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나는 보도블럭 위에 주저앉아있다. 숨을 몰아쉬며 완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팔이 욱신, 아파왔다.

"어디 안 다쳤어?! 그렇게 뛰어들면 어떻게 해!"

어머니가 내 옆으로 뛰어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파트 진입로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4차선 보도, 왜 여기에 내가 있는 건지,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한참이 걸린다. 어느새 이리로 내달았을까. 언제 아파트 계단을 모두 지나서 이리로 달려왔을까. 절대 지나가지 않는, 빙 둘러서라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도로로. 속도를 내어 지나치는 차들을 보니 새삼스럽게 아찔해진다. …여기 이 거리에서 아빠와 그렇게 이야기를 했었다. 맞은편에서 벤츠가 왔었다. 차가 드문 한낮 시간이라 조금도 의심 없이 있었는데, 벤츠는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 우리 쪽으로 차선을 넘어버렸다.

"나경아!"

아빠는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게, 내가 들은 아빠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아무도 아빠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내가 왜 병원에 있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아니면- 내가 기억나지 않는 것들만 물었다. 그 때는, 그랬다. 갑작스럽게 기억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것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리고 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너… 어쩐 일이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완은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여태 쥐고 있던 내 팔을 놓았다. 화났구나.

"무작정 찻길로 뛰어드는데, 그럼 가만히 보고 있어?!"

우연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마치 TV 드라마처럼 기묘하게도 완과는 이런 식으로 몇 번의 만남이 있었다. 그 반 정도는 우연을 가장한 연기였지만. 완이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서 나를 일으켰다. 완이 잡았던 팔이 조금 아팠을 뿐, 다른 곳은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뛰어든 나 때문에 놀란 택시 운전사는 몇 번이나 괜찮냐고 물었다. 좋은 사람이다. 열의 아홉은 이런 경우에 욕설부터 할텐데, 놀란 완이나 어머니의 얼굴이 안되어 보인 것일까. 운전사는 명함까지 건네주고는 갈 길로 갔다. 그 사람에게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 왜 이러니-."

어머니는 힘없이 되뇌며 벽에 기댔다. 하얗다 못해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 혈색을 찾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 완은 나를 부축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마치 죄인처럼 그 뒤를 따라온다. 언젠가 꼭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 당신이 저렇게 한숨쉬며 이야기하고 정작 나는 태연한 이런 때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혼자 걸을 수 있어."

완을 가볍게 뿌리치며 나는 앞장서 걸었다.




어머니는 한숨만 내쉬다가 안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이 닫기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가는구나- 생각하는데 가슴히 뻥 뚤린 것 같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소매를 걷었다. 완이 잡은 팔은 어딜 잡은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멍이 들어 있었다. 사내아이들의 손힘이란 이렇게 센 거였구나.

문소리가 다시 나더니, 완이 불쑥 내 방문을 열고는 비닐봉지를 앞세워 들어왔다. 연고제를 멍든 자리에 바르고 완은 아픈 곳 없어, 물었다. 고개를 젓자 비닐봉지에서 이런저런 파스들을 꺼내놓았다. 그래도 모르니까 내일이라도 아파지면 꼭 붙여, 하는 말이 꼭 동생을 챙기는 오빠같다.

"혹시 바다넷 요즘도 들어가?"

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흐흠. 진지한 말을 하기 전에 언제나 그렇듯이 완이 몇번 헛기침을 한다. 완을 올려다본다. 굳은 얼굴이다.

"신경 쓰지마, 혜정이 말."

내가 신경 쓰이는 건 네 말이야. 혜정이나 시현이 아니라.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 녀석은."
"…글쎄."

선생님은,
오빠 이야기 할 때만 웃어요.

바람이 부는 듯이 차가웠던 병실에서, 그 애는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나를 보고 있었던 그 애는, 내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걸 견딜 수 없었다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거겠지. 내가, 자신의 여신女神을 죽게 했다고 생각하면. 처음부터 그 애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그 애의 일로 가슴아프거나 서운하거나 하지 않다. 어쩌면 나는… 기분이라는 게 어떤 건지 다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니까. 아빠의 부분을 잊어버린 그 때부터.

"글쎄가 아니야."

완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그녀석이 왜 그러는 건지도. 한 곳에 빠지면 다른 건 아무 것도 안 보는 녀석이긴 했지만."

혼자 계속 말하는 것이 어색한지, 말의 내용이 어색한지, 완은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사람들을 이어주는 고리가 깨졌고, 더 이상 '우리'일 수는 없는 거니까. 그 고리를 깬 사람에게 원망이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내 입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놓고, 이러는 게 우습지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

조금 느릿하게, 완이 말했다.

