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part 3. 리(裏)




" 물러서, 현현(顯玄)!!! "
" 무, 무리하지 말아요 리(裏)! "
" 소오류(小烏流)! 엄호해! "
" 알았어- 매직 미사일! "

한 손에 검을 든 청년이 기둥 만한 발디체를 휘두르고 있는 미노타우
르스에게 대쉬해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양손을  앞으로 뻗은 소녀의
손에서 눈부신  빛의 화살들이 뻗어 나왔다,
텅텅텅, 빛화살들은 정확하게 미노타우르스의 몸에 명중했고, 그  충격
에 발디체가 잠시 느려진 틈을 타서 청년의 검이 날카롭게 미노타우르
스의 옆구리에 박혔다.
끄워어어억-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던전 안을 가득  채웠고 검을 박
아 넣었던 청년은 재빠르게 검을 거두며 물러나다가 휘두른  발디체의
자루에 맞고  다섯 발자국쯤 밖으로 굴렀다.
그리고 붉게 충혈된, 고통으로 흥분된 몬스터의 눈이 조금 전,  자신에
게 빛화살을 날렸던  소녀에게로 향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발디체가
당장 그녀의 몸을 두동강 내어버릴 것만 같았다.

" 피해 소오류! "

조금 전에 검을 든 청년의 말에 뒤로 물러섰던, 끝이 뾰족한 귀를 한
청년이 새파랗게 질려서 외쳤다. 그러나 소녀는  피하지 않고 두 손을
들었다. 소녀의 손이 기묘한 도형을 그리며  은빛의 가루를 허공에 살
짝 뿌린 후- 그녀는 캐스팅 했다.

" 컬러스프레이-! "

공중에 뿌려진 은가루가 화려한 원색으로 변해 촤악  미노타우르스의
얼굴에 뿌려졌다. 미노타우르스는 앞이  안 보이는 듯이  엄한 곳으로
발디체를 휘둘렀고 캐스팅 했던 소녀는 긴 로브자락을 추스르며 그 발
디체를 피해 몸을 굴렸다.
굴렀던 청년이 다시 일어나 재공격 하려는 순간 지금까지 보이지  않
았던 동료 하나가 미노타우르스의 등위에 나타났다.  보고 있던 세 사
람과, 눈의 감각을 잃어버린 몬스터가 그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  이미
그의 단검은 몬스터의 목을 도려내듯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긋고  있
는 중이었다. 시뻘건  선혈이 분수처럼  촤악 튀었고,  미노타우르스의  
거대한 몸집은 무너지듯, 던젼 바닥에 쓰러졌다.

" 잘했어 가온(珂瑥) "

청년의 칭찬에, 곱살하게 생긴 검붉은 머리칼의  소년은  무표정하게
살짝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리고 엘프 청년이 달려왔다.

" 괜찮습니까 리? 가온도 다치지 않았어요? "
" 아, 나는 괜찮아. 날이 아니고 자루여서 좀 얼얼하긴 한데... "

청년-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엘프 청년이 그 발디체의 자루에
얻어맞은 곳을 눌렀다. 리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 강한 체 같은 건 적당히 해 둬요, "
" 그렇군 치료해주겠어? "

리가 쓴웃음을 짓자, 엘프  청년은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상처에
손을 얹고 기도문을 읊조렸다. 새하얀 빛이  손과 상처 사이에서 번지
더니, 곧 통증이 가라앉았다.

" 열 둘, "

조용히 서 있던 가온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 변성도  되지
않은 하이톤의  목소리였다.

" 어? 열 둘이면 다 끝난 거잖아? "
" 응, 끝. "

아직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진 미노타우르스를 내려다보던  짧은
머리의 소녀가 소년의 말에 반색하며 돌아보았고 소년은 가볍게  고개
만을 끄덕이고는 허리춤에서 아까 미노타우르스의 목을 도려내었던 그
단검을 다시 꺼내어 새하얗게 빛나는 날을 미노타우르스이 머리에  난
뿔 중간에 대고 가볍게 밀었다, 놀랍게도  뿔은 마치 나무토막처럼 깔
끔하게 잘려져 나왔다.

