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그의 등뒤로 멀리 서울의 빛이 보였다. 가로등마저 들어오지 않는 이
곳에서 보이는 서울은, 하늘까지 환하게 비추는 빛의 섬, 그  자체만으
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결계...
라에느는 숨을 들이쉬었다. 자신의 앞에 보이는 것은 눈부신 빛의 결
계에 싸인 서울, 그 주변의 점점이 박힌 주황색의  보안등과  그 빛을
받고 일렁이는 강물, 그리고... 이곳, 예전에 행주산성이란 곳이 있었던
자그마한 산의 산줄기와  잔해만 남은 산성의 흔적, 그 앞에 선, 자신
의 연인의  '몸'

" 나에 대한 제거 명령인가요 "  

지금까지와는 다른, 착 가라앉은 차분한 목소리, 강바람이  그녀의 금
발을 흩날렸다. 잠시간의 바람소리뿐인 침묵이 지나가고, 놀란  표정으
로 굳어있던 토파가 입을 열었다.

" 하.... 이런 이런. "

묘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 생각보다 대단한 감각을 가지고 계셨군, 이렇게 단번에 알아내리라
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
" 정신지배- 다이아몬드 쥬얼씨.. 겠지요. "

여전히 라에느는 무표정인 채로, 그리고 토파-아니 아몬은 감탄의 표
정으로, 서로를 주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몬의 감탄한 표정은 경계
로 바뀌어갔다.

" 넌 누구지? 단순한 ADRTF가 아닌 건가? 어떻게 나를.. 아니 나의
능력까지 다 알고 있는 거야?! "

핑-. 아몬의 신경 곤두선 외침에  라에느의 머리를  고정시키던 핀이  
두조각으로 갈라지며 튕겨나갔다. 핀의 속박에서 풀려난 금빛 나는 머
리카락이 화르륵 강바람 속에 흩날렸다. 핀과 함께 잘려져나간 머리카
락 몇 가닥이 금빛의 선을 허공에  그리며, 산 정상 쪽으로 밀려갔다.
그리고 여전히 무표정한, 금빛 머리칼 한가운데에 자리한 얼굴.

" 나는..... "

길은 듯, 짧았던 침묵 끝에, 라에느가 입을 열었다. 이무런 감정도 실
려 있지 않은, 기계음처럼  평이한 그녀의 목소리에  아몬이 흠칫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선 그녀는, 막내- 토파즈의
기억에 남아있던 늦잠자기를  좋아하고, 방 정리에는 게으르며 잘 웃
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웨이트레스 아가씨가 아닌, 무언가 엄청난 공포
감을 일게 만드는 위압적인 존재였다.

" 나는 당신들이 알고 잇는 대로 ADRTF의 일원인 라에느 제이린, "

당신들이라는 복수의 호칭에 아몬이 한번 더 흠칫했다. 그것은 그 둘
을 어디선가 바라보고 있던 세 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청잣빛 눈
동자가 무서우리만큼 조용한 무표정으로  토파와-그 정신을 지배하고
잇는 아몬과-그리고 그 외의 세명을 뚫듯이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 그리고.... 당신들이 찾고 있던 플레인스  트레블러, 팔라셰 드 뮤르
의 수제자. "

약간의 공포감을 띄고 그녀를 바라보던 아몬의 눈이 그 말을 듣자 공
포보다 더한 놀람으로 커졌다.

" 그랬어... 그랬었군, 그래서 너에게는 우리의 능력이  미치지 못했던
거였군. 그 빌어먹을 무도가들의 마인드 배리어 때문에!!! "

아몬의 탄성인지 비명인지-혹은 공포감을 몰아내려는 허세인지 구별
가지 않는 커다란 목소리가  바람소리를 누르고 빈  산허리에 퍼졌다.
그러나 라에느는 여전히- 그녀답지 않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벅,
라에느가 자신 앞에 선 남자에게로 한 발작을 내딛었다. 조금 전,  그
녀가 입을 열 때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던 그는, 이번에도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부서진 산성의 돌 조각이 타각 하고 발에 와
닿았다. 단 한 발작만을 내딛고 라에느는 다시 멈추었다. 꿀꺽, 누군가
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 나를 죽이러 오지 않았나요? "

지금까지의 무표정 위에 보일 듯  말 듯 떠오른 옅은  조소,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싸늘하고 단아한 비웃음, 아몬은 목안으로 자꾸만 잦아
드는 숨을  크게 들이켜 내뱉듯이 소리질렀다.

