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허브원은 신전에서의 위치로 보자면 상당히 구석진 곳임에는 확실했다. 약초원에 비하면 약간은 작은 듯 싶은 그 곳에서는 언제나 식용, 약용의 허브들이 종류별로 잘 분류되어 제각각 향기를 피워대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갈 때-리와 함께였던 그 때에도 그랬고, 온통 눈으로 덮인 지금에도 그랬다. 아니, 이 허브원 안에서는 겨울이란 것을 실감할 수조차 없었다. 그 공간에는 마치 봄과 같은 훈훈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고, 그것은 온갖 허브들 덕분에 상쾌한 향기마저 품고 있었다.
파슬리에, 세지, 로즈마리에 타임, 마조람, 애플민트에 페퍼민트, 바질과 라벤더와 레몬밤,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잇는 클러브 핑크와 헬리오트 러프, 서식지도, 재배시기도 각각인 그 풀들은 이곳에서만은 그런 계절적인 구별과 자라나는 땅의 구별 없이 언제나 자신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 여긴 여전하군요. ”

민트의 마른 잎을 따주고 있던 현현은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낮선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신전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외부사람이 간단하게 들어올 수 잇는 곳이 아닌 탓이었다.
그리고 등 뒤, 허브원의 입구에 서 있던 사람은, 분명히 외부인은 아니었다.
긴 여행인지 모험인지 모를 여로에서 막 돌아온 듯이 약간은 길어진 머리칼, 안에 체인메일이라도 받쳐입었는지, 살짝 더러움이 탄 타바드는 약간 딱딱한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하게 성스러운 문장을 박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안면 가득히 띄운 그의 모습은, 한 손에는 긴 스태프를 들고, 왼쪽 허리에는 그물모양을 한 맨캐쳐를 매단, 어쩌면 이곳 허브원과는 이질적인 느낌마저도 드는, 그런 외부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그을린 듯한 건강한 갈색피부의 얼굴은, 성직자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였다.

“ 그레인 하이 파트리아크!(High Patriarch) ”
“ 오랫동안 안 뵈었다고 명칭이 다시 경칭이 되었군요. ”

그의 미소는 아주 부드러웠다. 대화하는 상대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 나올 것만 같은, 따스한 미소. 현현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끼며 마주 미소를 지으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가장자리가 날강날강해진 타바드의 자락에 입을 맞추었다.

“ 파트리아크 현현 에스타릇테가 하이 파트리아크 길버트 그레인 님을 뵙습니다. ”

정중한 격식을 갖춘 현현의 인사에, 길버트라고 불린 그는 그저 미소만 지었을 뿐 특별히 말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모험자의 차림새를 하고 잇는 것에서는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움직임에는 현현과 같은 단정함과 기품이 엿보였고 그 행동 하나하나에는 신관 특유의 우아함이 엿보이는 것이었다.
현현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어 그의 인사에 대한 답을 하고, 현현이 일어나기를 기다린 뒤에 그는 감격한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허브원과 그것을 둘러싼 연녹색 야광석의 신전을 둘러보았다.

“ 꽤나 개축이 잘 되었군요, ”
“ .. 그러고 보니 통합신전에는 처음이신 셈이죠? ”
“ 네, 이곳이 엘로아의 신전일 때라면 잘 알고 있지만. ”
“ 그다지.. 변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게나 오랫동안. ”
“ .. 그렇죠, 잘 안 들리게 되니까요 ”

부드러운, 그리고 깊은 미소. 그것은 마치. 현현의 미소와도 같았다. 기나긴 세월을 보내고 현실 앞으로 돌아온 자의. 두 사람은 가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허브사이를 걸었다. 한 블록을 지날 때마다 다른 향기들이 풍겨 왔다. 사방은, 눈이 내렸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듯이 조용했고, 잎사귀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들려올 것만 같았다.

