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part 5. 융합 (fusion)



그곳의 나무에는 이파리마다 옅게 소금기가 배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서 그 이파리들을 날릴 때마다, 숲의 싱그러운 냄새와 함께 짠 갯내음이 스쳐 온 바람에 묻어오곤 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거라고는 숲과 바다뿐인 곳, 그 주변을 둘러싼 무시무시한 폭풍우와 소용돌이와 뇌운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평화스러운 그곳을,  밖의 사람들은 모두
세계 끝에 나타난 섬 엔드라고 불렀다.
그곳에는 아무도 살지 못한다고 했다, 누군가 용기 있는 자가 있어 주변을 둘러싼 폭풍우를 넘어서, 소용돌이를 지나, 운이 좋아서 사방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뇌운 속을 뚫고 지진이 가져다주는 해일을 넘어, 어떻게 해서 섬에 닿더라도. 섬에는 이 세상의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 온갖 몬스터가 있어서 상륙하는 사람들을 사냥하여 살아간다고 했다. 그곳은, 세상이 끝나는 곳이며 다른 세상에의 문이 열려 있어서 그 문으로 이 세계가 그 섬으로 빨려들 듯이,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다고, 일반인들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섬에 가고자 한 사람들은 제법 많았다. 이미 이 섬이 확인된 지 50년. 이름 깨나 알려진 모험가들 사이에서 엔드라는 섬은, 마지막 처녀지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인간이 약해지고 몬스터가 강해졌다 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엔드에 가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돌아온 사람은 아직 없었다. 일부는 그들이 죽었다고 했고, 일부는 그들이 '문'을 통해 이계로  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남자의 눈앞에 펼쳐진 엔드는, 그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북해 한 가운데의 보통의 섬일 뿐이었다. 단지, 다른 것이라고는 수평선에 보이는 것이 푸른 하늘이 아닌 두꺼운 구름의 벽이라는 것 뿐.
사각, 금속제의 각반이 달린 남자의 발 아래에서 하얗게 깔린 모래가 고운 소리를 내었다. 햇빛에 잘 그을린 듯한 구리빛의 얼굴에 짧게 깎은 다갈색머리를 한 남자는, 눈을 들어서 수평선의 구름의 벽을 바라보고, 그 벽에 새겨지는 뇌격의 무늬를 잠시 살핀 다음 발걸음을 돌려서 해안가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근육이 다부져 보이는 온 몸에 무겁게 걸친 흑청색의 필드플레이트 메일이 그가 걸음을 옮김에 따라 철겅철겅 쇳소리를 내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의 등뒤에는 거의 2미터가 넘어 보이는 투핸디드소드가 마치 무슨 막대기인 듯이 비스듬하니 가볍게 매달려 있었고, 남자는 그 칼의 무게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무표정하게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서 해변가의 모래사장을 벗어나 잡풀이 소복이 난 언덕으로 올라섰다. 드문드문 들어선 나무들에게서 소금냄새가 풍겨왔다.

" 블루씨~! "

새된 소년의 목소리가, 해변의 반대쪽에서 들려 왔다, 남자가 그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언덕 아래 자그맣게 자리잡은 2-30호 가량의 작은 마을에서 한 소년이 언덕을 향해 뛰어오는 중이었다. 이제 막 십대 중반을 넘긴 소년은 가죽갑옷을 입고 숏소드를 뒤에 찬 경무장이었다.

" 무슨 일이야 데인? "

남자의 앞까지 뛰어올라온 소년은 허리를 굽히고 숨을 헐떡거리며  몇 번 들이쉰 다음, 똑바로 고개를 들어서 그를 보고 말했다.

" '문'의 숲에서 또 시체가 나왔어요. "
" 또 '네파에트' 인가? "

