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당신이 사는 섬-2부

2006.02.16 00:5502.16




남자는 방 안에 있는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페이지는 넘기지 않는다. 남자는 결국 책을 덮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온다. 거실에서 물을 마시고 남자는 아버지의 방문을 본다. 잠시 방문을 바라보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다. 방 안에는 남자의 아버지가 자고 있다. 남자는 다시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는다. 방문을 닫은 남자는 옷을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간다.
집 밖으로 나간 남자는 잠시 멈춰 서서 집을 돌아본다. 하지만 곧 발걸음을 옮긴다. 남자는 아버지의 차에 다가간다. 하지만 차문을 열려던 남자는 멈칫한다. 그리고 집을 한 번 더 바라보더니 차를 놔두고 어디론가 향한다. 남자가 도착한 곳은 버스 정류장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남자는 연신 버스가 오는 방향을 힐끔거린다. 잠시 후 버스가 온다. 지난번보다는 훨씬 빨리 왔다.
남자가 운전석을 보니 버스 기사가 지난번과는 다른 사람이다. 얼굴의 반을 덮은 선글라스를 끼고 코 옆에 커다란 점이 인상적인 기사다. 버스 안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다. 뭔가 커다란 보따리를 안고 있는 아줌마와 외지에서 왔는지 커다란 배낭과 카메라 가방을 가진 젊은 남자다. 보따리를 안고 있는 아줌마는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앞만 쳐다본다. 젊은 남자는 18세기 낭만주의 화가 같은 눈으로 창가에 턱을 괸 채 창 밖을 바라본다. 남자가 자리에 앉자 버스 기사가 버스를 출발 시킨다.
버스 기사의 운전이 거칠어 버스가 심하게 요동친다. 그럴 때마다 세 사람은 같은 모습으로 흔들린다. 그리고 버스 바닥에 비친 햇빛도 같이 흔들린다.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남자가 해리에 도착한다. 남자가 내리고 남자가 처음 탔을 때와 똑같은 포즈를 한 두 사람을 태운 채 버스는 떠난다.
남자가 다시 걷는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을 지나고 자신이 살던 집도 지나 도착한 곳은 바닷가 근처에 있는 헛간 같은 집이다. 집 앞에서 어망을 손질하고 있는 노인이 보인다. 남자가 웃으며 노인을 부른다.

“할아버지.”

남자가 해를 등지고 있어서 노인은 한참 눈을 깜박이고 나서야 남자를 알아본다.

“아니, 웬일이냐?”

“저 왔어요.”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냐? 네 아버지가 허락이 한 거냐?”

남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하루에 한 번은 나올 수 있어요. 숲을 돌봐야 하니까요. 여하튼 죄송해요. 빨리 찾아뵙어야 했는데 찾아 뵐 엄두가 나야 말이죠. 그 날은 죄송했어요. 아버지 대신 사과드릴게요.”

노인이 한숨을 푹 쉬며 말한다.

“그 날.......많이 혼났지?”

“뭐, 그렇죠.”

“왠지 미안하구나. 나 때문에 너희 부자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니에요. 저희 아버지가 문제죠.”

남자가 노인 옆으로 와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노인도 손질하던 어망을 옆에 치워두고 함께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는 잔잔하다. 그저 아이스크림을 아껴먹는 어린 아이처럼 한 뼘도 안 되는 땅을 조용히 핥고 있을 뿐이다. 그런 바다 위로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쫴 수면 위는 마이더스의 손길이라도 닿은 듯 반짝인다. 짠 내 나는 바람을 맞으며 노인이 말한다.

“네 아버지의 문제는 아니지. 오히려 이 늙은이의 미망이 더 큰 문제일지도 몰라.”

“.......”

“난 말이다, 바다를 건널 때를 잊을 수가 없다. 그때부터 시작된 거지. 모든 이에게 이걸 보여주고 싶다,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하는 헛된 열망이 말이야.”

“헛된 열망이 아니에요.”

“아니야. 지금 내 꼴을 봐라. 나야말로 모든 것을 잃었다.”

“저는 잃지 않으셨잖아요.”

남자의 말에 노인이 웃는다.

“그래, 너만은 잃지 않았지. 그래 맞다.”

다시 남자와 노인은 바다를 바라본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보던 노인이 다시 말을 잇는다.

“네 아버지도 너만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미워해서는 안 돼. 그럼 난.......”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건망증 좀 고치셔야겠어요. 지난번에 제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하하, 그래, 그래. 네가 아니라고 말 했었지. 근데 이 나이가 되니까 자꾸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게,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더라고. 그러니까 이해해 다오.”

다시 대화가 끊긴다. 노인은 다시 어망을 손질하고 남자는 손가락으로 모래에 그림을 그린다. 잠시 후 어망 손질을 끝낸 노인이 남자에게 말한다.

“이렇게 왔으니까 밥이라고 먹고 가라. 점심때가 좀 지나긴 했지만 말이야. 밥 안 먹었지?”

“네.”

남자는 노인의 집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고 노인의 집을 나선다.

“이제 집에 가봐야겠어요. 아버지 주무실 때 몰래 나왔거든요.”

