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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남겨진 사람들

2018.06.30 15:3206.30

화창한 숲에는 시원한 5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잘 다져진 흙 길사이로 자전거 한 대가 달리고 있다. 성준의 출근길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금은 금요일 아침의 출근길. 오늘 만 지나면 내일은 즐거운 주말이 시작된다. 성준은 기쁜 마음이었다. 단정히 자른 검은머리에 어울리는 성준의 네모난 뿔테안경이 햇살에 반사되어 빛이나고 있었다. 그가 멘 낡지만 아직 튼튼한 가죽배낭은 자전거를 따라 조금씩 덜렁거렸다. 주변에는 새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향긋한 숲의 바람이 성준의 코를 가득메우고 습관처럼 그는 그녀를 생각했다.

 

수아는 검은 색 긴 생머리에 자그마한 흰 얼굴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작은 얼굴안에 오밀조밀하지만 이목구비가 균형을 잡고있어서 전체적으로 보면 남들과는 달리 의외로 쉽게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생각해보면 수아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항상 이뻤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를 볼 수 없는 지금 성준의 마음속 그녀는 점점 더 아름다워졌다. 같이 자라난 어릴적에서부터 수아가 잘 사는 집 딸인 것은 어렴풋이 알고있었지만, 저 멀리 중앙 정부에 연줄이 있는 고위관리의 자녀인것까지, 어린 성준은 알 수 없었다. 그 연줄 덕택에 성준이 그가 나고 자란 연방 정부에, 성준이 공무원으로 취직한지 얼마 뒤, 그리고 둘의 연애가 시작된지 5개월만에, 그녀는 바깥 세상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열차를 타고 중앙 정부로 떠나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다시 중앙정부의 고위직으로 발령된 것이다. 그녀가 떠난 지는 햇 수로는 벌써 2년이고 편지는 한 1년 전쯤부터 오지 않았다. 한창 서로 좋아할 때 떠나서 그런지 성준은 수아가 많이 그리웠다. 그리고 그리움은 습관이 되었다. 마치 지갑 속 소중한 이의 사진을 자주 꺼내 보는 것처럼.

 

덜컹.

 

자전거가 돌부리를 넘었는지 자전거가 크게 출렁거렸고 성준의 사색은 끝이 났다. 성준은 숲 길을 지나서 이제 울타리 옆 길로 접어들었다. 성준의 왼쪽 편에 위치한 울타리는 2미터 정도의 높이에, 담쟁이 넝쿨이 녹슨 철제 울타리를 빽빽이 메우고 있다. 그 너머에는 방사능 위험을 나타내는 표지판 몇 개를 뒤로한 채 황무지가 지평선 너머로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 세계적인 방사능 유출사고가 일어난지 벌써 30년이 넘게 흘렀지만, 참혹하게 죽어버린 땅이 다시 살아나기에는 아직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보다 더 늦게 태어난 성준의 눈에는 이 풍경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황토색 흙과 바위 뿐인 황무지를 유일하게 가로지르는 시멘트로 지은 거대한 고가 다리만이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쭉 이어져 울타리위를 가뿐히 넘어서, 안쪽으로 들어와 성준이 사는 연방 정부 위 를 지나고 있었다. 갑작스런 환경변화로 지구촌 전체의 생태계가 흔들리자 세계는 부랴부랴 화석연료의 사용금지 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나마 가장 효율이 높은 원자력 발전만은 20년의 기한을 두고 점차 축소하기로 합의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한이 얼마남지 않은 시점에, 전 지구적으로 연쇄적인 원자력 발전소 누출사고가 터졌고 세상은 뿔뿔이 쪼개져 방사능 낙진구역을 제외한 지역에 조그만 연방 정부들과 커다란 중앙 정부가 세워진 것이다. 이제 작은 정부들을 이어주는 건 오염된 땅 위에 우뚝 선 고가 다리를 달리는, 전기를 연료로 움직이는 열차뿐이었다. 커다란 재앙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이 전과는 달라졌다. 많은 노동력과 자본과 기술력은 사라졌다. 세상은 이제 이와같은 열차를 다시 만들기엔 그럴만한 자원과 기술이 부족했다. 이것이 성준이 학교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은 지금까지의 역사였다.

