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해가 지고, 주황빛이었던 허공은 보랏빛으로 변하며 점차 짙은 남빛으로 가라앉았다. 잉크를 물에 푼 것과 같은 그 남빛의 어둠 속을 몇 줄기의 비콘 라이트가 가로질렀다. 들뜬 웅성거림과 언성을 높이지 않은 흥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스타디움 한 면에 설치된 무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비콘 라이트의 불빛이 비치지 않는 듯, 어둠이었다. 새까만 어둠이 비밀스럽게 그곳을 덮고 있어서, 빛 속에 선 관객들에게는 그 안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둠을 떼어, 그것으로 커튼을 만든 것처럼.
언제부터인가, 스타디움 안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입장할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전광판에서 흘러나오던, 거리를 가득 메우던 그 곡조는 어쩐지 오늘따라 조금 더 달콤한 느낌이었고, 사람들은 익숙한 그 곡조를 흥얼거리면서 기대감으로 어둠 속의 무대를 바라보았다. 누구도 크게 소리내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흥분과  기대감이 담긴, 홀린 듯 한 눈을 하고 무대를 응시했다.
세 번인가 멜로디가 리플레이 되었을까. 그 곡조에 아주 희미하게 변화가 생겼다.
목소리.
달콤하고 부드러운, 끊어질 것 같이  가느다라면서도 흘러내리는 물처럼 유연한  목소리가, 그 곡조에 맞추어 노래하고 있었다. 사랑의 노래를.  
흠칫, 무대를 주시하고 있던 리의 어깨가 가늘게 반응을 보였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마치 그 목소리가 키워드라도 되었던 것처럼, 리의 가슴은 그날 밤처럼 뛰기 시작했다. 불안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낮선, 이상스럽게 흥분되는 두근거림.

  속삭여 줄게요
  작게, 당신만이 들을 수 있게
  크게, 당신이 확신할 수 있게

  I Love You.
' 당신을 사랑한다' 고
  Ich Liebe Dich.
' 당신을 사랑한다' 고
  워 아이 니
' 당신을 사랑한다' 고

그 목소리는, 지금까지 멜로디를 들어왔던 사람들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도 저런 목소리가 존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상상했던 최상의 아름다운 목소리에서, 장점만을 따온 것이라 해도 믿어질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낮게 귓가에서 속삭이듯이 다가오다가도 어느새 새처럼 까르르  높게 웃으며 달아났다. 지금에라도 당장 사랑에 빠지게 할 듯이, 그녀의 목소리는 마음을 끌어당겼다.
세영은 급히 귀에 꽂혔던 무전기의 이어폰을 뽑고, 가슴 앞에서 늘어져 잇던 워크맨의 이어폰을 그 자리에 꽂았다. 들으면 안 된다. 자신은 저것에 버틸만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볼륨을 높이고, 외부의 소리에서 자신을 차단시키고, 세영은 귓속에서 바로 머리로 울려오는 듯한 하자트리안의 '칼의 춤'의 강렬한 선율을 들으면서 어둠으로 가려진 무대를 응시했다.

' 부탁한다 콜. '

  아이시테루.
  사랑한다고
  쥬뗌므.
  사랑한다고
  에고 테 아므,
  당신을 사랑한다고

조금씩 조금씩, 목소리는 커져갔다. 처음에는 그저 작게, 멜로디에 섞이어 나오던 그 목소리는 점차 노래의 주도권을 잡고 스타디움을 채워갔다. 관객석은 이미 침묵이었다. 수만 명의 사람이 그곳에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무도 소리내지  않았다. 단지, 노래만이 그곳에 존재하는 듯이.
라에느는 한숨을 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만 그것이, 현실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 속처럼 조용해진 관객석과 잡음 하나 섞여 나오지 않는 속삭이는 음조의 그녀의 노래, 처음 그녀의 노래를 들었을 때의 충격만큼은 아니었지만 헤드폰으로 울려오던 조악한 음질의 그 데모 씨디에서 들려오던 목소리와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차이는 컸다. 라에느는 입술을 악물고, 리가 있음직한 장소를 바라보고 세영이 있음직한 자리를 올려다보았다. 마인드 배리어가 없는 세영은 이어폰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아예 듣지 않고 있을 테지만, 그는 어떨까.
차가운 옆얼굴, 표정 없는 단정한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인상에 남아, 라에느는 그가  있음직한 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스승님이 그랬듯이, 그도 철벽같은 마인드 배리어를 가지고 있을까,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그녀의 목소리에 매혹되지 않을까. 아니면.... 라에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어둠 저 편에 있을 그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애써, 노래를 듣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조용해진 것은 관객석만이 아니었다.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마련된, 두터운 유리로 둘러친 VIP석 안도 그 노래만이 들려올 뿐, 조용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무대는, 여전히 어둠 색의 커튼에 가려져 있었지만 세티는 멍하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싸인 무대를 내려다보면서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것은 여성인 자신이 듣기에도, 너무나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 아름답지 않은가. "

