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part 7. 과거 - 아트로포스 (The past)




..... 정말 나는, 그것으로 좋아- 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거기서 무어라고 한 마디, 말을 했다면 일은 이렇게까지 안 되지 않았을까.

잠이 깼을 때, 현현은 자신이 거의 50년만에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나 긴 시간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그것은, 마치 현실이라고 생각 될 정도로 선명했다. 분명히, 세상이 이렇게 변해버린 뒤로는, 그에게서 신이 멀어진 뒤로는 꿈을 꾸지 않았었으니까, 어쩌면 그 이전에는 꿈이 선명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일어나셨습니까? 에스타릇테 파트리아크(Patriarch)님. ”

잠옷을 벗고 하얀 로브의 단추를 막 채우는데, 짧은 로브를 입은 20대 초반의 견습사제 한 명이 들어왔다. 그랬다. 여기는 그렇게나 익숙했던 여관 ‘미풍’ 이 아닌 하이쿼터의 통합신전이었다.
여관과 던젼을 전전하던 모험자로의 생활을 그만두고 신전에 정착하게 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절반의 동료를 잃어버린 그 사건 이후에, 더 이상 함께 다닐 친우가 사라진 것이 첫 이유였고, 한번의 죽음 이후 눈에 띄게 쇠약해진 동생 소오류의 요양 때문이기도 했다.
리는, 그렇게 짧은 편지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가 엔드로 갔다는 것을. 왜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라면,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현현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간은 두달 반이 지났다.

“ ..눈이 내렸군요. ”
“ 네? ”

느닷없는 질문에 옷걸이에서 사제복 위에 걸치는 인사로 나뭇잎을 수놓은 초록색의 신관복을 내리던 견습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현은 하얀 로브만을 입은 그대로 고개를 들어 견습사제의 뒤쪽,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옅은 미소가, 그 입가에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 아, 예, 어젯밤에 내린 모양입니다, 조금 쌓였고요. ”

견습사제는 그에게 어떻게 창문도 없는 이 방에서 그런 것을 알았느냐고 묻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현현은 소슈트라 -기후와 원소를 다스리는 신의 고위사제, 그 스스로의 힘으로 기후를 바꿔버릴 수 있는 사람이, 날씨변화를 모른다면, 그것이 더 우스운 일일 테니까.

“ 이번 겨울의 첫 눈인가요.. 올해는 눈이 늦었군요. ”
“ 따스했으니까요 요 몇 달은. ”

견습사제의 도움을 받아가며 초록색의 사제복을 걸치고, 그 위에 신성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증명인 페넌트를 달면서, 현현의 시선은 덧창까지 단단히 닫혀진 창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묘한 것이었다. 아마 인간으로는 그렇게 깊은 눈빛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현현은, 자신이 살아왔던 모든 시간을 되돌려 기억해 가며 그 창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눈이 내려 있다. 그리고 자신은, 정말로 오래간만에 꿈을 꾸었다.
그것은, 정말 아무런 연관 없는 현상인 걸까.

“ 창을... ”
“ 네? ”
“ 창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
“ 아, 알겠습니다. ”

나무로 된 덧창 너머의, 새하얀 세상. 열린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과 눈부신 반사광이 밀려들어왔다. 은은한 연둣빛 야광석 위에 쌓인 눈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눈부셨으며, 또한 꺼질 듯이 안타까워 보였다.

“ .. 많이 내렸군요. ”

옅은 미소를 띄운 채로, 현현은 누구에게 인지 모르게 자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 눈에는 마력이 있지.
- 마력?
- 세상을 모두 덮어버리는 마력,

누구였을까,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 차갑고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부서지기 쉽지, 하지만 모이면 세상을 덮어 버려...... 그리고 아름다워.

