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당신이 사는 섬-1부

2006.01.20 14:2801.20






입안에 있던 밥을 삼키고 남자가 아버지에게 말한다.

“여행을 떠날까 해요.”

침착의 가면으로 가장하려 했지만 가면은 그를 채 반도 가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가르게 떨렸다. 국을 뜨려던 남자의 아버지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

“다른 땅을 보고 싶어요.”

“철없는 소리 말고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이나 열심히 해. 충동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숲을 맡은 지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른 곳을 가겠다는 거냐.”

남자의 아버지는 다시 숟가락을 든다. 남자가 한숨처럼 말한다.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에요.”

“넌 배도 없잖니? 네 숲의 나무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배를 만드는 건 힘들다. 기껏해야 뗏목이나 만들까. 하지만 여기서 다른 땅을 가려면 배 밖에 없어. 배 없이 뗏목으로 바다를 건넌다는 건 미친 짓이야.”

“그래서 말인데요. 아버지의 배를 좀 빌려주시면.......”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아버지가 말을 자른다.

“지금 다른 사람의 배로 바다를 건너겠다는 거냐?”

아버지의 말에 남자는 비 맞은 민들레처럼 움츠린다. 그런 남자를 바라보던 남자의 아버지는 더 말 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다시 밥을 먹는다. 남자도 다시 숟가락을 든다. 잠시 밥을 먹던 아버지가 한숨을 쉬더니 남자에게 말한다.

“지금 네가 어디를 떠나고 싶은 건 그저 한 순간의 충동일 뿐이야. 어느 날 아침, 평소와는 다르게 아침밥을 안 먹고 싶어서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하고 크게 다르지 않아. 만약 내가 너한테 배를 빌려줘서 네가 다른 땅으로 간다고 해도 넌 분명히 후회할 거다. 바다는 거칠고 저곳은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아.”

“어떻게 아시죠?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나도 가 봤기 때문이지.”

“.......”

“네가 달라는 그 배로 가 봤다. 그곳이라고 특별하지 않았어. 사실 어처구니없었지. 내가 그 고생을 해가면서 건너 간 곳이 겨우 그런 곳이라니 말이야. 그냥 바다와 소금기 있는 땅과 하늘이 있었을 뿐이야. 그거라면 이곳에도 있잖니?”

“그건.......”

남자는 몇 번이나 말을 내뱉으려 하지만 그때마다 말은 천적 만난 토끼처럼 저 깊은 곳으로 숨어버린다. 남자의 아버지는 숟가락을 휘두르며 말한다.

“그러니 제발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네 젊음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지 말란 말이다. 그런 일은 도움은커녕 해만 된다. 이젠 제발 내가 너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해다오, 아들아.”

“하지만 거기서 어머니를 만나셨잖아요.”

가시 돋친 아버지의 말에 벽에 던진 공처럼 튀어나온 남자의 말. 남자의 말에 남자의 아버지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래, 그랬지. 그리고 그건 그렇게 인상 깊은 사건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믿고 싶으신 거겠죠.”

“아니야.”

“그럼 말씀해보세요. 그렇다면 왜 아직까지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화를 내시는 건데요?”

“난 화 낸 적 없어.”

“아버지가 어머니를 무시하는 건 치졸한 자존심일 뿐이에요.

“엄마 얘기는 그만 하자.”

“어머니는 아버지를 버린 게 아니라고요.”

남자의 아버지가 식탁을 강하게 내리치며 외친다.

“그만!!!”

아버지의 호통에 남자는 움찔 놀라며 눈을 감았다 뜬다. 소리를 지르고 나서 남자의 아버지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남자는 말없이 아버지의 손 사이로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손가락 사이로 한숨이 진득하게 흘러나온다. 남자의 아버지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노인네 때문이구나. 그 노인네가 너한테 바람을 집어넣었어.”

“.......그 분 때문이 아니에요.”

손을 뗀 남자의 아버지의 얼굴에는 이미 분노가 어려 있다.

“그렇다면 모두 네 의지라는 말이냐? 하하, 물론 그렇게 믿고 싶겠지. 하지만 모두 다 그 노인네가 획책한 거다. 넌 그런 애가 아니었어.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할 만한 아이가 아니었어. 어렸을 때의 나처럼 말이야. 그 노인네가 이제 나처럼 너를 후회와 체념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는 거야.”

“그런 말씀 마세요. 그 분이 뭐 하러 그러겠어요.”

“그게 재밌으니까. 자신이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말 하면서 네가 굽실거리는 걸  즐기는 거야. 그 영감은 옛날부터 그랬다. 나한테도 그랬다고. 그 영감은 악마야. 악마라고.”

