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동교동, 카페 FATE. 손님이 한차례 지나간 오후  다섯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약간 어두운 조명과 종류를 알 수 없는  달짝한 술 향기가
넓지 않은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바에 서 있는 것은  이 카페의  간
판아가씨라고 불리는 세이티(saity) 였는데,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셰
이커를 흔들고 있었다. 짧게 커트한 검은머리와  그 아래로 곧게 뻗은
목이, 검은 색의  제복에 잘 어울렸다.

" 마스터, 'PS, I love You' 주문이에요, "
" 아 그런가. "

세이티는 자신이 아직 만들지 못하는 칵테일이 적힌 리스트를, 막 그
랜드피아노 앞에서 내려온  바 마스터- 세영에게  건네주었다. 세영은
긴 머리를 가볍게 묶고는 셰이커를 집어들었다. 주재료는 깔루아와 베
일리스, 오렌지 큐라소 그리고  우유.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셰이커를
흔들어서 잔에 완성된 칵테일을 따라낸 세영은 컵받침에 잔을  얹어서
세이티에게 밀어주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불투명한 문 너머를  바라
보았다.

"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으세요 마스터? "
" 응? 아아, 아니야. "

세영은 그렇게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피아노 앞에  가  앉았지만, 세
이티는 그의 시선이 계속해서 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그저
멍해져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확실한 것은 평소의 그와는  무
언가 약간 다르다는 것이었다.
짤랑-

" 어서 오세요- "

문 위에 매어 단 방울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세이티는 반사적으로 인
사말을 올리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을 들어서고 잇는 사람은, 긴 허
니블론드를 묶어 늘어뜨린, 검은 탱크 탑과  찢어진 블랙진 차림의 아
가씨였다.

" 어머, 어서 와요 라에느 언니, 오래간만이야. "
" 안녕 세이티. "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던 세영은, 문을 들어선  그녀를 바라보고 낮게
한숨을 쉬면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영과 눈이 마주친 라에느가
살짝 목례를 하면서 웃어 보였지만 그것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 가게
에 들렸을 때와는 약간 다른 느낌을 주었다. 조금 더 여성스러워 지고,
조금 더.. 물기가 어린 듯한 미소.

" 오래간만인데, 주문은 언제나 그것으로 괜찮은가? "
" 네, 세영씨. "

세영은 보존고에서 몇 가지 술병을  꺼내어 칵테일 스푼을 걸쳐놓은
스트레이트 잔에 조심스럽게 따르기 시작했다.  스푼을 따라서 천천히
흘러내린, 각자 색이 다른 알코올이 일렁이면서 위태로운 층을 이루며
쌓여갔다. 테이블스푼 가득 도수 높은 럼주를 따르고 가열하자, 곧  럼
주에는 파랗게 불이 붙었고,  세영은 그것을 다섯 가지  색으로 층 진
스트레이트잔 위에 가만히 흘려 부었다. 일렁이는 새파란 불빛, 그  빛
으로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오색의 층. 세영은  잔 아래 컵받침을 받치
고, 냅킨과 짧은 스트로를 곁들여서 층이  무너지지 않게 부드러운 손
놀림으로 그것을 라에느의 앞에 밀어놓았다.

" FATE 특제 칵테일, '그라데이션'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

라에느는 파랗게 타오르는 알코올의 불꽃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다
가 그 불꽃이 사그라지자 짧은 스트로를  꽂고 아래의 층부터 천천히,
그러나 한번에 그 칵테일을 마셨다. 층마다 다른, 조금씩 변해 가는 맛
이 쓰게, 혹은 달게, 혹은 독하게 그녀의  입안과 식도를 감싸고, 그대
로 아릿한 감촉을 남기며 위속으로 사라졌다. 입안에 남아있는 은은한
향기와. 위와 식도를 감싸는 아릿함, 잠시 빈 잔을 내려다보던  라에느
는 곧, 고개를 들고 잔을 씻고 있는 세영을 올려다보았다.