옆에서 들려온 낮고 익숙한 목소리에, 멍하니 그 노래에 빠져있던 세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조명 빛으로 묘하게 아스라이 보이는, 자신이 섬기는 자의 옆얼굴은, 이상스럽게 멀고, 낯설게 보였다.
이드의 시선은, 세티가 아닌 유리창 너머의 어둠을 향해 있었다. 아니, 아마도 그 너머에 있을,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세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어둠, 아무 것도 반사해 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이드의  깊은 눈동자와도 같은, 이드의 긴 머리칼과도 같은.  
손가락을 턱 아래에 살짝 괴이고, 자연스러운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앉은 이드는, 너무나도 편안한 자세로 무대를 바라보고는 있었지만, 세티는 이드의 모습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눈빛, 언제나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보곤 하는 그의 눈빛이, 지금은 자신과 동등한, 아니 혹은 자신보다 더 높을 지도 모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이질감이었고, 낯섦이었으며, 두려움이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당신이 어떤 언어를 쓰던 간에,
알아들을 수 있도록 속삭여 줄 테니까.

여전히 스타디움을 채우는 목소리와 암흑, 낯설게 보이는 익숙한 사람의 옆얼굴.

" 우스운 일이지, 가장 부족한 자가 가장 완벽하게 보인다는 것은... "
" ..마스터? "
" 그리고 그것으로 비틀리고..... "

그의 목소리조차, 평소의 그와 틀렸다. 어딘지 읊조리는 듯한 낮고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 음악에 묻혀서 그 목소리는 그렇게 확실하게 세티에게까지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만 막연한 불안감만을, 그녀에게 가져다 줄 뿐이었다.

사랑한다고....

언제 존재하던 간에
어디에 존재하건 간에
사랑한다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속삭여 줄 테니까

-------------------------------

꿈꾸는 듯, 시간이 노래와 함께 흘러갔다, 스타디움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 앉은, 단순히 노래를 듣기 위해 오지 않은 몇 사람들은, 그 노래를 즐기지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무대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노래가  시작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대는 암흑이었고, 거기에서 무언가 더 변한다거나 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말해주지도 않고,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그저 그 목소리만을 들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라에느는 평상심을 잃을 정도로 초조해 하고 있지는 않았다. 약간은 긴장된 손을 꼭 맞잡고, 첫 번째의 신호가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올려다 본 하늘은, 스타디움의 수많은 조명들로 인해서 밝은 보라색으로 보였고, 달도 별도, 그 밝음에 눌리어 보이지 않았다.  
리는 태연히 무대가 아닌 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옆의 누구도, 리에게까지 신경을 쓸 정신은 아닌 듯 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무대 쪽으로 쏠려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리 역시 그랬다. 그러기에 애써 그것에서 시선을 돌리려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목소리가 가져다주는 이상한 두근거림이, 폭풍처럼 자신의 몸을 감싸고 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스런 설레임, 그것만으로 표현하기엔 무언가 부족한, 그 어떤 것. 약간, 호흡이 힘들어져서 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두근거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노래는 허밍으로 바뀌어져서 후렴구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사랑스럽고 달콤한 비음이, 여전히 어둠으로 덮인 무대를 채우며 흘러나와, 스타디움 안으로 퍼져나갔다.
그 어둠을, 다른 음악을 들으며 바라보고 있던 세영에게 그 음악조차 몰아내 버릴 만큼 강력한 외침이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져 들어왔다.

- 세영씨 눈 감아요!!!

