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 오늘 스케줄입니다. "

세티는 정리를 끝낸 스케줄 표를 이드의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커다란 그의 방구석에 딸린 샤워 실에서는 그녀가 들어설
때부터 물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물소리에 섞여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거기 두고 기다려라. "
" 예. "

물소리를 들으면서, 세티는 커다란 전면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버
티컬이 반쯤 열린  창 밖으로,  흐릿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에 펼쳐진 것은 유리와 철로 지어진 서울이라는 이름의 마천루
의 성.
그날 밤에 보았던 별의 바다는 어떻게 되었던 걸까. 저렇게나 흐려진,
탁한 하늘일 뿐인데. 이 빛의 도시에서는, 별 따위 보일 리가 없을  텐
데.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세티는 다시 시선을 바로잡았다.  수증기의
물 내음과 함께  다가오는 것은, 그의 무스크향.

" 오전 스케줄은? "
" SOLLV뱅크 각 지부장들과의 미팅이 있습니다. "
" 그리고? "
" 지부장들과의 오찬  후, 저녁에는 경제부  장관님이 주최하신 자선
파티가 있습니다. "
" 오늘은 좀 바쁘군, "

타월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 낸 이드는 가운을 걸친 채로 드레스 룸으
로 들어가 옷장 문을 열었다. 세티는 그 옆에 서서 물기가 어린,  그의
단정한 옆얼굴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 오늘의 의상은 자네의 의견을 듣지, 뭐가 좋겠나? "
" 약간 날씨가 흐리니까 오전 중에는 청회색의 싱글 수트에  하얀 드
레스셔츠가 좋겠습니다. 넥타이는  보라색으로, 저녁의 파티에는  감색
스리피스와 보우타이가 어울리실 겁니다. "  

이드는 세티가 골라서 내미는 옷들을 받아들고는 싱긋 웃은 다음, 그
녀의 어깨를 툭 치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두근.
왜일까, 손끝이 스친 것에 불과할 뿐인데  가슴이 뛰다니. 묘한, 빨려
들 것만 같은 매력, 그러나 당신 스스로는, 언제나 흔들림 없이 서  있
을 뿐이지. 당신이 만들어낸 주변의 혼돈을 무시하듯이 그렇게. 그래서
당신의 이름은 Temperance. 절대 흔들림 없는 안정과 번영.
스케줄 표를 들고, 세티는 탈의실에서 이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
쨌든 그는 자신의 주인, 자신은, 그의 세큐리터인 것이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이드는 머리를 말려 빗어 넘기고, 세티가  권한
청회색 수트를 차려입은 모습으로 나왔다. 그에게는 유난히 청색이 잘
어울린다. 차갑고, 안정적인 청색.

" 오전 중에는 에오더드 선배가 동행할겁니다 "
" 저녁의 파티에는 자네로군, 무슨 색을 좋아하지? "
" 예? "

이드의 넥타이를 매만지던 세티는 뜬금없는 그의 말에 이드를 올려다
보았다. 빙긋, 미소를 띄운 단정한 얼굴, 그의 손이, 세티의  드러난 어
깨를 쓸어 내렸다.

" 이 제복도 잘 어울리지만 파티니까 드레스가 나을 것 같아서. 어떤
색 드레스가 좋겠나?  "
" 아, 저, 저는... "

그래, 당신은 늘 이런 식이다. 자신은 흔들리지 않고 주변사람을 흔들
어 놓는다,

" 마스터가 골라주십시오. "
" 그러지, "

보라색 넥타이에 자수정 장식의 넥타이핀을 끼우고,  같은 색의 커프
스버튼을 단 다음, 하얀 포켓행거를 앞 포켓에 맵시 나게 끼우는 것으
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이드는 서류가방을 세티에게 넘겨주고 앞장서
서 방을 나왔다, 문 밖에는 이미, 제복대신 검은 양복으로 갈아입은 에
오더드가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약간의  웃음기를 담은, 금빛의 차가
운 눈동자.

" 그럼, 다녀오십시오, 마스터 "

보일 듯 말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 이드는 먼저 성큼성큼 자신감 넘
치는 걸음걸이로 복도를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티의 어깨
를 확 하고 에오더드가 낚아채더니  어떤 반응도 보이기 전에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움찔, 세티의 무표정한 눈빛이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듯 하다가 다시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간의 키스가 끝난 뒤, 한 발자국  물러
서서 서류가방을 에오더드에게 내밀었다. 흔들릴 이유가 없다. 나는 세
티 루릭, 그리고 이것은 내가 택한 길.

" 다녀오십시오 선배님, "
" 그러지, 뻣뻣한 후배. "

가방을 받아든 에오는 살짝  허리를 굽혀, 세티의 드러난  목을 슬쩍
핥아 올라갔다. 유별스럽게 소름이  돋아오는 것 같은  차갑고 끈적한
느낌. 귓가에 속삭이는 조소가 담긴 듯한 목소리.

" 그날 밤에는 무척이나 예뻤는데 말야. 나긋나긋하고- "

그 말을 남기고 에오는  이드가 간 복도를 뒤쫓아  걸어갔다. 세티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감싸안고 벽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바로잡았다.
버티는 것이 힘들어, 그의 존재가 무겁다.  난생 처음, 두려움과 수치
감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 나에게 쓰라린 패배감을 심어준 그가,  본
능 깊은 곳에서부터 두렵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
치는 그가 두렵다. 그의 페이스에 말려서 또 한번 그날 밤처럼 되어버
릴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
다시는, 다시는 감정 따위 가지지  않으려 했는데, 그날 밤의  주사약
두 번이 그렇게나 커다란 것이었나. 그래도  그들 앞에서는 흔들린 모
습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세티의 고집
이었다.