" 그럼, 일 얘기로 넘어갈께요. Diver 파트에서의 전갈입니다. "
" 아아. "  

젖은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으며, 세영의 눈빛이 좀  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세이티는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피고는 오디오의 볼륨을
조금 높였다. 가게 안은  어차피 한산했고, 손님이라고는 구석  테이블
몇 개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지만, 습관처럼, 그녀는 두 사람의  대화에
서 벗어났다.

" 결국 강행할 생각인가. Diver들은. "
" 오래간만의 활동이라서 다들 약간씩  들떠있어요. SOLLV 측의 감
시도 요즘은 약간 느슨해진  듯하고. 무엇보다 요즘  유난히 플레인스
트러블러들이 많이 넘어오니까. 다들 불안함을 해소할 곳이 필요한 거
겠죠. "
" 그런 것치고는 대규모로군, 어쨌든 알았다고 전해 둬요. "
" 정식 명령서는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
" 일부러 찾아와 줘서 고마웠어요 "

빙긋, 세영의 미소에 라에느는 마주 웃어 주었다. 그리고 빌과 칵테일
대금을 남겨놓고, 그녀는 방울소리와 함께 카페를 나갔다.

" 그래도, 라에느 언니, 다시 웃게 되었네요, 평생 안 웃을 것 같았는
데. 그때는. "

세이티는 오디오의 볼륨을 다시 원래대로 돌리면서 라에느가 나간  문
을 바라보고 한숨을 쉬듯이 중얼거렸다. 세영은  다시 피아노 앞에 가
앉다가 세이티의 그 말에 그녀를 돌아보고 물었다.

" 무슨 일이 있었나? "
" 애인이 죽었대요. 석달쯤 되었나. "
" 저런, 어쩐지 얼굴이 안 되어 보인다 했더니. "

세이티는, 바에 팔꿈치를 대고, 양손으로는 턱을 괴고는, 한숨을 쉬듯
이 중얼거렸다.

" 하지만 어쩐지 라에느 언니, 예뻐졌어요, 슬퍼 보이긴 하지만. "
" 사람이란, 누군가를 잃고 나면 그  잃어버린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고들 하지. "
" 그럼 미인이란 것도 결코 좋은 건 아니네요. "
" ..아마도. "

디링, 세영은 건반에 손가락을 얹었다.  모든 것을 잃고 대신 그 아름
다움만을 손에 넣는다면, 과연 그는 행복한 것일까.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아름다울 수 있다면, 미인이고자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는, 두 사람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에 더욱더  아름
다워진 두 사람을. 한 사람은, 운명에 의해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대가
로 아름다움의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에  왔고, 그리고 역시  대가로 아름다움이라는
덤을 얻었다. 두 사람의 운명은 같은 것 같았지만 미묘하게 틀린 것이
었다. 적어도, 세영이 보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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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맑았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하늘은  다시 회색 빛으로 흐려
졌다. 그리고 약속한 것처럼 추적추적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면 서울은 더욱 확연하게 두 구역으로 갈라진다.  빛에 둘
러 싸여서 빗줄기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고 지나다닐 수 있는 거리
와, 습기와 빗소리로 더욱더 음습해지는, 그 거리의 뒷면.  의외였지만,
가장 마천루가 밀집되어있고, 빛의 섬을 이루어  언제나 낮과 같은 밝
음에 둘러싸여 있는 명동에도, 그런  어두운 뒷골목은 존재했고, 빛이
강한 만큼, 그 어두움은 좀더 농도  짙게 그곳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그 가장 강한  빛과 어둠이 만나는  장소가, 바로 명동성당,
그곳이었다.

