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들어가도 되겠어요?"

이미 들어서며 어머님이 물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뵙는 환한 얼굴. 아홉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헤정은 집에 보이지 않았다. 어머님의 웃음은 효정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혹은, 아버님의 일이거나. 어머님은 유리쟁반으로 받쳐오신 유리잔과 과일 접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우리 효정이, 좀 하는 것 같아? 효정이 너 열심히 해야 한다."
"엄마는―"

효정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서글서글하고 사교성이 좋은 건 효정이 쪽이었다. 어머님과 살갑게 군다고 혜정이 묘한 투로 말하던 것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믿음이 가는 자식과 살가움이 가는 자식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닌 법이다.

"마음 편하게, 동생처럼 부탁해. 혜정이가 나경이를 얼마나 따랐어. 동생의 동생이려니 하고."

"네."

지금은 아닐테지만요…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다. 어머님은 빈쟁반을 들고 방으로 나가셨다. 언제나 어머님은 방문을 꼭 닫으신다. 바깥음이 새어 들어가는 게 꼭 자신의 탓이기라도 한 것처럼.

"언니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셨죠."
"응."
"언니 동생이라서 그런 거예요? 혜정언니 때문에?"

사이좋은 형제간이 없다고 그랬다. 가족간의 일이야 내 관심 밖이지만.

"아니. 네가 그러고 싶어하니까야."
"언니랑 나랑 어느 쪽이 더 좋아요?"

짖궂은 얼굴. 그래, 장난기가 있었지 너는.

"너는 나랑 혜정이랑 어느 쪽이 좋은데?"

아이는 황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곤 깔깔 웃었다.

"아아, 백기. 내가 졌어요."




효정이와 꽤 친해졌을 때쯤에는 그 해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친해졌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물으면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끔 일요일이면 어머님의 권유로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고, 함께 영화를 보기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영화의 내용은 기억에 나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 가을, 나는 내가 보았던 영화보다는 예전의 영화를 자주 떠올렸다. '그들'과 함께 보았던 PIFF의 영화, 여름날 갑작스럽게 찾아보았던 여고괴담, 디즈니의 뮬란 같은 것들. 그리고 조금 앞서 보았던, Total Eclipse. 그 햇살 가득하던 영화의 영상을.

"Total Eclipse?"

어느 영화를 다시 보고싶으냐는 물음에 나는 그 영화 제목을 이야기했다. 효정은 똑같은 발음으로 되물었다. 별로 유명했던 영화도 아니었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오지 않았다면 혜정 역시 보자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혜정처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그 예쁘장한 남자배우를 좋아하지도 않았던 내게 그 영화는 그렇게 우연처럼 다가왔었다.

"랭보에 대한 영화야. …랭보를 좋아한다면 별로 권하고 싶지 않지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랭보로 나왔었어."

"타이타닉의 그 곱상한 사람요? 헤-"

효정은 얼굴을 찌푸렸다. 타이타닉으로 세계적인 톱스타가 되었다는 그 배우는 Total Eclipse를 촬영하던 당시에도 상당한 팬클럽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했다. 기차역에서 부서지던 햇살을 받으며 걸어가는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와, 하늘을 반쯤 올려다보는 그 시선과, 휘젓는 팔에 내가 얼마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는지, 그 싸늘한 웃음에 섬뜩하게 심장을 훑어 내려가던 전율, 그런 것들을 효정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쓰레기야!"하고 얼굴을 한껏 찌푸리던 혜정을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을.

"좋은 영화예요?"
"아니."

웃는 나를, 효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았다. 혜정은 토하고 싶다고 했었다. 화면 가득히 레오나르도가 동성연애자로 나온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역겹다고, 정말로 그날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던 혜정이었다.

"근데 왜 다시 보고 싶으세요?"
"글쎄…."

나는 그냥 웃었다. 랭보의 집은 암울했다. 답답한 가정 분위기에다 일상적인 폭언이 더해진 최악의 환경이었다. 그런 집에 돌아온 랭보가 헛간에 들어와 곧바로 햇빛 드는 창 아래에 책상을 가져다 놓았다. 짚섶이 높게 산을 이루는 헛간의 풍경과 그 낡은 나무책상은 퍽이나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았다. 그 앞에 랭보는 의자를 가져다 앉고 펜대와 종이들을 챙겼다. 그 당당하고 거침없는 몸동작들이 아직도 생생했다. 여기는 내 자리야. 나는 시를 써야 하는 사람이야. 라는 그 모습이 다시 보고 싶다. 이미 글을 쓴다는 것은 관심 밖에 있는 내가, 왜 글쓰기라는 장면에 그다지도 사무치는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 알 수 없다.

