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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점점 더 알려지면서 곤란해하는 것은 ‘별빛 이야기’의 출판사 쪽이었다. 통신에서 연재되는 소설들을 출판하면서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출판사이긴 하지만 그 외의 글들은 말 그대로 구색맞추기라는 느낌이었다. 통신상의 글들이 거의 그 출판사를 거친다는 말이 돌 만큼 온라인 소설들의 출판이 주를 이루는 회사에서는 일이 어서 빨리 수습되기만을 바라는 모양이었다.

이진희의 말이 맞았다. 안티사이트의 내용은 오히려 자신들의 발목을 죄는 셈이었다. 원작의 출판 시기, 원문과의 대조 등에서 ‘별빛 이야기’가 번역된 ‘시간을 거슬러 가다’보다도 원래의 영어문장과 가까운 느낌이 드는 것, 모든 것에서 그들은 부정하지 못했다. 나는 오히려 그 사이트를 들른 사람이 번역가인 나를 추궁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의역을 택했느냐- 라고 말이다. 그러나 ‘별빛 이야기’가 여신이의 숨결이듯이, ‘시간을 거슬러 가다’는 내 숨결에 가까웠다. 원문과 동일한 글은 없다. 번역되는 순간 그 글은 새롭게 생명력을 갖는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오랫동안 그 사이트를 방문하고 사람들의 날카로운 항의성 글들과 반박의 글들을 읽으면서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 가다’의 작가인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별빛 이야기’가 유통중단으로 공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대형 서점에서 우연히 그 책의 묶음 위에 질낮은 갱지로 반품 확인을 찍어놓은 것을 보면서 나는 서서히 확신으로 나아갔다. 적어도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여신이를 다치지 않고 끝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자주 이진희의 전화를 받고 진행상황에 대한 보고를 들으면서 나는 별로 대응하지 않았다. 이진희는 그것이, 내가 처음 맡은 이 출판사의 일이 시끄러운 소란에 말려든 것에 대한 쇼크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항상 전화의 끝에 이진희는 내가 이번 일로 이 출판사와의 일을 더 하지 않는다거나 하지 않을까 염려했고, 다음 번의 책도 잘 부탁한다는 등의 말을 덧붙였다.

그 즈음에 나는 병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알린 것은 완 뿐이었다. 젊은 여자가 신경정신과 건물을 들어서는 것도 구설수에 오르내릴 수 있어서 나는 일부러 완도 나도 아는 사람이 없는 동네의 병원을 정했다. 처음 한 두 번은 퇴근하는 완이 나를 데리러 오거나 했지만, 이내 나는 혼자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졌다. 사실 정신과에 다니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 다짐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괜찮아 질 것이라는 확신. 그것이 나중에 뒤틀린다고 할지라도 이번에는 완에 의지하지 않고 회복해보려고 하는 일말의 기대. 그 어느 쪽이라도 내게는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짝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짝수가 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내게는, 옆에 있었어도 옆에 있는지 몰랐던 신이 같은 관계가 아니라, 나를 보고 있어도 보고 있는지 몰랐던 혜정이같은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고 기댈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된다는 것을 뜻했다. 나는 완과 내가 어느쪽에 속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완을 좋아하고 있고, 완이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느낌이지 확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닥터와 나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지금껏 나와 같이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아버지의 이야기와 완의 이야기.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시절의 절박했던 이야기와, 눌러 두었던 기억에 대한 이야기. 처음에는 항우울제같은 약들을 지어주곤 하던 닥터는 어느샌가 약을 점점 줄이기 시작했다. 그와 맞춰서 인위적인 들뜸이나 인위적인 편안함 역시 줄어들었다.

닥터가 가장 조심스러워 했을 때는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두 번의 자살미수. 부엌에서 칼을 들고 와서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첫 번째 자살미수는 분명 아버지 때문이었다. 겉으로 물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 나와 아버지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그 미친 차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버지는 죽지 않았을 거라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두 번째의 자살미수는, 좀더 치밀했다. 몇 군데의 약국을 돌아서 아스피린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고등학교 교련 선생님 덕분이었다. 사람이 죽는 데 꼭 수면제를 먹을 필요는 없다고, 그 분은 어떤 약이든 많이 먹으면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내게 그 말은 정보에 불과했다. 점층적으로 나는 모든 것을 내 안에 쌓아가고 있었다. 종종 찾아오는 간질 발작으로 아이들과 더욱 더 멀어져 간 것, 그들이 등 뒤에서 날 가리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나는 듣고 있었다. 내 병이 내 피를 타고 앞으로 내가 낳을 아이들에게까지 내림으로 가리라는 것이나, 한 번의 자살미수와 몇 번의 발작으로 학교 선생님들이 나를 남달리 대하는 것, 그런 많은 것들을 속으로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가 하루에 터뜨렸다.

닥터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원망할 곳을 찾지 못한 내가 그 화살을 나 자신에게 돌렸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두 번째의 자살미수 역시 그 연장일 뿐이라고 했다. 가해자 역시 죽은 상황에서 내가 그 원망을 자신에게 돌린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닥터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한참을 울었다. 겉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죽음 전에도 나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표정이 똑같았다고 해도 그 둘은 다른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의, 대학교 때의 나는 늘 계속해서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그 총부리 끝이 나를 뚫고 어머니를 상처입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제는 그 총부리를 치울 때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상처입어온 어머니를 보둠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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