“ 파트리아크님? ”
“ ..... 오늘은 허브원에 잇겠습니다. 찾는 분이 있으면 그리로. ”
“ 아, 예. ”

가볍게 허리를 굽혀 보이고 견습사제는 방을 나갔다. 남겨진 방안에서 현현은 열려진 창밖에 보이는 풍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세상을. 그 눈빛은 깊고, 부드러웠으며, 인간의 그것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세상은 온통 하얀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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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신전 근처는 하이쿼터였다. 고개를 들면 곧바로 왕성이 보이고, 걸어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돌로 포장된 도로에, 주변은 모두 화려한 저택으로 둘러싸인 고급주택지였다. 대부분 하얀 계통의 돌로 지어진 집들은, 더욱 새하얀 눈을 지붕에 얹고, 노랗게 마른 잔디 위에 눈을 얹은 채, 나름대로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집도, 겉보기에는 여타의 다른 저택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집주인의 취향이 보이는 단정하고 심플한 저택의 외견과, 오래된 역사를 증명하는 손때가 묻은 정문의 청동 문고리, 여백과 여유스러움이 느껴지는 깔끔한 정원에서는 하인 두서넛이 통행로에 쌓인 눈을 쓸고 있었고 그 한켠에서는 정원사가 나무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눈 사이로 새빨간 포인세티아 몇 그루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사방은 내린 눈 때문인지 유난히 조용했고, 눈 쓰는 사각거림과 즐거운 듯한 하인들의 이야기소리만이 정원의 고즈넉함을 달래 주고 있었다.
그 고즈넉함을 순식간에 깨뜨린 것은 찢어질 듯한 맹수의 울음소리였다. 사자와 독수리를 섞은 듯한 그 맹수의 울음소리에 사실, 대부분의 하인들은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하인들은 공포에 떨기보다는 의아하다는 듯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 ... 라센이 왜 저러지? ”
“ 글쎄...? “
“ ..가봐야 하는 것 아냐? ”
“ - 나, 난 싫어 ”

하인들이 청소라는 기본적인 업무를 망각하고 소리의 근원지인 안쪽정원을 바라보며 서로 수군거리고 잇는 사이, 또 한번의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맹수의 것이 아닌, 인간의 목소리였다.

“ 대체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듀크니스!! ”
“ 시끄러 주니어!! ”

먼저 들려온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그 뒤를 따라나온 것은, 그에 지지 않을 만큼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 둘 다 거의 싸움에 가까운 흥분한 목소리였지만 다행히도 그 둘은 다 하인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하나는 이 저택의 실질적 관리자인 집사의 것, 또 하나의 것은 이 저택의 주인의 것.
그리고 안쪽 정원에서 한 마리의 맹수와 두 명의 사람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맹수는, 마치 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날개와 앞발과 머리를 달아놓은 듯했다. 눈처럼 새하얀 몸의 모피와는 대조적으로 날개와 가슴에 수북히 난 독수리의 깃털은 새까만 빛을 내고 있었으며, 금속 색에 가까운 노란 눈동자는 육식동물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몸을 구속하는 은줄의 마구-안장과 고삐-가 아니었다면 금방이라도 눈앞에 보이는 누군가에게 달려드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듯한, 그런 맹수였다. 그리고 그 은줄 고삐의 끝을 잡고 잇는 것이 이 저택의 주인이고 지금 자신의 집사와 말다툼을 하고 있는 듀크니스 나인이었다. 성에서 입던 까만 예복 차림이 아닌, 여행용의 망토를 걸치고 배낭을 한쪽 어깨에 걸친 가벼운 차림새였다.

“ 라센을 몰고 나가시면서 ‘잠시 한 바퀴 돌고 올께' 라는 거짓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
“ 주니어! 난 그냥- ”

나인의 또래, 혹은 많아봐야 다섯 살 이상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젊은 집사는 라센의 고삐 한쪽을 꼭 잡고 단호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흥분된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격양되어 고함을 치지는 않았다.