" 에므!! "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밤하늘에 퍼지고 그 말꼬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연둣빛을 띈 사람 그림자가 팟하고  토파의 몸 옆에 나타났다가  그와
함께 사라졌다. 단지 나타났다가 사라진, 단 2초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 텔레포트.... "

라에느는 잠시 조금 전까지  토파가 서 있던 자리에  맴도는, 공간이
사라진 자리에 부는 바람을 내려다보고,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그녀
의 시선이 천천히 뒤쪽으로 돌아서, 저 멀리에 희미한  빛의  길 너머
에 있는 구도시에 고정되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렸을, 고
층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는 길고  넓은
길만이 희미하게 과거의 빛을  내고 있을 뿐, 온통  어두운 결계 밖의
치외법권- 솔브가 금지한 금지구역. 그녀의 다리가  가볍게 지면을 박
찼고, 곧 이어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스피드로 라에느는
구도시를 향해 달려나갔다.
탁탁탁탁탁탁
불빛이라고는 저 멀리의 도로에서 비치는  반쯤 꺼져가는 가로등 불
빛 말고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고층건물들 사이를 지나는 그녀의 발소
리가 반쯤 무너진 건물에 공명되어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잠시 발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본 라에느가 펄쩍, 십여층이  넘어가는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방을 천천히 둘러본
다음,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날 듯이 뛰어넘어 반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져있는 건물을 향했다.

" 어떻게 된 거야 아몬?! "
" 나도 몰라!! 무도가를 보고 어쩌라는 거야? "
" 싸울 때가 아냐 루, 아몬, 그녀가 오고 있어. "

천장이 날아가 버린, 부수다 만 건물의 최상층 플로어, 거기에서 약간
지친 듯이 숨을 고르고  있던 연둣빛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두 사람-
토파의 몸을 한 아몬과,  그를 향해 추궁하듯 상황을  묻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아가씨를 향해 말하자, 그녀에게서 약간 떨어진 홀에 서 있
던 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 어디까지 왔지? "
" 근처... 부근이야.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아. 아니 200미터.... 아
냐- 마, 말도  안돼. 이, 인간이 이런 속도로 움직일 수는 없어-!"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모으고 있던  여인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
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두 사람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차분히 가
라앉은 라에느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 그런 속도로 움직일 수도 있지,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

수 키로가 되는 길을 달려온 것 같지 않은 낮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  
평소라면 그저 듣고 흘려버렸을 그  나지막한 목소리는, 이상스럽게도
엄청난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천천히 아래를  훑어 본 라에느는 서
있던 철골에서 세 사람 앞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 순간,  플로어와
홀에 흩어져 잇던 철근 박힌 콘크리트 파편들이 둥실, 떠올랐다.

" 죽어!! "

붉은 머리칼을 한 아가씨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지르는 것과 동시
에 떠 있던 파편들이  엄청난 속도로 라에느에게  날아갔다. 삐죽삐죽
솟아나온 철근들이 서로 얽히는 소리와 콘크리트가 맞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쌔근쌔근, 그녀의
숨 몰아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 루, 루비 쥬얼, 텔레키네시스트, '보석의 아이들' 중 둘째.... "

작은 산처럼 쌓인 콘크리트 더미속에서 들려온 태연한 목소리에 약간
숨을 헐떡이고 있던 붉은 머리칼의 아가씨가 흠칫하고 한 발짝 물러섰
다. 퍼석, 라에느는 철근과  분리되어 산산히 부서진 콘크리트  가루를
털어내면서, 이리저리 휘어진 철근을 옆으로 밀쳐내고 그 더미에서 걸
어나왔다. 드러난 팔이 몇 군데 긁혀서 피가 조금 나오고 있었지만, 그
외에 상처는 없었다. 루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 역시 당신이 가장 위험한가요, 이 기습은... 조금 의외였어요. "

탁, 팔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동작을 마치는 것에 바로 뒤이어  라
에느의 다리가 지면을 차고 루에게 도약했다.  숨을 가다듬고 있던 루
가 미처 그 동작을 파악하기도 전에,  라에느의 무릎이 그녀의 복부를
파고 들어왔다.