성준은 이제 출근길을 끝나고 벽돌로 된 3층건물로 지어진 연방 정부청사에 들어섰다. 자전거를 메는 곳에는 벌써 몇몇 자전거가 도착해 있었다. 화석연료 사용이 금지된 지금,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출 퇴근에 자전거를 이용하였고, 그렇지 않은 공무원은 걸어다는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출근도장을 찍고 성준은 오늘 해야할 자신의 업무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성준은 생활지도과에 소속되어 있다. 하지만 말이 생활지도과이지, 아이들 교육문제부터, 농산물 배급문제까지, 거의 모든 행정업무를 다 처리하고 있어서, 바쁜 날도 많았다. 중앙정부로부터 온 회신을 읽고 이 달의 캠페인 목록을 본다. 농산물 수확현황을 파악하고 가구당 얼만큼의 식량을 배급할 수 있는 지를 계산한다. 교육에 관련되어서는 방사능 피해를 최소로 할 수 있는 피폭시 행동강령부문을 보충하였다. 중앙 정부의 지시였다. 정신없이 일을 하던 와중에 생활지도 과장님이 출근하였다. 인자하신 교감선생님같은 인상을 풍기는 분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다시 업무를 시작하였다. 사무실은 이내 타이핑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점심시간이 되자 성준은 도시락을 얼른 다 먹고서는 조용히 밖을 나갔다. 자전거 주차장 구석에 연방정부의 마스코트 덕구를 보러가기 위해서다. 덕구는 이제 막 3개월된 갈색 강아지다. 덕구는 한번 쓰다듬으면 부드러운 털아래 토실토실한 감촉이 느껴지는 귀여운 강아지였다. 성준이 다가가자, 꼬리를 치며 반긴다.

“으휴 이놈아. 잘 있었니?”

덕구를 쓰다듬으며 덕구의 까맣고 착한 눈을 보니 마음이 절로 편안해졌다.

덕구를 보면 어렸을 적 수아가 키우던 강아지가 생각났다. 물론 혈통이 좋아보이는 이쁘고 자그마한 흰색 강아지였다. 틈만나면 넓은 마당이 있는 수아네 집에 성준과 수아 그리고 또하나의 단짝친구 진욱, 이렇게 셋이서 놀곤 하였다. 현재 진욱이는 성인이 된 후에는 목공소에 취직하여 목공 기술을 배우는 중이다. 애초에 뛰어난 성적으로 연방정부의 공무원이 된 성준과 달리, 그는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고, 건장한 체격과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진욱에게 그 일은 남들이 보기에도 잘 어울리는 일이었다. 성준과는 주말마다 집 근처 공원에서 농구를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내일은 또 주말의 시작이니 굳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성준과 진욱은 공원에서 만날 것이 당연했다. 성준은 덕구를 한번 더 쓰다듬어 준 후에 사무실로 복귀했다.

아침에 왔던 그 길을, 노을진 저녁을 배경으로 성준의 퇴근길이 시작되었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황무지 너머로, 저물어 가는 붉은 노을은 아름다웠다. 역설적이게도 방사능 사고가 없었다면 이토록 단순하고도 강렬한 풍광은 없었을꺼라고 성준은 생각했다. 사실 성준의 머릿속에는 노을말고 커다란 생각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에 중앙 정부로부터 전보가 내려왔는데, 연방 정부에서 중앙 정부로의 인력수급을 원한다는 전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쉽게말해 쓸만한 젋은 공무원을 보내달라는 얘기였다. 이러한 전보가 들어올 때마다 성준은 매번 자신을 보내달라고 지원을 하고는 하였다. 중앙 정부로 가는 열차를 타고 마침내 그 곳에 도착하면 그 곳에는 꿈에 그리던 수아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번번히 떨어지고 말았다. 그럴때마다 성준은 내심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크게 낙심을 하곤 하였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꽤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번 전보는 생활지도방면에서 경력이 있는 젊은 남자 공무원을 요청했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성준에게 유리했다. 성준의 기대감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커져만 갔다. 성준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엔 수아야. 너를 만나러 갈 수 있다’