“그 분을 욕하는 건 그만두세요. 더 이상 부탁하지 않겠어요. 이해 받으려고 하지도 않겠어요. 이젠 저도 지쳤어요.”

기어코 남자의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아들을 향해 호통 친다.

“그래. 가 버려라, 이 배은망덕한 놈! 혼자 살게 해 달라고 해서 순순히 들어줬더니 지 애비보다 그 빌어먹을 늙은이 말을 더 따르는 거냐! 오냐, 그래. 당장 꺼져버려!”

호통을 친 남자의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쾅’ 하는 문 닫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비 맞은 민들레처럼 고개를 숙인다. 이미 식탁 위에 있는 밥과 국은 차갑게 식었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잠시 식탁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긴다. 그리고 아버지가 들어간 방을 향해서 말한다.

“죄송해요. 아버지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전 그냥 다른 곳을 한 번 쯤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아버지는 제가 아버지를 거역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전 아버지를 따라가는 거예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전 저 바다를 건너고 말 겁니다.”

남자는 외투를 걸치고 아버지의 집을 나온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연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매서운 찬 바람이 그에게 안긴다. 밖이 이미 어둑어둑하다. 주위에는 온통 마르고 가지만 앙상한 나무뿐이다. 찬 바람과 삭막한 풍경에 남자는 새삼 추위를 느끼는지 몸을 움츠린다.
메마른 풀과 흙과 돌을 밟으며 남자는 몸을 움츠린 채 걸어간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서 남자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버스 정류장이라고 해서 다른 곳과 다르지 않다. 그저 ‘버스’라고 써진 표지판 하나와 단단한 쇠 버팀목에 올려져 있는 더러운 플라스틱 의자 몇 개가 있을 뿐이다. 남자는 잠시 의자를 바라보다 그냥 표지판 옆에 선다. 그리고 하얀 입김을 내 뿜으며 버스를 기다린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버스를 기다리다 지친 남자가 정류장 근처를 거닐기 시작한다. 땅바닥에 있는 마른 풀을 뜯기도 하고 돌을 차기도 한다. 가끔 하늘을 보고 커다란 한숨을 쉬기도 한다. 주위는 어느새 깜깜해져 정류장 표지판에 있는 ‘버스’라는 글자가 잘 안 보일 지경이다.
한 쪽 무릎을 꿇고 마른 풀을 뜯던 남자가 무슨 소리를 들은 듯 일어선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인다. 버스가 정류장에 선다. 남자는 요금 통에 돈을 넣고 의자에 앉는다. 버스에는 남자 말고는 손님이 없다. 버스를 출발시키며 버스 기사가 남자에게 말을 건다.

“아이구, 이거 추운데 오래 기다리지는 않으셨습니까?”

“아, 별로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이 동네가 다 좋은데 교통이 참 나빠요. 바다도 근처라 풍과도 좋고 공기도 깨끗한데 말이죠.”

“확실히 교통이 좀 불편하긴 하죠.”

“그렇죠? 근데 사실 그게 다 이 동네 사람들 자업자득이에요.”

“네?”

“생각해 보세요. 아니, 사람들이 모여 살면 좀 좋아? 죄다 무슨 영역 표시하는 맹수들처럼 띄엄띄엄 살고 있으니 버스도 띄엄띄엄 다닐 수밖에요.”

“그렇겠군요.”

“그러니까요. 세상에 어떤 미친 버스 회사 사장이 이 먼 거리를 하루에 수십 번 씩 왔다 갔다 한답니까? 그런데도 여기 사람들은 뭐 이렇게 버스가 안 오냐, 버스를 한 번 놓치면 몇 시간 씩 기다려야 된다, 하면서 저를 들들 볶습니다. 겨우 말단 버스 기사인 저를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원. 보세요. 지금도 이렇게 손님 혼자 타고 있잖아요. 전 가끔 이 개인에게 고용된 개인 기사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버스 기사가 아니라요. 아, 그런데 어디까지 가십니까?”

“해리까지 갑니다.”

“아, 해리. 거기 일몰이 멋있다던데. 좋은 곳에서 사시는 군요.”

“네, 교통이 불편하지만요.”

남자의 맞장구에 운전기사는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맞아요! 정말 교통이 불편하다니까요. 이 손님 뭘 아시네. 여하튼 교통이 편리하기만 하다면 관광 특구 같은 걸로 지정돼서 땅값도 꽤나 오를 텐데 말이죠. 참 안타까워요. 근데 손님은 무슨 일 하시죠?”