소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로 슬쩍 턱을 긁적이고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네파에트, 그대로 직역하자면 '침입되어진 자' 라는 의미의 그 말은, 이곳 엔드에서는 이계와의 문을 통해서 나온, 이계의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문'의 숲은, 이 섬, 엔드의 정 중앙에 잇는 작지 않은 숲이었는데, 엔드의 모든 몬스터는 이 숲 안에 살고 있었다. '네파에트'들은, 보통의 인간만큼이나 약했고, 대부분 '문'을 넘어오자마자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 헤매다가  몬스터에게 죽곤 했다. 불행히도, 그들에게 엔드는, 살아남기 힘든 곳인 듯 싶었다.
데인은, 몇 번이나 그 숲의 주변에서 이색적인 옷을 입은 네파에트들을 발견하곤 했었다. 그들은 대부분 죽어 있었고, 가끔 숨을 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보통 얼마 못 가서 죽어버리곤 했다. 그들은 지극히 약했다. 상처가 난 채 가만 내버려두면 보통은 살아날 상처였음에도, 그들은 죽어버렸었다.
개중에는 가끔 묘한 힘을 가진 사람들도 있긴 했었고 그들은 모험자만큼 강해서 마을까지 자기 발로 걸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네파에트들은 약했다. 몸이 견디어서 살아남아 마을까지 온 자들도, 대부분 이틀을 못 가고 미쳐버리곤 했다, 바뀌어진 환경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사람은, 데인이 10년 동안 '문'의 숲을 순찰하면서 발견한 사람들 중, 너댓명 뿐이었다.

" 데인, 시체의 처리는 언제나처럼 하도록 해, "
" 네,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게 네파에트가 많아요 "
" 글쎄, 왜 그럴까. "

무엇엔가에 묻는 듯한 블루의 말에는, 옅게 쓴웃음이 발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옅었고, 데인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단지 고개만을 갸웃거리고는 블루와 함께 언덕을 내려왔다. 파도소리와 바람소리, 숲을 지나가는 이상한 공기의 울림이, 엔드를 덮고 있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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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컹, 흑청색의 건틀렛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테이블 위로 던져졌다.
그리고 뒤이어, 그 위로 투핸디드소드가 건틀렛을 깨버릴 것 같은 요란스런 소리를 내면서 따라왔다. 정통으로 검신에 얻어맞은 건틀렛 한 짝이, 바닥에 떨어져 쇳소리를 내면서 몇 번 구르다가 멎었다.

- 왜 그리 신경질적이 된 거지요 블루?

건조하고 무감정한 목소리, 블루는 그 소리가 들려온 방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반투명한 모습의, 검붉은 로브를 입은 한 남자가 있었다.
분명히 마법적인 영상으로 짐작되는 모습의, 이십대 후반으로 갓 접어든 듯한 것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비록 헐렁하고 색 짙은 로브로 온 몸을 가리고는 있었지만 그 자락으로 빠져 나온 손목이나 얼굴이 야위어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그는 움푹 패인 뺨과 마른 목이 아니었다면, 미남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짙은 갈색의 긴 머리칼이라든지,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라든지. 젖은 듯한 녹색의 눈동자라든지 하는 것들은, 그가 이미 성별을 착각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음에도, 여성으로 착각할 만한 소지를 남겨 주는 듯했다.

" 신경질적이라.. "

한 손에 각반을 벗어 들고, 블루는 비웃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로브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 요즘 들어 네파에트가 많더군, 아니, 그쪽에서는 플레인스 트레블러라고 부르나? "

텅, 왼쪽에 신었던 각반을 건틀렛이 구르고 잇는 테이블 아래에 집어던지고, 다시 오른쪽의 각반을 벗으면서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는 블루의 목소리는, 분명 오전에 데인과 대화할 때와는 달리 확실하게 모가 서 있었다. 로브를 입은 남자의 얼굴에, 옅게 슬픈 빛이 돌았다.

" 하나가 가면, 하나가 온다, 그것이 규칙이었지, 안 그래? "

남자가 대답하던 말던, 블루는 말을 계속했다.

" 내가 모르는 사이 몇 명이나 그쪽으로 불려 간 거지 응?! "

남자는, 여전히 슬픈 표정으로 블루를 바라보았다.

" 제기랄, 애초부터 잘못된 거야 이건. "

한 손에는 벗어든 각반을 들고, 블루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 블루...
" 애초에 엔드까지 오는 놈들은 그래도 잘나간다는 모험자야, 어딜 가든지 어느 정도는 안 죽고 잘 버틸 수 있다고. 하지만 그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

데인이 발견한 네파에트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음직한 소년이었다. 아마 데인과 나이차이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에 물어뜯긴 듯이, 청바지를 입었던 하반신은 한쪽 다리가 거의 뜯겨져나가다시피 한 채, 피가 살점들과 함께 옷감에 엉겨붙어 있었다. 밤새도록 숲에 방치되어 있었던 듯 밤이슬에 젖은 옷, 반쯤 부서진 씨디맨이 허리에 매달려서 한쪽이 떨어져 나가고 없는 이어폰을 길게 늘이고 있었다. 피가 번진 티셔츠와 한쪽 발에만 남은 농구화가, 놀라움과 당황으로 커진 눈동자가, 눈물로 엉망이 된 소년의 얼굴이 이상스럽게 눈에 밟혔었다. 어째서, 저런 아무런 관련 없어 보이는, 평범한 아이마저 이곳으로 넘어와서 죽어야 하는 걸까. 그들은 '침입한 자'가 아닌 '침입되어진 자'였다. 누가 그 이름을 붙인 걸까.

