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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혜정, 상처



2월 즈음에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혜정의 책에 대해서 그 출판사 쪽에 항의신청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저작권법 위반에 관한 건이었다. 번역물의 경우에 어느 정도로 두 글의 동일성을 인정할지가 관건이었지만, 그러나 1차적으로 일단 '별빛 이야기'의 출판사측에서 책을 회수하기로 했다고 한 것을 보니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을 듯 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출판사로부터 전해 들으며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그리고 효정은, 제일 원했던 대학에 불합격하고, 차선책으로 택한 대학을 들어가는 것 대신 재수를 택했다. 집안의 어수선함이 그 아이의 시험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지. 나는 그 아이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언니와 그런 싸움을 벌이고 있는 주체인 나, 그 설명을 얼마만큼 효정이 집중할 수 있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효정의 어머니는, 아마도 혜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게 계속 와 달라고 말했다. 나는 12월부터의 휴식을 끝내고 다시 효정의, 혜정의 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새해가 되면서 생긴 변화는 그 외에도 있었다. 완이 부산에 있는 한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젊은 교수의 소개로 들어갔다는 회사에서는 5년을 근무해야만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다고 했다. 완은 회사의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산업기능요원'들의 대우가 과히 좋지는 않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주말을 챙겨서 나오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완은 바빠졌지만, 그 시간은 항상 나와 보내려는 듯이 완은 나를 종종 불러냈다. 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그런 말을 완에게 쉽게 꺼낼 수는 없었다. 완이 차라리 내게 대답을 독촉했다거나 했다면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휴일에 같이 영화를 보고 돌아와도, 가끔 그가 권하는 특이한 식당에서 저녁을 같이 먹어도, 종일 같이 걸어도 완은 다시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 날의 꽤나 노골적이었던 표현을 생각해보더라도 완의 태도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조용하고 잔잔함 속에서, 조금씩 감정에 익숙해져 가면서도 완에게서 그런 의문을 풀 수 있었던 것은 엉뚱한 일에서였다. 2월말, 신학기의 수강신청도 등록금 납입도 끝나고 나라 전체를 떠들썩하게 하던 대학입시의 열병도 슬슬 가라앉을 즈음. 효정의 집으로 영어 수업을 하러 갔더니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그만해, 다 나가, 나가란 말야!”

안방 가까이에 있는 혜정의 방 쪽이었다. 새된 음성이 혜정의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만큼 날카롭다.

“아, 오셨어요.”

효정이 그 방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가, 발걸음을 죽이고 현관으로 다가왔다. 나는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효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으로 내려섰다. 그 때,

“이제 속이 시원해?!”

문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밖으로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도.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이니 당연히 한번은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오랜만이네.”

담담하게 나오는 내 음성이 섬뜩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높은 괴성과 함께 혜정의 손에서 뭔가가 내게로 날아왔다. 희고, 가벼운- 쿠션. 그리고 다음엔 아마도 혜정의 방에 있었을 꽃병과, 책과. 금새 거실은 난장판이 되었고 방에서 나와 혜정을 붙들던 어머님은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제발 좀 그만해 언니!”

혜정과 닮은 음성이 하나 더 소리를 질렀다. 고막이 핑 울린다. 나는 그 전쟁 한가운데에서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거실에 나뒹구는 잔해들을 보고 혜정의 얼굴을 본다. 창백한 시체같은 얼굴. 순간 역하게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 나는 그대로 뛰어 계단을 내달렸다. 이미 들었다. 효정은 몇 번인가 지나가는 말로 혜정이 아무 것도 먹지 못한다고 말을 했었다. 단지 듣고 싶지 않았던 건 나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파트 1층까지를 한달음으로 달려 내려와,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고객의 사정으로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딱딱한 기계음이 들리고, 삐이 긴 소리.

“…여기 혜정이 아파트 앞이야.”

울컥, 다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

“와 줘… , 보고 싶어.”

무슨 말을 했는지 전화를 끊고 나서야 깨닫고, 나는 아파트 앞 놀이터 그네에 엉거주춤 앉았다. 아이들의 키높이에 맞추어 놓은 그네는 한참 낮아서 무릎을 세울 수 없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 어울리지 않는 감정. 왜 지금 완을 부른 것일까. 오지 못할만큼 바쁜 사람인데. 얼굴이 달아올랐다. 커다란 나무가 서 있어서 혜정의 집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네에서 일어나 비를 뿌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회색을 머금은 하늘에서 흩내리는 빗줄기는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분수 같았다. 이 곳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뉴스에서는 봄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늦추위와 폭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들 있었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곳에는 이 도시를 닮은 습기와 염도를 머금은 비가 내렸다. 눈을 잃어버린 도시는 나를 닮았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도. 나는 이 도시의 모습을 닮아있다. 좀처럼 쉽게 융화되기 힘든 겉으로 날선 성격까지도.

“…하아.”

