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7.별빛 이야기



여태 나는 모르겠다, 그때 들었던 울음소리는 어디서 난 거였던지. 자기 버리고 간 어미를 다시 보고서 어째 니는 그래 환하게 웃었는지. 그 말을 하는 외할머니가 처음 우셨다, 내 앞에서. 어머니는 그렇게 어머니의 어머니 이야기를 했었다. 갓난 딸을 낯선 집 대문 앞에 버리고 돌아서선 죄책감으로 평생 시달려 왔던 외할머니가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했던 고백이다. 그 말로 외할머니는 조금 편한 마음이 되어 가셨을까. 당신 딸에게 진 그 부채감으로, 내리사랑을 내게까지 내리셨던 외할머니는, 지금 웃고 계실까.

…하지만,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 편이 좋았다. 당신이 나와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면, 맞은편에서 오는 차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고, 아니 내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그 날 그 시간에 차를 타고 있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렇게 나 자신을 원망해야 하는 기억이라면. 언제나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절대적인 믿음으로 나를 바라보던, 내 최대의 후견인이던 당신을, 내 잘못으로 잃고 말았다는 사실은 확인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 여신의 죽음 앞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더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직도 모자라? 한사람을 죽여 놓고도 또 다른 사람을 죽게 하고 싶어?
살인자.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해.
증거 인멸.
역겨워 죽겠어. 피해자인척 하는 꼴이라니.

혜정이의 말은 지극히 혜정이 다운 표현이었다. 증거 인멸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혜정의 편지를 내가 들고 있었던 것, 그 것에 대해서 잊고 있었던 것, 충분히 오해할 만하다. 내 기분에 대해서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원망해서는 안된다. 그 아이에게 내가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거나 해서도 안된다. 혜정의 상실감이란 내 것보다 절대 작지 않을테니까.

디스켓 드라이브를 끼우고, 노트북을 켠다. 윈도우즈 로고가 뜨고 바탕화면이 뜨는 사이에 디스켓을 넣었다. 캡쳐한 파일은 그대로 정리도 하지 않아서, 그냥 노트패드로 파일을 열었다. 파일을 읽어들이는 시간이 꽤 길다.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연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벌써 단행본 한 권 분량이 되는 글 전체가 다 올라갔다는 것부터가, 이 글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을 뜻했다. 혜정이는 절대 속필파일리 없다. 시험을 칠 때도 몇번이나 확인에 확인을 하는 신중한 아이였다.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절대 남들에게 자신의 것을 보여주지도 않는, 그런 아이인 거다.

별빛 이야기.

여신이의 글은, 무슨 제목이었더라. 제목이 있었는지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대학노트 첫장부터 빼곡히 내용이 채워져갔던 그 내용만을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목 이외에 다른 것은 완전히 여신이의 것이었다. 한글97의 가지체를 닮은 여신이의 글씨가 아니라, 컴퓨터의 파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것은 아주 평범한 사랑 이야기였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아주 평범한 청소년 이야기였을 수도 있었다. 난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누구의 이야기인지도. 바로 내가, 그 글의 첫 독자였으니까. 몇 년 전 오월 어느날에 여신이는 내게 그렇게 그 글을 보여 주었으니까.

혜정이 그 이야기를 '별빛 이야기'라고 지은 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아주 훌륭한 제목이었다. 그 이야기는 다름아닌 여신이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서 시작되는 그 이야기 2화에서 곧바로 내가 나왔다. 몇 년동안 여신이는 이 글을 다듬었던 모양이다. 처음 기억과 같은 것은 줄거리 정도이고, 바뀐 부분이 꽤나 눈에 띄는 걸 보면.

[ 어머니는 몇번이나 내게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팔개월간의 입원. 죽을 줄 알았던 아이가 살아났다는 안도감보다도 앞으로 아이가 살아갈 일이 더 걱정인 듯. 새 담임은 웃으면서 어머니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어머니는 나만 보았다. 이 아이, 친구 사귀는 데에 참 서투르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어머니의 도회적인 말투가 사람들을 얼마나 주눅들게 하는지 어머니 당신은 알지 못한다. 나는 어서 어머니가 돌아가기를 기다리다가, 일과 시작종이 울리자 담임보다 조금 먼저 일어났다.

/ 오늘부터 같이 공부하게 된 한 별이다. 휴학을 해서 너희보단 한 살이 많다. 친하게 지내도록. /

그렇지만 자리에 앉아있는 아이들은 나보다 한 뼘은 커 보였다. 내 얼굴이 달아올라 있지는 않을까.