자전거는 벌써 울타리 옆길을 지나 숲길을 지나고 있었다. 노을이 있던 하늘의 시간은 지나고 제법 어둑한 밤이 되자, 낮에는 밝은 햇살에 쌓여, 느끼기 힘들었던 희미한 숲의 향기마져도 한층 피워올랐다. 신선한 5월의 밤공기와 자그마한 풀꽃들의 향기가 어두운 숲의 하늘을 메워주고 있었다. 그리고 성준은 그와 비슷한 수아의 긴 머리에서 나던 향기를 기억했다. 수아의 옆에서 이야기 하노라면 그녀의 머리에서 풍기는 향기가 성준의 기분을 좋게 해주던 경험이 꽤나 있었다. 돌이켜보면 일반 사람들은 쉽게 쓸 수 없는 좋은 샴푸를 쓸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어렸던 성준에게 좋은 향기란, 결국 수아의 향기로 각인된 것인지도 몰랐다.

자전거는 낡은 단층 아파트 앞에서 멈췄다. 아직은 저녁시간이라 전력 수급이 가능해서 집집마다 작은 전구가 켜진 상태였다. 밤 11시 이후 에는 에너지 보존정책에 따라 전력이 차단되곤 하였다. 연방정부의 변변찮은 태양광 발전설비로 만들 수 있는 전기는 양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올라 성준은 열쇠로 문을 열었다. 벌써 어머니와 아버지는 저녁을 차려놓고 아들 성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분은 모두 근처 공용농장에서 농부로써 성실히 일하시는 분들이었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를 한 어머니가 일을 마치고 온 자신의 아들을 보자 눈주름짙게 크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아들 오늘도 고생했어. 여기 된장찌개랑 오늘 바로 나온 계란으로 만든 계란찜 좀 먹어봐”

“오 엄마 대박인데? 역시 우리엄마가 요리하나는 기가 막혀!”

옆에서 모자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런닝셔츠 차림의 통통하신 아버지가 말했다.

“아들아 오늘 아버지가 따온 고추도 한번 먹어봐 이게 더 기가막혀!”

“하하 맞아마자 우리 아빠도 아주 수고 많으셨네요 하하”

“엄마만 챙기면 나도 섭섭해. 하하”

“일단 얼른 씻고 올께요. 먼저들 드시고 계세요.”

즐거운 식사시간을 마치고 어머니를 대신해 설거지를 마친 성준은 조용히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어두운 방 안에 성준은 스탠드를 키고 책상앞에 앉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 이번에도 중앙 정부쪽 발령을 신청했다는 말씀을 드리니, 두 분 다 여느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아들의 성공을 위해서 발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중앙 정부에서의 삶은 항상 일정구역에서만 거주하던 연방 정부사람들에게는 굉장한 성공으로 인식되곤 하였다. 그 곳에는 연방정부에는 얼마없는 태양광 발전시설 설비가 잘 되어 있어서, 이 곳과는 다르게 전기도 충분히 쓸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고 좋은 시설을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또한 가끔 연방 정부를 방문하는, 중앙 정부 쪽 사람들이 해주던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는 연방 정부사람들에게는 꿈의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평생 한 두 번 볼까말까한 비행기가 자주 날라다니고 사람들은 전기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이동한다는 그런 이야기. 중앙 정부인들의 옷 차림또한 화려했고 또한 그들이 가진 물건또한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손목시계에서부터 아름답게 장식된 악세사리까지, 그들은 연방 정부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연방정부의 아이들중 중앙정부에서의 삶을 꿈꿔보지 않은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수아를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낸다면 얼마나 기쁠까?’

한번도 가본적은 없지만, 성준의 상상 속에서는 멋진 옷을 입은 수아와 성준이 손을 잡고 화려한 중앙 정부의 밤거리를 걷는 모습이 펼쳐졌다.

 

책상에 앉아 평소처럼 일기를 쓰던 성준의 손은 어느새 다시 수아에 대한 그리움을 적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성준은 일기장을 덮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성준은 운동화를 신고 가벼운차림으로 공원을 나섰다. 짧은 머리의 진욱은 짙은 눈썹이 있는 부리부리한 눈을 뜨고 벌써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봄이라 그런지 진욱의 피부가 더 진하게 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터 기다렸냐?”

“3일전부터.”

“또 잡소리 하네.”

둘은 언제나처럼 1:1농구를 하기 시작했다. 잘 다져진 모래위 농구코트위에서는 농구공이 팡팡 튕기는 소리와 신발이 스사삭 모래에 끌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역시 농구는 진욱이 우세했다. 사실 진욱은 어릴 때부터 스포츠에 재능이 있었다. 둘은 어릴적부터 매일 놀곤하였다.