"늦었다."

나는 가방을 둘러메며 일어섰다. 효정은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녁 먹고 들어간다고 말했는걸요 뭐."
"나도 집에선 딸이야."
"체에."

불룩한 볼을, 나는 손가락으로 툭 눌러버렸다. 효정이 푸우, 하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년이면 이렇게 못나온다구요. 가끔쯤은 봐줘요."
"봐주는 건 봐 주는 건데, 나도 집에서 어머니가 기다리시거든."

못이기고 효정이 결국 일어났다. 고3이 된다든가 하는 것을 굳이 나까지 일깨워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겹도록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듣고 있을 테니까. 이맘때의 고 2교실이란, 보지 않아도 훤하다.

"나, 말이에요."
"응?"
"외대 가고 싶어요."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했었잖아. 외대를 간다고 해서 외교관이 못되는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10년이 넘는 꿈을 바꾸어버릴 일이 네게 무엇이 있었을까.

"영어과라도 가려고?"
"…네."

나는 그저 웃는다. 저 나이의 꿈이라는 것은 얼마나 자주 바뀌는 것인가. 내년 이 무렵에 효정은 어쩌면 자연계를 갈 걸 그랬어 하고 한숨을 쉴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지금은, 너의 선택 하나하나에 그저 웃어줄 수밖에.

"안 기쁘세요?"

조금 실망한 얼굴로 효정이 대뜸 물었다.

"왜?"
"내가 영어를 하고 싶어 하잖아요. 선생님 과목을요."

혜정 역시 나를 밀어낼 때면 그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는 걸 효정은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언니의 동생으로가 아니라 자신으로 보아달라고 계속해서 주장하곤 하는 효정이니까. 하지만 자꾸만 나는 효정이가, 몇 년 전의 혜정이로 겹쳐져 보인다. 작은 일 하나하나에 효정이와 언니 혜정이를 구별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만큼 내가 효정이를 효정이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어를 좋아하는 건 물론 기쁜 일이지만―, 니 꿈은 니 인생을 결정하는 거야. 누군가를 기쁘게 하려고 선택하는 게 아니잖아?"

/ 나는 나경이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길 바란다. 니 꿈을 날 위해서 정하지 마라. 니 꿈은 니 인생을 결정하는 거란다. /

다시 문득 머릿속에서 익숙한, 그러나 낯선 음성이 생생하게 들려온다. 서늘한, 현기증.

"언니?"
"응?"
"괜찮아요? 얼굴이 창백해요."

아, 하고 나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가을바람에도 축축한 느낌이 손 끝에 묻어났다. 효정의 얼굴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고 나는 애써 웃어보였다. 뭐였을까. 그 목소리와, 그 서늘한 한기는. 생각하지 말라고 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낮게 속삭였다.

"놀랐잖아요."
"미안―."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74 장편 R & J-6 anjai 2004.10.15 0
73 장편 R & J-5 anjai 2004.10.15 0
72 장편 R & J-4 anjai 2004.10.15 0
71 장편 R & J-31 anjai 2004.10.12 0
70 장편 R & J-2 anjai 2004.10.12 0
69 장편 R & J-1 anjai 2004.10.12 0
68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3. CUT 먼여행 2004.10.11 0
67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2. 여신女神 (2)1 먼여행 2004.10.09 0
66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2. 여신女神 (1) 먼여행 2004.10.08 0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1. 새로운 아이, 효정 (2) 먼여행 2004.10.08 0
64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1. 새로운 아이, 효정 (1) 먼여행 2004.10.06 0
63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0. 꿈에서1 먼여행 2004.10.02 0
62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9. 네트워크 먼여행 2004.10.01 0
61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8. Blue Mirage 먼여행 2004.09.30 0
60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7. 첫번째 목소리 먼여행 2004.09.29 0
59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6. 사람들 사이에는 강이 흐른다.2 먼여행 2004.09.28 0
58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5. 비틀림 먼여행 2004.09.27 0
57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4. 혜정, 병원 (2) 먼여행 2004.09.26 0
56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4. 혜정, 병원 (1) 먼여행 2004.09.25 0
55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3. 시현 먼여행 2004.09.2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