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일주일이란 시간은 짧으면서도 길었다. 은의 카페는 영업을 중지했고 손님 대신 작업복을 입은 청년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라이플을 담은 상자가 커피원두 상자 대신 창고에 쌓였고, 손님들이 모이던 카페는 청년들이 쉬는 장소로 바뀌었다. 그래도 여전히, 커피포트에서는 물이 끓고, 오디오는 간간히 씨디를 갈아가며 음악을 내보냈다.
소년은 컴퓨터 앞에 매달려 움직일 줄을 몰랐고 알프렛도 은도, 갑자기 늘어난 사람들 관리에 정신이 없었다.
리는, 지하실의 구석에 앉아서, 라에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브리핑이 끝난 그날부터 거의 이곳에만 틀어박혀서 정신집중을 하거나 허공을 상대로 섀도우파이트를 하곤 했다. 포니테일로 묶어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지나 허벅지까지 흘러내리는 길고 묵직한 직모의 허니블론드. 그 긴 머리칼이 마치 황금으로 뽑은 실처럼 그녀가 움직임에 따라 일렁거렸다.
파이팅 피스트(fighting fist). 라에에서도 그 수가 극히 적은, 그나마 50년 전부터는 왕실 경호대의 대장이라는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인 맨손전투의 엑스퍼트들.
여성에게 대대로 이어져오던 그 자리가 명분상의 이유로 남자에게 넘어가고 난 이후부터, 그들의 존재는 이미 전설에 가까워져 있었다. 신의 힘을 구사하던 성직자와 함께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약간은 부풀려져서 전해오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하던, 말로만 들어오던 파이팅 피스트의 바람과 같다는 움직임. 그 경이로운 움직임을, 이곳에서 실제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것은 자신이 익히 보던 검사들의 움직임과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좀 더 스피디하면서도 하나 하나가 완성 된 상태로 다음 동작을 끌어내고, 그것이 이어져 단순한 하나의 공격 수단이 아닌 무언가, 춤과 같은 무형의 무언가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그 많은 움직임 속에는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차가움과 예리함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죽음과  맞서고 있던, 라에와 같은 차가움이었다.
그녀는 하루에 4시간만 잠을 잤다. 10시간은 몸을 움직였고 10시간은 정신집중에 쏟았다. 그리고 그녀가 수면을 취하는 시간이 되면 리는 연습을 시작했다. 비록, 상대를 두지 않는 섀도우파이트라 하더라도, 이미 자신의 검술이 일정 이상의 수준에 다다랐다는 건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가 되면, 검의 움직임은 이미 단순한 검의 휘두름이 아닌, 한 번 한 번이 상대의 생명을 노리는 치명적인 살기를 담고 있었고, 그것을 남에게 보이고픈 생각은 별로 없었다. 어떻게 보면 춤을 추듯이 아름다우면서도 어떻게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한 검의 움직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기지 못했다.  
싸늘하게 미소짓던 붉은 입술, 흑적색의 젖은 머리칼, 너무나도 가온과 닮아서 더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던 그 흑녹색 눈동자. 그녀의 검을, 자신은 이기지 못했다.

" 가엘리온 엘르..... "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

콘서트의 날이 다가올수록, 달은 둥글어져 갔다. 아마도 그 당일에는 만월이 될 것만 같았다. 홀로 외로이, 밝은 밤 하늘 위에서 그저 희고 조그만 빛으로 존재하는 하나뿐인 이곳의 달, 콘서트를 이틀 앞둔 밤, 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두근거림, 이유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초저녁부터 밀려와서 평소 같으면 잠들어 있을 시간까지, 리를 붙잡아 놓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희게 바랜 듯한 보름달, 건물 사이에 약간은 다른 세계인 듯 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던 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술? "

청년들과 함께 무언가 종이를 펴놓고 의논 중이던 은은, 리의 말에 일어나서 바 안쪽으로 향했다.

" 언제나 마시던 것으로 괜찮겠나? "
" 아뇨 조금 독한 것으로 "

그 말에 셰리병을 꺼내려던 은은 그대로 보존고를 닫고, 다른 쪽의 보존고를 열어 2/3쯤 차 있는 스카치위스키 병을 꺼냈다. 쟁반에 스트레이트 잔과 온더락스 잔을 놓고 물과 얼음을 옆에 챙긴 은은 그것을 리에게 밀어주었다.  