“옛날에 깼겠다.”

“뭐, 가서 혼나야죠.”

“그래, 어서 가 봐라.”

남자는 노인과 헤어지고 숲으로 간다. 지난번처럼 근무일지에 순찰이라고 적고 숲을 돌아본다. 그리고 아까처럼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려 버스를 타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도착해서 들어가니 남자의 아버지가 신문을 읽고 있다. 남자의 아버지는 남자를 곁눈질로 보더니 신문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묻는다.

“어디 갔다 오냐?”

“숲에 좀 다녀왔어요.”

남자의 아버지는 별 말 하지 않고 신문을 본다. 남자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벗고 텔레비전을 켠다. 드라마 재방송을 한다. 남자는 2부 연속으로 해주는 드라마를 보고 채널을 돌려 오락 프로그램을 본다. 남자가 한참 오락 프로그램을 보며 실없이 웃고 있을 때 남자의 아버지가 들어와 말한다.

“밥 먹어라.”

남자는 웃음을 미처 다 털어내지 못해 미소를 지으며 거실로 나온다. 남자가 자리에 앉자 식사는 시작된다. 아무 말 없이 밥을 먹던 아버지가 말한다.

“이제 뭘 할 거냐?”

“네?”

“숲지기는 계속 할 거냐?”

“배운 게 그건 데요.”

“내가 아는 사람이 물류 쪽 일을 하는데 사람이 모자란다고 하더라. 생각 있으면.......”

“됐어요. 전 이 일이 좋아요.”

남자의 아버지는 더 권하지 않고 밥을 먹는다. 남자가 아버지보다 먼저 밥을 다 먹는다. 남자가 빈 밥그릇을 들고 일어서자 남자의 아버지가 말한다.

“그 늙은이를 찾아갔겠지.”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싱크대에 빈 밥그릇을 놓는다. 밥그릇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난다.

“그것까지는 막을 수 없겠지. 하지만 바다에는 절대로 보낼 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는다. 잘 알아둬.”

남자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춰 선다. 그리고 말한다.

“제가 여기 있는 이유는 더 이상 아버지를 혼자 놔둘 수 없어서예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간다. 남자의 아버지는 한참을 남자가 들어간 방문을 쳐다보다 다시 밥을 먹는다.



남자는 매일 숲을 찾았다. 그리고 어느 샌가 그런 남자의 뒤에 매일 어떤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는 모자 쓴 남자에게 말을 걸지도 눈길도 주지 않았다.
숲에 다녀온 남자는 노인의 집 앞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파도가 바위에 부셔지며 흘리는 포말, 수면에 부딪쳐 신음하는 빛들, 하얀 모래를 사랑해 달려드는 물결 같은 그런 풍경들을 빼 놓지 않고 눈에 담으려는 듯 남자는 몇 시간씩 바다를 바라봤다. 그리고 노인은 그런 남자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 채 낚시를 하러 가거나 시장에 가거나 어구를 손질했다.
오늘도 남자는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잠시 그런 남자를 보던 노인이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리고 요란하게 기침을 한다.

“감기 아직도 다 안 나으셨어요?”

“나이가 드니까 잘 낫지를 않아. 세월이란 게 참.”

“세월 탓만 하지 말고 빨리 병원에나 가보세요. 감기 오래 놔두면 큰 병 되요.”

“병원? 야, 내가 소싯적에는 그 흔한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뼈가 부러져도 한 달도 안 돼서 뼈에 아교 바른 것처럼 딱 붙던 사람이야. 아무리 늙었다고 무슨 이까짓 감기 때문에 병원을 가?”

“에이, 말도 안 돼. 무슨 한 달도 안 돼서 뼈가 붙어요.”

“이 놈이 사람 말을 안 믿네. 진짜라니까. 이거 증거를 보여줄 수도 없고 참.”

“그러다 큰일 나세요. 이제 연세도 있으신데 조심하셔야죠.”

노인이 한숨처럼 말한다.

“괜찮다. 아직 병원 같은데 안 다녀도 10년은 더 살 수 있어.”

노인의 말에 남자는 그저 웃을 뿐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남자는 다시 바다를 바라본다. 그런 남자를 쳐다보던 노인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한참을 우물쭈물 하던 노인이 다시 격하게 기침을 한다. 기침이 멎자 노인은 남자 대신 바다를 바라보며 말한다.  

“바다를 건너는 건.......힘들겠지?”

남자는 고개를 숙인다. 모래를 헤아리는 듯 한참 땅을 쳐다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말한다.  

“모르겠어요. 하지만.......아버지를 그냥 저렇게 두고 갈 수는 없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아버지고 하나 뿐인 가족이니까요.”

“그래, 어쩔 수 없겠지. 하긴 너희 아버지만큼 불행한 사람이 또 있겠니? 모든 걸 잃었고 이제 겨우 하나 남은 너를 잃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정말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

“어쩌면.......네가 생각을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전 바다를 건너가 보고 싶어요.”

“너도 너희 아버지처럼 되지는 않겠지만 많은 걸 잃을 거다. 그리고 넌 저런 아버지를 버리고 갈 수 있니?”

“.......”