“숲지깁니다.”

“숲지기? 아, 그 나무 심고 어쩌고 하는 사람 말이죠? 요즘에는 별로 사람들이 안 하는 직업인데 어쩌다 숲지기를 하게 되셨나?”

“나무를 키우고 싶었거든요. 뭐, 생활비는 벌어야 하니까 제 나무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봤더니 숲지기 밖에 없더라고요.”

“어허, 나무를 키워서 뭘 하시려고? 무슨 가구 공장이라고 차리시게?”

“아니요. 바다를 건널까 해서 배를 만들려고요.”

버스 기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한다.

“아니, 바다를 건너신다고요?”

“예.”

“이야, 요즘 같은 세상에 바다를 건넌다는 사람이 다 있구만! 아, 절대 손님을 깔보거나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버스 기사나 하고 있지만 요즘 사람들이 어디 바다를 건너려고 합니까? 다들 자기 꺼나 지키려고 하지. 참 대단하시네요.”

“대단하긴요. 근데 이렇게 어두운데 제가 계속 말 시켜서 위험하지 않나요?”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래봬도 20년 넘게 여기서 버스 기사를 했는데요. 이 동네 길은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주의에 개의치 않고 계속 떠드는 운전기사를 내버려 두고 눈을 감는다. 그러다 눈을 뜨고 창 밖을 바라본다. 운전기사는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는지 연신 떠들어 댄다. 남자가 듣든 안 듣든 상관없다는 태도다. 그 모습이 덜컹거리는 버스의 요동과 묘하게 어우러져 운전기사의 모습은 엉성한 십대 랩퍼의 모습 같다.
버스는 한참을 요동치며 달리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갑자기 멈췄다.

“다 왔습니다.”

갑자기 멈춘 버스에 의아해 하던 남자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한 걸 깨닫는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손님 덕분에 늦은 시간에 적적하지 않아 좋았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남자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버스에서 내린다. 바다가 곁에 있어서 그런지 바람이 더 세차다. 남자는 옷깃을 여미며 집으로 향한다. 곳곳에 가로등이 있지만 길이 제대로 포장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지 남자는 몇 번 씩 넘어질 듯 기우뚱거린다. 그때마다 그의 구두에 돌들이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10분 쯤 마을을 가로지른 길을 걷던 남자가 시멘트 몇 부대와 통나무 몇 개로 대충 지은 듯한 집 앞에 멈춰 선다. 남자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외투를 벗으려던 남자는 멈칫한다. 그러더니 남자는 외투도 벗지 않은 채 벽난로에 불을 붙인다. 잠시 후 집 안에 훈훈한 온기가 돌자 그제야 남자는 외투를 벗어서 벽에 걸고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바닥이 찬 듯 남자는 요를 두장이나 겹쳐서 깔고는 그 위에 누워 두꺼운 이불을 덮는다. 그리고 탁탁 소리를 내며 타 들어가는 불씨를 잠시 바라보다 잠이 든다.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에 발작하듯 몸을 튕기며 남자가 잠에서 깬다. 쾅쾅, 하고 누군가 다시 문을 두드린다. 남자는 한숨을 쉬면서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지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 외친다.

“누구세요!”

“날세.”

잔뜩 쉰 노쇠한 목소리다. 남자는 담요를 몸에다 둘둘 말고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연다. 문 밖에서 남자를 깨운 건 길게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산발한 노인이었다.

“자고 있어나?”

노인이 물으며 집 안으로 들어온다. 남자는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대답한다.

“어제 늦게 들어왔거든요. 아함. 근데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그냥 와 봤다. 늙은이는 원래 아침잠이 없거든.”

남자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아무 말 없이 바닥에 앉아 창문 밖을 보는 노인을 바라본다. 몇 번 눈을 힐끔거리며 남자를 쳐다보던 노인은 잠시 후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그래, 알았어. 실토하마. 이 나이 먹도록 거짓말 하나 제대로 못 하니 나이는 다 어디로 먹었는지 모르겠네. 사실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제 그 녀석 집에 갔다면서? 그 녀석이 뭐라고 하던?”

남자가 웃으면서 말한다.

“뭐 똑같으시죠.”

“아직도 화가 많이 났냐?”

남자는 씁쓸히 웃는다. 노인이 한숨을 쉬더니 말한다.

“그렇겠지. 자기 인생을 내가 앗아갔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아니, 내 잘못이지. 그런 나약한 아이에게 내가 뭐 하러 그런 바람을 넣었을까.”

“할아버지 탓이 아니에요.”

“위로해줄 필요 없다.”

“.......”