" 고맙습니다. "
" 뭘. "

그리고 은은 다시 청년들과의 의논에 들어갔고 리는 쟁반을 들고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왔다.
하얗게 뜬 달,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던지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음악소리, 술을 부르는 허스키한 여성 목소리의 우울한 블루스.
시간은 점차 자정을 향해 갔고 달은 슬슬 서쪽을 향해 갔다. 도시의 백광에 가려져 서글프게 비치는 하얀 달, 그리고 계속해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이상한 두근거림. 리는 계속 달을 바라보면서 술잔을 비웠다.
똑똑 노크소리가 나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이 열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가벼운 발소리가 가까이 오더니 옆에서 멈추었다. 돌아보자, 창으로 들어오는 밖의 빛으로 알프렛이 비쳐 보였다.
언제나 입는 슬리브리스 원피스의 홈웨어, 하얗게 드려내 놓은 어깨와 가느다란 종아리,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

" 한잔할래? "

리의 말에 그녀는 빙긋 웃고는 창턱에 앉아있는 리의 아래에 앉았다. 리의 무릎에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몇 올 늘어졌다. 알프렛은 특별히 긍정을 표시하지는 않고 다만 리를 올려다보며 미소지을 뿐이었다.
리는 잠시, 술잔을 든 손을 무릎에 놓고 다시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올려다본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고도까지 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달은 하늘에 있었다.

" ..왜 그렇게 달을 봐요? "
" 글세......... "

리는 무릎에 올렸던 손을 들어 다시 잔을 비웠다.

" 나도 잘 모르겠어. "

리의 말을 듣고, 알프렛이 머리를 리의 무릎에 기대왔다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이.

" 플레인스 트레블러..라는 자들. 많이 보지 않았어? "
" .. 많이. "
" 나 같지 않은가 보지?"
" ....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
" ........... "

알프렛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낮았다. 평소의 장난기는 다 어디로 간 것인지, 그녀는 낮고 차분하게, 마치 슬픈 것처럼 그렇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리가 침묵하자 그녀는 고양이처럼 리의 다리에 기대 몸을 비볐다.

" ...그건 그래. "

웃어버릴 수 잇는 것은, 술을 마셨기 때문, 아니면, 알프렛이 옆에 있기 때문. 리는 그대로 아래에 앉은 알프렛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손을 잡자 리는 그녀를 가볍게 끌어올려 무릎 위에 앉혔다. 그녀는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툭 하고 리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따듯한 그녀의 체온이 얇은 천을 넘어서 전달되어왔다.  

" 이런 날은.... 요정들이 달라붙지. "

이상스럽게 달이 하얀 밤, 이상스럽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밤,

" 내가 있던 곳에선, 그런 요정들이 악몽을 불러온다고 해. "
" .... 잠들고 싶지 않아요 리? "

여전히 기슴에 기댄 채로 그녀가 물어왔다, 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단지 그대로 그녀에게 키스를 했을 뿐이었다.

" ..많이 마셨군요 "
" 조금이야. "

웃어 보였지만 절대로 조금 마신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독한 것을 많이 마신 것은 건너오기 전에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상스럽게도 몸이 술을 부르는 밤. 혀 끝에 닿는 알코올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밤. 알프렛이 가만히 팔로 리의 목을 감싸안았다.

" ... 나도 잠들고 싶지 않아요 "
" ...... "

알프렛은 이상한 여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있으면 무언가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나쁜 방향인 적은 없었지만. 감싸안은 팔에서 목으로 전해져 오는 따듯한 온기가 싫지 않았다. 체향인 듯, 향수인 듯 은은하게 전해져 오는 오렌지향이 평소와는 달리 달게 느껴졌다.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은 계속해서 술을 불렀다. 스스로가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안정되지 않은 묘한 기분. 다시 잔을 비우고 리는 아래에 놓아둔 병에 손을 뻗었다. 얼음이 아직 남아있는 잔 안에 술을 따르고, 다시 병을 내려놓았다.