- 그래도 토파의 형제들이야
- 루에의 새끼들이지.
- 죽일 필요는 없어
- 살려둘 이유도 없어.
- 스승님의 가르침을 잊지 마 라에느.

짧은 비명을 토해내면서  루가 반대편으로 굴렀다.  반대편의 벽까지  
굴러간 루는 배를 부여잡고 몇  번 쿨럭거리다가 그대로 풀썩  쓰러졌
다.

" ..주 죽였나? "

이제는- 완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변해버린 토파의 말이 등뒤에서 들
려왔다. 라에느는, 루의 복부에 박혔던  무릎을 펴고- 그 다리를 살짝
바닥에 내리고는 그 접촉점을 중심으로 빙글, 뒤로 돌았다. 공포에  질
린  토파-아몬과, 그 앞의 냉정하려고 애쓰고 잇는 연둣빛  옷의 아가
씨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모두 죽여버려.
-스승님의 가르침은 무의미한 살인이 아니야
-저들이 인간으로 보여 라에느 제이린?  저들은 그저 루에의 보석이

-토파와 같은 존재야!

꽈악, 라에느가 주먹을 쥐었다.  경직된 근육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녀의 안에서, 두 가지의 감정이 싸우고 있었다. 모두, 모두 죽여버리
고 싶다, 스승님을 죽게 한 이들, 토파와 나를 갈라놓은 이들, 모두 고
통스럽게-!
....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스승님이 살아나지는 않는다, 토파가,
루에의 아이가 아니게 되지는 않는다. 스승님은 이미 죽은 분,  그리고
토파는.. 솔브의 일원.  

" ..... 토파를, 돌려줘요. "

간신히, 라에느의 입이 열리고 흘러나온 말은, 그녀의 가장 솔직한 감
정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은 자신들이 얼마나  유용한 인질을
가지고 잇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아몬은 정신을 집중했다.

- 에므.
- 왜?
- 사피에게로 가,
- 뭐, 뭐야, 지금은 나 혼자밖에 이동할 수 없어
- 혼자 가, 저 여자는 나를 못 죽여.
- .....
- 내가 토파의 몸을 가진 이상, 나를 못 죽여, 가서 사피를 도와.

팟, 에므의 몸이 지운 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라에느는 아까
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계속  무
표정한 채로 토파의 육체를, 아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

" 사피! "

에므는 텔레포트의 후폭풍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고개를 들어 어두운
이 방 어딘가에 있을 자매를 불렀다. 그러나 그 다음순간, 그녀는 무언
가 강한 힘에 의해 방의 벽으로  던져지듯이 밀려났다. 둔탁한 통증이
등과 뒷머리로 번져왔고, 그 통증은 그녀를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도
록 만들었다.
어둠, 어둠으로 가득 찬 방이 눈에 익숙해져가면서  뿌연  형체로 존
재하던 것들이 선명하게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마치  잠
자는 모습처럼 눈을 감고 네트워크에  접속해있는  자매와, 그녀의 앞
에 있는 모니터가 내뿜는 새파란 빛, 그리고,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새파란 눈동자의 소년.
소년은, 천진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그러나 그 미소는, 어쩐지
에므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파란 눈, 이상스러울 정도로 새파란
눈, 소년의 등뒤로 모니터의 푸른빛이 기괴하게 비추어지고 있었다.    

  " 넌... "

에므는 등과 뒷머리의 통증을 억지로 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 누구지? "

또박. 또박. 또박. 소년은  차분한 걸음으로 에므의 앞까지  걸어왔다.
에므가 잠시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어느 사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소
년의 농구화가, 그대로 바닥을  밟듯이 에므의 허벅지를 밟았다.  등과
뒷머리에 번지던 둔탁한 통증을 압도하면서, 짓이겨  으깨는 듯한  아
픔이 새로이 에므의 신경을 자극했다.

  " 알면 어쩔 거죠 에메랄드  쥬얼? 나를 막아보기라도 할  생각인가
요? "

공손하고 예의를 갖춘 듯이 들리는 소년의 목소리, 자신을  내려다보
고 있는 차가운 새파란 눈동자, 에므는  간신히 비명을 참으며 소년의
새파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사..사피를.. 어떻게 한... "
  " 사파이어양은, 단순히 다이브(Dive) 중이시죠. "

방긋, 소년의 입가가 확실하게 밝은 미소를 띄웠다.

