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세영은 언덕 위에 서서 멍하니 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래에는 약 십여호쯤 되는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작은 촌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지만, 그 굴뚝을 보는 순간 세영은 마을로 내려가려는 것을 머뭇거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 걸까.
척 보기에도 집들의 생김새라든지, 한가운데에 성당으로 짐작되는 커다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든지 하는 것이 한국 산간마을의 품새는 아니었다.
유럽 어딘가, 알프스 한 자락에 생긴 마을이면 저렇게 생겼을까. 무언지 모를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촌락이었다.
언덕 위에 털썩 주저앉아버린 세영은 집에서 쫓겨난 어린애처럼 멍하니 촌락을 내려다보았다. 단층으로 나지막하게 지어진, 나무로 지붕을 올린 집들과, 마을을  둘러싼 단단한 나무 울타리, 그리고 집 사이를 아마도 닭이나 그런 것들이라고 짐작되는 동물 한 무리들이 오르르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집들 뒤에는 제각각 조그만 텃밭이 있었고, 가을걷이라도 끝난 것인지 짚더미가 장작과 함께 집 옆에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세영이 그렇게 지켜봄으로써 새롭게 알아낸 것은 가운데 성당에 걸려 있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십자가와 상당히 흡사했지만, 단순히 두 개의 직선을 겹쳐놓은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상단부가 타원형으로 되어 잇는, 그러니까 T자 위에 세로쪽이 좀 더 긴 타원을 올려놓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낯익은, 그러나 한편으로는 낮선 그 마크는, 보통의 성당이라면 십자가가 달려 있었을 위치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세영은 결심이라도 한 듯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 바닥에 앉아서 풀이 뭍은 바지를 탁탁 털고는 언덕 아래 촌락으로 걸음을 옮겼다.    
촌락을 둘러싼 나무울타리는 낮지는 않았지만 무리해서 넘자면 못 넘을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주 꼼꼼하게 짜여져 있지 않아서, 밟고 올라갈 모서리가 충분했었던 것이었다. 낑낑대며 울타리를 넘자, 그 아래서 땅을 헤집고 잇던 닭들이 우르르 도망갔다.
언덕 위에서 보았던 대로, 촌락은 조용했다, 모두 일이라도 하러 나간 것처럼 사람이 사는 흔적은 곳곳에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한 바퀴 주변을 둘러본 세영은 그대로 성당 쪽으로 걸었다. 가까이 에서 본 집들의 모습은 정말로 이국적이면서, 약간은 옛날 분위기를 풍겼다. 흙과 돌로 지어진, 그야말로 중세의 그것에 가까운 집들. 그리고 그 중, 유일하게 붉은 색의 벽돌로 지어진, 그 집들 한가운데의 성당, 두툼하고 무거워 보이는 성당의 문에는, 은은하게 녹이 슨 청동제의 노커가 달려 있었다. 노커를 두드리기 위해 문으로 다가가자, 이미 문은 빠끔히 열려 있어서, 안을 살짝 보여주고 있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두운 실내와 문의 반대편에 걸린 커다란 타원형 상단부의 십자가와 그것을 둘러싼, 붉은 색의 태피스트리들, 그리고 그 아래의 제단과 은빛으로 빛나는 촛대들. 이런 시골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성물의 화려함에 잠시 세영은 멍하니 바라모기만 할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계속 바라보던 세영은, 그것이 일반적인 성당과는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게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세영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성당과는 약간 틀렸다.

" 밖에 누구십니까? "

