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같이 앉아도 되지?"

시현의 말에 얼굴을 찌푸린 것은 내가 아니라 혜정이었다. 함께 있어서 어색한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그걸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혜정이다. 나는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완이 불쑥 일어나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 옆으로 오려던 시현은 머쓱하게 섰고, 혜정이 안쪽으로 들어와 앉았다. 내 앞은 시현, 그 옆은 혜정, 그 앞은 완. 어쩌자고 이런 자리로 만들어 버렸을까.

"굉장한 우연이네요. 1720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인데."

혜정은 전보다 훨씬 발랄해 보였다. 누가 이 아이가, 불과 몇 달 전에 죽을 각오로 약을 먹었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나도. 너랑은 처음이구나."

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내가 대신 대답했다.

"바깥에 비가 많이 오죠?"

친숙한 얼굴로 주인이 다시 우리 자리로 왔다. 시현은 아아 지금은 좀 멎었습니다, 한다. 혜정은 등을 돌려 문 쪽에 놓인 우산꽂이를 쳐다보았다. 새하얀, 작은 고양이가 그려진 우산. 나는 저 우산을 쓰고 있었던 아이를 알고 있다. 물론 지금 저 우산은 그것이 아니다. 내가 처음으로 선물한 그 우산은 벌써 4년 전의 것이고, 지금은 아무리 기름칠을 하고 세제로 빨아내어도 낡은 기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손때 묻은 물건이다. 주인을 잃은 그 우산은 버려졌을까, 아니면 같이 태워졌을까. 시현은 내 앞에 놓인 잔을 보고는 라벤더를 주문했다. 그리고 혜정도 라벤더를 주문했다. 12월이다. 그래서다. 옆 사람의 체온이 반가워 지는 것은, 겨울이기 때문이다.

“웬 거야?"

시현이 디스켓을 보았다. 왜 완은 아직 저걸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두었을까.

"소설… 완이가 줬던 거 돌려주는 거야."

혜정이 네 소설이야- 라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혜정은 냉큼 디스켓을 들어서 레이블을 보았다. 'H. J. with Goddess.' 순간 혜정의 얼굴이 굳었다. 분명히. 완은 빼앗듯이 디스켓을 가방 안으로 챙겼다.

"…내 거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시현 뿐이었다. 시현은 혜정을, 나를, 완을 쳐다보았다. 팽팽한 긴장.

"네 거라고?"

사람들과 맞서는 건 기분이 좋지 않다. 목덜미가 지끈 아파 온다.

"왜 네가 올리는 거야? 신이 누나 거, 네 것처럼."

완이 거들었다.

"…무슨 소리예요?"

눈을 동그랗게 떴던 혜정은 애써 표정을 수습했다. 하지만, 혜정이는 그렇게 쉽게 마음을 숨길 수 있는 애가 아니다. 시현이 놀란 눈으로 완을 쳐다보았다. 순간에 어째서, 혜정이 찻잔을 잡은 손의 반지가 눈에 띄는지. 그 순간에 어째서, 테이블 위로 언뜻 올라오는 시현의 손에 똑같은 반지가 눈에 띄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 순간에 나는, 아득할 만큼 화가 치밀었는지.

"그럼 그게, '바람이 있는 풍경'이 아니란 말이야? 여신이가 4년동안 계속해서 고치고 고치고 다듬어온 글이 아니라고? 난 그걸 4년 전부터 봤어."

입이 먼저 말하고 머리로 기억이 떠올랐다. '바람이 있는 풍경'… 대학 노트 앞에 작게, 볼펜으로 적어 놓았던 제목이다. 신이는 풍경화를 좋아했다. 고호의 풍경화 앞에서는 숫제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을 만큼. 함께 서점에 가면 화집을 펼쳐놓고 멍하니 있곤 해서, 늘 되돌아와 그 아이를 불러 세워야 했다. 그래서 그 제목에 나는 조금 웃었다, 그래- 그랬다.

"정말 기가 막히네요. 왜요, 증거라도 대 보시지 그래요."

혜정은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꼭 다문 입술에 조금은 꼬리가 올라간 눈매가 서늘하다.

"왜요, 글동에 올리시지 그래요? 표절이라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그렇게 말하면 죄책감이 없어지나 보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내가 신이 언니 글을 가져갔다고 말하면, 선생님이 언니를 죽게 한 게 아니게 되나요?"

"이 녀석!"

탕- 내가 화내는 것보다 완이 일어나는 것이 빨랐다. 테이블 위의 포트들이 흔들린다. 주인이 우리 쪽을 조심스럽게 살펴본다. 다행히 손님은 단골 하나와 우리들뿐이지만.