" 그쪽에서는 잘도 방관하고 있군, 어떻게 얼버무리는 거지? 사람이, 밑도 끝도 없이 사라지는 걸 말야. "
- 블루, 나는...
" 뭐지? "

날카롭게 모가 선 듯한 반문에, 남자의 표정이 조금 더 슬퍼졌지만, 블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매정할 정도로 남자를 밀어붙이며. 여전히, 시선조차 맞추지 않은 채로.

- 나는 당신이 이쪽으로 다시 와줬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그쪽에 매이지 말고..
" 매여?! 이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야. 너야말로 좀 더 냉정하게 파악하지 그래? "
- 블루... 나는 당신의 의형제에요, 언제나 옆에 있어준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블루는 손에 들고 있던 각반을, 남자의 영상에 집어던졌다. 정확하게 남자의 얼굴에 던져진 각반은 그대로 영상을 통과해 그 뒷벽에 맞고 요란스런 쇳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각반이 뚫고 나간 영상을 노려보면서, 블루는 씹어뱉듯이 낮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화난 야수가 으르렁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 클론 주제에 건방진 소리하지 마라, "
- ...  
" 스스로 잊고 잇는 것 아닌가? 너는 아스타가 아닌 그의 클론이라는 것을?
- 나는 아스타입니다 블루,
" 웃기지 마, 내 의형제인 표츈시커(fortunseeker) 아스타 로드는 그 운명과 포츈시커의 이름을 에테프에게 넘기고 죽었다. 너는 그저 그의 껍데기에 불과해. "
- 블루..

남자의 얼굴은 무척이나 슬펐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무감정하고 무척이나 건조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여 떨어질 것만 같은 슬픈 표정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더 블루를 화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저기에 있는 것이,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였다.

- ... 포츈시커가 아닌 나는, 아스타가 아니라는 겁니까.
" 아스타가 죽고 4년 동안 나를 속였으면 충분하지 않나? 에테프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끝까지 너에게 속은 채였겠지. "
- ..통신을 끊겠습니다, 언제든, 당신이 돌아오는걸 기다리고 있겠어요,
" 돌아가지 않아, "
- ..... 건강하세요 블루.

블루는 시선을 돌렸다. 반투명한 그의 영상이 사라지는 것 따위는 그다지 보고싶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 옛 상처를 후벼파는 것 같은 그의 모습을, 더 이상은 보고싶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정확했다. 언제나 웃음을 담고 지내던 그가 웃지 않았을 때부터,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바보였다. 이미 그때부터 너는 네가 아니었는데.
차라리 그 때에 너는 죽었어야 했다. 너의 기억과 너의 감정과 너의 얼굴을 가진, 네가 만들어낸 인형 따위를 50년 동안, 보고 있는 것보다는 그때 죽었다고 수긍하는 쪽이 더 좋았다. 이렇게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영원 속을 살아갈 거였다면, 애초부터 일찍 죽음으로 기억되는 것이 너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 바보다 너는... 저런 것 따위 만들어서 눈속임이나 하려 들다니, "

블루의 굵은 목소리가, 약간 젖어서 떨려나왔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함께 생사의 길을 가던 의형제 아스타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클론만을 남기고 죽어버렸다. 자신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던 대부분의 것들은 죽거나 사라졌거나 변화되었다. 절대적인 정의라고 믿었던 남자는 결백조차 증명하지 못하고 암살 당했다. 평생을 지켜주겠다고 한 의형제는 자신에게 아무 말 없이 홀로 죽어버렸다.
이제 자신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스스로가 정의였고 자신만이 자신을 움직이는 계기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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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엔드'인가. "

책상 위에 펼쳐진 몇 장의 서류를 읽어나가던 여인의 눈이 한곳에 멎었다. 황금색의 표지를 한 서류철, 모험자 길드에서 올라온 서류의 첫 장에는 새빨간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엔드로 갔음을 말해주는 도장이었다. 올 해 들어서 이 빨간 도장이 찍힌 황금색의 서류철은 벌써 네 번이나 그녀에게 왔다. 네 그룹의 모험자들이 엔드로 갔음을 증명하면서.
낮게 혀를 차면서 서류를 펼치는 것과 동시에, 열린 문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 듀크니스(Duchess) 나인, "
" - 폐하, 어쩐 일로 이곳까지. "