위엄 있고 낮은, 엘토의 목소리가 세영의 눈이 미치지 않는- 그러니까 빠끔히 열린 문의 사각지대에서 들려왔다. 문 안쪽을 들여다보던 세영은 그 목소리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일, 이 초간, 수많은 생각들이 세영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대로 나갈까, 아냐, 그러다가 무단침입으로 혼이라도 나면, 성당이면 종교적인 장소인데 불경죄는 아닐까, 외지인은 배척하는 동네가 아닐까 왜 말은 통하는 걸까.
마지막 생각이, 그래도 세영의 머릿속에 멈추었다. 분명히 저 목소리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 언어를 이해한 것이지?
세영은, 거기에서 더 생각을 멈추고, 빠끔히 열린 문을 밀었다. 끼이이이익 하는 둔한 마찰음과 함께 무거운 나무문이 열리고, 성당 안의 모습이 좀더 확실하고 밝게, 세영의 눈에 들어왔다. 제단의 오른쪽, 문에 가려져서 안 보이던 그곳에는 작은 책상이 있었고, 거기엔 촛대 위에 촛불이 켜져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렁거리는 빛 앞에 서 잇는 한 사람의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세영은 보았다.
그녀의 옷차림은 기묘했다.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옷 위에 작은 사슬을 엮어 만든 판을 무겁게 껴입고 그 위에는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와 같은 색의 긴 천을 어깨서부터 드리우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역사책의 삽화에서 막 빠져 나온 것과도 같은 모습,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이 체인 메일이라는 것을, 세영은 기억해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푸른 광택의 검은 색이었다.

" 당신은... "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시선이 어딘지 익숙하다는 것을, 세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틀어 올린 검은머리, 푸른 광택의 검은 눈동자. 하얗고 갸름한 얼굴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분명히, 눈에 익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 유..세영... 씨? "

자신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세영은 잠시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무언가 상당히 이질적이고, 낮선 느낌이었다. 어딘지 모를 이국의 땅. 이국의 장소에서 자신의 이름을 듣는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도, 한국어였다.
다시 한번, 세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와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와 가슴 앞에 길게 내린 타원형 상단부의 십자가 목걸이. 그 목걸이를 보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 본 순간, 마치 안개가 가신 것처럼 그녀가 누구인지가 기억이 났다. 어디에서 그녀를 보았던 것인지도. 그녀를 보았던 곳은 명동성당의 면회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의 수녀 중 한 명이었다.

" ...시스터 포스? "
" 그래요, 저입니다. "
" ...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겁니까?, 아, 아니 그 이전에, 여긴 어디죠? "

그녀는, 세영을 바라보고 쓰게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는 어딘지 모르게 피곤함이 묻어 있었지만, 지금의 세영은 그런 것을 느낄 정도로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다.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으로, 세영은 좀 더 불안해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세영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옷자락이라도 잡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

" 조금 진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 아.. "

그녀의 차분한 알토의 음색과 푸른 광택의 눈동자에, 세영은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제 와서 흥분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세영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그런 세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의자를 내밀었다.

" 앉아서 쉬고 계세요, 차라도 끓이지요. "
" .. 고맙습니다. "

그녀가 내민 의자에 앉으면서 세영은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바보라고 말했다. 어째서 평상심을 흩트린 걸까, 이런 곳에 떨어졌을 때도 그렇게까지 불안해하지 않았는데, 왜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자제력을 잃어버린 걸까.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스스로 ADRTF의 일원으로써, 한 사람의 스나이퍼로써 불안해하거나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자부해 왔었는데.
물이 끓은 소리가 들려왔다. 곧 이어서 향긋한 냄새가 나는 물이 담긴, 청동제의 고풍스런 머그컵이 세영의 앞에 내밀어졌다.

" 드세요. 이런 것밖에 없군요 여기는. "
" 아뇨.. 충분합니다. "

컵을 받아 들고 향기를 들이마시자, 마음이 다시 안정되는 듯했다. 익숙한 자스민의 향기였다. 따듯한 온기가, 두툼한 컵을 통해 전달되어왔다.

" 세영 씨도 플레인스 트레블러는 알고 게시죠? "
" 예, 물론입니다. 몇 번 만나 본 적도 있고.. "
" 여기는, 그 사람들이 온 곳입니다. "
" 네? "

그녀의 말에 반문하고 나서야, 세영은 그녀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차원을 넘어서, 다른 공간에서 서울로 넘어온 사람들, 그들이 플레인스 트레블러. 그리고 이곳이 그들이 '떠나온' 곳.당연한 일임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들이 어느 곳에서 살았는지,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으니까. 쓴웃음이 세영의 입가에 번졌다. 그랬던 것이었나, 나는 그들이 온 곳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 역시 이 곳으로 와 버렸을 지도 모르겠군.

" 그럼 전 돌아갈 수 없는 겁니까? "
" 그렇진 않아요. "

그녀가 무언가 다음 말을 하려는 찰나에, 쾅 하고 요란스런 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왔다.