  " 이것으로 일단은 작별이군. "
  "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만날 겁니다. "

  성당의 뒷마당, 몇 개의 하얀 돌들로 만들어진 십자가가  묘비 대신
자리하고 있는 간소한 묘지 주변에는 가느다란 쇠막대기들로 테두리가
둘려져 있었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하얀  비석과 공기 중에 노출되
어 검게 녹슬기 시작한 쇠 테두리들은 더욱더 음습하고 무채색으로 보
였다.
  그리고 거기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남자 쪽은 비를 맞으며, 그리고
여자 쪽은 건물의 처마 아래에서  그나마 비를 그으며.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였다. 허리까지 닿는 검은 색의 긴 머리를 등 복판쯤에서 가
볍게 묶은 남자는, 처마 아래 서  있는 검은 수녀복 차림의 여인의 약
간은 단조로운 어조의 대답에, 옅게  미소를 짓고는 뒤돌아서 묘지 옆
으로  난 조그만 길을 따라, 높지 않는 벽돌담  너머의 마천루로 향했
다. 아니, 사실은 그 마천루 사이에 생긴 어두운 그림자로 향하고  있
었다.
  빗물이 방울방울 얹혀진 가느다란  무테 안경 밑으로  그의 새파란,
코발트 블루의 눈동자가 언뜻 보였다. 깃을 세운 레인 코트의 단 아래
로는 금속 같은 무언가가 아주 살짝, 그 끄트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장
식품인 듯, 섬세한 장식이 되어있는 그것은,  남자가 걸음을 옮김에 따
라 약하게 철렁거렸고 남자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이 거
침없는 걸음으로 성당을 빠져 나와 명동의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밝은 쪽의 거리에서는 오늘도 하이비전이  가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
는 뮤직비디오를 거리에 비추었다. 멀리서도 아련히 들리는 귓가를 울
리는 달콤하고 유혹적인 목소리, 우산을  받쳐든 몇 사람이 다시 걸음
을 멈추고 하이비전을 멍하니  응시하는 것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남자가 걷고 있는 곳은, 중앙로에서 상당히 떨어진, 하이비전이  보이
지도 않는 사각진 위치였지만, 노랫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그의 귀에까
지 들려오고 있었다. 가사는 없는,  속삭이는 듯한 허밍. 잠시,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마치 그 허밍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가  내리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레인 코트의 깃을  가
볍게 세우고, 다시 거침없이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등뒤로,
여전히 비가 추적이며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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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츠르르르르르르르릉-
  문에 매어 단 방울이 울리는 소리에 잠시 유리잔을 닦고 있던 은은,  
반사적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비로 흠뻑 젖은 레인  코트
차림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길고 검은머리에 키는 180정도,  약간은
호리호리해 보이는 체형이었지만 어깨가  제법 넓고 다부진  실루엣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빗물이 방울진 안경을  벗어  가
볍게 한번  털고 다시 쓴 다음, 은을 바라보았다. 무서울 정도로 새파
란 코발트 블루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 MR. 서? "

어딘지 모르게 이국의 억양이 느껴지는 남자의 말에, 은은 고개를 끄
덕였다.

  " 시스터 시스의 소개로 왔습니다. "
  " 환영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

  은이 바 안에서 손짓으로 의자를  권하자, 남자는 비에 젖은 레인코
트를 벗어들고 은의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한 칸 떨어진 의자에  앉았
다. 의외로, 레인코트 안에 입은 것은  차이나칼라가 달린 정장이었다.
그의 허리에는 단정하게 장식된 긴 금속제의 봉 같은 것이 매달려  있
었는데, 그것이 무척이나 그의 옷차림에 어울려서 은도 그것이 세이버
- 칼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채지는  못했다. 그냥 스쳐 지나간다면, 좀
독특한 장신구로구나 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세이버는 그의 허리
에 어울렸다.

  " 뭔가 마실 것을 드릴까요? 뭐가 좋으십니까? "

  은의 말에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 드라이 셰리가 있으면 부탁합니다. "

  은은 와인글라스를 하나 꺼내어  남자의 앞에 놓고,  보존고에서 병
하나를 끄집어냈다. 아무래도 이 가게는 회원제이니 만큼,  수량은 적
었지만 어지간한 술이란 술은 다 구비해 놓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
었고. 거기다가, 요즘은 플레인스 트러블러들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었
고, 그들은 언제나 약간 독특한 음료를 찾았다.  은은, 남자의 약간 독
특한 억양과 그가 가진 검에서 그가 차원을 넘어 온 자임을 알 수 있
었다. 무척이나 단정해  보이는 얼굴선, 이상하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
은 앞에 앉은 남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와인글라스에 노란 색을 띈 갈색의 투명한 액체가 채워지면서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좋은 향기를 풍겼다.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
랐다. 은은, 그가 잔을 들어  가만히 향기를 음미하고 한 모금을  맛본
다음, 다시 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내밀었다.