“ 이틀 뒤에 있는 대귀족 연례회의에 올해도 불참하실 생각이시지요? ”

핵심을 찔린 듯, 나인은 움찔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을 뿐, 그녀에게는 라센의 고삐를 놓거나 물러설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나인은 똑바로, 어린 집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날 억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 해리엇 로스트인 주니어? “

이번에는 주니어가 움찔했다.
철이 들 때부터 그녀의 아래에서 일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라왔다. 자신과 같은 이름의 아버지는 이 집안의 집사였고, 그 아버지도 그 아버지도 모두 같은 이름을 가지고 해리엇, 혹은 해리엇 주니어로 불리며 이 집안의 일을 도맡아 해 왔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이 집안의 유일한 주인, 듀크니스 나인이었다. 감정이 잘 보이지 않는 선명한 초록의 눈동자, 어릴 때부터, 주인의 것이라고 보아왔던 그 초록의 눈동자에는 고집과 강한 의지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려나 있었다. 주니어는 한숨을 내쉬면서 잡고 잇던 라센의 고삐를 놓았다.
나인은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라센의 목 부근에 달아 맨 안장에 훌쩍 올라탔다.

“ - 폐하께서 찾으시면 ”
“ 예전처럼 얘기 없이 사라지셨다고 해 놓겠습니다. ”

주니어의 목소리는 예의 단정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조금 전, 그렇게나 흥분했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을 바르게 하고 라센 위에 올라탄 나인에게 꾸벅 허리를 굽혀 보인 주니어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안채로 걸어갔다.

“ 하아-! ”

그리고 나인은 라센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새까만 날개가 활짝 펼쳐지고, 라센의 거대한 몸이 땅에서 떠오르는 가 싶더니, 그대로 공중으로 치솟았다. 퍼득.. 하고 몇 번 검은 깃털이 섞인 바람이 정원 한 구석에 휘몰아치고, 나인을 태운 채로 라센은 하늘 한 쪽으로 사라졌다.
멍하니 나인과 주니어와의 설전을 보고 잇던 하인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신들의 원래 업무인 눈치우기에 다시 열중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사방은 눈 때문에 고즈넉했다. 언제나와 같은, 그런 눈 내린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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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너머로 하이쿼터와 왕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은,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실상은 이 슬럼가의 사람들에게는 세계의 어떤 장소보다 먼 곳이었다.
어두컴컴했던 색조의 좁은 골목에도 눈은 하얗게 쌓여 있었다. 이미 수명의 사람들이 지나다녀 길 위의 눈에는 발자국 투성이었고 몇 군데 사람이 미끄러져 넘어진 자국이나 미끄러지지 말라고 재를 뿌려 놓은 곳도 보였다. 더럽혀지고, 사람의 냄새가 묻어 있는 눈 쌓인 골목길은 꼬불꼬불 길게 이어져, 슬럼가를 미로처럼 잇고 있었다.
그 골목 안에 어쩐지 이질감이 느껴지는 한 사람이 들어선 것은 약간 늦은 아침 무렵이었다. 슬럼과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단정한 얼굴을 한 아직 애티가 남은 얼굴의, 소년이라고도 소녀라고도 말할 수 없는 묘한 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나이는 많아야 열 일곱, 적게는 열 둘까지도 볼 수 잇는, 155cm 쯤 되는 키에 약간은 마른 체형을 하고 있었다.
여행용의 망토를 걸친 조그마한 어깨 위에는 약간 긴 듯한 까만 단발머리가 흘러 내려와 있었다.  단정하게 뻗은 까맣고 가느다란 눈썹, 딥 그린의 눈동자를 감싼 긴 속눈썹, 그리고 매끈히 뻗은 코의 선과 그 아래 자리한 선명한 적색의 입술, 젖살이 채 빠지지 않아 통통한 볼은 추위 때문인지 고운 핑크 색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아이는 거침없이 골목을 걸어 나갔다. 몇 사람이 신기하다는 듯, 아이를 돌아보았지만 그것은 그 아이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아이의 미모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사실, 아이는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귀티가 나는 얼굴과, 하얀 팔목, 그리고 그 팔목에 걸린 두툼한 금팔찌는 이곳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들 중 하나였다. 다만, 아이의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폭이 좁고 날렵해 보이는 검 한 자루와 그것이 매달린 오래된 듯한 벨트, 어쩐지 아이처럼 보이지 않는 당당하고 거리낌없는 표정은 아이가 어떠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이 장소에서 살아나갈 자신이 잇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익숙한 듯, 골목을 걸어나간 아이가 잠시 발을 멈춘 것은 미들쿼터와 슬럼의 경계에 길게 마련된 사창가였다. 사실 사창가라 해도 미들쿼터 쪽의 건물 몇 개는 대귀족들의 저택을 연상시킬 만큼 크고 호화스러운 데다가, 그렇지 않은 쪽도 결코 슬럼의 일부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깔끔하게 단장되어있었다.
제법 폭이 넓은, 건물들의 앞길의 눈은 깨끗이 쓸려 있었고, 엷고 팔랑거리는 옷을 입은 꽃처럼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코트를 어깨에 두르고 길가에 나와 서로 잡담을 하고 있다가, 아이가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호기심에 그 쪽을 돌아보고는 자신들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 여자아이지? ”
“ 남자아이 아냐? ”
“ 귀여워라- 안아주고 싶어. ”
“ 어쩜.. 눈동자가 보석 같아.. ”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아이는 거침없이 골목을 걸어가 제법 규모가 큰 건물 앞에 발을 멈추었다. 외부에 개방되어 안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든 주위의 다른 창관(娼館)들과는 대조적으로 1층의 홀부터 단단히 폐쇄되어 있는데다가 아주 조그마한 창 몇 개만이 나 잇는, 그야말로 상자처럼 사방이 막히고 네모난 건물의 문 위에는 검은 간판에 아름다운 필체의 은빛 문자로 「Square of Night」라고 쓰여 있었다. 무언가 묘한 느낌인 듯, 간판을 올려다보고 방긋 미소를 지은 아이는 그대로 어두운 다크브라운 색조의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창이 없어서인지, 온통 하얀 대리석의 벽에 새까만 흑요석의 바닥이 깔린 홀 안은 어두컴컴했다. 몇 군데 어둠을 밝히기 위한 촛불의 불빛을 하얀 벽이 빛을 반사해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뿐, 사방은 어둡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쩐지 달짝지근한 공기가 그 공간 안에 차 잇는 듯했다.
아이가 들어서자, 홀 안에 있던 몇 명의 하얀 드레스를 차려 입은 여인들이 아이를 돌아보고는 자신들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그리고 그 중 그나마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래도 20대의 초반을 넘은 걸로는 보이지 않는-한 여인이 아이에게 다가왔다.