" 혼자 마시자니 심심한데. "
" 그렇게까지 마시는 건 처음 봐요 "

알프렛이 리를 올려다보았다, 갈색의 부드러운, 모든 것을 감쌀 것만 같은 눈동자.

" 뭐... 이쪽에 와선 처음이니까. "

두근거림,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이상스러운 기분, 마시지 않는다면 이렇게 라도 마음을 달래지 않는다면 바로 저 거리로 뛰어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하얀, 바랜 듯한 달 아래로. 알프렛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이상스럽게 멀었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가온의 목을 가볍게 잘라내던 그녀의 뒷모습, 뿜어지던 피, 그리고 까맣게 동공이 열린, 가운의 얼굴.
쭈욱, 리는 다시 잔을 비웠다, 빈 잔 안에서 얼음이 짤랑였다. 그리고 다시 그 안에 새로 술을 부었다.

" 그만해요 "
" ...이제 세잔 째야. "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들어온 다음부터 세잔, 그 전에 마신 것까지 친다면 아마도 그 네 배는 되고도 남을 것이었다. 물론 알프렛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방 안에 감도는 술 냄새만으로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알 수 있는 그녀였으니까. 잠시 알프렛은 아무 말이 없었고, 리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창을 넘어오는 하얀빛에 비추어서 마치 허물어져 버릴 것만 같은 슬픈 표정.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내릴 듯이 그렁그렁해진 갈색의 눈동자.

" ....왜 그래... 그런 표정. "

알프렛은 고개를 젓고는 그대로 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 뭐가 슬프지..? "
  " ..... 당신이... "
  " ....? "

잠시 알프렛은 아무 말이 없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려는 듯이 몇 번 숨을 들이마시고, 손을 꼬옥 쥔 다음, 여전히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 .... 당신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어.. "

풋 하고 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마를 손으로 짚고는 쿡쿡쿡 하고 터뜨린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잠시 그렇게 웃고 난 리는, 여전히 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이봐.. 알피. "
" .... "
"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 아니었어? "

리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담겨 있었지만, 평소에 장난스럽던 알프렛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리가 웃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여전히 슬프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 신경 쓰지 않아요 "

여전히 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 ..단지 "

여전히 주먹을 꼬옥 쥐고, 약간은 울 듯한 목소리로.

" ..... 나도.... 원하지 않는데 넘어오는 것 뿐 "

그녀의 말에, 리는 웃음이 딱 멎어버렸다.
감정이 넘어온다. 타인에게 공명하고, 그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하여 타인의 아픔을 삭히고, 마음의 상처를 치료한다-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능력인지. 감정전이,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자신이 느끼게 되는, 정령사나 대모신의 클레릭에게서 가끔 볼 수 있는 능력. 그녀가 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복잡한 감정들이 그녀에게 흘러간 것이라면, 그녀의 슬픈 표정의 이유는.

" 그건... 미안하군. "

리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알프렛을 안은 다음,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창틀에서 바닥으로 내려놓은 다음, 자신도 창턱에서 내려왔다. 알프렛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춤 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창에서 멀어지자, 그녀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약간 묻혔다. 리는 잔에 남은 술을 그대로 쭉 들이키고 빈 잔을 창턱에 내려놓은 다음, 알프렛을 향해 팔을 벌렸다.

" 자. 이제 그럼 그만 마시지. 됐어? "

그녀는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보일 듯 말 듯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리는 웃었다.

" 자는 게 좋아... 요정에게 잡히는 건 한 사람이면 족하니까. "

분명히 오늘밤은, 잠들게 된다면 악몽을 꿀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악몽을 그녀에게까지 전염시킬 수는 없었다.

" .... 먼저 자요 "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 ..옆에 있어 줄 테니까... "
" ........ "

리는 잠시 그녀의 말을 생각했다. 지난번, 그녀가 옆에서 잤던 그 밤에는, 분명히 악몽을 꾸지 않고 아주 편안히 잘 잤었다....