"…누나 손목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어. 누나는 편한 사람 만나서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완의 시선 끝 내 왼손목에는 절대 빼지 않는 굵은 가죽의 손목시계가 있었다. …완이 대학생이 되었던 봄, 저녁을 사달라는 완의 말에 갔던 음식점에서 종업원은 실수로 내 옷에 찌개를 쏟았다. 그 때 처음으로 시계를 끌렀다.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아주- 순간의 일이었으니까. 물수건으로 붉은 국물을 닦아내는 것도 나는 태연하고, 조심스러웠으니까.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이 덤덤하면서,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너.

/ 나경아! 너 왜이래! 왜이러니! /

내게서 칼을 빼앗으며 어머니는 울었다. 무표정한 내 앞에서 어머니는, 계속해서 울었다.

/ 왜이러니… 니 탓이 아냐. 그건 사고야… 사고야, 나경아. /

아주 잠시- 사고를 기억해 낸 것만으로, 내 신경은 온통 뒤엉켜 버렸었다. 그날 밤이었을 거다. 주방의 식칼을 들고 내방으로 들어왔던 건. 어머니가 왜 그 밤중에 잠에서 깨셨는지. 왜 어머니 당신은 곧장 내방으로 달려 들어와,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칼을 뺏아들었는지.

곧바로 날 업고 당신은 병원으로 달렸다. 커다란 딸을 업고 응급실로 가니,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저 약한 사람이 이런 거리를 업고 왔냐고. 몇바늘을 깁고 붕대를 감고 나서, 다행히 신경은 다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서 어머니는 안도한 듯 의자로 무너져 내렸다. 떨리는 손으로 내 머리를 쓸어주던 어머니의 젖은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 나경아, 이러면 안돼. 아빠가 얼마나 슬퍼하시겠어…. /

더 떨고 있었으면서. 당신이 더 울고 있었으면서.

/ 나경아… 엄마 여기 있어. 안 보이는거니? /

어머니는 내 얼굴을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그 속에 나는 잠들어 버렸다. 나는 나보다 더 상처입은 당신을 위로하는 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쉽게 결정내린 거 아닐테니까, 누나는. 그렇게 결정했으면 그만큼 많이 생각했을 테니까. 혜정이 말 때문에 결정 후회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완은 어색하게 말을 맺었다. 이제 알겠다, 내가 완 앞에서만은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조금 더 일찍 그랬어야 했어."

그리고 완 앞에서만은, 이렇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까닭도.

"그랬으면… 여신이는 죽지 않았을 거야."
"…누나!"

그건, 이 녀석이, 유일하게 내 앞에서 솔직한 그 감정을 보여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금의 가식도 없이. 아프면 아픈 대로, 화나면 화나는 대로, 나에게 서운하면 서운한 대로. 지금 이렇게 내게, 소리치는 것처럼.

"설마 누나도 여신이가 누나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이런 거야?"

질문은 공격적 성향을 반영한다. 완은 지금 화내고 있다. 나에게.

"누나는 우리 중에서 여신이 제일 잘 알잖아. 그런데 왜 누나 때문이야?"

알기 때문에. 그 아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적어도 그것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애가 받았을 상처를 나는 알 수 있다. 하지만 완에게 말해도 좋을까― 신이와 시현의 일을.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 누나는? 왜 그렇게 혼자만 끙끙거리는 거야? 나는 어쩌라고? 모두다 왜들 이러는 거야?!"

모두다?

"혜정이는 앞 뒤 설명 없이 누나 때문에 여신이가 죽었다고 하고, 누나도 앞 뒤 없이 그러고, 시현형은 혼자 로맨티스트인 척 하고 있고- 나만 모르는 거야? 도대체 다들 뭘 알고, 뭘 생각하는 건데?"

"…완아."

"그래, 아무래도 좋아! 아무래도 좋다구! 하지만, 하지만- 내 마음은 어떻게 되는 건데?"

완은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었다. 나에게 화나 있지만, 모두에게 화나 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단지 '우리'였던 사람들이 자신 외에 모두가 무언가에 빠져 있다고 해서?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우리만이 알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너 역시도 나만 제외한 그 공간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있었으면서, 그렇게 나를 제쳐 놓았으면서? 모두다 진실은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조차 알 수 없는 걸.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이럴 때는, 따스하게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래 하고 나를 도닥이던 아빠처럼. 완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한참 머뭇거린다.

"좋아해."
"알고 있어. 니가 여신이를 좋아한다는 건."

완은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는 나를 보았다.

"…누날 좋아한단 말이야. 나경 누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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