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6.사람들 사이에는 강이 흐른다.



안개가 짙게 깔려 시선이 흐릿하다. 이상한 향이 있다, 했더니 먹물향이었다.

“나경아.”

등 뒤에서 나직하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려 하지만, 고개를 돌릴 수가 없다. 묵직한 손이 내 어깨로 내려온다. 누군가가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이 난 정말로 싫다. 하지만 어쩐 이유일까, 손을 뿌리칠 수가 없는 것은. 그 넓은 손이 내 어깨를 당겨 가볍게 토닥였다. 손이 따뜻하다. 그 무게감이 이상하리만치 편하다.

“괜찮니?”
“…….”

난 몸을 돌려 그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넓은 가슴의, 나보다 시선이 훨씬 높아서 품에 파묻히면서도 얼굴을 볼 수 없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데도, 난 어머니 태胎 속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다.

“힘든 일이 있구나. 그래, 속상했구나….”

그가 내 등을 감싸고 토닥인다. 반가운 사람의 체온과… 먹물향.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사람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도,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모두 다 알 것만 같다.

“…보고 싶었어…, 많이 보고 싶었는데…….”
“그래, 나도. 그래.”

그래- 라고 말했다. 언제나, 그건 안돼 라는 말을 할 때조차도 이 사람은 그래, 라고 말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음성이 좋았다. 그가 내 등을 쓸어주는 감촉도. 그의 크고 두터운 손도.

방이 춥다. 으슬으슬한 기운에 이불을 끌어 올려보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여름에도 이불을 덮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만큼 추위를 많이 타는 나를 위해서 어머니는 큰 맘을 먹고 양모 이불을 사 주셨다. 하지만, 어째서 이래서 추운 걸까.

“…나경아, 얘, 나경아?!”

누가 날 부르고 있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아득히 먼 거리에서 들리는 것 같은, 울리는 음성이다.

“누나?”

서서히 물위로 의식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뭔가, 아주 기분좋은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흐릿한 시선으로 어머니의 얼굴과, 그 뒤에 서 있는 완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몇시야?”

일어나면서 문득,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 방에 완이 와 있을까 라는 생각도. 머리가 무거워서 나는 일어나 어머니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열이 너무 많이 나서, 걱정했어.”

완이 어머니 대신 말했다. 어머니는 조금 한숨을 내쉬며 나를 보았다.

“하루를 꼬박 잤다.”
“…엄마, 추워.”

어머니는 내 이마에 손을 얹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가끔 어머니의 얼굴에서 세월이 보일 때마다 나는 시선을 피해버린다. 나는 당신을 정면으로 쳐다볼 수가 없다. 당신이 내 표정을 볼 때마다 어떤 느낌을 받는지 알기 때문에. 이따금 내 손을 붙잡고 하는 당신의 말들이 나는 부담스럽다. 당신이 힘들어하는 그 무표정이 내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시선을 피할 수밖에.

“넌 어쩐 일이야?”
“집에 와 보니까 앞에 서 있더라. 너 안나왔다고 그래서 얼마나 놀랐는지.”

어머니가 완 대신 대답했다. 완이 흐흠, 헛기침을 하며 말을 꺼냈다.

“전화는 켜져 있는데, 안받잖아.”
“끄는 걸 잊어먹었네….”

머리맡에 놓인 전화를 들어보니, 분명 소리로 맞춰져 있었다. 부재중 전화 5. 어지간히 깊이 잠들었나보다, 이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에도 깨지 않을 수 있다니. 집 전화는 내 방의 벨을 일부러 죽여 놓았기 때문에 집에 전화가 오더라도 깨지 않는 수가 종종 있긴 하지만.

“…아, 혜정이한테는?”

하루를 잤다는 말에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다. 어머님은 그렇게 반가워 하셨었는데.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더라. 정신과 치료 들어간다고….”
“다녀왔구나, 잘했어.”

내가 어머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이 버겁듯이, 어머님도 혜정이와 단둘이 있는 것이 부담스러우실 것이다.

“정신과라니?”
“아, 엄마…”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어머니의 얼굴이 먼저 질렸다.

“걔가 왜?”
“…엄마….”
“왜, 왜 다들 그런다니. 왜 멀쩡한 사람들 가슴에 못을 박아―.”

어머니가 비틀, 주저앉았다. 책상 의자가 어머니를 받치고, 어머니는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짐작조차 하지 못할 작은 단서에도 어머니는 금방 상황을 알아냈다. 그것은, 당신이 이미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엄마 여기 있어. 나경아, 안 보이는 거니?/
/보여./
/왜 그랬어, 왜?/

그 날 어머니는 꼭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과 마찬가지로 지금 나는 어머니를 위로할 어떤 말도 할 줄 모른다. 완은 어색하게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서 있었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 강이 흐른다. 그 강 가운데에는 섬조차 없다.




혜정이 퇴원하기까지의 일주일동안 우리는 거의 매일 혜정에게 들렀다. 때로는 완과 나 둘이서, 때로는 나와 시현, 그리고 때로는 시현과 완. 세 사람이 함께 움직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 사이의 묵계같은 것이었다. 세 사람이 함께 그 아이를 찾아갔을 때, 혜정 자신이 우리들에서 유일하게 따로 있는 것처럼 느낄지도 모르기 때문에. 혜정은 점차 말수가 늘었지만, 기분탓일지, 내게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일 주일이 지나 퇴원일이 되었을 때에 혜정은 나와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때쯤에 나는 혜정에게서 빌린 편지를 펴 볼 용기가 났다.