" 자지 않으면? "
" 그런 거라면.. 나는 필요 없는 거구요. "

그렇게 말하면서 알프렛은 손을 내리고 평소처럼 장난기가 약간 섞인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도 평소대로 돌아와는 있었지만, 희미한 빛에 뺨이 살짝 반짝이는 것이 물기가 약간은 남아있는 듯 싶었다.  
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알프렛에게로 다가갔다.

" 요정, 쫓아주겠어? "

알프렛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를 올려보자, 리는 그대로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입을 맞추었다.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열고 깊은 키스를 하고 나자, 그녀에게서도 희미하게 스카치의 맛이 났다.
그대로, 리는 그녀를 다시 안아들어 창턱 위에 앉혔다. 슬리퍼를 벗기고, 그녀의 조그만 발에 발목에, 입맞추면서 천천히 위로 올라와 무릎에, 그리고 스커트자락에 가려진 허벅지 위에 키스했다. 알프렛의 손이 리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목을 타고 내려와 셔츠자락을 잡아당겼다. 그 잡아당기는 힘에 맞추어 천천히 리는 상체를 숙였고 그대로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오렌지향이, 그녀에게서 풍겨왔다. 생 과일을 껍질 채 우두둑하고 맨 손으로 쪼갤 때 풍기는- 그런 시원한 오렌지향.
그녀의 귓불을 살짝 핥은 다음, 리는 그대로 귀에서부터 목을 거쳐 가슴까지 키스해나갔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고, 한 손은 옷자락을 끌어올리고, 그대로 천천히 그녀를 손끝과 입술로 인식해 갔다.
손 안에 들어오는 그녀의 가슴이 부드러웠다. 팔 안으로 안겨오는 그녀의 어깨가 따듯했다. 알프렛은 작고, 따듯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모두 받아들여주는 듯이 포근했다.
자요, 악몽 같은 거 꾸지 말고, 푹 자요 리. 옆에 있어 줄께요.      
자신을 몸 안에 받아들이면서 작게, 아마도 그녀가 그렇게 속삭였던 것 같았다. 창 밖으로 달이 진 하늘이 하얗게 보였다.

-----------------------------------------

11월의 첫 날.
오늘밤은 달이 희었다. 마치 바랜 듯한 생기 없는 하얀 색, 세티는 트레이닝 룸의 커다란 창 밖으로 보이는 야경 위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떠 있는 달을 보고 잠시 트레이닝을  멈추었다.
차라리 지하의 트레이닝 룸으로 갈 것을, 후회를 하는 것은, 그 도시의 광경이 너무나도 섬뜩했던 탓이었다. 달보다도 더 밝은 것은, 건물의 창으로 번져 나오는 빛들, 밤하늘은 더 이상 검은 색이 아니었다. 낮과 같은, 백광으로 둘러싸인 빛의 섬, 서울. 그리고 이방인처럼 떠 있는, 빛 바랜 백색의 달.
약간은 어깨로 숨을 쉬면서, 세티는 창을 바라보았다, 창 너머의 도시를, 밤하늘을, 달을, 그리고 그 창에 비치는 자신을. 약간은 흐트러진 머리, 상기된 얼굴, 그리고,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

- 콘서트 구경은 어떨까?

이드가 그렇게 말한 것은 저녁식사를 하면서였다. 세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얼굴 없는 아이돌 가수, 그녀를 만들어 낸 것은 솔브 산하의 솔브 엔터테이먼트, 그리고 거기에 자금을 대는 것이 이드였으니, 그녀의 콘서트에 가 보는 것도 그로써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난번 말쿠드에서의 파티 때와 같이, 그는 '세큐리터'가  아닌 '파트너'로써 다시 한번 자신을 요구했다.
....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여자'가 되는 건.
단지 당신의 세큐리터가 되길 원했었다. 이런 것은.... 싫었다. 단지, 그에게 거부를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이기에, 그에게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에.

" 늦은 시간이다. "

약간은 조소가 섞인 듯한, 그러면서도 당당한 목소리, 세티는 소리가 들려온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였다. 금빛의 눈동자, 은빛 머리칼, 자신과 같은 세큐리터의 트레이닝복.

