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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Angel of the night <02>

2006.03.04 19:4103.04

게시판에 금지단어(아-르-바-이-트!)가 있더군요. 수정이 될 때까지는 A르바이트가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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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후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경찰청에 와 있었다. '서'도 아니고 '청'이라니, 어쩌면 그 정신병자 엄청 유명한 연쇄살인범인지도 모른다. 수사에 협조하면 고맙다는 의미로 돈이라도 주려나?

"거기서 기다려요."

정신병자를 향해 모가지를 뽑느니 어쩌느니 했던 남자는 알고 보니 경찰청 특수범죄부 4과 소속의 박우현 경감이라고 했다. 경감쯤 되면 무슨 만화에서 본 것처럼 양복 빼 입고 우아하게 추리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지? 여진은 의자에 기대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종이컵을 내밀었다.

"커피라도 마시고 있어요. 이름이 뭐예요?"

"조여진인데요."

자동적으로 대답하며 커피를 내민 사람을 보던 여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커피를 들고 온 여자는 이런 곳에서 일하기보다는 아직 학교에 다녀야 할 정도로 어려 보였다. 150cm쯤 될까 싶은 키에 짧고 윤기 흐르는 단발머리, 작고 갸름한 얼굴에 살짝 들린 귀여운 코, 조그만 입술, 어울리지 않는 시커먼 선글라스.

커피를 받아든 다음 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직원이에요?"

"네. 커피 심부름 해요."

여자가 미소를 방긋 지었다. 여진은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블라우스에 털 달린 조끼, 카키색 하렘 바지에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워커가 꽤나 잘 어울리긴 했지만 어쨌든 너무 어려 보인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장 취직한 건지도 모른다. 여진 자신도 스물 넷밖에 안 되긴 했지만 이 여자는 너무나 어려 보였다.

늙은 거야, 고등학생이 이렇게까지 어리게 느껴지다니. 한숨을 삼키고 여진은 커피를 홀짝였다. 시커먼 색깔과는 달리 커피 맛은 꽤 부드러웠다.

"맛있죠?"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그녀를 보고 방긋 웃었다. 여자의 눈이 옅은 갈색을 띠고 있는 걸 보고 여진은 살짝 눈살을 찡그렸다. 혼혈인가? 뭐 그런 걸 지적하는 건 아무래도 무례한 일이겠지.

"그럼 아까 본 거 이야기를 해볼까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볼래요?"

"그런 건 아까 그 경감님한테 말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여자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조그만 분홍색 입술이 오므라들고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한 기색이 어린다. 여진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서 고개를 돌렸다. 사라진 경감이란 사람은 돌아올 기색이 없다.

"저기 잠깐 나 좀 봐요."

여자의 말에 여진은 다시 돌아보았다. 여자가 그녀를 빤히 노려본다.

"자, 날 똑바로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말해 봐."

이 여자도 제정신이 아닌가? 여진은 인상을 조금 더 찌푸리고 커피 컵을 옆에 내려놓은 다음 팔짱을 꼈다.

"저기 미안하지만, 커피 심부름 하는 사람이라면서요. 아무한테나 다 말하면 나중에 두 번 일 해야 되잖아요. 그냥 나중에 한 번에 말할래요. 그 박우현 경감님인가 하는 분 좀 얼른 불러다 줄래요?"

여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처럼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연한 갈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붉은 빛을 띤다. 여진은 이상한 기분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말도 안 돼. 오늘 너무 이상한 일을 겪어서 그런 거겠지.

"말도 안 돼. 어떻게 된 거야? 너......"

내가 왜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애한테 반말지거리를 당하고 있어야 되지? 짜증이 무럭무럭 솟아오른다. 여진은 한숨을 푹 내쉬고 가능한 한 싸늘한 얼굴로 여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정말이지 나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내일도 아침부터 일하러 가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빨리 그 경감님 좀 불러다 주세요. 알겠죠, 아가씨?"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여자가 기가 막힌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나서 복도 끄트머리로 달려가더니 사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은 채 여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런 짜증나는 경우가 다 있담. 경찰청이든 뭐든 공무원들 있는 데는 다 이 모양인가 보지?

정신병자 탓에 엉망진창이 된 뻣뻣한 머리를 쓸어 내리고 다시 끈으로 묶은 다음 팔짱을 낀 채 그녀는 기다렸다. 3분쯤 있으니 아까 여자가 들어갔던 안쪽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우현과 그 여자, 그리고 낯선 남자였다.

도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여진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온다.

"정말로 안 통했어! 믿어 줘. 저 여자 뭔가 이상하다니까. 날 똑바로 쳐다보면서 아무한테나 말하기 싫으니까 덱스를 불러달라고 했다고!"

"쉿, 조용히 해. 들리겠어."

"들리긴? 이 거리에서 이게 들리면 사람이 아니라 뱀파이어지. 이렇게 시끄러운데."