경기가 끝나고 거친 숨을 내쉬며 둘은 벤치에 앉았다.

성준은 집에서 가져온 차가운 보리차를 꺼내서 한 모금 마신 뒤에 진욱에게 주었다. 건네받은 진욱은 보리차를 꿀꺽꿀꺽 삼킨다.

보리차가 담긴 통에 맺혔던 물방울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나 잘하면 중앙 정부로 갈 수 도 있어”

성준은 말했다.

“야 또 그러네 얘가. 니 저번에도 간다 간다 하더니 결국 떨어졌잖아”

“이번엔 진짜야. 느낌이 딱 온다. 생활지도과에 경력있는 직원 보내랬으니깐. 가능성이 커.”

“......너 또 수아 때문에 그러냐?”

“야 언제적 얘기를 꺼내. 다 잊었어.”

“그럼 여자 소개 받을래?”

“아니.”

“야. 니 못잊은거 다 티나거든.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으휴. 아니면, 어디가 시원찮은 건 아닌지......하하”

“야 하하. 개소리 하지마라. 진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땀이 맺힌 더운 몸을 식혀주었다.

웃음짓던 진욱의 입가는 웃음을 거두고 갑자기 진지하게 얘기했다.

“너. 이번에 되면 진짜 가는 거냐?”

성준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가긴 가야지......기회되면. 좋은 기회야. 쉽게 오지도 않고.”

성준은 고개를 돌리더니 살짝 끄덕이며 대화는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온 성준은 샤워를 마치고 평범한 주말이 마무리 되었다.

다음날 출근한 성준은 오전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침에 들은 소식 때문이다. 성준의 중앙정부로의 발령이 허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며칠 뒤에 중앙 정부의 열차가 오기로 하였고 그 때까지 모든 이직준비를 마치고 탑승하라는 말이 였다. 머릿 속은 복잡했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생각만이 가득했다. 이제 수아를 보러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다른 한 편으로는 불안하였다. 막상 꿈에 그리던 일이 성공하자 그 다음의 걱정이 생긴 것이다. 과연 중앙 정부로 가는 것이 옳은 판단이 될 것이냐는 것이다. 머릿 속은 복잡해져 갔다.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온 성준은 일단 이 기쁜 소식을 덕구에게 전했다.

덕구는 짤막한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자신만의 축하를 해주었다.

“덕구야 근데 이렇게 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

덕구는 까맣고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중요한 문제야. 내가 그곳으로 가면 너도 이제 나를 못봐. 누가 점심시간마다 널 보러 와주겠니!.”

사실 성준말고도, 어느 누가 보아도 귀여운 덕구를 이뻐해주는 사람은 많았다.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 쭈욱 살아왔는데......가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 곳으로 가면.......”

‘더군다나 수아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행여나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어쩌지?’

성준은 그제서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생각해왔던 불안함을 꺼냈다.

수아가 성준에게 보낸, 결국 마지막이 된 편지의 끝 부분이 문득 생각났다.

 

[잘지내 성준아......]

 

다른 편지들의 마지막 끝부분은 항상 [보고 싶다.]였지만 그 편지 만큼은 아니였다. 평소와는 다른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그 구절을 처음 본 순간 성준은 무언가를 직감하였다. 그치만 애써 그 생각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편지를 끝으로 수아에게 답장을 받는 일은 없었다.

그 때부터 성준의 삶은 수아를 보고 싶다는 그리움만을 제외하면, 잘 정돈되고 스스로 만족하는 삶으로 변화되어 갔다. 어쩌면 그녀에 대한 그리움또한 성준의 삶을 이루는, 하나의 완성된 감정이었을 수 도 있었다고 깨달았다. 발령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오히려 단순하지만 단단했던 성준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후내내 밀려오는 업무를 평소처럼 쉽게 처리할 수 없는 성준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나누고자, 퇴근길에 잠시 성준은 진욱이 일하는 목공소 앞에 들렀다. 목자재가 군데군데 쌓여 있고 몇몇의 사람들이 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진욱은 작업복을 입고 열심히 땀흘리며 일하는 중이었다. 이제 제법 일이 익숙해졌다고 본인이 떠들긴 했지만 그 말이 사실인 듯 하였다. 제법 목수로서의 느낌이 났다. 같이 일하는 주변 분들과의 호흡이 맞아 떨어져 보였다. 드디어 일꾼 한 명으로써의 제 역할을 해내기 시작한 모습에 내심 본인이 뿌듯한 감정이 든 성준이었다.