서류를 살펴보던 여인은, 문을 들어서는 사람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단정하게 뒤로 모아 하나로 묶어 내린 긴 은발이 은청빛의 문장이 들어간 검은 예장 위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 일어나게, 공적인 일로 온 것이 아니야. "

방에 들어선 '폐하'는, 고개를 숙이는 그녀에게 가볍게 손을 내저어서 만류했다, 공적인 일로 오지 않았다는 그의 말대로, 언제나 그의 뒤를 따라다니던 수행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저 사람인 만큼,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문 앞의 경비들도 막지 못했으리라. 이제 막 십대라는 나이의 초반에 접어들었음직한, 아직 아이의 태를 다 벗지 못한 통통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그는 일어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하얀 뺨에 부드러운 고수머리의 금발이 곱게 늘어뜨려져 반쯤 뺨을 가렸다. 부끄러운 듯한 미소를 지은 소년 왕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 저어, 괜찮다면 함께 산책할까? "
" 네? "

여인은 약간 놀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곧 풋 하고 웃으면서 소맷자락을 잡고 있는 하얗고 통통한 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았다.

" 폐하의 명이시라면, "

밖은 한창 가을이었다. 널찍한 정원의 나무들은 불타는 듯이 붉은빛을, 황금과도 같은 노란빛을, 혹은 손때가 곱게 탄 오랜 가구와도 같은 깊은 갈색을 띄고 제각기 그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잎을 서서히 떨구고 있었다.
멀리 있는 동쪽의 브릴란트 대산맥이 가까이 보이고, 제법 차가워진 바람에서는 희미하게 눈 냄새가 나는 듯했다. 분명, 지금쯤 가장 북쪽인 실버글레이즈에는 첫 눈이 내렸으리라.
하얀 돌로 지어진 건물과 유난히 새파래진 하늘, 슬슬 그림자가 길어지는 약간은 늦은 오후의 조용한 시간. 넓은 정원 위에 펼쳐진 색색가지 낙엽의 주단, 그 위를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한 사람은, 훤칠하니 키가 크고, 검은 색의 예복을 차려 입은 여성, 그리고 그 손을 꼭 잡고 옆에서 가는 사람은 그녀보다 꽤 키가 작은, 보랏빛의 망토를 입고 세공이 잘 된 장신구를 단 소년이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닿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서 두 사람을 따르는 수행원들도 있기는 했지만  

" 아까 보고 잇던 건, 모험자들에 대한 서류였나? "
" 예 폐하, "
" ... 그들은 왜 위험한 곳으로 자처해서 가는 거지? "
" 폐하는 아마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
" 듀크니스 나인은 이해할 수 있는가? "
" 저도.. 한때는 모험자였으니까요. "

소년 왕은 나인, 단정한 얼굴을 가진 여공작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소년의 키가, 또래에 비해서는 절대로 작은 키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옆에 선 여공작의 키는 상당히 훤칠하여서, 소년이 한참을 올려다보지 않으면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깊은 코발트 그린의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눈빛.  

" 하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잇잖아, 두려움 같은 게 없는 건가 모험자들은. "

어딘지 모르게 약간은 침울한 음성, 자신도 모르게 소년 왕은 나인의 그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 그들도 다 나의 백성들인데, 그렇게 사라지고 실종되어 버리는 것은.... "
" 폐하. "

나인은, 가볍게 왕 앞에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추고 그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금색의 곱슬머리가 나인의 팔 사이에 포옥 파묻혔다. 그리고 나인은 그렇게 왕을 안고 가만히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어머니가 아들을, 혹은 누나가 막냇동생을 안듯이 그렇게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듯하게.

" 모험자들을 페하의 손안에 넣으려 하셔서는 안 됩니다. "
" 하지만 .... "

나인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소년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나인도 알고는 있었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왕이었음을, 그래서 아직 냉정해 질 수 없는 어린 마음에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가 아무리 힘들어하고, 아무리 분해하더라도 지금의 그로써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까지, 나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나인, 나는 힘들어. 몬스터는 계속 강력해지고, 나의 백성들은 죽어가, 무언가, 무언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데도 나는 무력하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해.... "