" 나는.. 이드 유리테스의 세큐리터.... 세티 루릭. "

주문처럼, 한 문장만을 계속 입 속으로 뇌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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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2시경, 세티 앞으로  배달되어온 드레스는 양  허벅지에 슬릿이
깊게 들어간, 머메이드 라인의  짙은 보라색 실크드레스였다. 몸에  딱
붙도록 만들어진  그 단순한 드레스에는 코사지라던가 비즈라던가 하
는 장식들은 보이지 않았고, 사파이어인 듯한 푸른 보석으로 만들어진
귀걸이와 드레스와 같은 질감의 천에  역시 파란 보석을 박아서  만든
쵸커가 함께 들어있을 뿐이었다. 검은 색에 가까운 보랏빛의 드레스는
빛이 비침에  따라 아름다운 광택을 내며 일렁거렸다. 사이즈를 다 알
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전에 이야기를 꺼내서 오후에 이런  드레스라,
세티는 팔에 감기는 실크드레스를  내려다보며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
다.

" 도와드릴까요? "

드레스를 전달해 줬던 이드의 텔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진
희원(眞 憙元), 이드의 하나뿐인 텔러, 이제 막 열  여덟이  된 귀여운
그 아이는 어쩐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새파란 바다 빛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왜일까, 파란 눈의 사람  따위. 안  적도 본 적도 없는
데. 이상하게 저 파란빛이 가슴을 아릿하게 만드는 것은.

" 괜찮아, 혼자 할게. "

드레스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거울이 달린 콘솔의 서랍을 열어, 거의
쓰지 않던  화장품들을 꺼내었다. 화장품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
다. 오늘의 드레스와 마찬가지로, 이드는 세티에게 가끔 어울릴 것  같
다면서 가끔 이런 것들을 사주곤 했었다. 하지만, 화장품은 후각을  마
비시키고, 드레스는 움직이는데 불편했다.  그러니까 결국, 오늘밤처럼
이드의 파트너 역이 아닌 이드의 세큐리터일 때는 하등에 쓸모가 없는
물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티의 옷장에는 오늘의 드레스  말
고도 두어 벌의 정장과  칵테일드레스가 자리잡고  있었다. 서랍 속의
화장품들과 함께, 사용되지 않고, 그대로 틀어박힌 채-.
-마치 여자로의 자신을 묻어버리듯 그렇게?
누군가. 세티 대신 그녀의 가슴에서 말했다. 세티는 고개를 저으며  파
운데이션을 얇게  펴 바르기 시작했다. 메이크업을  배운 것은 세큐리
터로의 훈련을 받을 때였다. 동기들은 아무도  이런 것을 배우지 않았
음에도, 세티는 여자이기 때문에, 메이크업을 배우고 스킨케어를  배우
고 드레스 입고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지금에 외서는 어떤 도
움이 될까.
늘어진 앞머리를 정리해 뒤로 넘겨 젤로 고정시키고, 몇 겹의 로션과
메이크업베이스와 파운데이션과 페이스파우더가 발려진 얼굴 위에  아
이셰도우와  립스틱으로 그림을 그리고, 귀걸이를 달고, 거울에 비치는
익숙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세티는  드레스를
입었다.
명령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세큐리터가 아닌 여자가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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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생각이십니까? "
" 무엇 말인가? "

이드는, 운전석에의 에오 에게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지부장들이
모아 준 보고서를 읽으며 반문했다.

" 다른 여자 세큐리터들에게는 이런 식의 행동을  보이시지 않으셨으
니까 하는 말입니다. 지금의 당신은 마치  그녀를 유혹하려 드는 보통
남자 같은- "
" 에오더드. "

팔락, 보고서를 넘기면서 이드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여느때보다 더욱더 차고 무감정한  목소리, 에오는 말을  멈추고 흘끔
백미러를 곁눈질하며 여전히 보고서만을  살펴보고 있는 이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무슨 생각인지 묻고 싶은 건 내  쪽이군, 너야말로 왜 그녀에게 집
착하지? "
" 그건.... "

에오는 말을 잇지 못하고 백미러 너머로 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시선
을 돌렸다. 차마 바라볼 수도 없는 싸늘함과 위압감, 등뒤에서  느껴지
는 그의 존재가, 그가 '무엇'인지를 뼛속 깊이 재인식 시켜주었다.  

" 네 취미는 알고 있지만, 그녀의 소유자는 나다. 상처 난  여자는 보
고싶지 않으니, 조심하도록 해. "
" ..... 알겠습니다. "

에오더드는 침을 삼켰다. 이상스러운, 그답지 않은 집착이다,  이것은.
그리고 그 이유를 자신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특별한 존재다.
단순히, 어렸을 때부터 주시해왔던 인재 이상의 무엇이, 그녀와  그의
사이에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렇기에  자신도, 그녀를 파일로  보았을
때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감성을 자극시키는 차가운 바다빛 초록의 눈
동자와 붉은 입술, 거기에 정말 오래간만에 자신을 만족시키는, 지배욕
을 돋구는 도도함. 그런 여자를 만난  것은 정말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스터는,  그런 일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 때문에...

"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자네 일에만 집중하도록 하게 에오더드, "
" ....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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