사실 성준 또한 연방 정부안에서 제법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던 차 였다. 적성에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스스로도 꽤 만족하는 편이었다. 별탈 없다면 몇 년 뒤에는 승진을 할 수 도 있다. 지금까지 직장에 적응하기까지의 노력이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진욱과 이야기를 하러 찾아온 성준이었지만, 진욱은 일 때문에 매우 바빠보여서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온 성준은 부모님께 발령소식을 전했고, 잠깐의 침묵 후 두 분은 정말 기쁜 일이라며 축하해 주셨다. 하지만 평소 마음이 여린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진 이유가 단지 기쁨의 의미만은 아닌 것을 알기에 성준의 마음은 무거웠다.

아파트 전체에 소등이 되고도 자신의 방 안에서 성준의 두 눈은 어둠속에 말똥말똥 살아있었다. 어둑한 방안에서 조용히 일어나 책상 의자에 앉았다. 그날 밤은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벌써 며칠이 지났고, 성준의 깊었던 고민은 일단은 해결되었다. 열차가 오기로 약속된 날이 밝았다. 평소에는 미동도 없던 커다란 고가 다리가 천천히 진동을 울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중앙 정부에서 연방 정부를 향해 출발 해온 거대한 열차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거대한 열차의 외관은 군데군데 녹이 슬었고, 열차의 내부의 많은 부분은 대체할 수 없는 부품으로 인해 대충 수리해둔 판국이었다. 아직 달릴 수 있다는 사실만이 그 것이 열차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구 시대의 산물로서 작은 정부와 정부를 잇는 거대한 열차. 지금은 턱없이 부족한 전기로 인해 그 옛날의 빠른 속도는 내지 못하지만, 무거운 몸을 이끌고 조용히, 그렇지만 당당히 이 곳을 향해 오기 시작했다.

열차가 오는 날은 흔치 않기 때문에, 그 날에 맞추어 여러 행사가 펼쳐지곤 하였다. 중앙정부 사람들과의 물물교환이나, 정부가 달라 서로 떨어져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택배 서비스도 간혹 누릴 수 있었다. 역 앞의 광장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열차를 구경하였다.

성준은 멀찍이 서서 아련히 열차를 바라보았다.

“야. 니 안간다매?”

어깨를 툭치며 뒤에서 진욱이 말을 걸었다. 목공소에 바로 온 모양인지 그의 이마에는 아직 땀이 흐르고 있었다.

성준은 씩 웃으며 말했다.

“응”

“근데 뭘 그렇게 아쉽게 쳐다보냐?”

“아쉬운 건 아쉬운 거지.......잘 하는 걸까? 아직도 모르겠다.”

“야. 결정했으면 아닌 길은 털어버려.뭐 어쩌겠냐”

“......그건 그래. 니 말이 맞아.”

“그리고 솔직히 수아는 이제 너 잊었을 껄? 편지도 예전에 끊겼잖아! 하하”

“하아. 야 그 얘기는 그만하자. 나도 알어 그건. 남의 상처에 소금치지마라.”

“야 됐고. 여자나 소개해줄게 저번에 말한 애한테 니 얘기했더니 너 소개해달래.”

“하하 진짜? 그럼 뭐 한 번 만나보는 것도......”

진욱은 큰 눈으로 성준을 보며 씩 웃더니 말했다.

“크큭. 그럴 줄 알았다. 성준아 이 위대한 진욱이형님이 알려줄께. 사랑은......다른 사랑으로 잊는거야.”

 

행사는 하루 종일이 걸렸다. 열차의 짐을 수십여차례나 내리고 올렸다. 저 넒은 황무지에는 다시 븕은 노을이 지고, 물건을 다 실은 열차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성준의 삶은 다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할 것이라 스스로 생각했다. 훗날 후회할 수 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치만 그에게는 아직 많은 것이 남아있다. 단정한 뿔테 안경너머로, 븕은 노을을 가로지르는 열차를 보는 성준의 눈은 살며시 웃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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