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달려가려고 했다, 가온에게 가는 그녀를 잡아, 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
다. 그러나 리의 다리는 리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그대로 비
가 고인 땅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는 필사적으로 멀
쩡한 왼팔로 그녀에게 기어갔다.
절대로, 절대로 가운을 죽게 둘 수 없어. 그 잘 보여주지 않던 새초롬
한 미소, 이쪽이 머쓱해질 정도의 강한 접촉 거부증, 그러나 무엇을 더
알지? 나는 가온에 대해서 무엇을 더 알지? 아직도 가온은 어린데, 우
리와 앞으로 계속해서 좀더 계속해서 살아나가고 알아나갈 만큼  어린
데, 여기서 죽게 놔둘 수는 없어, 죽게 하지 않아!
억지로 입술을 악물고 팔과 다리의 통증을 참으면서 리는 그녀의  발
목을 잡았다. 의외로 한 손안에 들어가는 작고 여성스러운 발목이었지
만, 그것은 단단한 철갑으로 싸여있었다. 잠시 자신의 발목을 잡고  늘
어진 리를 바라보던 그녀가 싸늘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 소용없어 이것은 예정되었던 일, "

그리고 리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쪽의 발이, 지표면을 내려  밟듯이,
리의 팔목을 밟았다. 약간 높게 만들어진  그녀의 부츠 바닥은 쇠였고
그 굽은 리의 팔을 파고 들어갔다. 칼이나 발톱에 베이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고통이 팔 전체에 퍼져나갔다. 그러나  리는 그녀의 발목을 잡
은 손을 놓지 않았다.

" 가온.. 도망...가...!!"

이를 악물었을 때는 나오지 않던 신음소리가 말을 더듬게 하는  것을
애써 참으면서 리는 소리쳤다. 비에 젖은 바닥에 뒹구는 것 따윈 아무
일도 아니었다, 추하게 바닥을  기면서, 그녀의 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쯤은, 가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 할 수 있었다.
- 한명 살려내고 나면 제 능력으로는 일주일동안 부활 주문을 쓸 수
없어요.
현현의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분명히, 현현은 자신의  반
쪽을 살리기 위해, 소오류에게 그  주문을 썼다. 가온은- 가온은 죽더
라도 살려낼 수 없어, 죽으면- 끝인 거야!
그러나, 리의 다급한 마음과는 틀리게, 가온은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계속 무언가를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미, 그
의식이 이곳에는 없는 것처럼, 리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
럼 그러고 서 있었다. 아니, 허공 중에 쓰러져 있다- 란 표현이 더 맞
을 정도로 위태롭게.

" 뭘 하는 거야!!!!! 소오류!! 현현!! 가온을!!! "

이미 자리를 피한 현현이나 소오류가 돌아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무
언가 외치지 않고는 이 조급함을,  안타까움을, 가온이 죽는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해버리는 것 같아서 리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발목
을 잡고 가온의 이름을 불렀다.  
스윽, 리의 팔을 밟고 있던 구두가 물러났다. 그리고 그녀는 살짝  허
리를 굽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리를 내려다보았다. 짙은.. 초록색
눈. 굵게 웨이브진 머리카락이, 흠뻑 물에 젖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
지 못하고 어깨에서 스르륵 허공으로 흘려 내렸다. 빗물과는 다른,  굵
은 물방울이 리의 얼굴에 떨어졌다.  - 아름다운 얼굴이다, 이런 상황
이었지만, 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녀는 지금까지
와는 다른, 무언가 아름다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 그 두 사람도 죽게 하고 싶은가? "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리고  그것은, 리가 그렇게도  부정했던
현실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리에게 가져왔다.
무어라 반박하지도, 화를 내지도 못했다. 아니 그 이전에 말을 할  수
조차 없었다, 그저 망연하게,  그녀의 깊은 초록 눈동자를  바라보았을
뿐. 이미 리의 손은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지 않았다. 피식, 그녀는 쓰
게 웃었다.

" 귀찮군 이런 것도, "

철벅..철벅... 그녀의 발소리가 들려왔지만 리는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 어머니도 참, 이런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실 것이지. "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가온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의 몸이, 가온의 몸을 가리고 그녀의 오른손이 거두었던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이 움직였다.
퍽.
둔탁한 소리, 빗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다른  종류의 물소리, 철퍽, 데
구륵 하고 무거운 것이 구르는 소리. 동공이 풀린, 까맣게만 보이는 가
온의 눈동자, 젖은 땅 위에 흩어진 가온의 머리칼, 아랫부분을  잃어버
린 채, 리를 바라보는 가온의 잘려진 목.  