그것이 콜의 텔레파시구나 라고 인식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세영은 눈을 감아버렸고, 그 바로 다음 순간, 감은 눈꺼풀 위가 갑자기 밝아지면서, 감은 눈 속까지 빛이 파고 들어왔다. 무대의 조명이 들어온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사이, 아까 까지 완전히 침묵이던 아래쪽 관객석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한숨처럼 터져 나오는 탄성과, 무언가를 말하고 싶으면서도 차마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숨의 내뱉음, 그리고, 혹은 경악에 가까운 소리 없는 비명, 그런 것들이 그녀의 허밍에 섞이어 세영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세영은, 조심스럽게,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앞으로  어떠한 것이 보이더라도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밝고 눈부신 백색광이 스타디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암흑으로 덮여 잇던 그 무대 위에는, 당연한 듯이,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 '누군가'를 확인하려고 시선을 돌린 순간, 세영은 자신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거기에 서 있는 것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길게, 무릎까지 내려오는 짙은 블루의 머리칼은, 조명을 받아 마치 보석처럼 투명하게 빛나면서도 금속처럼 매끄러운 질감을 내고 있었고, 얌전히 가슴 앞에서 마이크를 모아 잡은 손목은, 드레스보다 더 하얗게 보이면서도 발그레하니 고운 혈색을 띄고 있었다.
그녀는 별달리 움직이거나 하지도 않고, 그저 무대 한 가운데에서 마이크를 잡고, 속눈썹이 긴 눈을 살짝 내려 감은 채, 조명이 들어온 것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흥얼거리며 허밍하고 있었다. 먼 빛에서도 그런 그녀의 모습은 선명하게 세영의 눈 안으로 각인 되어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단순히 그 한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것이었다. 마치 조명이 아닌, 그녀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할만큼, 그녀는 한없이 아름다웠고, 한없이 사랑스러웠고, 그러기에 더욱 이 세상의 존재 같지 않은 경외감까지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라에느 역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의 몇 사람들처럼 기절한다거나, 혼을 빼앗긴 듯이 멍한 눈빛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오히려, 공포에 가까웠다. 세상에 저런 존재가 있을까 하는, 이상스러운 공포. 분명히 인간인 것을 알면서도, 인간이 아닌 듯이 보이는 공포. 그러나, 자신의 눈앞에 서 잇는 것은 분명히 인간이었다. 홀로그래픽이나 CG 가 아닌, 따듯한 피가 그 안을 채우고 있을 것 같은, 사람.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선 그녀의 모습은, 끌어안아 주고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몇 겹이고 투명한 레이스 소재의 천을 십 수 겹 겹쳐 만들었음직한 새하얗고 폭 넓은 드레스는 가슴 바로 아래에서 넉넉하게 품을 두고 맨 머리칼과 같은 색의 리본 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몸의 라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몇 겹의 레이스들은 바람이 없음에도 그들 스스로 살랑살랑 흔들리면서 우아하게 드레이프 되어 그녀의 가느다란  몸을 휘감았다. 그 드레스 위로 윤기 있는 블루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모습은, 묘하게 소녀적이면서도 성숙한 듯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음악이 멎으면서, 그녀도 허밍을 멈추었다. 그와 함께 약간의 소란이 번져나가던  관객석도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녀의 살짝 다문 장미색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이 살짝  떨렸고, 잠시 머뭇거린 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또렷한 얼굴의 윤곽이 눈부신 조명 아래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모양 좋게 오똑한 코의 선도, 살짝 감은 은행껍질 같은 눈꺼풀도, 그리고 그 아래에 길게 드리워진, 머리칼과 같은 빛의 속눈썹까지, 그 눈꺼풀이  움찔 하는 것 같더니,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아래에서 드러난 것은, 선명한 금록(金綠)빛의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의 빛에, 리는 무언가로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한, 가슴을 잡아  뜯는 것과도 같은 아픔, 무얼까, 무얼까 이 감정은.  그녀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가수처럼 가냘프고 작지 않았다, 비슷한 톤의 블루 헤어라고 해도, 그저 그녀의 눈동자에 금빛을 덧씌운 듯한 빛깔의 눈동자를 가졌다고 해도 그녀의 바다색 초록 눈동자는 좀 더 차고.... 문득, 리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어렸을 때, 그리고 그녀가 어렸을 때, 그녀는, 저렇게 밝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었다. 천진하고 초롱초롱한, 지금처럼 차지 않은 눈동자를.
금록의 눈동자를 놀라운 듯이 동그랗게 뜨고,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스타디움의 관객석을 훑어갔다. 가운데에서 시작해서 천천히 오른쪽으로, 그리고 거기서 다시 가운데를 거쳐서 왼쪽으로, 마치 신기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더 커지는 듯 싶더니 발그레하던 뺨이 확 하고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아... 저... "

