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2.남은 자들



신이가 어째서 내게 그 선물들을 주지 못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신이를 처음 만난 여고 1학년의 봄에, 나는 사람에 대한 배반감에 꽤나 시달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일인지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신이를 만났을 때, 즉 복학생인 신이가 내 짝이 되었던 그 날에 나는 굉장히 날카로운 여학생이었다는 것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러한 것이다. 한 살이 많은 복학생이 한 반에 있다. 새하얀 얼굴을 보면 아파서 휴학한 것인 듯 한데, 그렇다고 나이많은 동급생과 친구를 하는 게 어디 만만한 일인가. 어째서 내가 끔찍하게도 좋아했던 짝이 전학을 가고, 그 자리에 그 만만하지 않은 동급생이 짝이 되느냔 말이다.

“…저기, 나는, 강, 강 여신….”
“이름 알아. 난 이나경. 됐지?”

나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중학교 3년동안에 벗어나지 못했던 따돌림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 주었던 짝이 이제 더 이상 같은 학교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적응할 시간이. 그 애가 주었던 ‘무한궤도’의 LP판이 포장도 뜯지 못한 채 집에 있는데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무서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3년의 따돌림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던 내게 그 짝 외의 친구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내 대답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애에게 조금 미안해져서, 나는 조금 풀어진 얼굴로 다시 말을 걸었다.

“휴학은 왜 했었는데?”
“…응, 좀, 아파서.”
“이젠 안 아픈 거야?”
“으응.”

신이는, 환하게 웃었다.

“저, 저기, 신해철 좋아하니, 혹시?”
“어, 응. 무지무지 좋아해. 왜?”

신이는 가방 속에서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포장된 후에 한참 가지고 다녔었는지 모서리부분이 낡아 있었다.

“…뭔데 이게?”
“이거, 신해철 1집인데. 너 들으라구.”
“왜?”
“친구 됐으니까, 기념으로 선물하는 거야.”

신이는 다시 웃었다. …그 얼굴에 왜 화가 치밀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하지 말아도 좋다.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화가 많이 났었고, 신이에게 뭔가 심한 말을 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말렸던 것은 기억이 나니까.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신이의 마지막 말이다.

“미안해….”




박스 안의 책들을 모두 정리하기 위해서는 책장 한 줄을 완전히 비워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 벽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섰다. ‘소설작법’ ‘시나리오 쓰는 법’ 이라는 책이 줄줄이 꽂혀있는 칸 외에 비울 것은 없어 보였다. 신이가 보낸 박스에다 책을 정리하기 위해서 박스를 완전히 비워냈다. 두꺼운 습작노트들과 책장이 야리해질 정도로 손때가 묻은 책들이 박스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글을 쓰는 걸, 신이는 좋아했었다.
신이가 글을 쓰는 걸, 나는 좋아했었나?

외딴 방, 오래전 집을 떠날 때, 깊은 슬픔, 신들의 사회, 내이름은 콘라드, 엘리베이터, 아기찾기, 테러리스트, 탐그루, 반지전쟁, 실마릴리온, 용의 신전, 오메로스, 자유의 감옥, 어스시의 마법사, 오틀란토 성,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나는 왜 이 제목들을 하나씩 하나씩 읽고 있는가.

삐리릭.
전화가 울렸다. 멍하니 있던 나는 조금 늦게 전화를 받는다.

“네.”
“나경누나?”
“…응, 완이구나.”

반옥타브쯤 높아진 완의 음성. 나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헤정이일까.

“누나도 알고 있었어?”
“…….”
“누나도 알고 있었냐구, 신이누나가 그런 거…!”
“응.”

전화라는 것은 참 귀찮은 매개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화가 아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신이와 관계있는 누군가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완아, 나 좀 피곤한데.”
“누나!”

이녀석이 열혈이라는 것을 종종 나는 잊어버린다.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녀석도 종종 잊어먹는 모양이다.

“어제 화장한 모양인데, 장례 때도 친지들만 간촐하게 모인 모양이야. 나한테 들을 수 있는 거 없어. 그러니까 좀 끊어줄래, 완?”

내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딸깍, 전화가 끊어졌다.




책정리가 끝날 때 쯤해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박스 가득 담긴 책들을 책장 옆에 밀어놓고 전화를 받았다.

“네.”
“……저기, 아까는.”
“됐어. 또 왜 전화한거야?”

짜증이 묻어나있는 목소리는 아니다. 누차 말하지만 나는 다정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누나.”
“말해.”
“…뭔가, 꽉 막힌 것 같아. 이야기 좀 들어줄 수 있어?”
“이 완. 나는 여신이가 아냐. 니가 더 잘 알텐데?”

전화기 너머에서 완이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지만 어쩌란 말인가, 나는 지금 내 머리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이의 영상만으로도 힘에 겨운데. 다른 사람의 아픔까지 이해해 줄 표용력은 처음부터 갖고 있질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난 이해할 수가 없어! 누난, 오늘 답을 주기로 했었다구.”
“…무슨 답?”
“누나한테 프로포즈 했었어.”

전화기 너머로 무언가를 듣는다는 것은, 그것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이야기들을 듣는다는 것은 고역이다. 완은 삼십분 가량을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가 갔다. 나는 그가 한 말 중에 절반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완도 알고 있다. 그는 다만 이야기를 쏟아부을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어차피 나는 듣고만 있을 뿐인데, 그럼 내가 아니라 벽에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 신이누난 왜 그런걸까. ]

그래, 나도 그게 알고 싶다구.

“나경이 왔니?”
“아, 엄마?”

돌아다보니 어머니는 방문 너머에서 내가 밀어놓은 박스를 쳐다보고 계셨다.

“전화가 왜 계속 통화중이냐?”
“완이 전화했었어.”
“나경아.”

어머니 목소리가 조금 떨려서, 나는 어머니를 올려다 보았다. 뭔가 꽈악 막힌 것 같은, 그날 아침같은 목소리.

“괜찮니?”
“…응?”

어머니는 천천히 내게 걸어와 내 앞에 앉으시곤 내 손을 잡으셨다. 손등을 쓸어내리는 어머니 손이 차가웠다.

“엄마는 네가 걱정이 돼. 나경아. 물론, 여신이 일은 안됐지만……, 네가….”
“나 괜찮아, 엄마.”

어머니의 말을 끊는 것에는 실패했다. 어머니는 내 말에 더 애처러운 눈빛을 보내셨다.

“물론 너희 둘이 정말 친했고…, 그래서 너 많이 충격이 컸겠지만.”
“엄마.”

어머니가 나를 쳐다본다. 아마도 지금 나는 어머니가 제일 염려하는 그 무표정한 얼굴로 어머니를 보고 있을 것 같다.

“나, 여신이랑 친했어?”
“…….”

나는 박스를 한 번 쳐다보고,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나, 잘 모르겠어, 엄마. 신이 얼굴이… 기억이 안나.”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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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여행 04.09.23 11:05 댓글 수정 삭제
    이 글의 배경은 1998년입니다. 지금 보면 조금은 낯선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vt 통신이라든가 책 이름이라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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