" 알고 잇습니다 치프(Chief) "

빙긋, 그의 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차가웠다. 이드 앞에서의 그는 저런 미소를 짓지 않는다. 자신보다 낮은 자 앞에서만 그는 저런 미소를 짓는다.
에오더드는 거리낌없는 걸음걸이로 세티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가 가까워짐에 따라, 세티는 그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평소의 민트향 섞인 담배냄새가 아닌, 독한 알코올의 냄새. 세티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 그러고 보면 "
" 네? "
" 너와는 대련한 적이 없었군. "

그가 말을 할 때 마다 더욱 진하게 풍겨오는 알코올의 냄새, 분명히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투나, 금속빛 나는 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온 몸을 훑어 내리는 듯이 차가운 금속 색의 금빛 눈. 그 눈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차가웠다. 얼음을 문지르는 것 같은 축축하고 써늘한 한기.

" 대련이라면? "
" 격투기말이야, 무엇을 배웠나? "
" 특별한 것은 배우지 않았습니다, 하이스쿨의 기본적인 격투기만을 어느 정도. "
" 그런데도 잘도 수석졸업이군. "

여전히 비웃는 것 같은 시선, 웃음이 섞인 듯한 말투.

" 졸리지 않다면 적당히 몇 판 붙지. "
" ... 알겠습니다 치프. "

그의 말은 부탁의 형식을 담고있는 명령이다. 거부해 본 적도, 거부할 수도 없다. 거부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솔브의 세큐리터들에게 주어지는 마인드 컨트롤. 자신은 언제나 그렇게 교육받아왔다.  
에오는 그대로 트레이닝복의 윗도리를 벗어 옆의 옷걸이에 걸었다. 단단하게 형체가 잡힌 상체가, 티셔츠 하나만을 걸치고 드러났다. 제복에 가려졌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역삼각형의 단단한 몸. 그의 기본 자세는 아이키도였다. 세티는 따라서 윗도리를 벗었다. 옷자락을 잡히는 것을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서였다. 저 사람과 무언가를 '적당히' 끝내 본 경험은 없었으니까.
먼저 들어오라는 듯이 그의 손끝이 까닥까닥 움직였다. 그와의 거리는 다섯 발자국쯤. 세티는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신 다음, 그대로 그를 향해 달렸다.
처음 내지른 주먹을, 그는 가볍게 피했다. 동시에 그의 주먹도 뻗어왔다.
빠르고, 힘이 실려있는 주먹, 그것을 손으로 쳐내자 이번에는 낮은 발차기가 들어왔다. 제대로 균형을 잡을 틈도 없이 연속공격이 들어왔다. 동기들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한, 예리함이 실린 공격이었다. 세티는 우선 방어를 위주로 그의 공격을 받다가, 그가 높게 올려 찬 다리를 팔로 막고 감아서 움직임을 봉한 다음 그대로 남은 다리를 후리면서 에오를 밀어붙였다. 중심을 잃은 에오의 몸이 밀려나면서 세티와 함께 바닥에 굴렸다.

" 제법이군. "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다시 한번 알코올냄새가 풍겼다.

" 취하셨습니다 치프. "
" 그래서 자신이 이긴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

비웃음, 싸늘한 비웃음. 세티는 감아쥔 그의 다리를 풀고 일어서기 위해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 순간 에오의 다리가 세티의 복부를 걷어찼고, 세티는 그 반동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 끝났다고는 하지 않았다. "  

바닥에 쓰러진 세티에게 에오가 그대로 달려들었다. 제대로 반응도 보이기 전에 세티의 팔을 낚아챈 에오는 그대로 관절을 잡고 등뒤로 꺾어 조르기 시작했다.
순간, 세티의 머릿속에 공포가 밀려들었다. 그날 밤, 묶인 채 그에게 유린당했던 밤의 일과 그 밤의 통증이 생각나서 세티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에오의 몸 아래 깔린 채, 팔을 잡힌 세티가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그는 유도의 기술을 제대로 배운 듯이, 조르기는 점점 형태를 바꾸어 십여분이 흐른 뒤에는 세티는 완전히 땀에 젖어 탈진해 있었다. 에오의 기술이 세티의 힘 잃은 근육을 우겨잡고 더욱 단단히 등뒤에서 바닥에 엎드린 세티를 눌러 조이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세티는 고개를 뒤로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차가운, 금속 색의 눈.

