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5. 비틀림.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소파에 어머니가 기대어 주무시다가, 인기척을 느끼곤 깨서 날 보셨다.

“아침에 온다고 했잖아. 밤새 이러고 있었어?”

책망하듯 내가 물었다. 어머니는 어색하게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아니다, 너 전화 받고 깼지. 전화는 왜 꺼놓고 있었어? 계속 해도 안 받더구나.”

“병원 안에선 핸드폰 사용 금지잖아.”

가방을 소파 앞에 내려놓았다. 묵직한 느낌이 어깨에서 사라졌다.

“혜정이는 갑자기 어디가 아파서 입원을 했다니?”
“큰 일은 아니래. 일주일 정도는 있을 것 같은데.”

어머니에게 그 애가 약을 먹었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이의 죽음 앞에서 내 눈치만 살피시던 어머니에게, 또 나와 친하던 누군가가 세상을 떠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래, 하고는 소파에서 일어난다.

“회사 오늘 하루쯤 가지 말고 쉬어, 엄마 밤새 못잤지?”
“아니라니까. 잠을 좀 설쳐서 그래.”

나는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거나, 그 품에 안긴다거나 하는 것을 할 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 속의 아빠도 어머니도, 내 손을 꼭 붙잡거나 내 어깨를 감싸 안는다거나 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니까. 가끔 생각이 난다. 아빠의 손이 무척이나 컸다는 것, 아빠에게선 언제나 먹물향이 났다는 것, 그런 것들이.

“참, 류시현이란 청년한테서 전화왔었다. 너 전화 꺼져 있다고 하면서.”

어머니가 방에 들어가려다 멈춰 서서 내게 말했다.

“……그래?”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더라. 그럼 씻고 들어가서 쉬어. 피곤할텐데.”

“응.”

가방을 다시 들고 내 방 안으로 돌아왔다. 만 하루도 지나기 전인데, 방안 풍경이 돌연 낯설게 느껴진다. 책상 위, 노트북이 놓여져 있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언제나 똑같이 보던 것들이 그 자리에 들어차 있는 이 작은 방이 왜 이렇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인지.

방 한쪽 벽을 채우고 있는 책장에 시선이 멈춘다. 그래, 달라진 것은 한 가지다. 이미 눈으로 보고 간 것이라고 해도, 책장 한 줄의 색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은 여전히 내 눈만은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이 내게 주는 압박감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다.

도망치듯이 전화를 켰다. 네 개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오랜만이다. 이 시간에 전화를 꺼놓는건, 받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다시 연락할게.”
여덟시 사십이분.

“여기, 리젠이다. 어딘지 알지? 기다리고 있을 거다.”

아홉시 삼십분. 시현의 목소리는 조금 취한 듯하다.

“나경아, 사랑해…, 사랑한다구…. 난 여기서 있을테다. 알았어?”

열두시 삼십팔분. 잔뜩 술에 취한 목소리.

“너, 정말… 잔인하다. 니가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두 시 오십일분.

전화를 다시 끄고 침대에 기대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시현에게 무엇을 했나. 시현은 왜 나에게 ‘니가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말하는가. 시현은 나에게 무엇인가. 시현에게 나는, 무엇인가.

“‘그들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낮게 중얼거리는 내 음성. 그조차 낯설다.

시현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니 시현 자신의 말로는 술을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그가 이렇게 만취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한 것은 처음이다.

/네, …류시현씨? 이거 뭐야?/
/나경아./
/이거 뭐냐니까./
/널 좋아해. …내 연인이 되어줘./

어울리지 않게 굳은 목소리였다. 그 내용만큼이나 어울리지 않게. 그 답지 않게. 매사에 거칠 것 하나 없다 싶은 그 사람이 그런 떨리는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싫어./
/…왜?/

그 물음에 난 뭐라고 대답했더라. 석 달 열흘이 넘은 이야기. 이상한 일, 시현이 날 좋아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데. 그는 무엇으로 내가 그의 연인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 것인지.



완이 부산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건 그다지 의외의 일은 아니었다. 내가 가르치고 있던 몇 년 동안에, 완은 안되면 아버지가 재직중인 학교에 갈 거라고 장난처럼 말하곤 했었다. 물론 아버님이 재직하고 계시는 그 곳은 부산에서 꽤 인정받는 대학에 속했다. 모교라는 점을 빼고 객관적으로 보면, 내가 졸업한 학교와 비교해도 나쁘지 않다, 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아들은 서울 보내고 싶어하실 거다./
/쌤. 객관적으로 말이예요, 내가 서울대를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킥킥 웃으며,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이 가볍게, 그 때의 완은 그렇게 말했다.  