" 아트로포스!! "

문을 돌아보자, 세영이 조금 열어놓았던 문이 활짝정이 동요하고 있었다.

" 소개할께요 블루, 이쪽은 유 세영씨. 그리고 세영씨, 이쪽은 블루 슬레스타씨. "
" 이건 또... "

블루라는 남자는, 너무나도 태연하고 차분한 시스터 포스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조금전 세영이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쓸어 올렸다.

" 네파에트와 아시는 사이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트로포스. "
"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무슨 일로 오셨죠? "
" 동쪽 마을 근경에 몬스터가 나와서 부상자가 생긴 모양입니다. "
" 그렇군요. "

세영은 그 둘의 대화를 듣고는 있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한국어로 말하고 있지 않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뜻을 파악할 수 없는 단어가 나오곤 했다.

" 잠깐 여기 계시겠어요 세영씨? 급히 다녀올 곳이 생겨서. "
" 아, 네, 괜찮습니다. "
" 돌아가는 것은, 다녀와서 얘기해보도록 하죠. "

그녀는 제단 아래에서 무언가 긴 것을 꺼내어 허리에 찼다. 나무 자루에 쇠로 머리가 달린, 철퇴였다. 세영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 시스터 포스, 아트로포스라는 이름이, 당신을 지칭하는 건가요? "

옅은 미소, 그리고 이상스러운 위압감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그녀는 세영에게 몸을 돌리고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 마치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차분하게 대답했다.

" 예 그렇습니다, 저는 아트로포스, 다른 이름으로는 별의 아트로포스라고 불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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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은, 마천루들의 한 가운데에, 언제나처럼 거기 있었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철과 유리로 지어진 탑들 사이의 조그만 이공간.
나지막한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넓지 않은 성당의 앞마당으로 들어가면서, 리는 주변의 공기가 틀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매연과, 혼탁함으로 흐려진 명동의 한 복판임에도 불구하고 그곳만은 다른 곳들과 달랐다. 주변을 둘러싼 건물들 사이로 가늘게 들어오는 햇살과, 차분하게 가라앉은, 어딘지 모를 향기까지 풍기는 듯한 공기와,  다른 세상 같은 조용함. 간혹 걸어다니는 수녀나 사제들의 풀먹인 옷자락이 사각대는 소리마저 들려올 것 같은 조용함이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
평일 미사를 보기 위해 두셋씩 모여드는 사람들의 옆을 스쳐 지나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수녀원 건물로 들어간 리는, 어두운 실내를 한번 바라보고, 가볍게 숨을 내쉰 다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초가 타고 난, 독특한 냄새가, 어둑한 공간에 진하게 퍼져 있었다.

"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기척을 느낄 사이도 없이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온 사람은, 하얀 선이 들어간 까만 수녀복의 아가씨였다.  

" 시스터 시스를 만나러 왔습니다. "
" 누구시라고 전해드릴까요? "
" 리. "
"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

그녀는 앞장서서 건물 안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갔다. 리도 이 건물의 구조를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안내하는 방향에는, 외부인들이 갈 수 있는 마지막 방인, 면회실이 있었다.

"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들어온 반대쪽의 문으로 나갔다. 작고 황량한 방, 있는 것이라고는 방 한 가운데의 테이블과 그 양쪽에 놓인 장식 없는 의자, 그리고 방의 양쪽에 난 문, 아무 것도 가로막지 않았지만 저 문은,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이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넘어서는 안 되는, 방의 절반. 그리고 그 절반 건너편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 오래간만이에요 리할트. "
" 그렇군, 당신의 말이 맞았어. "

리는 평소의 차가운 무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선 검은 수녀복의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리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차고, 무표정했다. 그녀가 의자를 빼고 조용히 테이블 앞에 앉자, 리도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그녀가 리를 바라보았다.

" MR. 서가, 당신에게 말하라고 하더군. "
" 무엇을? "
" 유 세영이란 사람이 없어졌어. "

갸웃, 그녀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마치 인형처럼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깜박임 없는 까만 눈. 그리고 그 까만 눈 안에 거울처럼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 순간적으로 등줄기에 서늘한 느낌이 번져왔다. 그것은 마치. 존재하지도, 어딘가에 속하지도 않는 것과 같은, 그런 무존재함. 조여드는 것과도 같은 위화감에 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당신은 누구지? "
" 나는 당신이 아는 대로 시스터 시스. "

단조롭고, 톤이 없는 무감정한 메조 소프라노의 목소리. 깜박임 없는 까만, 거울 같은 눈동자. 그리고 그 입가에 그린 것처럼 번지는 부자연스러운 미소.