“결국 선택은 네 몫이다. 물론 난 네가 바다를 건넜으면 좋겠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난 이제 지쳤어. 또 한 사람 증오와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구나. 감당할 시간도 없고. 더 이상은 무슨 말도 해줄 수가 없구나.”

노인이 다시 기침을 한다. 남자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기침이 심하신데 정말 괜찮으세요?”

노인이 잔기침을 하며 말한다.

“쿨럭, 괜찮다니까 그러네. 흠, 흠. 며칠 바다에 안 나가고 쉬면 괜찮을 거야. 쿨럭.”

남자가 일어난다.

“가려고?”

“네. 부탁인데 병원에 꼭 가보세요. 아, 그리고 죄송한데 며칠 숲을 돌봐 줄 사람 좀 구해주세요.”

“숲을 돌 볼 사람?”

“네.”

“아니, 왜?”

“아무래도 어디 여행이라도 갔다 와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알았다. 그런데 어디로 갈 생각이냐.”

“잘 모르겠어요. 생각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남자는 인사를 하고 노인의 집을 떠난다. 남자는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여행을 가겠다고 말했다. 남자의 아버지는 말없이 아들을 쳐다보다 선선히 허락했다. 남자는 아버지의 허락에 조금 당황한 듯 우물쭈물하더니 ‘주무세요.’ 라는 말한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로부터 이틀 뒤 남자는 늦은 아침에 출발한다.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불량 학생의 책가방 마냥 가볍게 든 남자의 발걸음이 홀가분하다. 남자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문 앞까지 나와 배웅한다.

“다녀올게요.”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라. 여비는 충분하냐?”

“네, 걱정하지 마세요.”

남자는 목적지에 시외버스 터미널이라고 쓰여 진 버스를 탄다. 버스에는 역시 사람이 없다. 남자는 자리에 앉아 다리 사이에 가방이 넣는다. 그리고 오늘따라 유난히 하얀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본다. 돌에라도 부딪친 것처럼 버스가 심하게 덜컹거릴 때마다 남자는 가방 손잡이를 움켜쥔다. 그리고 버스가 다시 잠잠해지면 남자가 가방 손잡이를 놓는다. 가죽으로 만든 가방 손잡이가 땀에 젖어 가죽표면의 주름을 따라 빛난다.
남자가 도착한 곳은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터미널 안으로 들어 간 남자는 버스 시간표를 확인한다. 그리고 한 쪽에 붙은 시계를 확인한 다음 매표소에서 표를 산다. 직원이 다른 직원과 무언가 얘기를 하고 있다.

“도시 가는 11시 20분차요.”

매표소 직원은 얘기도 멈추지 않은 채 표를 내민다. 남자는 표를 받고 품 안에 조심스럽게 넣는다. 그리고 터미널 안에 있는 작은 가게에 들러 과자와 음료수를 산다. 과자와 음료수를 산 남자는 터미널 중앙에 모여 있는 의자들 중 하나에 앉아 차를 기다린다. 남자는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보다 난로 가에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그들 대부분은 버스 기사인 듯 같은 모양의 점퍼를 입고 서 있다. 그들은 난로 가에 서서는 자신들의 불행과 이 시대의 불합리함을 계속해서 성토하는 듯 보인다. 가끔 폭소가 터져 나오지만 그들의 말은 대부분 한숨과 새하얀 입김으로 끝난다.
둥근 조각칼로 얼굴을 파낸 듯 굵은 주름이 진 노인이 남자 옆에 앉더니 남자에게 말은 건다. 하지만 남자는 그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거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다. 하지만 얼굴에 주름 진 노인은 끊임없이 말을 시킨다.
도시 행 버스가 도착한다. 난로 가에 있던 버스 기사 중 한 명이 소리친다.

“도시 가시는 분 탑승하세요.”

얼굴에 주름 진 노인을 남겨두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를 탄다. 가방은 의자 위에 있는 수납 칸에 놓고 남자는 자리에 앉는다. 곧 사람들이 하나 둘 버스에 올라탄다. 삼분의 일 정도 자리가 채워지자 밖에서 기다리던 버스 기사는 피우던 담배를 내던지고 버스에 탄다. ‘푸쉬’ 하는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차는 거친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출발한다.
남자는 아까 샀던 과자를 꺼내 먹는다. 과자를 반 쯤 먹고 다시 잘 갈무리해 둔다. 창 밖을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잠이 든다.



남자는 버스가 멈추자 눈을 뜬다. 남자의 무릎에는 과자와 음료수가 든 봉지가 출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얌전히 놓여있다. 버스기사가 말한다.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긴 여로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승객들은 영화가 끝난 극장의 관객처럼 하나 둘 일어난다. 승객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지루함이 포도송이처럼 얼굴에 매달려 있다. 남자는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쓰다듬은 다음 과자와 음료수가 든 봉지를 들고 버스에서 내린다. 터미널 안으로 들어 선 남자는 멈춰 선다. 그리고 입을 조금 벌린 채 터미널 안을 천천히 둘러본다.
남자가 사는 지역의 터미널보다 몇 배 더 큰 터미널 안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 무수한 웅성거림과 기쁨의 외침과 지루한 기다림이 팔려가는 병아리 마냥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다. 그 소음 사이로 안내 방송이 동굴에 울리는 희미한 반향처럼 들린다.

