뚱맞았던 교원자격증. 그것만으로 내가 선생이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었다.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을까. 젊은 어머니는 잠시 교직에 있었다. 그 피가 내게도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자신 없었어.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거.”

내 얼굴의 표정이, 나는 궁금하다.

“10대의 잔혹함이 싫었어. 집단이 되면 한없이 무서워지는 그 아이들이.”  

대충 웃어넘기려고 했었는데, 나오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 때로 머리와 말이 다르게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과외는 하시잖아요.”
“그건 한 명이니까.”

나는 머쓱하게 웃는다. 집단이 무서워. 하나를 잃고 전체가 된 자들이. 혜정이의 팬사이트 사람들처럼, 시간을 거슬러 가다의 팬들처럼. 자신의 이름은 사라지고 집단의 이름만 남은 사람들은 언제나 무서워. 그것이 10대가 되면 더더욱 그래.

“이해 잘 안돼요.”
“응.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데 아까 그 말은 무슨 뜻이에요? 그런 걸로는 모른다는 거.”

애꿎게도 나는 밥 옆에 곁들인 후르츠 칵테일의 파인애플을 포크로 찌른다. 이런 말,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가… 좋아하는가…, 행동이나 말로는 알 수 없어.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도 있지만… 속으로만 파묻어버리는 사람도 있으니까.”

“…잘 모르겠어요.”

효정은 난처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어색한 듯 같이 나온 새하얀 음료를 빨아올렸다. 금속제의 컵 표면에는 미끌어질 것처럼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서로 다른 두 온도의 접점.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이도 저도 아닌, 가운데 지점의 상태. 음료수가 차가운지는 만져보지 않아도 알아, 금속제 컵 표면에 금방 맺혀서 흐르기 시작하는 저 물방울들을 보면. 하지만 표면을 갖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차가운지 따뜻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12 중편 도플갱어 [중] lucika 2005.09.12 0
111 중편 도플갱어 [상] lucika 2005.09.12 0
110 중편 높은 성에서(4) - 요약 moodern 2005.09.02 0
109 중편 높은 성에서(3) - 불꽃 moodern 2005.08.29 0
108 중편 높은 성에서(2) - 머리 moodern 2005.08.29 0
107 중편 높은 성에서(1) - 초대 moodern 2005.08.29 0
106 장편 [환국기] 0. 세성(歲星)1 강태공 2005.08.25 0
105 장편 [맹약의 겨울] 해를 집어삼키는 늑대 (3) 풀잎새 2005.07.25 0
104 장편 [맹약의 겨울] 서장 - 해를 집어삼키는 늑대 (2) 풀잎새 2005.07.25 0
103 장편 [맹약의 겨울] 서장 - 해를 집어삼키는 늑대(1) *수정 풀잎새 2005.07.17 0
102 장편 맹약의 겨울 - 프롤로그1 풀잎새 2005.07.17 0
101 중편 미래로 가는 사람들 : 起 [본문삭제]2 ida 2004.11.05 0
100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4. 풍경 속의 바람 (3) 최종회5 먼여행 2004.11.02 0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4. 풍경 속의 바람 (2) 먼여행 2004.11.01 0
98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4. 풍경 속의 바람 (1) 먼여행 2004.11.01 0
97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3. 여행1 먼여행 2004.10.30 0
96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2. 혜정, 상처 (4) 먼여행 2004.10.30 0
95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2. 혜정, 상처 (3) 먼여행 2004.10.30 0
94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2. 혜정, 상처 (2)1 먼여행 2004.10.26 0
93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2. 혜정, 상처 (1) 먼여행 2004.10.2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