  " 시스터 시스에게 들으셨겠지만 다시 인사드리지요. 서 은입니다. "
  " 리할트 폰 자일리트입니다. "

  남자- 리할트는 은이 내민  손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표정 없어
보이는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상당
한 미남이로군- 하고 은은 생각했다.

  " 오는 길에 노래를 들었습니다. "
  
  셰리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난  리할트는 후 하고 호흡을 내쉰  다
음, 그렇게 입을 열었다. 잠시 딴 생각에 잠겨 있던 은은, 잠깐 생각을
정리한 뒤에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
었다. 하이비전에서 사람들을 세뇌시키듯이 흘러나오는, 그 노래의  이
야기였다. 리할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 직접적인 육성이 아니고 허밍인데다가 간접적인   재생방식이어서
효과는 적었지만, 확실히 시스터 시스가 말한 대로였습니다. "
  " 아.. 역시 걱정했던 대로... "
  " 그래요, 희미하지만 마력(魔力)이 느껴졌습니다. "

  마력의 감지- 차원을 건너온  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할 수
있는 것, 물론 그들  중에서도 이것을 잘 느끼는  사람이 있었고 이쪽
서울의 사람들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못 느끼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
은의 앞에 있는 남자- 리할트는 상당히 예민한 편인 듯 했다. 이 정도
로 예민하게 마력을 감지했던  것은, 자신들의 실수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렸던 그녀,  팔라셰 정도였다.    

  " 저항력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쉽사리  매혹될 겁니다, 가사가 없으
니 별 문제는 없지만.. "
  " 가사가 있으면 무엇이 틀려집니까? "

  은의 물음에 리할트는  가만히 와인글라스의  테두리를 어루만졌다.
우웅- 하고 얇은 글라스가 우는소리가 침묵 대신 작게 들려왔다.

  " 비슷한 종류의 노래를 알고  잇습니다, 그 노래의 경우에는  가사
에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담아, 대상에게 전합니다. 아마, 지금 들려오는
노래의 경우에도 가사가 있다면 다들 무의식적으로 그 가사 대로 움직
이게 될 겁니다. "

  천천히, 리가 말했고, 은은 잠시동안  그것을 듣고만 있었다. 서울의
사람들은, 마력에  대한 저항력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나마 약간의 저항력을 가진 것은, 설의 반려인 진명과. 자신과, 팔라셰
의 후계자인 라에느, 그녀 정도였고. 그 외 정신저항을 가진  능력자들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마력에는 무저항에 가까웠다. 자신도 모르게, 은
은 한숨을 내쉬었다.

  " 어쨌거나, 잘 오셨습니다. 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앞으로 천천
히 하도록 하죠, "

은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고, 리할트는 그 손을 잡았다. 은은 무의
식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

  " A. D. R. T. F에 합류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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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망가고 있다. 어디로? 그런 건 모른다. 그저 죽지 않으려면 도망가
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기에, 그래서 더욱 멀
리,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도망가야했다. 떼어내었다  싶으면
곧 새로운 시선이 뒤를 따라붙었다. 상처마다 파고드는 살기, 통증, 그
리고 불안함.
  멀리, 아주 멀리, 그들의 손이, 시선이, 주의가 닿지 않는  곳으로 멀
리.

  - 리는 그때에도 여전히 차가운 편이었죠

  부드럽게 웃고 있는 녹색머리의 엘프 신관.  그리고 그 옆에서 환하
게 웃고 있는 그를 닮은 소녀. 그리고 약간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함
께 서 있는 검붉은 머리의 소년과 같은 소녀.
그들을 만나서, 겨우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움직이면서
조금은 풀어졌다고 생각했다.