“산천 행 7시 10분 버스가 지금 출발 하오니 탑승자들께서는 속히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남자가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간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가 수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잠시 기다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흘끔거리던 남자가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는지 말한다.

“예. 숙모. 저예요. 안녕하셨어요? 하하, 뭐 그렇게 됐어요. 하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바람 좀 쐴까 해서 나왔죠. 삼촌도 안녕하시죠? 예, 아버지도 건강하시죠. 저기 그런데 제가 어디 묵을 때가 없어서 그런데 며칠 신세 좀 질 수 있을까요? 아, 괜찮아요. 아, 네 거기요? 예, 찾을 수 있죠. 하하, 아니에요. 그럼 제가 그 쪽으로 갈게요. 네, 있다가 봬요.”

남자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터미널을 나온다. 그리고 터미널에서 나온 사람을 태우려고 길게 서 있는 택시들 중 하나에 탄다.

“정진동으로 가주세요.”

택시기사는 아무 말 없이 미터기를 켜고 택시를 출발시킨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택시기사에게 말한다.

“저기 아저씨 죄송한데 정진동에 사거리 있나요? 무슨 아파트도 있다고 하던데.”

“아파트 근처 사거리?”

“네.”

“글쎄, 있었던 것 같은데. 가 보면 알겠지.”

택시기사는 어중간한 말만 하고 택시를 몬다. 남자는 입을 다문 채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헛기침을 한다. 남자의 목과 이마에서 땀이 흐른다. 그리고 턱 언저리에 있는 남자의 손은 잔뜩 힘을 줬을 때처럼 가늘게 떨린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남자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묻는다.

“얼마나 남았죠?”

“한 20분은 더 가야 돼요.”

심드렁한 택시기사의 대답에 남자는 다시 입을 다문다. 택시는 택시기사의 말대로 20분 정도 더 가자 멈춘다. 남자는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집어삼키듯 웅얼거린 다음 돈을 내고 택시에서 내린다. 택시가 떠나고 남자는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본다.
남자의 말대로 아파트가 있는 사거리다. 많은 사람들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횡당보도를 건너고 정지선을 넘은 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던 차들은 사람들이 다 건너자 차를 출발시킨다. 차와 사람들이 지나가는 옆으로 원색의 네온사인 간판을 단 가게들이 즐비하다.
얼굴을 찡그린 채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어딘가를 향해 걷는다. 5분 정도 걸어 남자는 공중전화부스에 도착한다. 남자는 아까처럼 전화를 건다.

“예, 숙모. 저 도착했어요. 지금 공중전화 앞이에요. 네, 육교 앞이요. 예, 기다릴게요.”

남자는 육교 앞에 서서 육교를 건너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대부분은 남자를 못 본 척 지나가지만 몇몇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낯빛을 한 채 남자를 쳐다본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남자의 옆에서 어떤 커플이 키스를 시작할 때 누빔으로 된 빨간 점퍼-적갈색으로 바랜-를 입고 아줌마 파마를 한 여자가 남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다. 여자의 목에는 까만 머플러가 감겨있다.

“아이구, 오랜만이다. 어떻게 밥은 먹었니?”

남자는 입술 끝을 조금 떨며 미소 짓고는 대답한다.

“저녁은 아직 안 먹었어요.”

“그럼 빨리 가자. 삼촌은 늦는다고 했으니까 우선 가서 밥부터 먹자.”

“네.”

남자는 숙모를 따라 걷는다.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고 10분 정도 걸어 골목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깜박거리는 가로등 몇 개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 작은 집에 도착한다. 까만 칠을 한 대문에 시멘트로 덮인 3평 남짓한 마당이 있는 기역자 모양의 집이다. 하얗게 회칠을 한 벽은 오랜 세월 탓에 곳곳이 부숴 지고 벗겨져 있다.
마당 가운데에 있던 커다란 대야를 한 쪽으로 치우며 남자의 숙모가 말한다.

“어서 들어가.”

남자는 멈칫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선다. 그러자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덩치에 짧은 머리를 한 남자의 사촌동생이 남자를 반긴다. 덩치는 크지만 얼굴은 아직 앳되다. 남자의 사촌동생은 한참동안 남자를 살펴보더니 실망한 얼굴로 말한다.  

“형, 뭐 안 사왔어?”

“이 놈이, 사 오긴 뭘 사와. 너 숙제는 다 했어? 너 숙제 다 안 하면 저녁 못 먹을 줄 알아. 빨리 가서 숙제나 해.”

남자의 사촌동생은 얼굴을 이죽거리며 투덜거린다.

“치, 거의 다 했어.”

그리고는 아까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남자는 그런 사촌동생을 보고 입을 가리며 웃는다. 남자의 숙모는 그런 남자를 보더니 겸연쩍은 듯 웃으며 말한다.

“배고프지? 일단 TV라도 보고 있어. 얼른 밥해서 줄게.”

“아니에요. 그냥 천천히 하세요.”