그녀는 재차 고개를 숙일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모르면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모습이 공개되지 않는 것에 대해 솔브 엔터테이먼트가 외부에 해명할 때마다 언제나 걸고 넘어졌었던, 그녀의 대인공포증이 정말이라는 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아마도, 관객들이 보지 못하는 그 암흑 너머에서, 그녀 역시 관객석을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않은 채 노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여전히 두근대는 가슴을 움켜잡은 채, 리는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놀라움, 아니 차라리 그것은 경악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전혀 다른 두 사람, 아무런 연관도 없을 두 사람, 꿈 속의 그녀와 지금 눈앞에 선 가수. 이성은, 그 두 사람이 다른 존재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은 왜?! 심장을 쥐어짜는 듯이 강한 통증이 가슴 전체로 퍼져왔다, 그것이 단지 통증인지, 아니면 그 외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시선에 어쩔 줄을 모르고 마이크를 꼬옥 쥔 채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보일 듯 말 듯이 살짝 고개를 숙여 관객석에 인사했다. 아까와는 다른 탄성이, 관객석 사이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 저.. 이렇게 와 주셔서.. 뭐라고 해야..할...지... "

마이크라는 도구를 통해 나오는 것임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조금 전 노래와는 전혀 다르게 애써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희미한 기계의 잡음에 묻히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그 목소리는, 이상스럽게도 그녀에 대한 호감을 깎아 내리지는 않았다. 아니,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에 귀여움과 묘한 보호본능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 조그만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 저 작게 떨고 잇는 어깨를 감싸서 불안함을 달래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무대 한 단 아래에서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하고 무대를 올려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매니저인 이 해승, 그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로, 관객석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각에 있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그저, 그의 '레이디'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디링-
해승의 손가락이 건반을 눌렀다. 그 소리에 무대 위에 선 그녀는 살짝 해승을 내려다보았다. 동그랗게 뜬, 신비로운 금록색의 눈동자. 보일 듯 말 듯 해승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피아노의 건반을 짚어 나갔다. 재즈 풍으로 편곡된 발라드곡이였다.
세영은, 멍하니 무대를 보고 있다가 음악의 트랙이 넘어가는 침묵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피아노 건반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나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무언가 역부족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뿐이었다.
피아노 하나뿐인 연주는, 약간 웅성거리기 시작한 스타디움을 어느덧 다시 침묵으로 돌려놓았다.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전자기기를 사용하지 않은 옛 방식의 피아노에서 느낄 수 있는 은은함이나 육중함이 그 음에 실려 있다는 것을, 같은 피아노를 사용하고 있는 세영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세계 최고니 국내 최고니 하는 수식어를 붙일 정도로 노련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기본기에 충실한 그 연주는 그녀의 다음 노래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인 채, 무대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장미색 입술이 언제 다시 열릴지에만 집중했다.
연주 처음에는 여전히 새빨간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코드가 진행되어 나가면 나갈수록 점점 평상심을 되찾았는지, 편안한 미소 띈 얼굴로 바뀌어 갔다. 녹을 듯이 달콤한, 그런 아름다운 미소를 가득 담은, 그런 아름다운 얼굴로.
그 모습은 마치, 음악이 그녀에게 힘을 불러 넣어주는 듯한 장면이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은 천천히 홍조 뛴 복숭아 색으로 변해 갔고, 부끄러운 듯 아래를 바라보던 아름다운 눈동자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기대감을 더욱 더 자극하듯이 살짝, 장미색 입술이 움직였고, 한없이 길었던 영원의 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I Believe in miracle
그것이 어떤 것이든,

I Believe in miracle
그때가 언제이든

I Believe in miracle
진심으로,

조금 전, 러브송을 부르던 그 목소리와 부끄러운 듯이 인사하던 목소리, 그리고 지금, 다시 노래를 시작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동일 인물의 목소리라는 공통점과 함께 누구라도 알아챌 것 같은 선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달콤하게 속삭이는 듯한 은밀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경쾌하게 마음을 쓸어 내리는 바람 같은 미성이 같은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에는 유리로 만들어진 종을 울리는 것과 같은,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있었다. 한 점, 어느 한 점이라도 실수한다면 유리종은 깨어지고 아름다운 목소리는 깨어진 종처럼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버리게 될 듯한, 그런 긴장감.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그 가느다란 긴장감 위를 유유히 건너가듯이 그렇게 노래하고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영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꽈악 물고는 시선을 내렸다. 콜의 경고가 없었다면, 그랬더라면 여전히 정신을 빼앗긴 채, 그녀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음악을 듣지 않았는데도,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이란 말인가,
세영은 스코프를 눈에 대고, 노려보듯이 그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다시는 저 모습에 홀리지 않으리라, 내가 실수하게 된다면, 이 계획 전체가 날아가게 될 테니까. 스코프 속의 그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노래하고 있었지만, 그 노래는 여전히 세영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작은 것이라도 좋아요,
하나 하나 떼어가던 꽃잎이
‘ 사랑한다’를 마지막으로 하는
그런 자그마한 기적,

그런 것이라도, 믿고 있다면
이루어 질 거예요

큰 것도 상관없어요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당신의 굿모닝 키스를 받게되는
그런 커다란 기적,

그런 것이라도, 믿고 있다면
이루어 질 거예요.