" 증거물 채집 끝. "
" 그럼 이제 나가자, 외워둔 마법도 거의 다 쓴데다가 던젼 같은 거
음침해서 싫어~ "

짧은 머리의 소녀가  투정하듯이 다른  세 사람을  돌아보고 말했다.  
엘프 청년은 쓴웃음을 지었고, 리는 자신의 검을  검집에 넣으며 사방
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봐도 똑같아  보이는 벽, 벽, 벽, 통로, 통로, 통
로. 미노타우르스의 소굴,  라비린스(미궁). 들어올 때도 숱하게 고생을
했는데 과연 나갈 때라고 쉬울까?  무어라 해도 이곳은, 아직도 그 전
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거대한 산맥, 브릴란트의 고대유적이니  만큼
깊고, 복잡하고, 강한  적들로 우글대고있을 테니까.

" 소오류 "

잘라낸 뿔을 피가 배어 나오고 있는 자루에 던져 넣고 단검을 허리 뒤
의 검집으로 돌려놓은 소년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 응? "
" 텔레포트 남겨뒀지? "
" 응.. 하지만 이 안에서 외부로의 텔레포트는 안 되는걸. "

우선 이 미궁을 되짚어 나가지 않으면.. 이라고 말을 덧붙이려다가  소
오류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나도 알아' 라고 대답이 돌아올 테니까.
소년은 자루를 가볍게 둘러메고 모두에게 말했다.

" 들어온 길에 마킹 해 뒀어, 가자. "

소년의 말에, 리는 소년을 돌아보고 픽 웃었다. 엘프 청년-현현과 소
오류도 약간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가 곧  미소를 띄웠다. 저런 데에
는 정말로 나이답지 않게 신중한 동료가 있었다는 걸 잠시나마 잊어버
린 것을 미안해하면서.
리는 잠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실은 저들의 힘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 뭐해 리? 앞장서야지. "
" ..아아, 가. "

-------------------------------------------------------

우리가 수도인 시에나로 귀환한 것은, 그 미궁을 빠져나온지 정확하
게 3분만이었다. 외워둔 스펠을 다 썼다고는 했지만,  걷기 싫어하는
소오류는 언제나  텔레포트 하나만은 남겨두기 때문에,
우리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모험자 길드로 향했다.  
반쯤 피로 칠갑을  한 갑옷이 신경 쓰였지만 그보다 더 눈에 뜨일 가
온이 태연했기에  나도 태연할 수 있었다. 가온은, 거의 다 피로 젖어
버리다시피 한 옷에, 한 손에는 피얼룩이 번져 나오는 자루까지  들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들을 배척한다거나  혐오스러워 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경외감을 띄고 무언가 대단한 존재를 보
듯이 멀찌감치서 바라보고 있었다. 모험자라고 하는 존재는, 이렇게
수도가 아니면 구경하기도 힘들 만큼 드문 존재였으니까.  모험자가
되고자 하는 꿈에 들뜬  청년들이야 많았지만, 길드에 소속되어  정식
으로 우리처럼 모험을 떠나고 몬스터를 상대할 정도까지 성장하는 사
람은, 극소수였다.
강한 사람만이 들어온다는 길드원들 중에서도 수시로 안 보이는 사람
이 생기곤 했다, 하지만 모험가들이라면 다 알고 잇는 사실이었지만  
'그 일' 전까지만 해도 몬스터가 이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인간이 이렇게 약하지  않았었다.
약간만 검을 써 본 사람이면, 마을을 노리는 오크나 고블린 따위는 햄
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은 강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 일 이후 모든 것은 틀려졌다.

" 여, 이번에도 이 파티는 무사귀환에 미션 클리어군. "

무언가 붉은 줄이 그어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상담원 타일(陀溢)
이 서류를 옆으로 치우며 우리를 맞았다. 힐끗 들여다보니,  또 어딘
가에서 연락이 두절되어버린-그러니까 전멸해 버린 파티의 신상기록인
듯 싶었다. 가온은 무심하게 피얼룩이 진 자루를 그와 우리 사이에 놓
인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 이것, 증거물 "

타일은 가온이 올려놓은 자루 입구를 슥 벌려 가볍게 안을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것을 집어 자기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옆의
서랍을 열고는 서류철 하나를 꺼내왔다. 이제는 눈에 익은, - 매번 모
험이 끝날때와 시작될 때 보았으니까- 금색으로  표기된 표지를 한 우
리 파티의 신상기록이었다.