  - 나한테 손대지 마!

  그 애는 그렇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분노와, 공포에 질린 눈을 하
고, 자신을 속여가며 무언가 에서 도망가려하고 있었다. 상처 입고  있
다는 것, 알고 있었어.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도, 아파하고 있다
는 것도.

  - 그녀에게 무엇을 해 주었지?
  
  싸늘하게 미소짓는, 그녀와 똑같은 흑녹색의 눈동자, 붉은 입술,

  - 그녀는 도망갈 수 없어, 예정되었던 대로, 나에게 죽어.
  - 알고 있었지? 그녀가 힘들어한다는 걸,
  - 왜 도와주지 않았어? 왜 방관했지?

  텅. 그리고 땅 위를 구르는 가온의 목, 비에 젖은 지면에, 피와 함께
흩어진 붉은 머리칼, 눈물조차 고이지 않은, 표정을 읽은 흑녹색  눈동
자. 피, 누이의 드레스를 적시던 피, 아버지의  머리 잃은 어깨를 적시
던 피, 자신의 가슴을 적시던 피, 그리고 가온의 작은 몸을 적시는 피.  

  " 으아아아악-!! "

  문득, 따듯한 것이 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뺨을, 이마를
어루만졌다, 안정이 되는, 그런 부드럽고 포근한 - 사람의 체온.
  리는 눈을 떴다. 연한 갈색의 조명이 희미하게 비치는 눈에 익지 않
은 자신의 새로운 방의 천장 아래로, 상반신을 숙인 사람의 모습이 눈
에 들어왔다, 현현? 그는 언제나 내가 그녀의 꿈을 꾸었을 때에,  저렇
게 나를 꿈에서 깨워주었다. 그러나, 취침등 하나만이 켜진 어둠에  익
숙해진 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현현이 아닌 한 여성이었다.

  " 괜찮아요? 가위눌리는 것 같던데. "

  가느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땀으로 젖은 뺨과 이마를 어루만져 주
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행동이었지만 천천히 리를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 불, 켜도 되겠지요? "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그녀가 미소짓고는,  침대 옆에서 일어났
다. 그녀의 손의 온기가 떠나는 것이 약간 아쉽다고 느껴진 리는 아직
잠이 조금 남아있고, 겨우 어둠에 익숙해진  흐릿한 시선으로 벽에 있
는 스위치를 향해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속에서,
그녀가 입은 옷이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팍, 갈색의 취침등이 꺼지고  새하얀 형광등 불빛이  대신해서 방을
채웠다. 밝은 불빛에 부신 눈을  몇 번 깜빡인 리는, 상반신을  일으켰
다. 그제야, 확실하게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밝은 불빛 아래서
본 그녀는 의외로 자그마한 체구를 하고 있었다. 틀어 올린 갈색의 머
리카락 몇 올이 하얀 목덜미에 흘려내려  있었고. 어깨를 훤히 드러낸
비로드 재질의 튜브 톱의 긴 원피스를 맵시 나게 입은 그녀의 모습은,
보통 남자들이라면 그대로 어깨를 안아주고픈 충동을 일으키게 할  정
도로 매력적이었다.
  리는, 그녀의 얼굴이 아주 낯설지만은 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디에서 보았는지,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등의 것들은 기억나지 않았
다, 자신을 바라보는 갈색의 따듯한 시선. 저것을 마주 보았다 라는 기
억만이 남아 있었다.

  " 악몽 꾸었나봐요. 뒤척이기에 깨웠는데. "

  그녀의 목소리는 울림이 좋았다.  약간은 코막힘이 섞인  듯한 애교
잇는 목소리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전등
스위치 아래에 있는 콘솔에서 물을 따라와서는 리에게 다가왔다.