다시금, 관객석은 침묵에 잠겼다. 아까의 달콤함에 휩싸인 침묵과는 그 성격이 조금은 틀린, 아슬아슬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조마조마함과, 감탄이 섞인 그런 침묵이었다. 어쩌면, 저런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을까, 그 목소리는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과도 같은 느낌을 주면서 다가와, 산들바람의 감촉을 남기고 사라지는 그런 독특한 기분을 만들어 주는 목소리였다.
마치 인간의 그것이 아닌 것처럼, 라에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지 그것 하나였다.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어야 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다른 목소리를, 그것도 톤이나 울림이 다른 것이 아닌, 느낌이, 오라 자체가 다른 목소리를 만들어 낸단 말인가. 게다가, 그것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자신의 상식으로는 절대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I Believe in miracle
마음이 닿으면

I Believe in miracle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I Believe in miracle  
이루어 질 거예요, 분명히.    

심장의 통증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하게 쥐어짜듯이 흉곽 전체를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이다, 절대 같지 않다,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녀의 움직임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인형처럼 무대의 한 가운데에 서서 양손으로 스탠드 마이크를 살짝 붙잡고,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거나, 혹은 어깨를 살짝 움직이거나, 기껏해야 손을 마이크에서 떼거나 할뿐이었다. 그러나 그 단순하고 제한된 동작들은 이상스럽게도 신비롭게 다가왔다. 극히 작은 그녀의 움직임에도 아름답게 일렁거리는 하얀 레이스의 드레스자락, 물결처럼 흘러내린 새파란 머리카락,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지고 있는 조명.
그녀는, 가끔 살짝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려뜨리긴 했지만, 곧 고개를 들고, 똑바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관객석도, 그 속의 누군가도 아닌, 허공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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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은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는 것은 몇 십개 일지도 모를 수많은 모니터들이었다. 그것들은 각자 다른 화면을 띄우고 둥글게 원형으로 늘어서서 누군가를 감싸듯이 빛나고 있었다. 조용한 어둠 속에서 모니터들의 나지막한 울림이 들려왔다.
그 한 가운데에, 소년이 서 있었다. 전혀 이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평범한 옷을 입은 소년은, 모니터들이 이루어 내는 원통형의 한가운데에 서서,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양손을 가슴 앞으로 내밀고 무언가를 만지고 잇는 것처럼 그 손가락을 연신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소년을 둘러싼 모니터의 화면들이 변화해 갔다. 그것들은, 어느 것은 단순한 바와 스크롤로 표시된 그래프를, 또 다른 것은 카메라에 비치고 잇는 듯한 약간 흔들리는 실사의 영상을, 그리고 어느 것은 3D 폴리곤으로 만들어놓은 듯한 건물의 평면도 등, 무어라 하나로 규격 지을 수 없는 다양한 영상들을 띄우고, 지우고 윈도우로 겹쳐 내고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빛이, 영상에 따라 소년의 얼굴을 밝혔다 사라졌다를 되풀이했다.
어느 순간, 소년은 감고 있던 눈을 반짝 하고 떴다. 새파란 눈동자가, 모니터의 빛을 받아 묘한 금속 빛으로 빛났다. 소년은, 그 새파란 눈으로 구석 모니터에서 점멸하고 잇는 디지털의 시계 문자판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새빨간 숫자는 pm 08 : 29 : 43 에서 맨 마지막의 숫자를 하나 하나 올려 가는 중이었다. 소년은 귀에 꽂힌 리시버를 만지작거리고, 거기에 달린 마이크를 살짝 어루만졌다.
시계의 초시계가 두 개의 0을 띄워 올리는 순간, 소년은 입가에 살짝 옅은 미소를 띄우고 낮지만 확실하게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 Let's Di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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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54 장편 SOLLV 에피소드 일곱 셋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53 장편 SOLLV 에피소드 일곱 둘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52 장편 SOLLV 에피소드 일곱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51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여덟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50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일곱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49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여섯 이야기. 김현정 2005.03.15 0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다섯 이야기. 김현정 2005.03.10 0
147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넷 이야기. 김현정 2005.03.07 0
146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셋 이야기. 김현정 2005.01.12 0
145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2.11 0
144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30 0
143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일곱 이야기 김현정 2004.11.30 0
142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여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19 0
141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다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10 0
140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8 0
139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8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7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6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다섯 이야기1 김현정 2004.11.02 0
135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