" 여기에 존재하는 가엘리온은 나 하나로 충분해. "

그녀의 칼에서 떨어지는 피가, 그대로 비를 타고 바닥을 붉게 적셨다,
가온의 피, 너무나도 붉은 피.  피의 비가 내리는 것처럼 땅은  새빨갰
다.

" .......가..온.... "

눈에 보이는 것은 잘려진 가온의 목, 피, 피 소름끼치도록 선연한  붉
은빛의 피들, 잘린 목의 아버지, 그리고 저 빛으로 물들었던 누이의 드
레스.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아픈 상처가 그  핏빛처럼 선명하게
떠올라왔다. 눈물같은것도 나지 않았다, 그저 너무나도 선명한 현실 앞
에 넋이 나갔을 뿐.
죽었나, 죽어버린건가, 정말로, 정말로 가온은 죽어버린건가.

" 으아아아!!! "

상처의 아픔이나 움직일 수 없었다 라는 것은 완전히 잊고 리는 칼의
피를 털어 내는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갑옷이  없는 옆구리에 촤악 칼
금이 그어지면서 새로운 피가 튀었다. 붉은 색, 가온과 같은 선명한 붉
은 색. 너무나도 선명한 그 빛에 잠시 주춤한  사이 그녀의 손이 리의
멱살을 낚아채었다. 강한 팔의 힘, 리는 자신의 다리가 지면에서  떨어
지는 것을 느꼈다. 달려들었을 땐 전혀  느껴지지 않던 고통이 새삼스
럽게 밀려들어왔다.  

" ...죽....여.... "

그녀의 눈동자, 가온과 똑같은 그 눈동자가  미치도록 저주스럽고 슬
펐다. 가온과 같은 흑녹색, 그러나 그녀와 같지 않은 무서울 정도로 냉
정하고 차가운 그 눈이, 너무나도 익숙하고 또 너무나도 낯설었다.

" 왜 스스로 죽고자 하지? "
"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널 죽이고 말 테다..."

가온과 같은 얼굴, 같은  눈, 같은 머리칼, 그러나  자신의 앞에 잇는
자는 계획적으로 가온을 살해한, 그녀의 원수.

" ...어떤 시간이 걸려도......."

가만히, 그녀가 리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아하하하하 하고 크게
웃어젖혔다. 그리고는 리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말했
다.

" 날 죽이고 싶으면 '꿈'으로 와라 애송이. "
" .......... "

꿈으로 오라고? 그녀는 몇 번이고 꿈에  대해서 언급했다. 꿈을 꾸는
지 확인하듯 물었고 자신이 꿈과 현실을 모른다고도 말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면 꿈으로 오라고?

" 아니, 올 수나 있을까? "

그녀는 다시 한번 까르르르 하고 웃었다. 빗소리가 조금 더 거세어졌
다. 지면엔 흥건하게 피의 강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리의 의식은  피가
흘러나가듯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털썩, 그녀가 잡고있던 손을 놓자
리의 몸은 마치 짐짝처럼 피로 젖은 땅바닥에 쓰러졌다.
철벅,,철벅하고 빗속을 걸어가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렸다. 무언가 나
무라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카랑한 목소리에 섞여 들렸던 것
도 같았지만, 의식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빗방울이 차갑게 얼굴에 와 닿았다. 지면에는 피의 강이 붉게, 너무나
도 붉게 흘렀다.

' ......... 가온 '

그리고, 기억은 거기에서 멎었다.

-----------------------------------------

천장, 어딘지 익숙한 갈색의 천장. 거기에서  다시 시선을 돌리면, 하
얀 회칠의 벽, 언제나의 아침과 같은, 여관 미풍의 침대.
리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걸까.
몸은 잘 움직여주지 않았다. 억지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자, 침
대 옆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는 현현만이 보였다. 가온도, 소오류도 없
었다. 이름을 부르려고 입을 열자, 바싹 마른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리는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었다.

" 현.... "

속삭임과도 작은 소리였지만 졸고 있던 현현의  귀가 움찔하더니, 반
짝하고 눈을 떴다, 반가움과 안도감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그 얼굴에
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푸석하게  흐트러진 녹색의 머리, 생기를  잃은
듯한 녹색 눈동자, 현현이 이런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가.