  " 물론, 애초에 당신들이 생각한대로  제이린을 공격한다던가  하는
행동은 못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대로 뇌를  태워
버릴 지도 모르거든요? "
  " 너... A.D.R.T.F인..... "
  " 예, 그래요 나는 ADRTF. "

거기까지 말한 소년은 허리를 굽히고 똑바로 에므의 초록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고통과,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흐려진 초록빛, 하얗고 가느
다란 소년의 손가락이 천천히 에므의 목에서 뺨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잠시 뺨에서 머물던 손은, 그대로 에므의 입을 막아버렸다.

  " 솔직히, 나는 당신들을 다 죽였으면 좋겠지만. "

밝은 웃음, 에므는 그 밝은 웃음이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공포스럽다
는 것을 느꼈다. 저 정중하고 예의바른 어투로 하는 말까지도,  비슷한
정도의 공포를 지니고 있었다.

  " 내 귀여운 파트너는,  사람이  죽는걸 싫어하기  때문에 당신들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죠, 당신들이 어떤 짓을 꾸미던 간에 "

꽈악, 입을 막은 소년의 손이 엄청난 힘으로 조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얼굴에는 천진하고 밝은 미소를 띄운 채로.

  " 이렇게 뒤에서 네트를 통해 급습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것 따위
는 상상도 못할 만큼, 정직한 아가씨인  덕에 나는 뒤처리하느라고 좀
바쁘긴 하지만, 그런 점이 좋아서 그녀의 파트너가 된 거니까요, 자 어
떤 계획을 꾸미고 있었죠? 전깃줄에서 낙뢰라도 떨어뜨릴  생각이었나
요, 아니면 인공위성에서 레이저라도 쏠 생각이었나요? "

소년이 말을 할 때마다 손은 믿어지지 않을 만한 악력으로  점점 더
조여 들어오고 있었다, 비명이 터져나올 정도의 고통이었지만 막상 그
것이 나가야 할 입은 단단히 막혀있었다.  게다가 소년이 웃는 얼굴로
가볍게, 그러나 예의바르게 내뱉는 말들은, 마치 그네들의 의논을 옆에
서 듣기라도 한 듯이 정확했다. 누구지 이 소년은,

  " 텔레파시라도 보내볼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거에요  에메랄
드 쥬얼 양. 당신이 텔레포트 해 온 순간부터  이 공간 바깥쪽에는 안
티 사이킥  필드가 쳐졌으니까, 아 그렇게 궁금한 눈으로  볼 건 없어
요, 내가 누구기에 이런 일을 알고 있고 이런  행동을 하는지 묻고 싶
은 거죠? "

소년은 다른 한 손을 가만히 에므의 이마에  올렸다. 웃음기를  담고
있는 새파란 소년의 눈과, 의문, 고통, 공포, 그리고 불안감으로 흐려진
에므의 초록색 눈이 마주쳤다.

  " 나는 콜, 콜링 레전드. 당신들의 분류에  따르면 이단의  에스퍼인
셈이죠, 그리고 전설을 불러오는 '소환자' 의 역할을 맡고 있고요. "

콜은 에므의 동공의 놀라움으로 커지는 것을 보고 생긋 웃었다. 그리
고 그녀의 이마에 얹은 손에 자신의  사이킥 파워를 집중시켰다. 집중
된 파워가 그녀의 뇌를 치고 되돌아 나오는 느낌과 동시에 큭 하고 틀
어 막혀진 목안에서 나는 단발마의 비명, 그리고 천천히 풀려 가는 에
므의 동공.

  " 이런걸 다 듣고 살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죠? "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띄운  채로, 콜은 에므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때었다. 지지대가 없어진 에므의 목이 툭 하고 옆으로 떨어졌다.

  " 자아 그럼, "

콜은 에므의 허벅지를 밟고 있던 발로 그녀의 시체를 툭 차서 옆으로
치운 다음, 뒤쪽의 데스크 앞에 앉은 사피를 향해 또박또박  걸어갔다.
그리고 익숙한 태도로 모니터를 자신의 앞으로 돌리고 키보드를  두드
렸다.

  " 내 파트너인 제이린이 뭘 하고 있는 지나 좀 볼까나... "

  마치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콜은 연신 싱글거렸다.