세상이 변해간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균형의 무너짐. 그것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연하게 이 세계에 찾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엔드가 나타난 것이 그 시초였고, 인간이 약해진 것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곧 이어 마나가 옅어지면서 마법사의 수가 줄었고, 신력을 행할 수 있는 성직자가 줄어들었다. 그나마 모험자들이 존재함으로써 일반인들은 몬스터에게 덜 고통받았지만, 그들은 어느 정도 성장해버리면 엔드로 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보통이니, 불안하지 않다면 그것이 비정상이었다.
50년 전, 그때의 왕은 카렐 7세로, 그가 죽고 잠시동안 왕위에 공백이 생겼던 그때에 엔드가 나타났다. 그 당시에 왕실은, 실버화이트 공작가의 반역 음모 사건으로 반쯤 뒤집히다시피 한 상태였고 한 달에도 몇 번씩 왕위 계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아마도, 라에가 생긱 이후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이 정리되어 실버화이트가와 왕실과 나라가 예전의 자리에 간신히 가까이 갔을 무렵에는, 왕실의 피를 이은 사람들은 절반 이하로 줄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아르콘 왕가의 수난은 끝난 게 아니었다. 카렐 7세의 사망 후 제왕위에 올랐던 헤르트레이 제 2 왕자는,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즉위 5달만에 스물 다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죽었다. 사망원인도 알 수 없는 돌연사. 제 2의 계승권을 가졌던 헤리가셸 다니에르 드 실버화이트 여공작은 이미 엔드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상태였다.
순위에 따라서 다음 왕위에 오른 것은 카렐 7세의 남동생인 아르콘 대공의 손자 그리안 1세였다.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헤르트레이 1세보다 어린 22살이었고, 그가 지금 나인의 눈앞에 있는 소년 왕, 카렐 8세의 아버지였다.

" 잘 들으세요 폐하, "

나인은 여전히 소년 왕의 등을 다독이면서 작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 목소리는 평소의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듣는다면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 모험자들은 이 세계에 묶인 자들이 아닙니다, 나라에 구애받는 자들도 아니고, 지배당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폐하의 잣대로 평가하여 옆에 붙들어 놓으시면 안돼는 것입니다. "
" 나인, 나는 그들의 왕이 아닌 건가? "

소년 왕의 목소리는 약간 떨고 있었다. 나인은 그의 머리를 안고 고개를 저었다.

" 폐하는 그들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해하시지는 못하시지요. "
"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
" 제가 있지 않습니까. "

그 말에, 소년 왕은 나인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약간 붉게 충혈된 부드러운 갈색 눈이, 약간은 멍하게 나인의 초록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빙긋, 나인의 가늘고 붉은, 모양이 선명한 입술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소년 왕은 붉어진 눈가를 비비고 왜 그런 표정을 짓느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인은, 그가 자신에게서 무언가 답을 구할 때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약간 깨물고, 궁금함을 억누르느라고 뺨은 살짝 붉어진다. 그리고 그럴 때의 그는, 아주 귀여웠다. 이 거대한 한 나라를 책임지는 지도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 폐하, 어느 왕도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지는 않았어요, 모험자들을 이해하고 길드를 관리하는 것은 제 몫입니다, 저 역시 그들과 같은 입장인 적이 있었으니까요. "
" 나인의 말은, 가끔 어려워. "

약간은 볼이 부은 듯한 목소리, 그리고 눈에 잘 뜨이지 않게 살짝 나온 아랫입술, 소년 왕의 어린애다운 투정에 나인은 한번 더 미소지었다.

" 해가 지는군요 폐하, 슬슬 돌아갈까요? "

그렇게나 새파랬던 하늘은 이제 슬슬 주황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핑크 빛의 구름이 서쪽 하늘로부터 번져 나오고, 담황색과 주홍색이 섞인 아름다운 색이 서쪽 하늘을 메우고, 하얀 성을 물들였다. 이미 동쪽 하늘은 얼음장같은 투명하고 짙은 파랑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는데, 서쪽하늘만은 눈이 부시도록 붉게 타오르듯이 밝은 담황색과 주황색, 붉은색이 뒤섞여서 천천히 진한 암적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제 곧, 저 하늘도 차가운 남빛으로 변해버리겠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보아왔듯이.
원래 푸른 하늘이, 붉어지는 것은, 빛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고. 그리고, 작은 소년이 느낄 정도로 세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위한 예고일까. 나인의 얼굴에 설핏 어두운 기색이 스쳤으나, 그것은 황혼의 어두움에 묻혀서 드러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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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3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2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1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0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9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8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7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6 장편 인사드립니다. 김현정 2004.10.30 0
115 장편 [환국기] 1. 동량(棟梁) (2) 강태공 2005.09.2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