  " 혹시나 좋은 꿈이었으면 미안하고요. 마실래요? "

  잔을 내밀면서, 그녀는 방긋  웃었다. 소오류의 햇살 같은  미소와는
틀린, 가온의 새침한 미소와도  틀린 그것은, 이상스럽게 리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러나 잔을  받아들고 물을 마시면서 생각을  해도,
그녀가 누구인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 그런데, 누구셨죠? "

  리의 무감정한 질문에, 그녀는 놀랍다는 듯이  갈색 눈을 크게 뜨고
리를 바라보았다.그리고는 곧 푸, 하고 살짝 웃음을 흘리면서 리의 침
대 발치에 털썩 앉았다.

  " 서운하네요, 아까 인사 나누었는데, 한숨 자더니  잊어버린 건가요
리할트 씨? "

  그녀의 웃음 섞인, 약간 비음에 가까운 목소리는 기억에 있었다.  포
근하게 감싸오는 듯한 갈색 눈동자도, 확실히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녀
는 장난기가 가득한 눈을 하고 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리가  기억해내
기 전에는 한 마디도 안 하겠다는 것처럼, 오렌지색 립스틱을 바른 입
을 꼬옥 다물고.
  다시 한번 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에남아 잇는 것은 갈색의
눈동자와, 목소리, 그리고 하얗게 드러난 자그마한 어깨와 감싸안고 싶
은 자그마한 몸집. 분명히 이름을 들었던 것 같은데-  리는 살짝 눈썹
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키득, 리를 바라보던 그녀가 손으로  입
을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손끝에 칠해진 오렌지 빛의 매
니큐어를 보는 순간, 한 이름이 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알프렛? "
  " 겨우 기억난 모양이네요 "

알프렛 비에타(Alpret Vieta). 이름이 기억나자 그 다음 기억들이 줄
줄이 꼬리를 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분명히 저녁 무렵, 은의 가게- 그
러니까 지금 자신이 자고 잇는 건물  지하의 회원제 술집- 가 영업준
비를 시작하면서 그녀를 보았고, 자러 올라가려는 리와 그녀는 통성명
을 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 손에 칠해진 오렌지색의 매니큐어가,  따
듯한 손이 기억에 남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고, 그녀를 다시 보았을 때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화장을 하고  머리를 틀어 올리고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었다. 악수를 나눌 때의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웨이브 진 갈색머리를 질끈 묶고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가벼운 차림
이었었다.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 지금... "
  " 새벽 네시 이십오분. "

  리가 내려놓은 물 컵을 들고 침대 발치에서 일어나면서 그녀는 시계
도 보지 않고 대답했다.

  " 가게 영업은 끝났어요. 나, 이 옆방 쓰고 잇는데, 방에 들어가려니
까 신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에 들려본 거예요. "
  " ... 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
  " 차갑네요 "
  " 네? "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미소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
면, 만났을 때도 지금도 그녀는 잘 소리내어 웃지 않았다. 그저 입  끝
을 살짝 올리면서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지만 그것은  리에
게 무척이나 따스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 차갑다고요, 이제부터 한참동안 함께 지낼 식구인데.  그런 식으로
거리 두려고 하지 않아도 좋지 않아요? "

  나무라거나, 싫어한다거나 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여전히, 자연스
럽게 웃음을 담은 호감 가는 목소리. 그녀는 천천히 리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침대 옆에 서서, 가만히, 리의 뺨을  쓸어 내렸다, 손에서 얼굴
로 넘어오는 따듯한 그녀의 체온.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리의 뺨을 감
싸고,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내고 바르게  선 콧날의 옆을 타
고 내려와 살짝, 입술을 스쳤다.

  " 게다가 그렇게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하면,  가만히 놔둘 수가
없어 보이는 걸요.. "

  리는 턱을 거쳐 목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았
다.

  " 이건 날 유혹하는 겁니까 알프렛? "

  빙긋, 부드러운 갈색과 황금색이 뒤섞인 듯한 알프렛의 미소.

  " 알피, 그렇게 불러요. "
  " 알피. "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리의 입술을 덮어왔다. 리는 그녀가 안겨옴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쓸어  내리면서 그 팔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알프렛의 자그마한 몸이, 거의 눕다시피  침대위로
올라왔고, 시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몸을 리의 몸이 지탱했다.  