-----------------------------------------------------    


바람이 불었다. 에므가 텔레포트한 곳을 시작점으로, 한 줄기  바람이
불기 시작해서, 부서진  돌가루들을 가볍게 날렸다.   아몬은- 그녀가
사라진 빈 공간을 내려다보고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아직도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라에느의 부표정한 눈동자로  시선을
돌렸다.

  " 이제 어쩔 셈이지 무도가? 내 공격은 당신에게 영향을  주지 못해
- 그러니, 이제 나를 어떻게 하든지, 그건 당신 마음대로야. 하지만 나
를 죽이면 토파도 죽는다,  그러나 나를 죽이기 전에는  나는 이 애의
지배를 풀 생각은 없어 "

라에느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눈동자로, 묵묵히, 자신의
연인이었으나, 이제는 아닌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

억지로 감정을 억누른 듯한 낮은 목소리,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녀의
말투에 아몬은 약간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어차피, 어차피 그런 식으로 쉽게 지배해버리고 말 거면서,  왜 가
만 내버려두지 않는 거죠? "
  " 우리는, 솔브의 아이들, 그리고 너는,  우리에게 반대하는 ADRTF
이기 때문이야. "

아몬의 말에 무표정했던  라에느의 눈동자가 새파란  안광을 띄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아몬이 채 눈치채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그의  멱살
을 틀어쥐었다.

  "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야!!! "

마치 지금까지의 무감정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듯이  격한 목소리,  
옷자락을 틀어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천을 타고  아몬에게도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때서야 아몬은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
가 보여주었던 무표정의 의미를.
그녀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참고 있던 울음은, 무표정과
무감정이 깨어지듯이 그렇게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사랑하는데....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어째서... 하지 못하게 하는
거야.. "

콱, 멱살을 틀어쥐고 있던 라에느의 손에 그대로  아몬의- 아니 토파
의 목으로 옮겨갔다. 그리고-옷자락을 틀어잡듯이 그대로 양손으로 그
목을 움켜잡았다.

  " 큭-! "
  " 당신이 말했죠 다이아몬드 쥬얼,  당신을 죽여도 토파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계속 당신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어버
리는 게 나아.. "

뚝, 뚝 굵은 눈물방울이  계속해서 뺨을 타고 흘러내려  라에느의 옷
앞을 적셨다. 목이 졸린 토파의 입술이 푸르게 변해 파들거렸다.  조금
만 더 힘을 주면, 그러면 이대로 목뼈가 꺾어 질 텐데.
토파는 뿌옇게 흐려진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흐느낌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아주 익숙한, 그러면서도 생소한 소리. 자신의 의식을 가려두고
있던 무언가는 엄청난 고통과 함께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흐릿한 시야에 잡힌 것은, 라에느의 눈물 젖은 얼굴.

  " 라.. 라에느... "
  " .. 토파? "
  
  라에느의 놀란 눈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아 그래, 내가 너한테  화
를 냈어. 겨우 그런 일로 널 울게  만들다니, 미안해, 사과하고 싶은데
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걸까. 너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싶은데. 온 몸
이 무거워, 말을 듣지 않아. 네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데.

  " ..미..미안, 마...많이 서운..했지.. "

겨우겨우 들어올린 손이 축축이  젖은 볼을 쓸어 내리고,  그대로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망히 열린 동공이, 라에느의 얼굴이 아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 사랑해.. 사랑해 토파..... 사랑해 "

소년은 모니터를 껐다, 픽 하고 새파란 빛이 사라지면서 실내는 암흑
에 잠겼다.

  " 넌 너무 물러 제이린. "

약간은 탓하는 듯한 말을 남기고, 소년의 모습은 그곳에서 사라졌다.
스테인 글라스가 장식된 복도,  그 복도를 비추던 촛불이  하나 하나
꺼지고 있었다. 복도는 저  끝에서부터 천천히 어둠에 잠겨왔다.  여인
은, 흐릿한 촛불 빛에 비추어, 상자를 열었다. 산산이 부수어진, 원래는
보석이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아름다운 광물조각들이 상자 안에 들어있
었다. 붉은빛과, 푸른빛의 보석만이 건재할 뿐, 나머지의 세 보석은 굵
은 모래처럼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여인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건
재한 보석을 다른 상자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옆에  있던 초를 훅 불
어 껐다.
어둠이, 그곳을 채웠다.




part 2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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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여섯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5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다섯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4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3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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