남자의 숙모가 부엌으로 들어가고 남자는 카펫이 깔린 거실에 앉아 리모컨으로 TV를 켠다. 얼마 쯤 남자가 TV를 보고 있는데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사촌동생이 거실로 나온다. 소리를 들은 듯 남자의 숙모가 날카로운 호통을 친다.

“너 숙제 다 하고 나온 거야!”

남자의 사촌동생은 짜증난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소리친다.

“다 했어!”

“너 있다가 내가 검사할 거야!”

“맘대로 해! 자기가 보면 얼마나 안다고 검사래....... 무슨 초등학생 숙젠 줄 아나.”

사촌동생의 중얼거림에 남자는 또 웃는다. 그런 남자의 표정을 보지 못한 남자의 사촌동생은 잔뜩 볼이 부어서 TV만 본다. 남자는 사촌동생에게 리모컨을 넘겨주며 묻는다.

“야, 너 이제 몇 학년이냐?”

“2학년.”

“중학교?”

남자의 사촌동생은 계속 TV를 쳐다보며 말한다.

“고등학교. 중학교 졸업한지가 언젠데. 형도 왔었잖아.”

“아, 맞다. 너 졸업했지.”

부엌 쪽에서 찌개 부글거리는 소리와 뭔가를 굽는 듯 ‘치’하는 소리와 옅은 연기가 나온다. 그리고 고소한 냄새도 난다.

“공부는 잘 되냐?”

“그냥저냥.”

남자는 얼굴에는 미소를 띠우고 발로는 사촌동생의 튼실한 허리께를 툭툭 건드리며 말한다.

“야, 임마. 그냥저냥 하면 어떡하냐. 잘 해야지.”

남자의 사촌동생은 귀찮다는 듯이 손만 휘휘저어 남자의 발을 쫓아낸다. 남자는 발을 치우고 묻는다.

“그래, 뭐 하고 싶은 건 있냐? 가고 싶은 학과는 있어?”

“그런 거 없어. 점수 맞춰서 가는 거지.”

“야, 그런 게 어딨냐. 사람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지.”

남자의 사촌동생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TV만 보고 있다. 남자도 더 이상 말을 시키지 않고 사촌동생과 함께 TV를 본다. 잠시 후, 남자의 숙모가 남자와 남자의 사촌동생을 부른다.

“밥 먹어!”

숙모는 음식이 가득 올려진 작은 밥상을 들고 오며 외친다. 남자는 얼른 일어나 밥상을 대신 들고 거실에 내려놓는다. 그때 숙모가 말한다.

“여기 놓으면 카펫이 더러워지니까 좀만 뒤로 땡기자.”

남자는 다시 밥상을 들고 뒤로 조금 옮긴다. 그제야 셋은 밥상에 둘러앉는다. 남자의 사촌동생이 다시 볼멘소리로 말한다.

“저 카펫 좀 버려, 엄마. 이제 너무 낡아서 친구들 놀러오면 쪽 팔리단 말이야.”

“버리긴 멀쩡한 걸 왜 버려. 밥 먹고 싶으면 조용히 하고 밥이나 먹어.”

남자는 밥상을 쳐다본다. 밥상 중간에는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 놓여져 있고 남자 쪽으로 고추장으로 양념한 돼지고기 불고기가 접시에 수북이 담겨져 있다. 싱싱한 고추와 상추도 씻겨서 한 아름 올려져 있고 밑반찬도 멸치볶음, 콩나물, 시금치나물 등 가지가지다. 밥상을 보며 남자의 사촌동생이 한마디 한다.

“야, 엄마 완전 치사해. 내가 밥 달라고 하면 알아서 차려 먹으라고 하면서 형 오니까 밥상이 완전히 틀리네. 하여튼 난 친아들이 아니라니까.”

“너 진짜 밥 먹기 싫어?”

“알았어.......”

남자의 숙모는 남자를 향해 웃으며 말한다.

“자, 배고팠지? 밥 많이 먹어. 더 있으니까 모자라면 말하고.”

“그럼 잘 먹겠습니다.”

셋은 맛있게 식사를 한다. 식사가 끝난 후 남자의 숙모는 설거지를 하고 남자의 사촌동생은 방에 들어가 버린다. 남자는 혼자 남아 TV를 본다. 남자의 숙모가 설거지를 끝내고 남자와 함께 TV를 한참 보고 있을 때 반백의 머리에 코트를 걸친 덩치 큰 남자가 들어온다.

“오, 왔구나. 그래, 얼마나 컸나 좀 안아보자.”

“크기는 옛날에 다 컸죠.”

남자의 삼촌은 환하게 웃으며 남자를 껴안는다. 남자도 웃으며 삼촌을 가볍게 안는다. 쿵쿵 소리가 나며 방에서 남자의 사촌동생이 나와 남자의 삼촌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그래, 공부 열심히 했냐.”

“네, 뭐.”

“그래, 컴퓨터는 좀만 하고 내일 학교 가야 하니까 자라.”

“네.”

남자의 사촌동생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간다. 남자의 삼촌은 자리에 앉으며 남자에게 묻는다.