/서울대 못갈 건 또 뭐있냐./
/간판만 따서 뭐하게요. 갈려면 내가 가고 싶은 데를 가야지./

그러면서도 완은 정확히 무슨 과를 가고 싶어하는지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완이 수능을 보던 해, 혜정은 고1이었다. 1하고 조금 소수점 자리대가 붙은 퍼센트라고 성적표가 나오던 날 내게 전화를 걸어서 알려준 완은,

/쌤. 내가 서울 가면 서운하겠죠?/

하며 웃었다. 못말릴 녀석, 속으로 그 말을 삼키며 내가 겉으로 한 말은 니가 서울에 가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였다. 어디든 붙기나 해, 하며 나는 뭐라고 조금 투덜거렸던 것 같다.

/나, 아버지 계신 데로 가기로 했어요./

그 때 완의 그 말에 떠올랐던 말은- 그래, 앞으로도 어쩌면 자주 볼 수 있겠구나 라는 것이었다. 조금 기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간판이라는 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능력이 있는 사람은 학벌과 상관없이 성공한다는 신화는 여전히 매스미디어의 단골 메뉴이지만, 그게 신화가 될 만큼 그 비율이 적은 것 또한 사실이 아닌가.

나는 지금 왜 완의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 시현. 시현 때문이다.

/밥 사줘./

어느날 갑자기 걸려온 전화 너머에서 완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넌 위장이 몇 개야?/
/세 개./

아하하, 하고 웃어버리고 나는 그러자, 했다. 혜정이네에서 월급을 받은 다음날, 남포동 수라우동을 찾아 들어서니 완 옆에 웬 사람이 앉아 있었다.

/누나. 여기 여기./
/안녕하세요. 류시현입니다./
/…안녕하세요./

그는 완의 학교 선배라고 했다. 복학한 바로 윗학번의 선배로, 나이는 나보다 두 살이 위. 이 앞에서 만나서 그냥 함께 왔다고 하는 완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글 쓰신다면서요?/
/…아아 뭐 글이랄 것도 없는데…./

그저 끄적대는 글이란 이야기가 나오고, 그는 내 이야기를 꽤 꾸준히 들어 주었다. 과외를 제외하면 내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시현이 ‘~면서요?’라고 말하는 것들에서, 아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완에게 이야기한 것이 상당한 양이구나 하는 생각.

/너는 내 흉을 그렇게 보고 다녀?/
/내가 뭘-/

완은 항변하듯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웃음으로 지웠었다.



팔이 뻐근하다 싶었더니 계속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전화기가 눈에 들어오자, 무작정 2번을 누른다. 습관처럼 손에 붙어있는 일들이 있다. 의식과는 상관없이 행동하게 되는 것.

“네, 류시현입니다.”

피곤에 찌든 목소리. 두시 넘어서까지 그러고 있었으니, 지금쯤 머리가 울릴테지. 숙취를 무척이나 버거워 하던 사람이었는데. 어쩌면 지금, 숙취를 이기기 위해서 늘 그러듯이, 따뜻한 현미녹차를 옆에 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야.”
“나경이?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지금 어디야? 거기로 갈께. 기다려.”

맙소사. 이 사람은, 지금 내 음성을 듣고 날 걱정하고 있는 거다.

“아냐, 지금 집인데, 밤새고 와서 목소리가 좀 그래.”
“정말이야? 밤새 뭐했어. 전화도 꺼놓고.”

난 침대 위로 올라가서 벽에 기대 앉았다.

“혜정이가 아파서, 병원에.”
“…괜찮아?”

이렇게 일상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지난 밤의 그 음성 메시지들은 시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실수로 남겨둔 것만 같다. 하지만, 아니지. 리젠을 알고, 사랑해 나경아- 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다시 없으니까.

“응, 괜찮은 거 확인하고 왔어. 일주일쯤 있으면 된대.”
“아니, 혜정이 말고.”
“응?”
“너 말야. 괜찮아?”

말문이 막히고, 온 몸에 힘이 스르륵 빠진다. 알고 있다. 이 사람은 언제나 나만 보고 있다는 것. 처음 봤을 때 완에게서 들었던 정보를 모두 외듯이 기억하고, 내 목소리의 변화에 민감한 이 사람.

“나경아?”
“응- 괜찮아. 시현씨는?”

그는 잠시 아, 하고는 침묵했다. 그제야 지난 밤의 일들을 떠올린 모양이다.

“많이 취했나보다, 나.”
“그런 것 같았어. 방금 전에 들었는데….”
“목소리 들으니까 좀 안심이 된다, 야.”
“…그래.”

난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시현이 어째서 나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쓰는지. 그리고 왜 나는 시현에게서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지.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이상한 면이 있는 것이다. 단점이라면 저 로맨티스트 주의랄까. 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개 장점이라고 불리지, 단점이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연애감정에선. 그렇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사랑할 수는 없는 거다.

“그럼, 끊는다.”
“아, 나경아.”
“응.”
“오늘, 잠시 볼래?”
“피곤해. 쉴래.”
“그래…. 잘자라.”

틱. 전화를 끊고 침대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와 눈이 부셔서 다시 일어나 커튼을 쳤다. 창 밖으로 아득히 아침 풍경이 보였다. 사람들이 출근하기 시작할 시간이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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