“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
“ 아내의 기일이라서.... ”
“ 그렇습니까. ”

대화는 가끔 길게 사이를 두면서 계속되는 듯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것은 어색하게 띄엄띄엄 이루어지는 대화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이가 긴 대화를 즐기고, 또한 말 사이의 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흘러가는 시간 따위는 그들에게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하는 듯 했다.

“ 어째서일까요? ”
“ 네? ”

두 사람의 발이 멈추었다.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 모든 인연을 끊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
“ ... 그레인 하이 파트리아크? ”
“ 나의 시간이 멈추고, 나의 운명이 고정되었을 때, ”

그의 시선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내렸던, 청회색의 하늘, 모든 잡념을 떨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바라보았던 그때의 하늘과도 같은 높으면서도 무언가 막힌 듯한 하늘.
세월을 바라보듯이 그는 한참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세상과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인연조차 남지 않았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그날, 하늘이 열렸다. 다른 운명이었던 세 개의 세상이 열리고, 그것은 곧 둘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틈새에 남았다. 모든 것이 멈추고, 불변의 것이 되었으며 마법에 걸린 것처럼 고정된 상태로 남았다.

“ 그래서 더 이상, 이곳에 미련을 가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

자신은 성직자였다. 사랑과 결혼을 주도하는 엘로아의 신관으로써 신을 믿고, 신이 원하는 사랑을 믿고, 자신이 존재하는 세상을 믿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사랑했던 존재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믿던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자신이 알고 있던 현실이, 현실이 아니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모든 세상에서 자신이 자신으로써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슬프게도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어쩌면 해방감이었을까 아니면.....

“ 그런데도... 저는 여전히 아내의 기일에 이곳을 찾고... ”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깊은 그의 눈동자가 어쩐지 살짝 흐려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그 깊은 갈색 눈을 바라보면서도 현현은 무어라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것은, 이상스러운 느낌이었다.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듣고 잇는 듯한, 이미 까마득한 예전에 들었던, 신의 음성을 듣는- 디비네이션과도 같은 느낌.
다정한 미소를 담은 갈색의 시선이 현현을 바라보았다.    

“ 에스타릇테 파트리아크. ”
“ 네? ”
“ 당신은.. 어째서 인간이면서 늙지 않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
“ 그건.... ”

잠시, 현현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것은 곤란해한다기보다는 그야말로 어째서 그랬는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차라리 라진을 만났을 때는, 그가 여전히 그 나이임에 놀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 동생인 소오류는 그를 당연하다는 듯이 수용했다. 마찬가지로 50년 만이었음에도, 그- 길버트 그레인의 경우에도 자신은 그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히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느껴졌을 정도였다.

“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당연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

길버트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아픔을 털어 버린 듯 해 보이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실은 깊은 슬픔을 그대로 담고 있는 미소였다. 그렇게 미소를 띄우고 현현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표정은, 순간 같기도 했고 혹은 영원 같기도 했다. 그 표정은 마치 한 순간, 가장 아름다운 때를 그대로 영원으로 잡아놓은 것과도 같은 기묘한 아름다움과, 현실 같지 않은 환상감이 함께 하는 것이었다.
한 줄기의 가느다란 실 한 가닥으로 현실에 연결된 환상. 엘프의 것보다 더욱더 먼 과거를 바라보는, 인간이 바라볼 수 없는 그림자.
그것이 그였다.

“ 당신들이 붙들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숲의 자손, 무한에 가까운 수명을 가진... 당신들이. ”

물처럼, 공기가 흔들렷다. 짙은 밀도의 바람은 숨막힐 듯한 싸한 민트향을 담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흔들리는, 현실, 혹은 그 이전의 것.