" 정신이 들었습니까 리? "

언제나 맑고 부드러웠던 목소리는,  약간 가라앉아서 탁하게  들렸다,
리는 마른침을  삼키고 가장 묻기 힘든 것을, 물었다.

" ...가온...은....."

현현은, 표정을 흐리고 그저 고개를 저음으로써 리의  질문에 대답했
다. 그랬군, 역시 꿈이나 환상 같은 게 아니었군, 가온은,  정말로 죽어
버린 거로군. 눈물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리는 그저 허망한 눈으
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기억은, 잊혀진  것이 아니었다, 가온의 죽음
을 대하는 순간, 잊었다고 생각했던 10대는  너무나 잔인한 현실로 리
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꿈' 역시

" 괜찮...습니까? "

현현의 목소리에는, 불안함이 실려 있었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
리고 그 목소리를 듣자, 리는 이유도 모르게 화가 났다. 왜 그렇게  말
하는 거지? 가온이 죽었어, 괜찮을 리가 없잖아!  

" ....별로 괜찮지.. 않아.. "

죽었다. 그것도 바로 내 눈앞에서, 나는 무력하게 그 아이가  죽는 것
을 보아야만 했다. 그러고도 잘도  살아있군 리할트, 그때처럼, 상황을
목격하고,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아무 것도 못하고 그들을 죽게 두고
선, 자신은......

" ..그래도 살아는 있군.. "
" - 당신마저 죽으면! "

격한 목소리. 어쩐지 현현과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리는 고개를
돌렸다.

" ......시끄럽게 굴지 마..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

괜찮지 않은 건 몸이 아니야-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
었다. 소오류가 그녀의 칼에 찔렸을 때, 그  새파랗게 질린 표정, 그래
현현도 자신의 절반이 죽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아무리 신의 힘을 행
하는 성직자라고 해도, 형제,  그것도 쌍둥이가 죽는 것을 경험한다는
건 결코 좋은 경험은 안 되겠지.

" 소..오류..는?"
" .... 신전에서 쉬고 있습니다. "
" ...... 그래..... "

분명히 소오유도, 엉망이 된 몸으로 여기까지의  텔레포트 주문을 썼
을 거다. 죽었다 바로 살아난 몸으로, 내가 현현이나 소오류에게  이기
적이니, 냉정하니 하고  화낼 것은 없는 거다. 이  둘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가온을 살리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살
리기 위해.
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풀려나가면서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라
도, 그녀를 짓눌렀던 그 놈을 죽이기 위해서라도, 가온을 죽인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라도, 그 방법이 어떻게 되던 간에.
자신은, 꿈으로 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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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빛은 보이지 않았다. 비는 이미 그쳤지만 달도 떠올라 있지  않
은, 새벽이 찾아오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 리는 테이블에 종이 한  장
을 내려놓고 날아가지 않도록 잉크병으로 눌러놓은 다음, 자신의 배낭
을 들었다. 등뒤로 현현의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 안녕, "

짧게 작별인사를 하고, 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문을 열고
여관을 나왔다. 검에 찔렸던 상처자국이 조금 얼얼했지만, 그럭저럭 견
딜 만 했다. 어느새 제법 차가워진  새벽공기에 입김이 보얗게 뿜어져
나왔다.

" 후- "

길게 숨을 한번 내쉬고,  리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서문이 아닌, 항구방향인 동문 쪽으로.

" 결심이 선 겁니까? "

들어 본 적이 있는 맑은 목소리에, 리는 고개를 돌렸다. 마치  기다렸
었다는 듯이, 금빛 머리칼을 한, 갈색피부의 청년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서 있다가 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하고 미소를 지었다. 왜일
까, 그것이 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꼭, 이곳에서 이 바드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와 나누게 될 대
화의 내용까지.

" 충분히. "
" 작별인사는? "
" 했다. "

청년은 팔짱을 풀고 벽에  닿았던 부분의 옷을 탁탁  털고나서, 옆에
내려놓았던 배낭을 둘러매었다. 천으로 둘둘 말은 류트가 배낭에 꽂혀
있다가, 끄덕 하고 흔들렸다.

" 그럼 가볼까요? "

그리고 그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등에 늘어진 금발이, 어두
운 밤의 어슴푸레한 빛으로도 빛나고 있었다.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면
서, 그는 항구까지 앞장서서 걸어갔다.

" 그곳은 끝, 혹은 계속,
  의미를 정하는 것은, 표시하는 자의 몫
  현실의 끝, 꿈의 계속,
  선택하는 것은 ..... "

노랫소리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꿈으로 갔다.





Part 3.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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