“ 무슨 일로 왔어요, 꼬마손님? ”

아이는 자신보다 약간 키가 큰 여인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옅게 미소를 띈 다음 아직 변성이 안 된 듯한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 펄을 불러 줘. ”
“ 에...? ”

너무나도 당당한 아이의 반말에 말을 걸었던 여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 왜 그래? 아, 아직 자고 있나? 별수 없군, 내가 직접 가야지. ”

그렇게 말하고 아이는 당황해 하는 여인은 그대로 둔 채, 거리낌없이 홀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마치 이곳에 익숙한 듯한, 그런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아이가 홀 안쪽에 있는 계단을 막 오르려는 순간, 커다란 사람의 벽이 아이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검은 색 튜닉 위에 역시 검은 색의 쉬르코를 걸치고 벨트로 단단히 허리를 조인, 적어도 아이보다 세배는 됨직한 널찍한 어깨를 가진 두 명의 청년은 계단을 가로막은 채, 눈을 깔고 위압적인 포즈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 왜 펄 누님을 만나려는 거지 꼬마? ”
“ 너희들이랑은 상관없어. ”

아이는 전혀 움츠러들거나 위축되지 않은 태도로 앞을 막아 선 두 명의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오히려 그 말투에는 청년들에 대해서 약간의 짜증이 배어 있기까지 했다. 마치 청년들은 상대조차 하기 싫다는 듯.

“ 언제부터 여기서 손님을 이런 취급을 했지? ”

약간 체격이 큰 청년의 관자놀이가 꿈틀 하고 움직였다. 입을 다문 채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어금니를 한번 간 청년은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자신이 화가 나고 있음을 확실하게 피력하는 듯한 목소리로 으르렁대며 말했다.

“ 좋게 말로 할 때 나가는 게 좋을 거다 꼬마야, 여긴 어린애 놀이터도 아니고, 혹시 여기서 일하고 싶은 거라면 한 오 년 뒤에 다시 오는 게 좋을 거야. ”

그리고 청년이 겨우겨우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가며 했을 그 말은, 완벽하게 무시당했다.