“ 당신들이 아직도 나를 기억하기 잇기에, 또한 나 역시 당신들을 기억하고 잇기 때문에. ”
“ ..길버트? ”
“ 어쩌면,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나를 잊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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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는, 주황빛의 광선이 비치고 있었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의 마지막 빛줄기,  
하얀 대리석의 벽, 까만 흑요석의 바닥, 그리고 방의 대부분을 채운 하얀 실크의 시트가 덮인, 네 사람도 거뜬히 잘 수 있음직한  커다란 침대는 화려하게 장식된 테스터(tester)로부터 흘러 내려온 반투명한 시폰은 네 귀퉁이의 기둥에 적당한 드레이프를 주면서 휘감겨서 그 안의 두 사람을 어렴풋이 보여주었다.
시폰 그림자 속의 두 사람, 한 사람은 누워 있었고, 한 사람은 일어나 앉아 있었다. 새까만 머리칼을 한, 누가 보더라도 여자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소년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화려한 장식이 되어 적당하게 쿠션이 붙은 머리받이에 등을 기대고 않아, 커다란 금빛의 하프를 끌어안고 그 현을 튕기며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투명하고 맑은 목소리가 돌로 된 방안을 은은하게 채워나갔다.

.......
혹은 운명,
나아갈 길을 결정짓는 선택의 다른 이름.
혹은 숙명
지나온 길을 망각하게 하는 잔인한 세리프.
뒤틀린 세계의 사생아
사랑 받지만 사랑 받지 못하는 유리성의 공주님

그리하여 그것은 슬픔.
아래와 위, 두 사람의 나.
땅과 하늘, 두 사람의 나.
왼쪽과 오른쪽, 두 사람의 나.
천사와 악마, 두 사람의 나.

노랫소리는 거기에서 멈추었다. 하프를 튕기던 소년은 손을 멈추고 자신 옆에 누운 여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언제부터였는지, 아름다운 포도주색의 눈동자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짙은 갈색의 피부 위에 은실 같은 머리카락을 옷 대신 감고 있을 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전라의 모습이었다.

“ 깨우게 되었나. ”
“ 얼마 만일까, 당신 노래로 잠을 깨게 된 게. 응- 그건 무슨 노래? ”
“ 비밀 ”

그렇게 말하면서 소년은 미소지었다.  

“ 별로 기억할 필요도, 이유도 없는 노래,  ”
“ 어째서? ”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등을 기댄 채, 하프의 현을 한번 더 티링 하고 튕기고는 그대로 하프의 몸체를 쓸어 내렸다. 스윽, 소년의 손이 하프를 쓸어 내리자, 스팟 하고 한 줄기 빛과 함께 하프는 소년의 손목에 같은 재질의 팔찌가 되어 감겼다. 펄은 재미있다는 듯, 그렇게 하프가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고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 또 입 다물어 버리는 거네, ”
“ 글쎄. ”

빙긋하고, 소년은 소리 없이 웃었다.
여자의 것처럼 아름다운 흑발을 가볍게 쓸어 넘긴 소년은, 그대로 머리받이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혀 펄이 아닌, 하얀 대리석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막 사라져 가는 주황빛의 석양이 묘한 줄무늬를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주황빛의 빛줄기들은 마치 그때, 그 던젼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편광 되어진 햇살 특유의, 아름다우면서도 조금은 옅은 그런 색조였다. 멸망과도 같은, 석양의 버밀리온.

“ 차라리. ”
“ 응? ”
“ 아무 것도 모르는 채였더라면, 그랬다면, 슬프거나 즐겁거나 둘 중 하나였을 텐데. ”

소년은 천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자신의 옆에 상반신만을 일으킨 자세로 비스듬히 누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짙은 딥 그린과 포도주 빛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잠시 그대로 침묵이 지나갔다. 씁쓸한 듯한, 어른스런 미소가 소년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그 침묵이 슬슬 답답함으로 느껴지기 시작할 때였다.