“그래, 갑자기 네가 무슨 일이냐? 아까 네 숙모한테 연락받고 좀 놀랬다. 무슨 일 있니?”

“일은요. 그렇지 않아도 한 번 찾아 봬야지 싶었어요.”

“그래, 와야지. 그럼.”

“여보, 밥 안 먹었죠?”

“어, 먹어야지. 그래, 아버지는 잘 계시냐? 아직도 그렇게 힘이 넘치셔?”

남자는 쓸쓸히 웃으며 대답한다.

“네, 힘이 넘치세요.”

“그래, 그래. 내가 언제 한 번 찾아봬야 되는데 말이야. 사는데 쫓기다 보니까 잘 안 되더라고.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한테 안부 좀 전해드려라.”

남자의 삼촌은 저녁을 먹으면서도 중간 중간 남자에게 말을 시킨다. 그리고 밤이 돼서도 남자의 삼촌은 남자를 놔주지 않는다. 남자의 숙모와 사촌동생이 이미 잠 든 시간이다.
남자의 삼촌은 담배를 피며 연신 넋두리를 한다.

“저 놈의 자식이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 원. 맨날 컴퓨터만 하고 앉아있고 말이야.”

“언젠가는 철들겠죠.”

“자식이 부모 맘을 어찌 아냐. 넌 모른다. 그 마음. 너도 네 아버지한테 잘 해. 아버지 맘 아프게 하지 말고.”

남자의 삼촌이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다. 잠시 적막이 흐른다. 그 깊은 적막 속에서 힘겹게 헤엄 쳐 나오듯 남자가 무거운 어조로 묻는다.

“어머니....... 어딨는지 아세요?”

대답대신 남자의 삼촌이 담배 하나를 또 빼 문다. 그리고 불을 붙여 한 모금 빤다. 남자는 그런 삼촌을 가만히 지켜본다. 더러운 가래를 뱉듯 찡그린 얼굴로 연기를 뿜으며 남자의 삼촌이 말한다.

“엄마....... 찾으러 온 거냐?”

남자는 대답대신 고개를 숙인다. 입술을 깨물 듯 다문 채 남자가 고개를 든다. 남자의 눈은 애써 삼촌의 시선을 피한다. 닻을 매달고 심해에 침몰한 난파선처럼 침묵하던 두 사람 중 남자의 삼촌이 먼저 말한다.  

“왜 20년이 다 되도록 엄마에 대해 말 한마디 안 하려던 네가 엄마 얘기를 꺼내는 거냐?”

“.......”

남자의 삼촌은 다시 말없이 담배를 피운다. 세포 하나하나에 니코틴을 채우려는 듯 깊숙이 담배를 빨아댄다. 그리고 담배를 비벼 끈다. 방안을 채우던 담배 연기가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남자의 삼촌이 말한다.

“네 엄마가 뭐 하고 사는지 들은 거냐?”

남자가 무겁게 입을 연다.

“아버지한테 들었어요.”

남자의 삼촌이 한숨을 쉰다. 담배를 집으려던 남자의 삼촌은 곧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만둔다. 대신 더러운 가래 덩어리를 뱉어내듯 말한다.

“너도 들었다시피 네 엄마, 파출부 나간다. 그래, 파출부가 부끄러운 건 아니지. 네 숙모도 가끔 돈이 궁할 때는 나가니까. 하지만 분명 네 엄마가 원한 인생은 그런 게 아니었을 거다. 고생 끝에 바다를 건너고 나까지 데리고 이곳으로 와서 살았던 건, 남의 집 집안일이나 하기 위한 건 아니었을 거라고. 난 그래서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난 절대로 네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을 거라고.”

남자의 삼촌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입은 다문다. 얼마간의 침묵 후 남자는 삼촌의 얼굴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묻는다. 여전히 삼촌은 쳐다보지 못한 채.

“어머니는.......지금 어디 사세요?”

“모른다.”

삼촌의 대답에 남자는 의외인 듯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되묻는다.

“모르신다고요?”

“그래....... 뭔 놈의 자존심이 그리 센지. 유일한 혈육인 나한테도 자기 사는 곳은 끝끝내 안 밝히더라. 네 엄마는 그런 면에서는 참 매정한 사람이지. 나도 사는 게 이러니 따로 알아볼 겨를도 없었고.......”

말끝을 흐리며 남자의 삼촌은 기어코 담배를 꺼내 문다.

“아니, 사실 다 핑계지. 어쩌면 난 누님의 그런 모습을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피한거지.”

“.......”

“어떻게 보면 나도 너나 네 아버지를 미워할만한 자격은 없는 것 같구나. 그래, 사람은 다 그런 거지.......”

남자의 삼촌이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남자에게 말한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숙모가 옆 동네에서 한 번 봤다고 하더라. 어쩌면 근처 직업소개소 같은데 물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남자의 삼촌은 일어서더니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사진 한 장을 들고 나온다.

“이 사진 가져가서 알아 봐.”