노인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눈 속에 담을 듯이 바라보며 말한다.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뭔데요?”

“너희 아버지를 증오하지도 미워하지도 말아달라는 거다.”

남자가 웃으면서 대꾸한다.

“아버지를 미워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아요.”

노인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이왕 부탁하는 김에 하나만 더 하자.”

“이상한 날인데요. 할아버지가 저한테 부탁할 게 이렇게 많으시고.”

“허허, 자꾸 나이가 먹어서 그런가, 모든 게 다 끝난 것 같은 생각이 요즘 부쩍 든다. 여하튼 잘 듣고 내 부탁 좀 들어다오.”

“네.”

“설사 네가 배를 타고 건너가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더라도 나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말아 다오.”

“.......”

“비겁한 말이라는 거 안다. 하지만 난 한 사람의 증오를 받으면서 사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 내 인생의 반은 네 아버지의 크기도 불분명한 증오를 받으며 살아야 했지. 그건 너무나도 큰 짐이었다. 마치 시지포스처럼 그 거대한 굴레가 아침마다 날 눌렀고 난 그걸 잠이 들 때까지 힘겹게 밀어 올려야 했다. 이해할 수 있겠니?”

남자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래, 그건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런 증오는 상상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말이야. 상상할 수 없을 거야.”

어디선가 갈매기 소리가 난다. 남자는 몸에 말고 있던 담요를 풀며 화장실로 간다. 노인이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묻는다.

“바다에 갈 거니?”

남자가 멈춘다. 그리고 뒤 돌아 노인을 바라보며 말한다.

“바다를 건널 겁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남자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고 노인은 집 밖으로 나간다.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담은 눈을 가진 노인은 천천히 산보하듯 집으로 돌아간다.

남자는 화장실에 들어서서 문을 닫는다. 변기와 작은 세면대에 샤워기 밖에 없는 화장실이지만 남자가 들어서자 꽉 찬다. 작게 한숨을 한 번 쉬고 남자는 세면대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고 물을 받아 세수를 한다. 한참 세수를 하던 남자가 뭔가 생각난 사람처럼 세면대 위에 붙은 거울을 본다. 그리고 홀린 사람처럼 거울에 비친 자신을 향해 말한다.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대답은 없다.

“몇 년이 지나면 더 이상 바다를 건너려고 하지 않을 지도 몰라. 지금 가야 해. 하지만 배도 없고 나무도 없어. 어떻게 할 거니?”

대답은 없다.

“아버지의 말이 옳은 걸까. 바다를 건너는 건 무모하고 쓸모없는 짓일까. 나도 후회할까. 나도 아버지처럼 할아버지를 증오하게 될까.”

남자는 다시 세수를 한다. 한참 얼굴에 물을 끼얹던 남자는 얼굴과 앞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다시 거울을 본다. 그리고 말한다.

“바다를 건넌다. 난 바다를 건넌다.”

주문처럼 한 자 한 자 힘 있게 중얼거린 남자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화장실을 나온다. 좋은 날씨다. 아침햇살이 남자의 집 안을 환히 비춰준다.



남자가 외투를 입고 문단속을 한다. 바람은 어제처럼 심하지만 햇볕이 따뜻한지 남자는 어제처럼 목을 움츠리지 않는다. 남자는 손을 외투 주머니에 찔러 넣고 천천히 걷는다. 남자는 걸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집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없다. 집들 사이로 바람만이 쫓겨난 불청객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돌아다닐 뿐이다. 집들 사이로 창자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을 걷던 남자는 곧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길로 나온다. 길을 보며 묵묵히 걷던 남자는 수레를 끌고 있는 뚱뚱한 농부와 마주친다. 농부가 끄는 외발수레에는 건초가 잔뜩 실려 있다.

“오, 숲지기 양반 어디 가는 길이야?”

“네, 숲에 가 보려고요.”

“요즘 하루에도 몇 번 씩 가던데 힘들겠구먼. 난 숲지기가 마냥 편한 직업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야.”

“겨울에는 아무래도 건조하니까 불이 일어날 확률이 많거든요.”

“그렇지, 그렇지. 겨울철에는 조심해야지. 하여튼 참 부지런해. 지난번에 있던 숲지기는 형편없었어. 숲에 불도 몇 번 씩 났었다니까.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끄느라 진땀깨나 뺐었지. 그 놈은 지금 어디서 뭐 하나 몰라.”

“아저씨는 어디 가세요?”