" 혹은, 라키시스. "
" ..라키시스... "
" 그것이 제 이름입니다. "

그녀의 말과 함께, 두 사람이 앉아있는 면회실이 일렁였다. 공간이 무너지는 것처럼 그들을 둘러싼 주변의 공기가 그 밀도를 바꾸며 소용돌이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공간의 느낌이 두 사람을 감싸왔다. 리는 반사적으로 허리에 찬 세이버의 손잡이를 잡았다.
불안감,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유 모를 불안감이 밀려왔다. 온 몸이 저릿저릿해 오는 것만 같은 압도감과,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 그리고 불안함. 거울 같은 까만 눈동자, 인형과 같이 반듯한 얼굴, 그리고 인공적인 미소를 짓고 잇는 붉은 입술.

"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죠? "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나라는 개체로 모아버리는 단조로운 목소리. 노래하듯 음률을 띈 일정한 톤의 메조 소프라노.

"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나요. "
" .. 당신.. "
" 녹색의 눈동자, 하나는 바다 빛의, 또 하나는 어두움의 녹색. "

그녀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리는 숨을 숙였다. 무서울 정도로 단조로운 목소리가 평범하게 인사를 건네듯이 리의 가슴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 두 개의 상반되는 감정, 증오와, 연모, 그것이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군요.
  숙명은 당신을 풀어주고, 운명은 당신을 이쪽으로 인도했어요.
  그리고... 끊어진 무언가. "
" 무엇을 말하는 건가 라키시스. "

빙긋, 그녀가 다시 미소지음과 동시에 파앙.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면서, 주변을 감돌던 이질감이 깨어져나가고, 면회실은 다시 평소의 상태로 돌아왔다. 세이버의 손잡이를 움켜쥔 손아귀에는 흥건히 땀이 흘러 있었다.

" 세영씨의 행방은 이쪽에서도 조사해보도록 하죠. MR.서에게도 그렇게 전해 주세요. "  

리는, 잠시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여전히 거울같이 까만, 서늘한 느낌의 눈동자. 순간이었지만 그것은 마치 영원과도 같은, 이상스럽게 긴 순간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불안함을 느끼고 긴장한, 알 수 없는 그녀의 느낌. 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그녀에게 등을 돌려 면회실을 나갔다.  
닫힌 문을 바라보면서, 라키시스, 그녀는 다시 한번 옅게 미소지었다.

" 끊어진 무언가가, 당신을 그 방향으로 이끌고 있어요. 따라가게 될 것인지, 이끌 것인지는 당신의 선택. 리할트. "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라키시스는 리가 나간 반대쪽의 문고리를 잡았다.
삐이꺽, 조용한 실내에 문 여는 소리가 아까 와는 달리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탕 하는 문 닫히는 소리, 사박 사박 사박 가벼운 발걸음 소리.

" 나는 라키시스.... 불안과 달을 의미하는 자. "

어두운 실내에서는, 초가 타고 난 독한 밀랍 냄새가 풍겨왔다. 복도는 어두웠고, 사방은 조용했다, 그리고 흐르듯이 들려오는, 낮고 단조로운 메조소프라노의 목소리.

" .. 그것 또한, 당신의 운명 중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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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두운 건물을 빠져 나왔다. 문을 나와 숨을 내쉬자 그제야 지독히도 밀도 높았던 수녀원 안의 공기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이곳으로 넘어와서 가장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그때에도 저런 무표정에 단조로운 어조를 가지고 있긴 했다. 그러나, 저런 불안감을 주지는.. 않았었다. 그 등골이 서늘해질 것만 같은, 거울 같은 검은 눈동자.
자신이 그대로 비쳐 보이는 듯한..
올려다 본 하늘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철과 유리와 콘크리트로 지어진 하늘을 가린 성채, 그리고 그 사이로 간신히 명목을 유지하고 있는, 붉으죽죽하고 칙칙한, 하늘은, 어쩐지 모르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했다.  
    
그것이, 서울의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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