남자의 삼촌이 가져 온 사진은 최근의 찍은 듯한 남자 어머니의 사진이었다. 남자는 사진을 받아들고 한참을 바라본다. 사진 속 남자의 어머니는 남루한 옷에 몇 가닥의 흰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환하게 웃고 있다. 그 모습은 아직 도시의 하늘을 날아보지 못한 어린 흰 비둘기를 연상시킨다. 매연에는 길들여졌지만 거칠고 차가운 바람은 느껴보지 못한.
남자는 사진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난다.

“저 그만 들어가서 잘게요.”

남자의 말에 남자의 삼촌이 콧잔등을 긁으며 말한다. 무슨 이유에선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있다.

“어, 그래. 내일부터 나가서 찾으려면 일찍 자 둬야지.”

남자는 방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닫고 남자는 자리를 깐다. 그리고 사진을 주머니에서 꺼내 머리맡에 놓고 불을 끈 다음 자리에 눕는다.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잠시 빛나던 남자의 까만 눈동자가 이내 사라진다.




다음 날 남자는 늦잠을 잔다. 남자는 일어나자마자 짐을 챙긴다. 조금 이른 점심을 먹고 남자는 집을 나선다. 남자의 삼촌과 숙모는 문 밖까지 나와서 남자에게 하루 더 묵고 가라고 하지만 남자는 한사코 거절한다. 남자의 삼촌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말한다.

“누님은 어디서 찾으려고. 오래 걸릴 텐데 여기 있는 게 어떠냐?”

“생각해 둔 게 있어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남자는 삼촌 내외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그런 남자를 삼촌 내외는 손을 흔들며 배웅한다. 남자는 가방을 들고 소행성 표면처럼 거친 아스팔트 내리막길을 걷는다. 큰길가로 나온 남자가 잠시 무언가 궁리하는가 싶더니 어디론가 걷기 시작한다.
남자는 지역 신문이 꽂힌 가판대 앞에 멈춰 선다. 그리고 신문 하나를 빼 든다. 신문을 펼친 남자는 보물지도를 보며 보물을 찾는 지나 데이비스처럼 찬찬히 신문을 읽는다. 길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남자를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지만 남자는 신문 읽기에 완전히 몰입해 있는 듯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 남자의 모습은 신을 위해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를 연상케 한다.
남자의 시선이 멈춘다. 남자가 바라보는 건 신문 광고다. ‘정진 직업소개소’라는 두꺼운 활자 밑에 전화번호와 대략적인 약도가 그려져 있다. 남자는 광고가 있는 부분을 찢어서 손에 쥔다. 그리고 나머지 신문 뭉치는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린다.
신문 조각을 쥔 남자는 그것을 한참 동안 쳐다본다. 답이 금방 기억 날 듯한 시험 문제를 쳐다보듯 얼굴을 찡그린 채 신문 조각을 쳐다본다. 그러다 남자의 표정이 풀리며 어디론가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남자는 중간 중간 멈추기는 했지만 금세 ‘정진 직업소개소’ 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을 찾는다. 건물은 볼품없다. 커다란 칼로 콘크리트 덩어리를 대충대충 잘라놓은 다음 문과 창문을 덕지덕지 붙은 것 같다. 남자는 신문 조각을 한 번 더 쳐다 본 다음 주머니에 넣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커다란 뱀의 식도 같은 계단을 올라간다. 차가운 콘크리트와 쇠붙이로만 이루어진 식도다. 남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커다란 반향이 불길하게 건물 안에 울린다. 그리고 반향이 울릴 때마다 남자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진다. 그래서 사무실에 도착해 문 앞에 설 때 남자의 얼굴은 지방 미술학원의 석고상처럼 누런 흰빛을 띤다. 남자가 문을 두드린다.

“누구십니까?”

문이 조금 열리며 갈색 뿔테 안경을 쓴 야윈 중년 사내가 고개를 내민다. 쥐구멍에서 머리만 내 놓은 채 바깥의 동정을 살피는 생쥐 같다. 남자는 머뭇거리며 말을 잘 하지 못한다. 야윈 중년 사내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일 구하려고 오신 거요?”

남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천천히 말한다.

“찾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파출소로 가쇼.”

야윈 중년 남자는 퉁명스럽게 말을 뱉고 문을 닫으려 한다. 남자는 황급히 문을 잡는다.

“여기서 일하시는 분 중에 한 분을 찾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야윈 중년 사내는 탐탁치 않다는 듯 한참을 눈을 희번덕거리며 남자를 쳐다보더니 문을 열어준다.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다. 사무실 안도 건물 외양처럼 볼품없다. 재활용센터에서 주워온 듯한 커다란 책상과 곳곳이 뜯어진 검은 소파, 서류들이 잔뜩 꽂힌 책장과 탁자, 말라비틀어진 키가 큰 관상용 식물이 전부다. 사무실 중앙에는 커다란 석탄난로가 있다. 석탄난로 위로 작은 벌레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커피라도 드시겠소?”

야윈 중년 사내의 질문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야윈 중년 사내는 주전자에 물을 넣고 난로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남자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하고 자신도 맞은 편 소파에 앉는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야윈 중년 사내가 묻는다.