“아, 소 줄 여물이 떨어져서. 이거 집에 따로 창고를 짓던지 해야지 저 쪽 김 씨네에 같이 쟁여놓은 거 이렇게 왔다갔다 나르려고 하니까 귀찮네. 그럼 바쁠 텐데 어여 가 봐. 저기 그리고 내 나무들 좀 신경 써서 봐 줘. 요즘 아무리 봐도 영 시원치가 않아.”

“네, 수고하세요.”

남자는 농부와 헤어지고 다시 걷는다. 남자는 농부와 헤어지고 한참을 걷다가 개 한 마리를 발견한다. 짧고 하얀 털을 가진 꽤 큰 개다. 남자는 쭈그려 앉아서 개를 불렀지만 개는 남자를 경계하듯 주춤거리다 이내 다른 곳으로 뛰어가 버린다. 남자는 씁쓸하게 웃더니 다시 가던 길을 간다. 남자가 숲에 도착할 때까지 만난 건 그게 전부였다.
남자는 도착하자마자 숲 입구에 있는 관리사무실에 들른다. 사무실이라고 해 봤자 마을 공동 경비로 산 컨테이너에 전기만 끌어온 것뿐이지만. 남자는 사무실에 들어가서 전기난로의 스위치를 올리고 ‘근무일지’ 라고 써진 파일을 펼친다. 날짜 기입란에 오늘 날짜를 적고 근무 내용에 ‘순찰’이라고 적는다.
근무일지를 덮은 남자는 의자를 끌어다 난로 앞에 놓고 앉는다. 그리고 손을 비비며 몸을 녹인다. 컨테이너 안 임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나온다. 그렇게 몸을 녹이던 남자가 뭘 본 듯 의자에서 일어나서는 밖으로 나간다. 밖에는 담배를 피우며 걸어가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등산객이 있었다. 남자가 등산객을 부른다.

“저기, 아저씨.”

등산객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자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을 부른 것을 알고는 의아한 듯 남자를 위 아래로 훑어본다.

“나 부른 겁니까?”

“네, 숲에 들어가시려고요?”

등산객은 배낭을 고쳐 메며 대답한다.

“그런데요.”

“그럼 담배 끄고 들어가셔야죠.”

등산객은 남자의 말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황급히 입에서 담배를 뺀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계속 피우고 있었네요. 이거 끊던지 해야지, 원.”

등산객의 말에 남자는 웃는다. 그리고 담배를 땅바닥에 비며 끄는 등산객에게 난처한 듯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죄송한데 담배랑 라이터 좀 저한테 맡기시겠어요?”

“네?”

“아, 여름철에는 여기가 뭐 국립공원이나 큰 숲은 아니라서 그냥 주의만 드리는데 겨울철은 건조해서 불이 나기 쉽거든요.”

등산객은 남자의 말에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근데 내가 가지고 있는 라이터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 좀 그렇거든요. 내가 다시 여기로 나올 게 아니라 여기를 거쳐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거든. 여기 말고 다른 데로 가자니 너무 돌아가고.”

“어디까지 가시는 데요?”

“대성리요.”

“대성리면, 음.......확실히 이 숲을 거쳐서 가는 게 제일 빠르겠네요.”

등산객은 잠시 고민하다 담배를 꺼내서는 남은 담배를 헤아린다.

“음, 얼마 안 남았네. 저기 혹시 안으로 들어가서 담배 피우고 가면 안 될까요? 3개피 밖에 안 남아서.”

“그럼 그러세요.”

남자와 등산객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접혀져 있던 철제 의자를 펴서 등산객에게 권하고 난로를 돌려 등산객을 향하게 한다.

“배낭은 여기 책상에다 놓으세요.”

배낭을 책상에 놓으며 등산객이 묻는다.

“여기 휴지통은 없습니까?”

“뭐 버리시게요?”

“담배꽁초 버리려고.”

등산객은 웃으며 손에 들린 담배꽁초를 보여준다. 남자는 책상에 걸려있던 비닐 봉투를 등산객에게 건넨다. 등산객은 비닐 봉투에 담배꽁초를 버리고는 다시 남자에게 돌려준다. 남자는 비닐봉투를 다시 책상에 걸고는 의자에 앉는다. 담배를 빼 물며 등산객이 묻는다.

“근데 젊은 친구가 왜 이런 하나? 더 재밌는 일도 많지 않아요?”

라이터가 켜지는 소리가 나고 등산객이 담배 연기를 한 번 내뿜을 때까지 남자는 등산객의 발쪽에만 시선을 둔 채 말이 없다. 등산객은 그저 묵묵히 담배만 태운다. 남자가 고개를 들더니 말한다.

“바다를 건널까 해서요.”

“바다?”

“네.”