"앉아, 이 완."

시현이 침착하게 말했다. 시현은 떨고 있다. 테이블 위에서 잔을 쥐고 있는 손끝이 불안하게 떨렸다. 완은 듣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 너야! 네가, 네가 누나를 어떻게 안다고!"

"오빠가 아는 만큼은 알아요! 그런 오빠는 뭘 아는데요? 언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언니가 마지막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언니가 선생님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아냐고요!"

"우리만 있는 곳 아니다."

이런 순간에도, 내 머리가 차가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주인은 우리 쪽으로 오려 하다가 고개를 돌려 단골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혼자 온 손님 쪽에서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시선조차 주지 않고 여전히 엷게 웃고 있는 것이 오히려 신경이 쓰인다.

"언제나 침착하시군요. 그게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모르죠?"

혜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아무도 없는 것처럼 혜정은 그대로 입구로 나가 버린다. 급히 시현이 따라 일어나 우산꽂이에서 작은 고양이가 그려진 혜정의 우산과 자신의 푸른 색 우산을 함께 집어들고 나간다. 문이 삐걱대는 소리,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소리. 테이블 위에는 만원짜리 두 장이 놓여 있다. 언제나 침착한 것은 나보다는 시현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찻값까지 계산하고 나가다니.

"신경 쓰지마."

원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완 자신일텐데.

"…차 더 마실래?"

나는 완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으며 주인을 불렀다. 완은 떨고 있다, 아까의 시현처럼.

"죄송합니다, 시끄러웠죠?"

오렌지 피코를 주문하고 나는 조금 얼굴을 숙였다. 몇 번 왔을 뿐인 나를 단골처럼 대하는 주인에게, 손님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아뇨, 저는- 아, 저 분도 괜찮습니다."

싱긋 웃은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덧붙였다.

"귀가 안 들리세요. 입술을 읽으셔서 대화를 하시죠."

손님과 등을 돌리고 있는 자세였다. 그렇게 자연스럽다니. 종종 잊어버린다, 나도, 사람들도.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표준에서 벗어나 있는지. 나 역시도 그러면서 말이다.

"하지만- 다음번엔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네요."

홍차와 새 잔 둘을 갖다놓으면서 주인이 다시 덧붙였다. 비가 오는 평일이 아니라면, 이 곳은 그래도 조금 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죠, 죄송합니다."

오렌지 페코의 붉은 빛이 다 번졌다. 새 잔 하나에 홍차를 따라 완에게 내밀었다. 완은 찻잔을 사약 사발이라도 되는 양 쳐다본다. 이것은 묵언(黙言)의 금기(禁忌), 위타드의 오렌지 페코를 좋아하는 것은 여신이기 때문에.

"여기, 괜히 왔나보다."
'꿈'보다 낫잖아, 누나한텐."

완은 허투로 넘기듯이 일을 기억한다. 무심한 듯 세심하게.
댓글 2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94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2. 혜정, 상처 (2)1 먼여행 2004.10.26 0
93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2. 혜정, 상처 (1) 먼여행 2004.10.26 0
92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1. 시간을 거슬러 가다 (3)1 먼여행 2004.10.24 0
91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1. 시간을 거슬러 가다 (2) 먼여행 2004.10.24 0
90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1. 시간을 거슬러 가다 (1) 먼여행 2004.10.24 0
89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20. 짧은 행복 먼여행 2004.10.23 0
88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9. 이진희, 장현진 (3) 먼여행 2004.10.23 0
87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9. 이진희, 장현진 (2) 먼여행 2004.10.22 0
86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9. 이진희, 정현진 (1) 먼여행 2004.10.22 0
85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8. 1999년 봄의 길목 먼여행 2004.10.22 0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7. 별빛 이야기 (3)2 먼여행 2004.10.21 0
83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7. 별빛 이야기 (2) 먼여행 2004.10.21 0
82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7. 별빛 이야기 (1) 먼여행 2004.10.21 0
81 중편 [로드링커] 1-1. 길은 길을 연해 D요한 2004.10.20 0
80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6. 자각自覺 (3) 먼여행 2004.10.20 0
79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6. 자각自覺 (2) 먼여행 2004.10.20 0
78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6. 자각自覺 (1) 먼여행 2004.10.20 0
77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5. 적의敵意1 먼여행 2004.10.15 0
76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4. 경주, 어머니 (2) 먼여행 2004.10.15 0
75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4. 경주, 어머니 (1) 먼여행 2004.10.1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