“그래, 찾는다는 사람이 누구요? 아, 이건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건데 혹시라도 누구의 사주를 받았다거나 범죄와 관련된 낌새가 보이면 당장이라도 쫓아낼 테니 그런 줄 아쇼.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그런 거 하나는 잘 잡아내니까 속일 생각일랑 말고. 내가 이거 하기 전에도 직업소개소를 했는데 별 너저분한 인간들이 다 꼬이더라니까. 그래서 아예 그런 일들을 안 만들려고. 어쨌든 그런 줄 알고 말해보쇼.”

“제 어머니를 찾고 있습니다. 이 근처에서 파출부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흠, 그래요? 어머니 이름이 뭔데요?”

“이름은 모르지만 사진은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야윈 중년 사내에게 건넨다. 사진을 받아든 야윈 중년 사내는 한참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남자는 두 손을 깍지 끼고 고개를 숙인채로 한 쪽 다리를 떤다. 주전자에 든 물이 끓어서 하얀 수증기가 올라올 무렵 야윈 중년 사내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

“아, 이 아줌마였구나.”

남자가 다급하게 묻는다.

“아십니까?”

“알죠. 좀 특이한 아줌마였으니까.”

“특이하다뇨?”

“계약 조건이랍시고 뭘 써 가지고 왔더라고. 그런 아줌마는 처음이었지. 더군다나 계약 조건까지 특이했으니 잊지 못할 수밖에.”

“계약 조건이 뭐였습니까?”

야윈 중년 사내는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는지 징그러운 미소를 띠며 말한다.

“신상정보를 남기고 싶지 않다가 계약 조건이었소. 참 재밌는 아줌마였지. 근데 말이야, 더 웃긴 건 내가 그 아줌마의 조건을 거절하지 못했단 거야. 방금도 말했지만 난 수상한 걸 참지 못하는 성미거든. 그런데 그 부탁을 들어 준거지. 뭐라고 할까, 여하튼 왠지 그 아줌마의 말은 반드시 들어줘야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 내가 이래봬도 감이 꽤 좋거든. 죽은 내 마누라 만날 때랑 비슷한 느낌이었어. 아, 그렇다고 그 아줌마한테 수작 걸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절대적이고 운명적인 느낌이 들었다는 뜻이니 오해는 마쇼.”

“그럼 어디 사는지 모른다는 말입니까?”

“모르지. 일자리도 단기로 뛰니까 나야 일이 끝나고 시작할 때만 얼굴을 볼 수 있었거든. 일솜씨는 꽤 뛰어나더군. 부잣집이면 부잣집 공사판이면 공사판, 다 칭찬 일색이었으니까. 어쨌든 이 근처에 사는 건 맞는 거 같소. 안 그러면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기는 힘드니까. 여하튼 참 신기한 여자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바다 건너 사람이니까요.”

야윈 중년 사내가 놀란 듯 말한다.

“아니, 그 아줌마가 바다 건너 사람이었소? 야, 그 아줌마 대단한 사람이었구먼. 어째 예사 사람이 아닌 것 같긴 하더라.”

남자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야윈 중년 사내도 뒤따라 일어나며 묻는다.

“가시게?”

야윈 중년 사내는 사진을 건넨다. 남자는 사진을 받고 품 안에 넣는다.

“네, 가 봐야죠. 실례 많았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뭐, 잘 가쇼. 어머니, 찾길 바라겠소.”

남자는 다시 그 긴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온다. 남자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화색이 돈다. 대신 막막함이 파운데이션처럼 남자의 얼굴에 붙어있다. 남자는 무언가 결심한 듯 어디론가 걷는다.


거의 한 달 동안 남자는 정진동을 다 돌았다. 동사무소에서 구한 지도를 들고 남자는 정진동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밥은 식당이 보이면 먹고 잠은 여관에서 잤다. 아침이 되면 보이는 모든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고 집 주인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남자 어머니의 소재를 물었다. 집주인이 며칠 씩 비운 집도 있었기에 남자의 하루는 날이 갈수록 한도 없이 늘어나는 엿가락처럼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런 필사적인 탐색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건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고함을 치는 것과도 같았다.
마지막 집을 확인하고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사진을 구겨버린다. 그리고 흠칫 놀라더니 다시 사진을 황급히 편다. 남자는 잘 편 사진을 다시 품 안에 넣는다. 그리고 터벅터벅 어디론가 걷는다. 묵는 여관에 도착한 남자는 가방을 챙기고 여관을 나온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간다.
가장 가까운 시간의 표를 사고 남자는 멍하니 배차 시간이 뜨는 전광판을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낸다. 까뮈의 이방인이다. 남자는 천천히 책을 읽어나간다. 남자의 표정에 변화는 없다. 맛이 없는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무덤덤하게 책을 읽을 뿐이다.

“바다 행 11시 30분 버스가 지금 출발 하오니 탑승자들께서는 속히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남자는 책을 덮고 일어난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버스로 간다. 버스 앞에서 남자가 멈춰 선다. 남자가 그대로 돌아서서 어딘가를 응시한다. 그건 도시의 사람들이나 편의점, 전광판은 아닌 듯싶다. 다시 남자는 돌아서서 걷는다. 버스에 탄 남자는 책을 가방에 넣고 잠이 든다.
김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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