“ ... 하렐.. 왜...? ”

펄이 무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신의 소년은 침대 밖으로 빠져나와 침대 옆 협탁에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꿰입고 있었다. 무어라도 말을 붙여 볼 수조차 없는 차가운 뒷모습에, 펄은 자신도 모르게 시트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으며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저 모습이다.
그때에, 자신이 아직 어린 다크엘프였을 때에. 자신이 속해 있던 어쌔신 길드, ‘숨을 훔치는 자들’ 의 제 2인자라고 불리던, 로얄 가디언 하렐 헤이든의 모습이, 자신 앞에 선 소년의 조그만 어깨 위에 자꾸만 오버랩 되는 것을, 펄은 느끼고 있었다.
그때처럼 아름다웠고, 그때처럼 여성스럽고. 그때처럼...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공포스러웠다.
소년은 차분한 동작으로 옷을 입고, 검이 매달린 벨트를 허리에 차는 것으로 이 방에 들어올 때와 똑같은 모습이 된 다음에야 뒤를 돌아 여전히 침대 위의 펄에게 시선을 돌렸다. 웃고 잇는 듯, 어쩌면 슬픈 듯한 딥 그린의 초록 눈동자가, 짙검은 긴 속눈썹 아래에서 일렁거리는 듯 했다.

“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

차분한, 그러면서 착 가라앉은 어른스런 목소리가, 소년의 아름다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펄은, 등줄기에 무언가 서늘한 것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 그랬다면 나도, 나를 잊고 미련을 잊었을까. ”

차분하고, 그렇기에 더 공포스러운 소년의 목소리. 소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녀는 잘 알 수 없었다. 판단 이전에 너무나도 강한 공포가 몸을 덮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지금, 나를 기억하는 것은 어둠의 엘프, 펄 너 뿐이겠지. ”
“ ... ”
“ 그래서 너를 만남으로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

스윽, 펄을 바라보는, 소년의 무감정하고 깊은 초록의 눈동자, 마치, 그대로 죽여버릴 듯한 날카로운 살기가, 그 무표정에서 풍겨 나오는 듯했다.

“ 그러나, 너를 만남으로 해서, 나는 내가 존재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실감하게 된다. ”
“ ... 하, 하렐... 난... ”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진심이다, 하렐의 저 눈빛은, 몇 번이나 길드에서 보았던, 그 로얄 가디언 하렐의 눈이다, 어려지기 전의, 로얄 바드의 칭호를 받기 이전의- 사람을 죽이던 눈.