무릎을 세우며 일어나 걸었다. 완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심통을 부리고 싶었던 것이다. 내게도 화병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부르면 달려와 줄 사람이 있다고. 바보같은 꿈이다. 그에게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은 주제에. 빗속을 무작정 걸었다. 카키색 코트가 쑥색으로 젖어들었다. 2월에는 조금 두꺼운 듯한 코트는 흠뻑 젖어 안에 받쳐입은 후드티를 적시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항상 버스에서 보는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형광색 3단우산을 쓰고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코트를 세우고 머리를 가리며 어디론가로 달려가는 사람들. 내게 그들이 풍경의 일부이듯이 그들에게 나는 조금은 기이한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여전히 모든 것은 엷은 장막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마냥 비현실적이었다. 내가 번역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 내 이름이 신문지상에 올라 있는 것, 그 책이 표절시비에 시달리는 것, 그리고 그 아이가 나에게 노골적으로 증오를 드러내는 것 모두다. 비를 맞은 풍경들은 회색빛이 더욱 선명해지고 유채색들은 모두 뭉그러져서 현실은 옅어지고 희미해졌다. 감정을 하나씩 일깨워나가도 내 감정의 정체를 알게 되어도 나는 여전히 풍경일 뿐 세상을 헤쳐 나가는 주인공은 아니었다.

길거리 버스 정류장에 얼기설기 만들어진 지붕 아래에 섰다. 나무둥치가 얽힌 지붕은 그늘을 위한 것이라서 비는 그대로 바닥으로, 나무 의자로 떨어졌다. 나는 축축해진 나무의자를 닦지도 않고 앉았다. 현진이가 보고 싶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아이들의 엄마가 된 현진이가. …아니, 신이가 보고싶었다. 여신[女神]이, 만약 시현이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 아이는 현진이처럼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도 없는 그런 표정으로 부드럽게 ‘우리’들을 보고 있었을지도. 그 옆에서 시현은, 그의 아이와 아내를 사랑스럽게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그런데 당신은 왜 그 애를 보듬어주지 못했나. 왜 나를 좋아했나. 왜 지금은 혜정이 옆에 있는데. 당신을 그토록 원했던 신이는 먼지로 흩어졌고 신이의 아이는 빛도 보지 못하고 갔는데. 시선이 뿌옇다. 울고 있나 보다. 무엇이 슬픈 거지. 시현이 혜정의 곁에 있는 것, 신이가 죽어버린 것, 현진을 지금 볼 수 없는 것, 아니 그 모든 것과는 다른 무언가.

“…어디 있니.”

누구인지도 모르는 대상을 향해 중얼거렸다.

한참만에 슬슬 일어나려 몸을 일으켰다. 그 때, 시선 한쪽에서 익숙한 자동차가 길가에 주차하는 것이 보였다. …이건 착시일까.

“누나.”
“…완아.”

이건 소설 속의 장면이라면 지나친 우연이라는 지적을 받을만한 일이다. 우산도 없이 차에서 내린 완은 내게 걸어와선 그 뒤론 아무 말도 없었다. 위태로운 표정이 평소의 완이 아니었다. 지금은 몇 시나 되었을까. 풍경은 어둡지만 날씨 때문에 시간을 알 수가 없다.

“비 많이 오는데, 젖어.”
“이 바보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 끝이 떨렸다. 울고 있었다. 빗물인줄 알았던, 젖어있는 눈가에서 주루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우니, 왜 우는 거니. 니가 울면, 나는, 나는 어딜 봐야 하는 거지.

“한참 찾았잖아…. 왜 이런 데서 울고 있는 거야.”

아직 울고 있었던가. 눈이 아리는 걸 보니 눈이 좀 부어 있나보다. 완의 눈을 적시는 게 빗물이 아니듯이 내 눈에 흐르는 이것도 빗물은 아니었나보다.

“…회사는….”
“그런 거 신경쓰지마!”

오늘의 완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다. 가슴이 아프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이렇게 완을 눈앞에서 보고 서 있는 것이 힘겨울만큼. 두려워했던 건 이런 거였지. 되살아나는 것이 두려웠던 건 그래서였지. 너에게 대답하는 게 어려웠던 것도 바로 그래서였지.

나를 보며 환하게 웃던 아빠. 모두 나를 꺼릴 때 내게 손을 내밀었던 신이. 나와 같은 대학을 가고, 내가 자신을 보고 웃어주길 바랬던 혜정이. 그들이 일순간에 망가져버렸던 건 누구 때문이지?

“혜정이 집에 갔었어! 효정이는 깜짝 놀라서 변명하느라 정신이 없고, 혜정이는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누나가 왜 그런 소리를 듣고….”

…하지만, 나는 이기적이게도 그런 너를 놓고 싶지 않아서….

완을 끌어안았다. 나보다 20cm가 큰 완. 젖은 내 옷이 완의 옷까지 더 젖게 만들어버린다. 기억하고 있어. 네가 나를 달래주었던 방법.

“…괜찮아. 니가 왔으니까, 괜찮아.”

완의 가슴에서 심장소리가 들린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다. 이젠 놓을 수 없다. 이미 알아버려서, 이 소리와 이 느낌과 이 온기를 알아버려서. 다시는 놓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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