“어허, 요즘에도 젊은이 같은 사람이 있네. 근데 바다 건너는 거하고 숲지기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그냥 자기 나무 키워서 배 만든 다음에 가는 거 아닌가?”

“그냥 제 나무 돌보면서 다른 사람들 나무도 돌보면 좋죠. 제가 원하는 일 하면서 돈 버는 직업이 흔치 않잖아요.”

등산객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말없이 담배만 태운다. 남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묻는다.

“근데 이곳까지 어떻게 오셨나요?”

“아, 저요? 대성리에 젊었을 때 신세진 분이 사는데 근처 산에 갔다가 겸사겸사해서 한 번 들리려고요. 내가 교수 해먹는 것도 다 그 분 덕분이거든요.”

“교수세요?”

“뭐 그냥 작은 대학이에요. 아마 이름도 못 들어봤을 걸?”

“그래도 교수님이면 공부 많이 하셨겠네요.”

“사실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죠. 아, 근데 담배 펴요?”

“아니요.”

“그럼 이거 미안한데. 원래 간접흡연이 더 안 좋거든요.”

남자는 웃으며 대답한다.

“상관없어요.”

“뭐, 그럼 다행이고. 아,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맞아, 공부 많이 했냐고 물었었죠? 물론 열심히 했지. 그래서 박사학위도 따고 내가 쓴 논문이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고 말이야. 내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 내가 어디 가서 꿀리는 실력은 아니거든요. 근데 참 세상이라는 게 내 힘만으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뭐, 날 끌어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이건 뭐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기라니까.”

“그래도 여기서 이렇게 숲이나 지키는 사람보다는 낫죠.”

“낫기는 무슨. 들어오는 애들은 도대체 고등학교 때 뭘 배워서 들어오는지 아는 게 없어. 그러니 가르치는 보람이 있기나 하나? 또 거기다 매년 시시껄렁한 고등학교 선생들한테 우리 학교로 학생 좀 보내 주십사, 하고 굽실거리기나 하고 말이야. 차라리 다른 사람들 나무 돌보면서 사는 게 훨씬 낫죠.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한 게 아까워서 그 학교 붙어있는 거지 사실 다른 건 아까운 거 하나 없어요.”

등산객의 담배는 어느새 꺼졌다. 등산객은 새 담배를 다시 빼어 물며 묻는다.

“근데 바다는 왜 건너려고 그래요?”

“뭐, 그냥 한 번 건너고 싶어서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 바다 건너에는 뭐가 있는지 말이에요.”

“사실 내가 젊은이한테 뭐라고 하는 게 지나친 참견 같긴 하지만 한 마디 하겠수다. 웬만하면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예요.”

“.......”

남자의 침묵에 등산객은 연신 담배를 빨며 말한다.

“내 친척 중에 하나도 그런 애가 있었어요. 부모님하고 얼마나 많이 싸우던지 결국에는 거의 반은 의절했었지. 그런데도 기어코 바다를 한 번 건너야겠다고 하는 거예요. 사실 바다를 건넌다는 게 많은 걸 희생하는 거잖아요. 힘들게 키운 자기 나무 다 잘라내고 몇 년 씩 걸릴지도 모르는 항해를 하는 거니까. 결국에는 바다를 가긴 했어요.”

“어떻게 됐습니까?”

“몇 년 있다가 다시 오긴 왔죠. 그런데 다른 대륙은 결국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 후로 고생 많이 했지요. 다른 사람들 다 열심히 공부할 때 바다에 나갔으니 말이죠. 미련한 짓 한 거죠. 뭐, 지금은 잘 살아요. 미련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가끔 배타고 며칠 씩 바다 가는 거 빼고는 다 괜찮아요.”

그 말을 듣자 남자는 눈의 초점을 자신의 내부로 맞춘다. 두 번째 담배도 다 피운 등산객이 담뱃갑을 구기며 말한다.