여진은 다시금 한숨을 삼켰다. 오늘따라 한숨 쉴 일이 너무 많다. 종이컵을 구기며 아무 것도 못 들은 척 앉아 있으니 세 사람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낯선 남자가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자를 때가 조금 지난 듯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긴 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 눈웃음이 매력적인 남자였다.

"저는 4과 과장인 최현호라고 합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조여진인데요."

"예쁜 이름이네요. 여기 너무 오래 앉혀둬서 미안합니다. 먼저 처리할 일이 있었거든요. 우리 사무실로 우선 좀 갈까요?"

여진은 일어섰다. 서고 보니 남자의 키는 그녀와 비슷한 정도였다. 경찰청의 과장이라는 직함에 걸맞는 카리스마나 품위가 풍긴다기보다는 오히려 상냥한 학교 선배 같은 이미지다. 현호가 그녀를 재빠르게 훑어보더니 빙긋 웃었다.

"굉장히 크네요. 모델인가요?"

"이 얼굴에 설마요."

여진은 어깨를 으쓱이고서 세 사람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손바닥만한 데다가 어두컴컴한 편이었다. 머리 위의 형광등이 깜박거리자 현호가 한숨을 내쉬고 여자를 돌아보았다.

"가서 1과에다가 형광등 갈아달라고 신청하고 와."

"왜 제가 해야 돼요? 덱스 시켜요."

"어서."

현호가 단호하게 말하자 여자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자 여진은 움찔하고서 문을 본 다음 현호를 보았다. 현호가 이마를 문지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과 정소영 경사인데, 성격이 좀 과격한 편이에요. 이해해요."

여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 그냥 얼른 무슨 일 있었는지 얘기하고 집에 가고 싶은데요. 저기 그런데 지금 이야기 끝나면 혹시 경찰차로 데려다 주실 수 있나요? 어쨌든 저도 피해자인데."

"어, 생각해 보죠. 경찰차가 아니라도 이 친구가 그냥 자기 차로 데려다 줄 수도 있으니까."

현호가 옆에 서 있는 우현에게로 고갯짓을 했다. 우현을 다시 쳐다본 여진은 새삼 놀랐다. 바깥에서는 미처 몰랐는데 우현은 경찰이라기보다는 범죄자 같은 인상이었다. 깡마른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온 데다가 눈은 마치 고행 중인 수도승처럼 날카로우면서도 빛이 번뜩인다. 턱 근처에는 마치 칼로 길게 베인 것 같은 흉터가 있고, 군대식으로 짧게 깎은 머리는 고슴도치 털처럼 뻣뻣하게 곤두서 있다. 키도 190cm 가까이 되는 것 같았다.

이상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부서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어서 돌아가서 자지 않으면 내일 A르바이트를 하러 나가기 힘들 것이다.

"그럼 무슨 이야기부터 하면 되죠?"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봐요. 그 남자를 어떻게 발견한 거죠?"

여진은 차근차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여자의 비명 비슷한 소리가 들렸고, 남자가 쓰러진 여자의 몸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고, 가로등 불빛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치 태아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는 것까지. 현호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여기 경감님께서 오시니까 그 남자가 도망쳤어요. 덕택에 저도 살았고요."

"생긴 건 어떻던가요? 보면 알아보겠어요?"

여진이 어깨를 으쓱이자 현호가 주머니에서 낡은 흑백사진을 한 장 꺼내서 내밀었다. 눈이 가늘고 약간 마른 남자가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분명히 그 정신병자와 거의 비슷한 얼굴이긴 하지만 이미지가 너무나 달랐다. 여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맞는 것 같은데요. 인상은 완전히 다르지만."

"어떻게 다른데요?"

현호가 재미있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여진은 다시금 어깨를 으쓱였다.

"사진 속의 사람은 좀 온화해 보이는데, 아까 그 살인범은 진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거든요."

현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뭐가 재미있는지 알 수 없어서 여진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으나 그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 때 갑자기 우현이 몸을 기울이고 그녀를 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쇠를 가는 것처럼 거슬렸지만 톤은 낮았다.

"그 사람과 싸웠죠?"

"네. 그러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요."

"싸우면서 뭐 이상한 건 못 느꼈습니까?"

여진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좀 뭐랄까, 굉장히 빨리 움직인다는 생각은 한 것 같은데, 제가 겁에 질려 있어서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 여자는 죽은 거 맞나요?"

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지만 그래요. 끔찍한 일이죠. 그런 살인범은 빨리 잡아야 할 텐데. 어쨌든 협조해 줘서 고마워요. 덱스, 자네가 좀 태워다 주고 와. 늦은 시간이니까."

우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서서 나갔다. 여진은 현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나갔다.



문이 닫히자 현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형광등이 그의 머리 위에서 깜박거렸다.

"신기한 게 굴러 들어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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