" 지쳤나? "
" .. 놓아... 주십시오.. 치프. "

애써 감추려고 해도, 말이 끊겨 나올 정도로 숨이 찼다. 팔을 꺾어 누르고, 다리를 잡아 조이고 있는 그의 손길은 분명히 체온이 있는 사람의 것이었지만 마치 파충류의 그것처럼 차갑고 소름끼쳤다. 스윽 하고, 허벅지를 감아쥐었던 손이 좀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와 함께 다리를 조이는 힘이 더 강해졌다. 신음소리가 입술을 넘어 나오려는 것을, 세티는 꾹 눌렀다.

" ....치프! "
" 비명 지르고 싶으면 질러라. 아프지 않나? "

차가운 목소리, 알코올 기운이 묻어나고 조소가 섞여있기는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찼다. 그의 체중이 좀 더 무겁게 실리면서 꺾어 누른 팔이 잡아당겨졌다. 에오는 세티의 팔을 비튼 채로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잡고, 자유로워진 손으로 천천히 땀에 젖은 뒷목을 훑어 내려갔다. 그대로 티셔츠의 목둘레까지 내려간 에오의 손이 그대로 뒷부분을 움켜잡았다. 옷이 당겨지면서 세티의 목을 졸랐다.

" 큭..... "
" 일어설 기운조차 없으면서 허세부리지 마라. "

그의 말이 맞았다. 그의 조르기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동안, 세티는 모든 힘을 다 써버리고 탈진해 있었다. 만약에 그가 지금 자신을 풀어준다고 해도, 일어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았다. 세티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 이 사람의 앞에서는 무력해질 뿐이었다. 지난번에는 약물로, 이번에는 실력의 차이로.
세티의 양다리를 타고 앉으면서 조이던 팔을 풀은 에오는 그대로 양손으로 잡고 잇던 세티의 티셔츠를 찢었다. 짜아아악하고 폴리에스테르가 찢어져나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트레이닝 룸에 퍼지면서, 에오의 눈앞에 새하얀 세티의 등이 드러났다. 그의 손이 땀에 젖은 등을 가볍게 쓰다듬어 내려가면서 능숙하게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었다. 그리고 난 다음, 목뒤에서부터 척추의 선을 따라 내려와서, 찢어진 옷자락을 어깨로부터 벗겨내었다. 공기에, 젖은 살이 드러나면서 한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 한기와는 다른 오싹함이 세티를 떨게 했다. 무섭다, 그가 본능적으로 무서웠다.

" ..그..그만둬..주십시오... "
" 싫은 걸. "

비웃음이 섞인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핥고 지나갔다. 뒷목을, 드러난 어깨를, 등줄기를 차례대로 천천히 핥아 내려간 그의 혀가, 허리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거칠게, 에오가 세티의 아래옷을 끌어내렸다. 땀에 찬, 맨살이 그대로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나면서 파랗도록 하얀 빛이 세티의 피부 위에 쏟아졌다. 그 빛에서 뿜어지는 한기가 온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
만 같았다.

" 기분 좋게 해 주지, 그날 밤처럼 말이야. "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면서. 에오는 세티의 몸 아래 손을 넣어 강한 힘으로 세티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손이 나신으로 드러난 세티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더듬어 점점 안쪽으로 들어갔다. 찢겨진 티셔츠가 세티의 몸에서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 제발..그..그만.. "
" 그래.. 좀 더 애원해 봐라 세티... "

목소리, 차가운 그의 목소리, 섬뜩한 그의 손길. 온 몸을 더듬고 지나가는 차가움.
추워.. 너무 추워... 세티는 어깨를 가늘게 떨면서 점점 자신의  머릿속이 이상해져 간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하얀 달이 지고 있었다. 서울은 하얀빛에 둘러싸인 도시였다. 그것은, 세티에게는 너무나도 차가운 색이었다.