  " 피부가 차요. "

  리의 셔츠 안자락으로 따듯한 손이 파고 들어왔다. 부드러운 호흡이
목 언저리에서 느껴지다가 다시 귓가로 옮겨갔다. 귀에서 목으로 이어
지는 선을, 알프렛의 손가락이  스쳐 지나갔다. 침대 위에  상반신만을
일으킨 리의 몸 위로 알프렛은 겹치듯이 올라앉아 있다가 상반신을 일
으켰다, 그리고 손을 자신의 등뒤로 돌렸다 작게, 지퍼가 내려가는  소
리가 들리고 알프렛의 상반신을 감싸고 있던 비로드가, 흐르듯이 허리
아래로 떨어지고, 새하얀 상반신이 드러났다.  리의 손이, 그녀의 상반
신 위를 그림 위에 덧칠을 하듯이 움직였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린  가
슴을 거쳐 흉곽이 그려내는 아치를 지나서 배꼽의 오목한 곳까지 이르
는 여성 특유의 아름다운 곡선 위를 천천히 지나간 손은, 그대로 그녀
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 괜찮겠어?
작은 귀걸이가 달린 귓불을 지그시 물었던 입술이 그대로 속삭였다.
  - 상관없어요.
  가벼운 키스와 함께,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시트가 들어올려졌고, 알프렛의 몸이 시트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녀
의 다리에 걸쳐져 있던 원피스가 바닥에 떨어졌다.

  ------------------

  다시 리가 눈을 떴을 때,  여전히 방은 밝았다. 하얗게 켜진  형광등
과, 블라인드 너머로 보이는 밝아진 하늘.

  " 당신은 MR.서의 여자일거라고 생각했어. "
  
  알프렛은 리의 그 말에, 베개 위로 엎드렸다, 하얀 등위로 풀어진 갈
색의 머리카락이늘어져 등이 반나마 가려졌다.

  " 그 사람, 좋아하던 여자가 있어요, 짝사랑이지만. "
  " 왜 나랑 자려고 한 거지? "  
  " 말했잖아요 "

  알프렛은 리를 바라보고는 미소지었다, 그녀의 시선은, 새벽과  마찬
가지로 한없이 따듯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 차가웠으니까 당신, "

  여전히 배게 위에 엎드려서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알프렛은
속삭이는 듯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해나갔다.

  " 플레인스 트러블러들은 다들 이곳  사람들과 틀리지만, 리할트 당
신은 유별해요. 얼음처럼 차가운데 활활 타고 있어, "

  그녀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어떠하였던 간에 솔직히 리는 그런 데에
영향받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리는 가만히 알프렛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울림이 좋은 목소리는 속삭일 때 더욱 기묘한 매
력이 있었고, 리는 그것을 오늘 새벽, 그녀를 안으면서 알게 되었다.

  " 무엇 때문에 당신이 이쪽으로  오게되었는지는 몰라요, 다들 운명
이 그렇게 끌었다- 라고 들 할뿐이고 나는 그걸  캐물을 자격은 없고,
하지만 나, 왠지 당신을 보는 순간, 안기고싶다고 생각했어요. "

  거기까지 말한 알프렛은 고개를 돌려서 리를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
자에 가득한 장난기.

  " 걱정 말아요, 사랑한다고 매달리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

  알프렛은 독특한 여자였다. 작고, 가냘픈 몸매였지만 긴 팔다리와 가
느다란 허리가,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가슴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아
주 부드럽고 나긋한 이미지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특별히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 포근하게 감싸 안는 듯한 갈색 눈동자는 보면 볼
수록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양을 떨고 있
을때의 고양이와 비슷한 이미지였다.  

  " 조금 더 자요, 이젠 악몽 같은 거 꾸지 말고, "

  그녀의 말이 커맨드 워드라도 된 것처럼,  리는 오래간만에 깊게 잠
이 들었다. 꿈을 꾸지도, 베개 밑의 세이버를 만지지 않고도 아주 편안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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