“ .... 어째서.. 너희는 존재하는 거지? 그렇게 긴, 무한에 가까운 수명을 가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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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북으로 날아갈수록 차갑게 변하여 와 닿았다, 기류를 타고 강풍을 피해 고도를 낮추자, 이번에는 눈을 찌를 듯이 새하얀 설원이 다가왔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벌판은 온통 눈과 나무뿐이었다. 파도처럼 바람에 흩날린 눈은 지표에 물결같은 문양을 그리면서 쌓여있었고, 간간이 파란 잎을 눈 사이로 살짝 드러낸 상록수가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세상은 모두 푸를 정도로 흰 눈 벌판이었다. 귓가로 매서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라센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설원 위를 활공했다. 아니, 라센의 고삐를 잡은 나인이, 속도를 줄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그녀는 은줄의 고삐를 단단히 몰아 쥐고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보이지 않은 채 바람 속에서 버티고 서 잇었다. 그녀의 긴 은발이 차가운 바람에 섞어 마치 눈보라처럼 그녀의 등 뒤로 휘날렸다. 공기중의 안개가 얼어붙은 미세한 얼음 조각이 그녀의 뺨을 몇 번이고 스치고 지나가면서 붉은 자국을 실금처럼 남기곤 했지만 나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라센을 모는 데에만 열중했다. 뽀얀 입김이, 붉은 입술을 빠져 나오기가 무섭게 바람에 휘날려 사라졌다.
몇 개인가의 언덕을 넘어, 자그마한 산맥의 능선을 따라 라센은 쉬지 않고 북으로 날았다. 아마, 말로 달린다면 눈 쌓인 벌판을 지나는 데만도 며칠이 걸릴 여정이었지만, 라센은 위에 탄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신의 최상의 속도로 북으로 향했다.  
저택을 나와 하늘을 가로지른 지 삼일 째 되는 날의 새벽, 거리를 분간 할 수 없는 깊은 밤을 제외하고는 연해 북쪽을 향해 날던 라센의 날개짓이 조금 둔해질 무렵이었다. 지평선으로 은청색으로 빛나는 얼음의 호수가 떠올라왔다. 마치 새하얀 지면 위에 수은을 부어놓은 것 같은, 물이 아닌 보석과도 같은 얼음의 호수는 보통의 성호(城湖)보다 배는 넓었고, 거의 한 모 이지러짐 없는 아름다운 타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라센이 고도를 내림에 따라 얼음 호수는 점점 선명하게 다가왔다. 거울처럼 주변 눈 언덕을 비추는 호수의 수면에는 어찌된 일인지 푸르고 흰-대리석와 아즈라이트로 이루어진 화려한 성채 하나가 그 얼음 속에 비치고 있었다.
마치 환상처럼,
얼음 속에 비추어지는 성채는 점차 또렷하게 드러났다. 주변의 눈과는 다른, 약간은 은빛이 섞인 것 같은 하얀 대리석의 벽감과 튼튼히 사이를 채운 아름다운 푸른 광택의 아즈라이트의 장식. 장인의 손으로 설계되고 꾸며진 듯, 성채의 모양은 아름다우면서도 단아하고 그 역할-침입을 막고 적으로부터 방어하는-을 제대로 행할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얼음에 비치는 그림자만 아니라면.    
라센은 천천히 날개를 접고 그 거대한 몸체를 호숫가에 내렸다. 검은 깃털 몇 개가 새하얀 눈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등위에서 나인이 내려섰다. 얼음과 바람에 붉어진 뺨은 어느새인가 그녀다운 상아색으로 돌아와 있었고, 붉은 입술에서는 하얀 입김이 옅게 새어나오고 잇었다. 가쁜 호흡을 몰아쉬는 야수에게서 은줄의 구속구를 풀어 준 뒤, 나인은 라센의 커다란 목깃털을 긁어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

크르릉, 낮은 목울림으로 야수가 대답하자 나인은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호수 안 쪽으로 걸어나갔다. 두꺼운 나인의 여행용 구둣창 아래에서 얼마나 깊은지도 모를 호수의 굳어버린 표면이 밝은 울림소리를 내었다.
나인은 그대로, 성이 비추어지고 있는 그 지점까지 다가갔다. 성문이라고 생각되는 위치에서 발을 멈추고, 불끄러미 호수 속의 성과, 그 앞의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던 나인의 모습은 어느 순간, 호수 위에서 사라졌다.

나인이 걷고 있는 곳은,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성의 중정이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성처럼, 그 위에 이어지는 발자국은 그녀가 걸어온 것 뿐이었다, 누군가 살았을 때는,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정원이었지만 지금은 단지 종아리와 무릎을 넘나들 정도로 두텁게 쌓인 눈 아래에서 잠자듯 쉬고 있는 듯 했다.
거침없이 중정을 가로지른 나인은 아름답게 세공이 된 공작석 장식의 본성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 사자머리 장식의 노커에 손을 대는 순간, 마치 불꽃이 일어나듯 노커에서 얼음의 결정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나인의 팔을 얼리며 몸으로 뻗쳐왔다..

“ 실버 드래곤의 이름으로, 주인을 뵈러 왔다. 흩어져라 심연의 빙결, 화이트 윙의 문지기여.   ”

나인의 차분한 말에 뻗어오던 얼음의 결정이 잠시 주춤하는 것 같더니 파직-하는 맑은 소리를 내면서 한 순간에 미세한 결정이 되어서 흩어졌다. 반짝이는 얼음의 입자들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허공 중에 녹아 내리듯 사라졌고 본성의 거대한 문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칼날처럼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않고 열렸다. 딱 한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게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나인은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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