“한 번 심각하게 고민을 해보세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자는 일어서는 등산객을 따라 황급히 일어서며 조심히 가라며 인사한다. 등산객은 책상 위에 있는 배낭을 지고 담뱃갑을 비닐봉투에 버린 다음 사무실을 나간다. 그리고 배낭을 한 번 고쳐 메더니 뒤를 힐끔 돌아보고는 조금은 불안한 걸음걸이로 숲 속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서서 그런 등산객을 창문을 통해 보다가 등산객이 숲 안으로 들어가자 의자에 앉는다.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남자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잠시 후 커피포트에 하얀 수증기가 올라오며 커피포트가 꺼지자 남자는 컵에 커피를 넣고 물을 붓는다. 그리고 커피를 든 채로 창 밖을 바라본다. 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커피를 마시던 남자는 마시던 커피를 책상 위에 놓고는 밖으로 나간다.
바람이 아까보다 심하다. 남자는 목을 움츠리며 몸을 한껏 떤다. 숲의 나무들도 바람에 뺨을 맞아 몸을 흔들고 땅과의 혼기를 놓친 마지막 낙엽들도 바람에 업혀 나풀거린다. 남자가 걸음을 서둘러 숲으로 들어간다. 두껍게 쌓인 낙엽 덕분에 남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푹푹 빠지지만 남자는 익숙한 듯 거침없이 나무 사이를 걸어 다닌다.  
숲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제각각이다. 어떤 나무들은 여린 몸이 거친 바람에 부딪쳐 방에 갇힌 밀폐 공포증 환자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어떤 나무들은 고집 센 구멍가게 노파처럼 세찬바람에도 꼿꼿이 서서 잔가지만 이따금 움직인다. 또 참나무 옆에 가문비나무가 다른 나무를 내려다보듯 높이 서 있고 그 옆에는 고무나무가 한 무더기 자라고 있다. 남자는 그런 나무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핀다.
주위가 점점 어두워진다. 아직 한 낮이건만 저녁 무렵처럼 모든 것들이 같은 심상으로 채색된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구름이 잔뜩 끼어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가 아까보다 빠른 걸음으로 다시 걷는다. 한참을 나무 사이를 걷던 남자의 걸음이 멈춘다. 몇 그루의 은행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곳이다. 나무들은 모두 남자의 키보다는 컸지만 세찬바람 앞에서도 자신의 고집을 세울 만큼 크지는 않았다. 남자는 찬찬히 나무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그 중 하나에 가만히 손을 댄다. 나무를 만지던 남자의 눈이 서서히 흔들린다. 그리고 그 진동은 서서히 잦아들어가 저 동공 속 깊숙한 곳으로 숨어 들어간다.
남자가 한숨을 쉬고는 나무에서 손을 뗀다. 나무들을 놔두고 돌아서서 걸어가려던 남자가 문득 멈춰서 하늘을 바라본다. 눈이 내린다. 남자가 한 쪽 팔을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편다. 몇 개의 눈송이가 남자의 손에 부딪쳐 사라진다. 남자는 사라진 눈송이를 붙잡는 것처럼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가 이내 팔을 내린다. 그리고 남자가 팔을 내리자 마치 누군가의 허락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더욱 소담스럽게 내린다.
남자의 하얀 입김 사이로,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 사이로, 같은 심상으로 채색된 풍경 위로 새하얀 눈이 떨어진다.



남자는 천천히 눈을 뜬다. 남자의 입술은 허옇게 말라붙었고 얼굴색도 창백하다. 멍하게 누운 채로 천장을 보던 남자가 갑자기 격한 기침을 한다. 기침을 멈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와 양치질을 한다. 화장실을 나오던 남자가 어제 읽다 머리맡에 펼친 채 놓아 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 본다. 남자는 책을 집어 들어 몇 페이지 읽다가 책을 책장에 꼽는다. 그리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난로에 장작을 넣는다.
탕탕하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자 밖에 있는 누군가는 한 번 더 문을 두드린다.

“나가요.”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연다. 그리고 대도의 예고장을 받은 졸부처럼 흠칫한다. 남자의 아버지가 문 밖에 서 있다. 남자는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난처한 듯 서 있다. 보다 못한 남자의 아버지가 말한다.

“넌 애비가 왔는데 들어오라는 말도 안 하냐.”

“아, 네. 들어오세요.”

남자의 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집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아버지에게 묻는다.

“그런데 웬일이세요. 연락을 미리 주시죠. 식사는 하셨어요?”

“먹었다.”

남자의 아버지는 남자를 쳐다보지는 않은 채 대답하고는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화장실까지 둘러본 남자의 아버지는 결국 혀를 차며 말한다.

“겨우 이런데 살려고 집을 나온 거냐?”

“.......”

“당장 짐 싸라. 출퇴근은 차로 하면 돼. 차 살 돈이 없다면 내가 빌려주마. 당장 여기서 나와.”

“그럴 수 없어요.”

남자의 아버지가 몸을 돌려 남자를 바라본다. 그리고 말한다.

“넌 그 여자를 꼭 빼닮았구나.”

아버지의 말에 남자의 눈이 매섭게 변한다.