---------------------------------------

잠이 깬 것은 해가 뜨기 전의 새벽이었다. 위 속을 잡아뜯는 것과 같은 목마름에, 리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옆에서는, 자신의 팔을 꼭 끌어안은 채 알프렛이 잠들어 있었다. 창을 넘어 들어온 희미한 빛에 파랗게 알프렛의 모습이 비쳤다.
잠든 알프렛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다음,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팔을 빼고, 리는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바닥에 던져놓은 바지를 주워 입고, 조심조심 식당이 있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물이 든 피처를 꺼내어 잔에 따르고 들이키자, 차가운 물은 식도를 타고 위까지 내려가 갈증나던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갔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분명히 악몽을 꿀 것 같았는데도, 그녀가 옆에 있어서인지, 오히려 다른 때보다도 더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단순한 감정전이의 능력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포근하게 느껴졌던 것도, 다 그래서였단 말일까.    
두근거림은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평소에 깨었을 때보다도 기분은 상쾌했고 편안했다. 술을 마신 두통만은 남아 있었지만.
잘 된 걸까, 리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컵에 남은 물을 쭉 들이키고, 빈 컵을 식탁에 내려놓다가, 리는 문득 자신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검은 색의 긴 머리칼. 어깨와 등을 덮는 그 머리카락을 보고 있던 리는, 식탁 옆에 잇는 과도를 집어들고는 머리끝을 잡은 채 목 길이에서 싹둑 잘라버렸다. 채 리의 손에 잡히지 못했던 머리카락들이 부스스 식당 바닥으로 떨어졌다.

" ...리? "

계단 쪽에서 들려온 놀란 목소리에, 리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가운을 걸친 알프렛이 놀란 표정을 하고 거기에 서 있었다.

" 아... 깼어? "

알프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왜. 라는 의문이 확실하게 떠올라 있었고, 리는 그녀의 시선이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에도 닿아 잇다는 것을 알아챘다.

" 뭐... 귀찮아서. 어차피 눈에 띄니까 자를까 생각하고 있었고 "
" ... 하지만 "

알프렛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는 잘려져 나간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살짝 어루만졌다.

" ... 아까워라. "

잘려져 나간 부분은, 알프렛의 머리길이보다 길었다. 그리고 남아 잇는 부분은 칼로 자른 덕에 불규칙하고 삐죽삐죽했다. 리는 빙긋 웃으면서 알프렛을 바라보았다.

" 다듬어 줄래? "

그녀도 빙긋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게 칼로 무턱대고 자르면... "

약간은 나무라는 듯이 그렇게 말하면서 알프렛은 주방서랍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적당한 크기의 가위를 꺼내 들고, 알프렛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배싯 웃으면서 리를 바라보았다.

" .... 음 ..... 더 청소하기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 욕실로 갈까요? "

그제야, 리는 주방 바닥에 새까맣게 흩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청소를 하려면 상당히 힘들 거라는 것이 한눈에도 역력했다.

" 그러지. "

난처한 웃음과 함께 그렇게 말하자, 알프렛은 또 한번 방긋 웃었다.
욕실에서 마구잡이로 잘라낸 머리에 물을 살짝 바르고, 알프렛은 능숙한 솜씨로 머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젖어서 무거워진 머리카락이 사각사각하는 가위소리와 함께 욕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내일이네요. "
" 그렇군. "

사각, 귓가에 맴도는 가위소리.

" 조심해요. "
" 응 ... "

사각, 사각, 머리카락들은 그렇게 떨어져 나갔다. 사라졌던 두근거림처럼 그렇게.


part 5. END.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54 장편 SOLLV 에피소드 일곱 셋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53 장편 SOLLV 에피소드 일곱 둘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52 장편 SOLLV 에피소드 일곱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51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여덟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50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일곱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49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여섯 이야기. 김현정 2005.03.15 0
148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다섯 이야기. 김현정 2005.03.10 0
147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넷 이야기. 김현정 2005.03.07 0
146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셋 이야기. 김현정 2005.01.12 0
145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2.11 0
144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30 0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일곱 이야기 김현정 2004.11.30 0
142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여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19 0
141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다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10 0
140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8 0
139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8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7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6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다섯 이야기1 김현정 2004.11.02 0
135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