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엘리온은 약간은 뾰루퉁한 얼굴로 동행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길버트의 사람 좋은 미소에 약간의 죄책감과 난처함이 그대로 배어났다.

“ 당신까지 채근할 건 없었잖아요. ”
“ 역시 그 일로 화난거군요. ”
“ 화나지 않았어요. ”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엘리온의 얼굴은 차가웠다. 남자처럼 넓은 보폭으로 철갑이 입혀진 부츠 뒷굽으로 하얀 돌의 복도를 괴롭히기라도 하듯이 빠르게 걸어나가는 그녀의 옆을 길버트는 간신히 같은 속도로 따라 걷고 있었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길버트의 어떤 말에도 전사로의 반응만이 되돌아올 뿐, 이미 여성스러운 뾰루퉁함이나 해승을 두둔하던 다정함은 없었다. 길버트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이미 참수의 마녀라고 불리던 메이저 알카나 no.8, Strength였다.

“ 하지만 엘르, 치프 세큐리터는 마스터에게 의사를 전달할 능력이 없을 때 주인을 대신할 자입니다. 마이너 알카나의 자리도 대신할 수 있는 대리인이입니다. ”
“ - 아비게일이 의사를 전달할 능력이 없다고 단정짓는군요 당신도. ”

차가운 대답. 탕. 하고 복도가 울리도록 강하게 바닥을 디디고 멈추어 서서,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깊은 암녹색의 가엘리온의 눈동자가 찌를 듯이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 그녀가, 슬픔에 미쳤다고... 말이죠. ”
“ .. 사실이니까요. ”
“ 그녀는 미치지 않았어요! 아니 우리들의 정신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미쳐버릴 수 있는 거였다면 나 역시 몇 수십 번은 미쳐버렸겠죠! ”
“ 엘르! ”

쏟아 뱉듯이 한달음에 소리친 가엘리온은 당황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 길버트를 바라보며 하아 하고 긴 숨을 토해내었다. 그녀의 깊은 암녹색 눈동자에 마치 불길처럼, 물기가 어려 있었다.  

“ 우리도, 아비게일과 마찬가지인데... ”

낮게 잦아드는 물기 어린 목소리. 그러나 그 물기는, 얼기 직전의 싸늘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등뒤로 서릿발을 뒤집어쓴 것과 같은 한기를 느끼고, 길버트는 자신도 모르게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 부정할건가요? 우리 역시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란 존재라는 것을? ”

가엘리온의 말은, 마치 자기자신을 찌르는 것 같았다. 애써 부정하고 외면해왔던, 바라보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던 진실. 그러나 멈추어버린 시간은 그네들에게 미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단지, 그 때에 머물러 언제까지일지도 모르는 무한의 시간을 영원히 부족한 채로 지내는 것만이, 메이저 알카나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숙명.  

“ 아니면... 그렇게 계속해서 부정하고 부정하고 부정하면서 자신이 무엇인지를 외면하고 있을 건가요. ”
“ -엘르 ”
“ 내 이름을 부르지 말아요! ”

그녀의 목소리는 울부짖으면서도 건조했다. 목 어딘가에 치우지 못한 앙금이 남아 호흡을 옥죄고 있는 것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친 그녀는, 천천히 길버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피하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그의 눈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듯이, 혹은-

“ 그 이름은.. 죽어버렸어.. 내가.. 내가 목을 잘라서... ”

흠칫, 길버트는 다시 한번 가엘리온에게서 물러났다. 그의 생각으로는 가엘리온마저 미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탁하고 갈라져 있었으며 섬뜩할 정도로 차갑게 목안으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길버트에게 등을 돌리고 차가운 돌의 복도를 철갑 부츠의 뒷굽으로 짓이기듯이 밟으며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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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 생각입니까? ”

소년은, 자신을 불러 세운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선홍의 눈동자와 청록의 눈동자.

“ 헤리가셸 ”
“ 말하세요 하렐. ”
“ 나는, 당신에게 속한 자가 아니야. 아마도 우리들 중에서도 얼마 되지 않는, 운명의 땅에 발을 디디지 않은 자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아비게일에게 쏟은 애정을 무시하는 건 아냐. ”

소년의 이야기를, 여왕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 당신이 차원에 자유롭듯이, 나는 시간에 자유로운 자, 그렇기에 당신도- 내가 아비게일에게 노래를 가르치도록 한 것이겠지? ”
“ 당신의 노래는 누구보다도 훌륭하니까요 ”
“ 아비게일만큼은 아냐. 나에게는 책임이 있어. 당신과는 조금 다른 것이겠지만. 그래서 ‘서울’에 갈 거야. ”

소년은, 노래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조금의 망설임 없이 낭랑하게 여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 나는 적어도, 당신만큼 냉정할 수는 없어 퀸. ”
“ 그런가요. ”

‘퀸’의 미소는 어쩐지 조금 슬펐다. 고독에 익숙하고 지도하는 데에 익숙한, 태어날 때부터 귀하게 태어난 그녀와 어쩌면 정 반대일지도 모르는 소년.