“어머니를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그 여자가 네 엄마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그 여자는 네 엄마가 아니야. 널 낳기만 하고 널 버렸다. 다시 바다를 건너겠다는 자기의 그 웃기는 꿈을 위해서.”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남자의 눈을 감고 피곤한 듯 이마를 감싼 채 한숨을 쉰다. 남자의 아버지는 말을 잇는다.

“내 말은 도통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 그 여자한테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었어.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지. 그래, 그래서 날 떠나갔지. 너와 날 버린 거야. 그건 꿈을 향한 열정도 뭐도 아니야. 너 지금 네 어미라는 여자가 뭘 하고 있는 줄 아냐? 응?”

“.......”

“다른 집 파출부를 하고 있더라고! 응? 상상할 수 있겠어? 그 도도하고 거만하던 여자가 다른 집 식모를 하고 있는 거야. 항상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 날 버렸던 여자는 결국 그렇게 파멸한 거야. 너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거냐? 아니, 네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도 난 그렇게 둘 수 없어. 넌 내 아들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 아들이란 말이다.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의 아들도 아니고 그 여자의 아들도 아니다. 넌 내 아들이야.”

남자가 눈을 뜨고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어 있다. 그런 아버지를 향해 남자는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하지만 끝내 말은 하지 못한다. 남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한다. 그런 남자를 향해 남자의 아버지가 쏘아붙인다.

“병신 같은 놈.”

남자의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리고 바다를 보며 담배를 꺼내 피기 시작한다. 집에 홀로 남겨진 남자는 몇 번 숨을 깊게 들이쉬고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문 앞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를 바라본다.
그때 흰 머리를 휘날리며 노인이 온다. 노인은 어떤 사람이 남자의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걸 보자 뒤에 대고 묻는다.

“뉘시오?”

남자의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노인을 본다. 둘 사이를 잠시 침묵이 감싼다. 남자의 아버지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땅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 끈다. 그리고 말한다.  

“오랜만입니다.”

노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입을 연다.

“그러게.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구먼.”

노인의 목소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떨린다. 하지만 남자의 아버지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말한다.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그러게 말일세. 나도 내가 이렇게 오래 살줄은 몰랐어.”

“글쎄요, 저는 대충 알고 있었는데 노인장께서 모르셨다니 조금 의외군요.”

“무슨 말인가?”

“생각해 보세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데 무슨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일찍 죽습니까? 안 그래요?”

“내가 원하는 일이라니.”

“우리 부자의 파멸, 원하지 않습니까?”

노인은 눈을 감는다. 하지만 남자의 아버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잇는다.

“노인장 아니, 당신. 자꾸 내 아들 주위를 돌면서 이리저리 바람을 넣는 모양인데 자꾸 그러면 재미없을 줄 알아.”

“아버지!”

“넌 끼어들지 마!! 이건 이 작자와 나의 문제다! 네가 주제넘게 끼어들 만한 일이 아니야!!”

아버지의 고함에 남자는 말을 삼킨다. 남자의 아버지는 계속해서 노인을 향해 말한다.

“이미 나 하나로 충분하지 않나?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바다를 건넜지만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럴 듯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당신은 어디 있었지? 내 분노가 겁나서 도망쳤나? 그래, 대신 아내를 만났다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여자도 나를 버렸어!! 다시 바다에 가겠다고 말이야. 당신 때문이지. 왜?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당신이 그 여자한테 바람을 넣은 걸 모를 줄 알았냐고!!”

노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인다. 고함은 점점 더 커진다.

“왜 당신은 처음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이야. 왜 나에게 하나 남겨진 그 여자도 빼앗아 간 거지? 난 모든 것을 잃었어. 꿈도 희망도 인간에 대한 신뢰도 사랑도 모두!!”

남자의 아버지가 남자를 가리키며 외친다.

“하지만 저 아이만은 잃지 않아! 당신이 내 모든 것을 가져갔어도 저 아이를 가져가는 것만은 용납하지 못해. 나의 파멸이 아들에게도 이어지는 건 절대로 보지 못해!”

남자의 아버지가 남자를 향해 걸어온다. 그리고 남자를 멱살을 잡은 채 거의 반강제로 끌고 간다. 남자는 갑작스러운 일에 제대로 반항 한 번 못해보고 아버지에게 끌려간다. 남자는 끌려가며 노인을 본다. 노인은 어느새 눈을 뜨고 남자를 보고 있었다. 멀어지는 노인을 보며 남자는 아무 말도 손짓도 할 수 없다. 그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노인을 바라 볼 뿐이다.
결국 노인은 남자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남자는 아버지의 차에 태워진다. 남자는 물에 젖은 휴지처럼 볼품없는 모습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한다.









김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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