“ 시끄러, 비켜. ”

아이는 두 사람의 서 있는 것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이 그대로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걸리적거리는 것은 치워버리겠다는, 그런 당당한 기세였다. 그리고 청년이 폭발했다. 청년은 거세게 아이의 가느다란 팔뚝을 한 손으로 움켜쥐며 그대로 건물 밖으로 끌어낼 듯 잡아당겼다. 청년의 예상대로라면 아이의 조그만 몸은 가볍게 청년의 힘에 끌려서 그대로 창관 밖으로 던져져야 했다. 그러나 그런 청년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이는 자신의 팔뚝을 움켜쥔 청년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그것뿐이었다. 힘을 주어 꽈악 잡는다던가, 무언가 특별히 관절을 꺾어 쥔다던가 하지도 않았다. 그저 단순히 손목을 잡았을 뿐이었지만 청년은 자신의 손목이 끊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잡고 있던 아이의 팔뚝을 놓치고 말았다.

“ ... 정말 언제부터 아이들 교육을 이 따위로... ”

아이는 자신의 팔뚝을 잡았던 그 손의 손목을 잡고는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청년의 입에서 숨막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고 옆에서 보고 있던 다른 청년은 황당한 표정으로 동료의 얼굴과 잡힌 손목을 번갈아 바라 볼 뿐이었다. 청년들이 나올 때 뒤로 물러 난 여인들은 이 돌발적인 사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고 홀 구석에서 그네들끼리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의 눈은 정말로 화가 난 것처럼 차가웠다.

“ 아침부터 떠드는 건 누구야? 정오 전에는 깨우지 말라고 했지? ”

계단 위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홀 안의 기묘한 고요함이 점점 차가움으로 변해 갈 때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불안함이 가득하던 여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언니-! ”
“ 펄 언니! ”

아이는 여전히 청년의 손목을 잡은 채로 계단 위를 올려다보고는 굳어 있던 얼굴에 피식 하고 미소를 띄웠다.

“ 정오까지는 20분 남았다, 펄. 늦잠 자는 건 여전하구나. ”
“ 어마.. 이 목소린... ”

타다닥, 급한 발소리와 함께 계단 위에 한 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반쯤 비쳐 보이는 하얀 나이트 가운 위로는 긴 은발이 물줄기처럼 흘러 내려와 있었다. 거의 검은빛에 가까운 다갈색의 매끄러운 피부, 머리칼과 같은 속눈썹 속에서 빛나는 물기 있는 포도주색의 눈동자와 통통한 핑크 빛의 입술, 균형이 잘 잡힌 얼굴의 양쪽에는 흘러내린 은발을 넘어서는 길이의 긴 귀 끝이 살짝 내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의 엘프였다.

“ 미스터 헤이든! ”

반가움이 가득한 그녀의 탄성에, 계단 아래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쏠렷다. 청년들의 놀란 듯 휘둥그래진 눈과, 여인들의 궁금함이 가득 담긴 눈. 그리고 미소짓고 잇는 아이- 미스터 헤이든의 눈. 아이는 그제야 잡고 잇던 청년의 손목을 놓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 오래간만이야 펄. ”
“ 세상에-!! ”

펄은 날 듯이 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며 계단을 뛰어내려와서는 아이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아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감격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32년 만이야.... ”
“ 알아. ”

아이는 자신의 어깨에 파묻힌 펄의 머리를 몇 번 쓱쓱 쓰다듬고는, 어른스럽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안아들었다. 새하얀 손가락이 가볍게 펄의 다갈색 피부를 보듬고, 펄의 눈꼬리에 맺힌 이슬을 쓱 하고 닦아냈다.