/ 저기 맨 뒷자리, 혜정이 옆에 앉아라. /

담임이 가리킨 자리에 숙인 목덜미가 유난히 하얀 아이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하얗다. 새 짝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곤 다시 고개를 숙였다. 불안해. 옆자리에 다가가는데 선뜻한 향이 난다. 옅지만 분명한, 'l'eur du temp' …1년의 시간 뒤에 있는 아이. ]

레르 뒤 땅을 썼다는 건 틀렸다. 내가 썼던 건 토미 걸이다. 기억한다. 아버지가 내 열 네 살 되던 생일에 선물했던 작은 샘플향수의 이름. 그 뒤로 나는 아버지에 대한 많은 기억을 잊고 있으면서도 줄곧 토미걸을 써 왔다. 어머니가 내 작은 화장대 위의 향수병이 바닥을 보일 때쯤이면 꼭 똑같은 것을 옆에 세워놓았던 때가 지난 후에도. 그러므로 그 때, 비어있던 내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던 여신이가 맡았을 향은 분명 토미 걸이어야 한다. 하지만 여신이 그랬다. 나에겐 어쩐지 l'eur du temp이 어울릴 거 같았다고. 물론 나는 그 향을 맡아본 적도 없다. 향수에 관심이 많은 건 여신이 쪽이었으니까.

바보같게도, 혜정이는, 이 자리에 자신을 앉혀 놓았다. 원래는 어땠을까. 내가 처음 받아본 이 이야기에 '나'는 등장하지 않는다. 8개월간의 입원 후에 돌아온 주인공이 만나는 건 '내'가 아니라 불분명한 다수들의 따돌림이다. 하지만 어째서 신이는 이 이야기를 혜정의 손에 들어가게 한 것일까. 혜정은 모른다. 신이와 나와의 그 고등학교 시절, 도서관에서 보이던 진청색의 바다, 그 바다를 붉게 물들이던 저녁빛- 그런 것들을 모르는 혜정이 어떻게 이 글을 쓰게 한 것인지.

[ 혜정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첫만남의 일그러짐 때문이었다. 문득 그 애를 보고 있으면,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하지만 그만큼, 그 애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애가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

/ 간질은 유전입니다. /

선언처럼 말하던 닥터는 내가 잠들어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흐느꼈던 것 같다. 그 사실을 내게 말하기 위해 어머니는 한참을 괴로워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 친구가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무런 상관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햇빛 아래서 쓰러지면 차라리 정신을 잃기를 바랬었다. 그러면 수근대는 소리들, 그 위선적인 말들을 듣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 됐어. /
/ …나경아. /
/ 죽지 않으면 되잖아. 조심할게. /

차갑게 말했어도 그 때의 나는 웃을 수 있었다. 밤에 혼자 울고 있으면 내 방에 들어와 머리를 쓸어주던 아빠가 있어서.

…사람을 싫어했던 것이 아니야.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누군가를 좋아했다가 그 사람이 놀라 도망가는 게 무서웠을 뿐.

누구나 그랬다.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들 앞에서만큼은 쓰러지지 않기를 바랬다. 그들이 흉한 내 모습을 보고 나를 싫어하게 되지 않기를, 아니- 쓰러진 내 머리 위에서 숨죽여 경멸의 말을 던지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것만큼은, 듣고 싶지 않아서.

신이와의 첫만남, 내게 내밀었던 테이프 때문에 나는 소리를 질렀었다.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왜 하필 그 때 다시 발작이 일어났던 것인지, 왜 그 애와의 첫만남이 그렇게 일그러져 버린 것인지. 신이가 소설에 그 장면을 쓰지 않은 것은 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까. 사실은 그랬던 거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았던 건 나야. 쓰러진 나 앞에서 경멸하지 않은 건 너 뿐이어서, 그것도 나를 잘 알지도 못했던 네가. 싸움을 말리던 친구들조차 놀라서 물러서선, 또야- 또. 아아. 저거 정말 싫다. 라고 해대던 그 순간에 너만이, 걱정스런 말만 계속 하고 있어서.



다음날 일찍, 밤새워 그 글을 읽고 나는 완을 불러냈다. 카페 1720에서 라벤더티를 시켜놓고 나는 완을 기다렸다. 허브티를 좋아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허브티의 향이 반갑다. 오늘은 마리아 칼라스였다. 학교 앞에서 계속해서 클래식을 들을 수 있는 곳은 아쉽게도 여기가 고작이다.

"많이 기다렸어?"

완은 금새 나를 찾아내고, 구석 커텐이 쳐진 자리로 곧장 걸어왔다.

"금방 왔어."

스윽, 디스켓을 꺼내서 테이블 위로 밀어냈다. 몇시간 사이에 그 분량을 다 읽었다는 것에도 완은 그닥 놀라지 않았다. 완의 집에서 몇 권의 역사책을 빌려다 다음날 도로 돌려준 전력 덕분이었다.

"어때?"
"…맞아."

완은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

나는 조금 머뭇거린다. 얼마나? 신이의 마지막 완성본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얼마나 같은지 알 수 있을까. 하지만…,

"아마 이름만 바꾸었을 거야."

내 조심스러운 확신을, 완은 부인하지 않았다. -일 거야 라는 말이 얼마나 불확실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지 않을텐데도. 때를 맞춘 듯이 '울게 하소서'가 나왔다. 마리아 칼라스의 음성은, 때로 사람을 섬뜩하게 한다. 너무나 감정을 자극해 버리기 때문에. 설사 내가 감정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왜…."

긴 한숨이 완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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