" 이로써 11회 연속 미션 클리어인가, 대단해, 어지간한 모험자들은
자네들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겠어. "  

타일은 연신 감탄사를 늘어놓으며 서류에 무언가를 기록했다. 리는  
타일이 적고 있는 서류철의 금색 표지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이 파티
를 만나 모험을 시작하기 위해 이 모험자  길드에 등록할 때 저 표지
는 파란색이었다. 그것이 일년도 채  지나지 않아 붉은색을 거쳐 은색
으로 변하고, 이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잇어서는 최고급을 나타내
는 금색으로 바뀐 것이다. 타일이 열어놓은 서랍 안에는 네다섯개의
금색 표지를 한 서류철이 더 들어있었고, 리도 그 내용에 대해서는 대
강 알고 있었다, 어느 파티든지, 모두 이름만으로도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인 것이다.
리는 다시 시선을 타일의 옆에 아무렇게나 쌓여 잇는  검은 표지의
서류철들로 돌렸다. 저것은, 최하급의 파티를 의미한다, 모험을 떠난
횟수는 5회 미만 클리어는 2회  미만, 그리고, 파티 내에 스펠캐스터
가 아무도 없으면 검은색의 표지를 달게 된다.
그 문제에 대해서 리는 스스로 자신이 운이 좋은 편이었다는 것을 다
시 실감하면서 옆에서 가온과 타일의 거래를 구경하고 잇는 두사람에
게 눈을 돌렸다, 뾰족한 귀를 하고 있는, 외형만은 완전한 엘프인 현
현은 신의  은총을 받아 신력을 사용하는 클레릭,  그 옆에서 지루한
듯이 로브자락을 꼬깃꼬깃 말아쥐고 있는  아가씨 소오류는 마나의 흐
름을  깨닳은 매지션. 그것만으로도 이 파티의 등급은 처음부터 파란
색으로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거기에- 모험을 시작하고 같이 지낸 시
간이 길어지면서 알게 된 것이었지만, 이란성 쌍둥이인 두 사람의 아
버지는 엘프였다고 했다. 그것이 현현에게는 조금 진하게 나타나  현
현은 완전한 엘프의 외형을, 소오류는 완전한 인간의 외형을 가지고
있는거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저 두 사람은  그 일을 겪은 마법사와 성
직자라는 거였다.
그러니까.. 그것은 벌써 50년이 지난  일이다. 세 대륙의 한가운데,
포세이돈의  소용돌이에 어느날 갑자기 섬 하나가 나타났다.  그 섬이
나타나는 것돠 동시에  하늘이 검게 변하였고 해일이 전 해안가를 덮
었으며, 일주일동안  폭풍이 몰아쳤다. 그 폭풍우가 치는  일주일동안
학자들의 토론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그 일',  -그
러니까 전설로 내려오던 미지의 대륙 엔드의 출현에 대한 의미를 모두
다르게 해석했다. 그당시에 가장 유력했던 멸망의 시작이라는 설은 이
제 한 세대나 지나버린 지금에 와서는 시들해졌고, 그 다음으로 두각
을 나타낸 것이 '이계' 와의 문이란 설이었다.  그렇다면 어디로의 문
?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그때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 일
이후 수십, 아니 수백의 파티가  포세이돈의 회오리 한가운데에 나타
난 엔드를 향해  갔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엔드의  주변에는
언제나 회오리바람과 소용돌이와, 그리고 잦은 지진과 낙뢰가 버티고
있었고, 그 한계선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아무도 다시  나오지 못했
다. 일부는 그 모험자들이 죽었다고 했고, 일부는, 이계로 날아가 버
렸다고 했다.
학자들의 책상공론이야 보통사람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라고 해도,
그 일주일간의 폭풍이 끝난 후, 이후 인간은 현저히 약해졌다. 그때까
지 인간의 강함을  도와주고 잇던 두 가지- 신과 마법이 인간에게서
멀어진 것이다.

" 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
" 아니 별로, "

현현의 말에, 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가온은 이제 타일에게서
넘겨받은 조그만 주머니에 든 보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 확인했어, 가격은 맞음. "
" 자 그럼 수령서에 사인하고, -이제 또 한동안 쉴 건가? "

타일의 시선이 서류에 사인하고 있는 가온을 넘어 나를 향했다, 나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고, 한마디 덧붙였다.

" 그럼 연락은 언제나처럼 미풍(美風)으로, 가자. 가온, 소오류 "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31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다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0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9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8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하나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6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여섯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5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다섯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4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3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2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1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0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9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8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7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6 장편 인사드립니다. 김현정 2004.10.30 0
115 장편 [환국기] 1. 동량(棟梁) (2) 강태공 2005.09.28 0
114 장편 [환국기] 1. 동량(棟梁) (1) 강태공 2005.09.28 0
113 중편 도플갱어 [하] lucika 2005.09.12 0
112 중편 도플갱어 [중] lucika 2005.09.1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