“ 조금 컸네 ”
“ 응... 당신, 여전해. ”
“ 이것도 운명인가 봐. ”

펄은 아이의 말에 헤헤거리면서 귀엽게 웃었고, 그런 그녀를, 청년들과 다른 여인들은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펄은, 이곳의 주인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저 모습이었고, 그네들의 선배로부터 들었던 것도 저 모습이었다. 엘프의 나이-특히 어둠의 엘프의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이미 20대 중반의 모습을 하고 있는 펄의 외형으로 보아서, 그녀의 나이는 적어도 백여살에 가까울 것이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저런 아이를 반가워한다는 것은, 무언가 그들의 사고구조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시간의 갭이 존재하고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두 가지는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아이가 남자라는 것과, 그녀의 소중한 손님이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약간은 언밸러스한 형태로 아이를 끌어안고 잇던 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손목을 감싸쥐고 있던- 조금 전까지 아이를 가로막았던 청년은 움찔하고 물러났고, 여인들은 한번 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무례한 짓 한 건 아니겠지? ”

아이에게와는 전혀 다른, 차갑고 날카로운 펄의 목소리에, 물러낫던 청년은 더욱 더 목을 움츠렸다. 펄은 차갑게 가라앉은 포도주색의 눈동자로 청년을 쏘아보았다. 그 시선은 다크엘프 특유의 독살스러움이 실린,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매서운 시선이었다. 상황판단이 빠른 그녀는 그런 청년의 태도로 조금 전, 자신이 내려오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짐작해 낼 수 있었고, 그녀가 사실을 알 거라는 것을 청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잇는 여인들은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청년은, 잘못을 시인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계단 아래 서서 아픈 손목만을 잡고 주물렀다.

“ 됐어 펄, ”

건드리면 끊어질 듯한 팽팽한 분위기에 아이의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화가 나 있거나, 짜증이 난 목소리가 아닌, 재미있다는 듯 약간은 웃음기가 실린 그런 목소리였다. 청년을 바라보던 펄이 시선을 돌렸다.

“ 쉬고싶으니까, 계단 아래 세워두는 건 적당히 하라고. ”
“ 아, 그래 그럼, 방은 예전에 거기로 괜찮지? ”
“ 거기라면. ”

펄은 조금전의 표독스런 시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긋 웃는 얼굴로 아이의 어깨를 감싸고 계단을 올라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계단 위쪽으로 사라지고, 그 발소리가 멀어지자, 간신히 청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 노, 놀랬다. ”
“ 정말로 아는 사이일 거라고 누가 믿냐구... ”

두 청년은 황당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두 사람이 올라간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이 Square of Night의 여러 방중에서도 로얄급에 속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화려한, 펄의 손님이 묵는 곳이었다.

“ 하지만 멋져. ”
“ 응, 정말, ”
“ 언니 손님이라니 아쉬워.... ”

계단 위를 올려다보며 소곤거리는 여인들의 말에, 손목을 잡고 잇던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네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은 바보 같은 꼴을 당했는데 그를 멋지다고 하는 그녀들이 조금 야속한 것도 있었고, 조금 전까지 그렇게나 겁먹어 물러서 있었으면서 바로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신기해서이기도 했다.

“ 그나저나. ”
“ 응? ”
“ 손목, 왜 그랬어? 고작해야 아이 힘이잖아? ”
“ ..아아 그것. ”

청년은 감싸쥐고 있던 손목을 풀어 보여주었다. 굵은 손목에는 또렷하게 잡았던 손 모양의 멍이 들어있었다.

“ 적어도... ”

잡혔던 때의 아픔을 되새기면서, 청년은 낮게 중얼거렸다.

“ ..단순한 아이가 아닌 건 확실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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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56 장편 텅 빈 이야기 -1- 돌진 정대영 2005.10.12 0
155 장편 SOLLV 에피소드 일곱 넷 이야기.2 김현정 2005.07.24 0
154 장편 SOLLV 에피소드 일곱 셋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53 장편 SOLLV 에피소드 일곱 둘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장편 SOLLV 에피소드 일곱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51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여덟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50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일곱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49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여섯 이야기. 김현정 2005.03.15 0
148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다섯 이야기. 김현정 2005.03.10 0
147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넷 이야기. 김현정 2005.03.07 0
146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셋 이야기. 김현정 2005.01.12 0
145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2.11 0
144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30 0
143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일곱 이야기 김현정 2004.11.30 0
142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여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19 0
141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다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10 0
140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8 0
139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8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7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