[ 사랑하는 혜정이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 지금은 새벽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야. 조만간 해가 뜰테지. 창 밖으로 먼 하늘은 아직 검기만 해. 이 아파트는 너무도 높아. 내 방 바깥쪽의 창 알지? 나는 이 둥근 유리가 정말로 싫어. 가까이 다가서면 풍경들이 일그러져 보이지. 무엇 때문에 이런 창을 달았는지 모르겠지만 말야.

마지막이란 말을 떠올렸을 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생각보다 마음이 편안하다. 오늘은 이것 저것 정리를 했어.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아. 한동안 보질 못했지. 완이, 나경이, 혜정이.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사람들이 알까.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해 왔을까. 나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나경이, 완이, 혜정이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걸 생각하니까, 자꾸 마음이 이상해진다.

…혜정아, 나경이가 그랬거든. 내가 하는 말들, 알아들을 수가 없다구. 나경이가 하는 말들이 나는 너무 무서웠었어. 그런데. 너무 나경이가 보고싶네. 미안한데, 너무 미안한데, 그 말을 하질 못했어.

보고싶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 미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잘 안돼. 아니… 너무 미운 걸지도 모르겠어. 내 소식을 뒤늦게 듣고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까. 슬퍼할까. 아니면… 아, 내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찌푸리지만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나경이도, 완이도, 혜정이도 모두 만나지 않았으면 아프지 않았을걸. 아냐, 아냐, 이건 잊어버려. 모든 건 내 탓이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건 나니까. …]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나는 2번째 장을 넘기지 않고 그냥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 그게 나라고? 분명히 그 앞의 문장은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글 어디에도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 혜정은 이 사람을 나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애가 내게 보인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 사람’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도망치기 위함이 아니다. 신이의 죽음에 내 책임이 없다고 믿고 싶어해서가 아냐. 이건, 내가 아니다. ‘그 사람’은 내가 아냐. 미워해야 하는데 미워할 수 없는, 자신의 소식을 듣고 얼굴을 찌푸릴까봐 신이가 두려워했던, 그 사람이 따로 있다. 몸이 떨렸다. 누군가가, 여신이를 그렇게 몰아간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지자 마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것은 그 당사자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나에 대한 분노였다. 나는 미친 듯이 여신이가 보낸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신이가 ‘테러리스트’ 안에 고의든 실수로든 쪽지를 남겨 놓았듯이, 다른 어딘가에 신이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장을 다 탈탈 털어 보아도 그런 쪽지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엄마!”
“응?”

문을 열고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는 거실에서 작은 소반을 놓고 뭔가 적고 계시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엄마, 여기 둔 박스 못봤어?”
“박스?”
“책장 옆에 둔 거, 라면 박스. 안에 책 들었는데.”

어머니 표정이 돌연 환하게 밝아진다.

“그거, 서재에 치워놨는데, 가져올까?”
“아니, 내가 갈게.”
“버리는 건가 해서, 깜짝 놀랐다. 그래서 치워놨지.”

어머니는 따라 일어서며 나에게 웃었다.

“버려? 뭘? 박스?”
“너 대학 때 보던 책들이 들었던데. 버리는 거 아니지? 나경아, 너 글 쓰는 거 좋아했잖니.”

아, 하고 서서 나는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 박스를 열어 보고 어머니는 또 깜짝 놀랐었겠구나. 거기 가득 들어있는 습작 노트들, 글을 쓰겠다고 읽기 시작했던 책들, 그것들을 보고 어머니는 많이 또 아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두꺼운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나에게, 어머니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는 것이다. 언젠가는 유리벽이 걷어질 것이라고, 그 때는 어머니를 향해서 밝게 웃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엄만 내가 글 쓰는 게 좋아?”
“물론이지. …나는, 니가 그렇게 남의 글만 보고 있는 게 너무 속이 상한다.”

번역이라든가 교정이라든가 하는 일에 대해서 나는 불만이 없다. 어머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나보다.

“예전엔 너 작가가 되겠다고 했었지. 얼마나 글을 잘 썼니. 다들 너 칭찬을 해서 나도 아주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는데.”

…그렇게 작은 상장을 타서 집에 들어선 날에는, 아버지는 날 따뜻하게 안아 주었었지. 그 큰 손으로 어깨를 토닥였었다. 그래, 우리 나경이가 세상에서 제일이지. …제길. 머리가 아프다.

“엄마, 일 안해?”

무표정하게, 나는 어머니에게 무심하게 내뱉았다.

“…아, 해야지.”

어머니는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거실 그 자리로 돌아갔다. 서재 입구에서 몰래 어머니를 보았다. 반상 앞에 숙인 어머니 등이 좁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등은, 저렇게도 좁다.

박스 안의 책들을 다시 들어내면서도 혹시 말려 올라가는 종이 조각이 없는지를 살폈지만 그런 종이는 없었다. 마침내 박스 안이 비고 나서, 책이 더럽혀지지 않게 놓았을 흰 종이 한 장만이 남았다. 여신(女神)답게 꼼꼼하다고 넘겨 버린 종이자락이지만. 나는 불안한 예감에 종이를 들어냈다. 바닥에는, 작은 스티커로 조심스럽게 고정되어 다이어리의 속지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조금도 접혀진 부분이 없이, 조금도 겹쳐진 부분도 없이, 세심하게 붙여진 다이어리 속지에 깨알같이 글씨가 가득하다. 나는 이 글씨를 세상 어디에서도 알아 볼 수 있다. ...꼭꼭 눌러쓴, 아래 한글의 ‘가지’체를 닮은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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