“ 당신을 싫어하는 건 아니야. 아마도, 나 역시 당신과 같은 시간대에 태어났다면 당신을 따랐을 거라고 생각해. ”
“ 영광이에요, 하렐 헤이든, ‘숨을 훔치는 자’의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가디언. ”
“ 이것도 같은 거겠지? 우리가 죽지 못하는 그것과. ”

소년의 목소리는 어느덧 바드의 그것처럼 일정한 가락을 띄기 시작했다. 말 사이의 호흡이 노랫가락처럼 잦아들고, 조금은 흥얼거리든, 또 조금은 연설하듯, 소년은 여왕에게 말했다.

“ 살아왔던 것에 만족한 자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 살아왔던 것에 만족하지 못한 자는 다시 태어나지. 하지만 우리는, 세상이 바뀔 때에 차원의 틈에 남은 우리는, 만족하지도 만족 못하지도 않았지.
남은 것은, 결국 갈등했던 이들. 자신의 운명의 갈림길에서 아직도 어느 쪽이 옳았다 라고 평가 내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인거야.
내가 그때에, 엘릭서를 마신 것을 만족하면서도 후회하듯이.
아비게일이 그때에, 리할트를 두고 죽은 것을 만족하면서도 후회하듯이.
그리고 당신이, 여행을 떠난 것을 만족하면서도 후회하듯이.
그때 그랬더라면- 하고 회상은 하지만, 막상 그것이 다시 닥치게 되면,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어. 당신도 그렇지 않아? “

여왕은 조용히 소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아비게일에게 가겠어. 나만이 그녀를 구할 수 있다거나 하는 영웅적 심리만은 아냐. ”

그렇게 말하면서 소년은 밝게 웃었다. 소녀처럼 보이는 해맑은 웃음이 소년의 얼굴에 떠오르자 마치 빛이 비친 것처럼 주변 공기 자체가 화사해지는 느낌이었다.

“ 나는 JUDGEMENT. 심판과 부활의 알카나이니까. 저스티스가 말한 대로, 그녀를 보호하러 가 볼 거야. ”
“ 잘 알았어요 하렐. 그럼 저는 더 이상 당신을 막지 않겠습니다. ”
“ 고마워. ”

소년은 다시 여왕에서 등을 돌리고, 긴 복도 끝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경쾌한 걸음걸이, 등위에서 찰랑이는 검은 머리카락, 소녀의 뒷모습이라 해도 믿을 만큼 가늘고 아름다운 실루엣이 하얀 복도 끝으로 멀어진 뒤에야 여왕은 시선을 떼었다.

“ 당신이 막으셨다면, 하렐이라도 들었을 겁니다. ”
“ 그랬겠죠? ”

미소를 지으며, 여왕은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나인을 돌아보았다.

“ 하지만.. 왠지 막을 수가 없군요 ”
“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평등하지만 평등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렐이 당신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신의 영향력까지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

나인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나인과 퀸- 헤리가셸의 외모는 상당히 흡사했다. 나인의 키가 좀 더 크고, 여왕의 머리카락이 좀 더 눈부신 은발에 웨이브가 져 있고, 나인의 몸이 조금 더 다부져 보인다는 사소한 차이, 그리고 서로 마주보는 그 눈동자가 하나는 깊은 루비 레드, 하나는 코발트 그린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마치 자매처럼 닮은 두 사람이었다.

“ 사실은 말이죠 나인. ”
“ 네 ”
“ 내가 가고 싶었어요. 가서 아비게일을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그러고 싶었죠. ”
“ .. 퀸.... ”
“ 아비게일은. 나와 같은 곳에서 태어났으니까. 근본적으로 나와 같은 운명이 되었어야 할 아이였으니까요. 어디서부터... 우리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그래서 그 아이는 나를 따르고 내가 말하는 운명을 따르던 아이였죠. ”
“ 그렇다고 해서- ”
“ 알아요, 나는 갈 수 없어요. 그러니까 나는 하렐을 말리지 않은 거에요. ”

여왕은 나인을 보면서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것은, 하렐이 그녀에게 보여줬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변이 환해지는 듯이 밝은 미소였다. 너무 밝아서, 보는 사람의 가슴이 저려오는, 밝은 미소였다.


part 7. END.    

  

댓글 2
  • No Profile
    mirror 05.08.18 14:20 댓글 수정 삭제
    작가 게시판 확인 중입니다.
    전체 리뉴얼 준비 차원에서 작가의 게시판 점검 실태를 보기 위함이니, 보는 대로 댓글을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달지 않을 경우 추후 리뉴얼 과정에서 게시판의 향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을 미리 이야기해두고자 함이니, 잊지 마시고 댓글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 No Profile
    아비게일 05.09.01 14:27 댓글 수정 삭제
    넵, 하지만 간만에 달린 답글이 이런 거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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